제72화
“아는 게 없는 놈이면 쓸 만한 정보도 없었겠네요?”
“네. 그렇지만 성과가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꾸준히 보고를 올리던 ‘형님’이라고 부르는 놈이 있는데, 이제부터 그놈을 한번 캐볼 생각입니다.”
“이번에도 몸의 대화를 나누려는 아니시죠?”
“당연히 아닙니다.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 이게 제 신조입니다. 그 덕분에 제가 저쪽 세계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참! 그런데… 한 가지 알아두셔야 할 게 있습니다.”
거침없이 말하던 차지훈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게 뭡니까?”
“앞으론 도청과 같은 불법적인 일도 할 생각입니다. 정석적인 방법으로 놈들의 뒤를 캐는 일은 불가능하니까요. 괜찮으시겠습니까?”
“필요하다면 해야죠. 염려 놓으세요. 불법적인 일까지 동원해서 저를 해코지하려는 놈들에게까지 신사적으로 대할 만큼 고리타분하거나 융통성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랬다면 차 팀장님을 우리 초이스 에듀로 초빙하지도 않았겠죠.”
정석적으로만 살진 않겠다. 그게 북한산에서 내려오며 건우가 했던 결심이었다.
“네.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럼 전 그 부분에 대해서 더 이상 고민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누군가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산적은 없으시죠?”
“물론입니다. 그건 왜 물으시죠?”
“혹시나 다른 변수도 생각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요. 그럼 혹시 누가 그랬을지 추측 가는 세력이라도 있으십니까?”
“차 팀장님도 조사해보셔서 알겠지만, 답은 너무 뻔합니다. 저는 얼마 전까지 그냥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원한이 생길 이유가 없습니다.”
“학원 강사가 되신 게 원인이라는 말씀이군요.”
“그것 말고는 이유가 없으니까요. 사교육 시장이 생각보다 규모가 엄청납니다. 10조 원이 넘는 시장에서, 앞으로 주도권은 온라인 분야를 누가 선도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현재는 대표님이 가장 유리한 고지에 섰다고 하더군요.”
“네. 다른 학원들 입장에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겠죠. 금액이 적다면 모른 척 넘어가겠지만, 워낙 어마어마한 시장이니 그럴 수가 없겠죠. 그만큼 저의 행보가 눈에 거슬렸을 테고. 그중에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 정도로 조직적으로 적대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습니다. 끽해야 세 곳.”
“기가 싱크빅, 세계교육 그리고 크레이듀. 이렇게 세 곳 중 하나겠죠.”
“그렇습니다.”
사설 학원의 1인자 기가 싱크빅.
엄청난 성장세를 보이며 그를 바싹 추격하던 세계교육.
우리나라 최상위권 대기업이 영어 교육 시장을 석권하기 위해 만든 크레이듀.
건우가 경험한 미래 상황까지 미루어 짐작한다면 세계교육이나 크레이듀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런 것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대표님과 제가 같은 생각이니까, 지금부터는 그 형님이라고 불리는 녀석을 조사하면서 세 곳에 대한 정밀 조사도 시작하겠습니다.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저와 친분이 있는 정보라인을 가동할 생각이고, 정보료는 꽤 비싼 편입니다. 괜찮으시죠?”
“물론입니다. 그런 일에 들어가는 비용은 얼마든지 지원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독자적인 정보망을 구축해주셨으면 합니다. 돈이 아까워서가 아닙니다. 신뢰성 때문입니다. 아무리 친분이 있다고 해도 100% 신뢰하기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운영 비용이 더 들어도 상관없습니다.”
“맞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저보다 먼저 은퇴했던 후배 중에 믿음직하고 실력도 좋았던 사람 위주로 알아보고 있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보고할 사항이 생기면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차지훈은 가볍게 묵례를 하고 대표실을 빠져나왔다.
***
초이스 에듀의 회의실 안은 적막함으로 가득 찼다.
지난 4월 건우가 손다정에게 애플리케이션 개발 업체를 선정해 인터넷 강의를 원활하게 서비스할 수 있는 앱을 개발하라고 지시를 했다.
그런데 얼마 전 개발 완료된 앱은 생각보다 굉장히 기대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이걸로 서비스를 시작했다가는 그동안 쌓아온 초이스 에듀의 명성만 갉아먹을 것 같아 회의에 참석한 직원들의 표정도 하나같이 어두워졌다.
“이게 앱이 맞긴 맞습니까? 스마트의 뜻이 뭡니까? 말쑥한, 깔끔한, 똑똑한, 고급의, 활기찬. 이런 단어들이 스마트를 의미하는데, 방금 실행해본 앱에서 그런 의미를 찾아볼 수 있었습니까? 손 팀장님.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침묵을 깨는 건우의 삭막한 목소리에 사람들의 고개는 더욱 바닥으로 내려갔다.
“죄송합니다. 개발되었다고 연락이 와서 기쁜 마음에 제대로 실행도 해보지 않고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정말 면목 없습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실행을 해봤으면요? 이거 수정이나 할 수 있습니까? 제가 원한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5개월의 시간이 충분한 기간은 아닐 수 있지만, 대신 개발비용을 최대한 지급했습니다. 혹시 우리가 지원한 돈이 부족했나요?”
“아닙니다. 남들보다 세 배 이상 지급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왜 이런 건가요? 아무리 정식 버전이 아니라고 해도 그렇죠. 디자인은 촌스럽고, 플랫폼은 엉터리고, 실행하면 로딩시간만 몇 분씩 잡아먹고, 게다가 동영상 실행 도중 다운되는 건 다반사입니다. 전 로딩이 오래 걸리길래 앱이 아니라 엄청난 퀄리티의 게임이라도 실행하는 줄 알았습니다.”
“킥. 죄…죄송합니다.”
건우의 말이 농담처럼 들렸는지 직원 중 가장 어린 기획팀 황효주가 웃음을 터트렸다가, 다른 사람들의 험악한 눈초리에 입을 가리고 재빨리 사과했다.
“로딩이 오래 걸리면 퀄리티라도 좋던가. 이런 엉터리 앱을 만들어 우리에게 보낸 이유가 대체 뭐랍니까? 그쪽 업체는 우리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였답니까?”
“아마 그게… 계약 문제 때문일 겁니다.”
건우의 물음에 법무팀장인 송미주가 재빨리 설명했다. 그녀가 오기 전의 일이지만 초이스 에듀와 관련한 법률 문제는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계약 문제요? 송미주 변호사님. 자세히 좀 설명해주시죠.”
“원래 계약서에 시험 버전을 8월 말에 제공하기로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9월이 되어도 연락이 없어서 얼마 전에 제가 재촉한 적이 있었습니다.”
“재촉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내온 앱이 바로 저런 말도 안 되는 프로그램이라는 말이군요. 그럼 제대로 만들고 있지도 않다가 갑자기 후다닥거리며 대충 만들었다는 이야기네요.”
“네. 앱 상태를 보니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우리가 외주를 준 유로 애플리케이션이 재정적으로 많은 문제가 생겼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출판 쪽을 담당한 이도은이 대답했다.
원래라면 이번 앱 개발도 그녀가 담당해야 했으나 늦게 합류했고, 손다정이 해왔던 일이라 인수인계는 하지 않았었다.
“그래요? 그렇다면 이도은 과장님. 유로 애플리케이션에서 사기 계약을 했다는 뜻입니까? 앱 개발 의지도 없으면서요?”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저의 예상이라는 것을 참고하고 들어주십시오. 처음에는 분명 개발에 들어갔을 겁니다. 그런데 지난 몇 달 우리 회사가 엉터리 루머들 때문에 힘들어했지 않습니까?”
힘들어도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건우의 기지가 없었으면 초이스 에듀는 시작도 해보기 전에 공중분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랬죠.”
“아마 그쪽에서는 우리가 재기하기 힘들 거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초이스 에듀 저러다 망할 것 같다. 앱을 개발해봤자 잔금을 받기도 힘들 거다. 하지만 선금으로 큰돈을 받았으니 아쉬울 건 없다. 공돈 벌었다고 생각하고 모른 척 있자. 대충 이런 상황 아니었을까요?”
“그러니까 망할 줄 알았던 우리가 망하지 않고 기적처럼 되살아났고, 갑자기 앱에 대해 문의가 들어오니 그제야 화들짝 놀라 누더기 짜깁기하듯 대충 만든 앱일 수도 있다는 말씀이죠?”
이도은의 설명을 듣자 건우도 상황이 대충 어떻게 돌아간 건지 이해가 갔다. 그렇지만 이번 일은 절대 묵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네. 그렇지 않다면 이런 허접스러운 수준의 앱을 만들어 보냈을 리가 없겠죠. 안 그래도 재정적으로 힘든데, 앱 개발을 제대로 못 해서 위약금까지 물게 된다면 엄청난 타격이었을 테니까요. 그쪽에서는 ‘눈 가리고 아옹’을 하더라도 일단 위약금을 무는 일은 피하고 싶었을 겁니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우리를 만만하게 봤다 이거군요. 기획팀 황효주 씨. 이럴 땐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네? 네. 대표님. 그러니까. 그…그러니까. 음.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어차피 개발하고 있었으니 반성할 수 있도록 따끔하게 지적하고 다시 기회를 준다면, 다른 곳보다 훨씬 빠른 시간 안에 훨씬 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눈치 없이 혼자 웃다가 혼쭐이 난 황효주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울상이었다.
“신뢰를 저버린 회사에게 또다시 기회를 주자고요?”
“아니요. 그…그게 말이죠. 대표님.”
“재정적으로 힘든 상황이라 제대로 된 앱을 개발할 여력이 없을 겁니다. 그냥 늦더라도 다른 애플리케이션 개발 업체를 찾아보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당황한 황효주를 대신해 이도은이 대답했다.
“저도 이도은 과장과 같은 생각입니다. 우리가 자선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회사의 사정까지 봐줘가며 일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신의를 먼저 저버린 쪽은 유로 애플리케이션입니다. 못 믿을 업체에 일을 맡기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송미주도 동감을 표했다.
“황효주 씨 의견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서는요. 다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기에는 상황이 너무 좋지 않군요. 그리고 이번 일 때문에 다른 업체까지 우리를 만만하게 보게 된다면 그것도 곤란하겠죠. 이 과장님. 혹시 유로 애플리케이션을 인수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건우 생각에는 능력만 있다면 재정적 문제를 해결해주고 일을 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인수요?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요? 왜 그렇죠?”
“재정 상태가 흔들리면서 알짜배기 개발자들은 상당수가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까 다른 업체를 찾아야 한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그렇군요. 그럼 송 변호사님.”
“네. 대표님.”
“이번 일로 우리가 유로 애플리케이션에 소송을 걸 수는 있나요?”
“물론입니다. 우선 계약기간을 어겼고, 퀄리티도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소송을 걸면 선금으로 지급했던 금액의 3배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미주의 대답에 건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재정적으로 좋지 않은 유로 애플리케이션에 지금 소송을 걸면 그 업체는 부도가 날 가능성이 높다.
그냥 압박만 줘서 회생할 기회를 주든지 아니면 돈을 회수 못 하는 한이 있더라도 벼랑 끝으로 몰아붙일지. 어떤 선택을 해도 기분이 유쾌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건우의 선택은 소송이었다.
처음부터 사정 이야기를 하며 양해를 구했다면 모를까, 꼼수로 눈속임이나 하려는 곳을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그럼. 소송을 하는 것으로 하죠. 한 번 호구로 보이면 다른 업체들까지 우리를 만만하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먼저 신뢰를 저버린 회사의 사정까지 봐줄 필요는 없겠죠. 송 변호사님. 소송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건우의 단호한 판단에 법무팀장인 송미주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 또한 이번 일에 대해선 일벌백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바닥은 생각보다 좁다. 사소한 일도 금방 소문이 난다. 때문에 한 번 만만하게 보이면 그 이미지를 벗기가 쉽지 않다.
만만하게 보일 바에는 차라리 차갑고 냉정한 이미지가 낫다.
“그리고 앱 개발은 일단 뒤로 미루겠습니다.”
“네? 다른 업체를 다시 선정하는 것이 아니고요?”
“제가 결정을 할 때까지 일단 기다려주세요. 포털 바나나에게 계속 서비스를 맡길 생각입니다.”
“하지만 대표님. 바나나가 가져가는 수익이 너무 많습니다. 서버 관리 등의 비용 문제가 있다고 해도, 중간 마진으로 40%는 너무 과합니다. 게다가 결제 비용 10%도 따로 떼어가지 않습니까? 결제 기능이 있는 앱만 개발해도 그런 불필요한 낭비는 충분히 줄일 수 있습니다.”
초이스 에듀의 경우 인터넷 강의 서비스를 우리나라의 대표적 포털 사이트인 바나나를 통해 공급했다. 사업자 등록만 했을 뿐이지, 직원이라고는 건우와 손다정 두 명뿐이었던 시절이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사실 사람이 많았다고 해도, 그때는 인터넷 강의 서비스를 할 인프라가 부족했다.
인터넷 강의의 경우 결제수수료 10%에 초이스 에듀와 바나나가 각각 6:4로 수입을 나누기로 계약했다.
참고서 이북은 상황이 조금 낫긴 했다. 같은 결제수수료 조건에 수입은 7:3으로 나누기로 했다.
인터넷 강의와 참고서 이북의 8월 총 매출이 445억 원. 수수료 10%를 떼면, 약 400억 원. 거기서 바나나의 몫을 빼면 455억 원 중 256억 원만이 초이스 에듀의 매출이 된다.
256억 원도 적은 돈은 아니지만, 무려 235억 원이나 되는 거액을 수수료로 지급하는 건 과해도 너무 과했다. 이대로 가면 수수료만 300억을 돌파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매달 수수료만 300억 원. 더 이상 매출이 오르지 않는다고 해도 1년이면 3,600억 원이다. 이 정도면 가히 천문학적인 금액이다.
아무리 관련 직원들을 뽑고 서버를 직접 관리한다고 해도 그 돈의 반의반만 있으면 충분하다.
왜 바나나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서비스를 해야 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자체 애플리케이션 개발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하루빨리 다른 업체를 찾아 앱 개발을 준비해도 시원찮을 판에 당분간 기다리라고 하니, 직원들도 쉽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지금 당장은 뭐라고 말씀드리기 힘듭니다. 일단은 다들 지금 하는 일에만 집중해주세요. 계획이 변경되면 그건 그때 가서 다시 논의하도록 하죠.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건우는 직원들이 궁금해하든 말든 조금은 독단적으로 회의를 끝내고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와 앉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