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수능 난이도 조절 대참패.]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왜 이렇게 어렵게 수능을 출제했나?]
[재수를 준비하는 학생들 속출. 정부는 책임이 없나?]
[어려워진 수능 난이도 덕분에 사교육 다시 기승?]
[모두가 눈물을 흘리는데 재수전문 학원만 즐거운 비명.]
[전문가들. 이번 수능은 모두에게 어려웠기 때문에 낙담은 일러.]
[차분한 마음으로 수능 점수 발표를 기다려야 한다.]
수능이 끝난 저녁 가장 먼저 올라온 기사들은 건우의 수능 적중률이 아니라, 예년에 비해 엄청나게 어려워진 이번 연도 수능에 대한 비난이었다.
모든 이의 예상을 깼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건우의 예상을 피하려다가 모두의 예상을 피해버렸다.
그 결과 사상 최악의 수능이라는 오명만 남았다.
***
강경준은 수능시험을 마치고 한강 에듀케이션으로 돌아왔다. 다른 아이들은 정말 원 없이 놀려고 하겠지만, 강경준과 다른 근로장학생들은 학원에서 함께 만나기로 약속했다.
“어. 경준이도 왔네. 표정을 보니 시험은 괜찮게 봤나 봐?”
학원에 도착해 건우가 마련해준 근로장학생 전용 휴게실 겸 공부방에 들어서자 김현주가 그를 반갑게 맞아줬다.
허리는 아프시지만, 아직도 큰 의지가 되는 할머니가 계신 강경준.
비록 장애인이지만,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는 조동훈.
지병이 있으셔서 병원에 입원해 계시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있는 이윤혜.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실종상태지만, 아버지는 분명 살아계시리라 확신을 하며 살아가는 박문수.
강경준과 다른 친구들은 집안에 어른이 계시고, 좁지만 몸을 뉘일 집이 있었다. 그러나 김현주는 동생과 함께 보육원에서 지내고 있다.
초등학생 때 부모님을 여의었고, 친척들의 냉대를 받으며 보육원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근로 장학생 다섯 학생 중 가장 밝은 아이였다.
“그럭저럭 괜찮게 본 것 같아. 현주 넌 어땠어?”
“당연히 어려웠지. 그런데 신기한 건 분명히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쉽게 풀려 당황했다니까.”
“역시. 너도 그랬지? 나도 마찬가지였어. 선생님이 알려주신 기출문제에서 어려운 난이도의 문제가 상당히 많이 나왔어.”
“맞아. 얼핏 보면 다른 문제처럼 보였는데, 다시 한 번 더 천천히 읽어보니 ‘아! 그때 푼 문제랑 비슷하다’라는 느낌이 팍 오는 거야. 그때부터 펜이 알아서 푸는 느낌? 정말이지 최건우 선생님은 천재야. 어떻게 그런 걸 전부 예상할 수 있으실까?”
“궁금해도 포기해. 그냥 우리 같은 범인(凡人)이 측정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신 것 같아.”
“호호호. 경준이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좀 웃긴다.”
“뭐? 내가 왜?”
“범인? 네가 평범해? 지난번 모의고사에서 전국 오십 등 안에 든 네가 평범하면 우리는 둔재라는 뜻이야? 50등이면 전국 0.01%라고. 그런 사람이 스스로를 범인이라고 낮추다니. 흑흑. 갑자기 살맛이 안 난다.”
“아니. 난 그런 말이 아니라….”
김현주의 낙담 어린 한숨에 당황한 강경준이 재빨리 변명하려고 했다.
“호호호. 짜식. 놀라긴. 그냥 장난 한번 쳐본 거야. 솔직히 최건우 선생님 옆에 있으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이 들 거야.”
“그래!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그러라니까.”
“알지. 나름대로 공부 좀 한다는 애들만 뽑은 게 우리고, 우리 중에 가장 머리 좋다고 인정받는 사람이 너야. 네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우리는 오죽하겠어? 가끔은 루머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니까.”
“무슨 루머? 설마 최건우 선생님 외계인 설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호호호. 왜 아니겠어. 처음 들었을 때는 뜬금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수능시험을 치면서 정말 말도 안 되는 가정까지 했다니까.”
“무슨 가정?”
“선생님이 일부러 난이도 있는 문제만 고른 게 아닐까? 적중률이 너무 높으면 부담스러우니까, 적중률은 낮추고 대신 어려운 문제만 기출문제에 실은 거지. 공부 잘하는 아이들에게는 그게 더 효율적이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선생님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김현주는 그냥 장난처럼 한 이야긴데 강경준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진지해도 너무 진지했다.
“에이. 설마. 수능에 나올 문제를 전부 알고 있지 않은 이상 그런 건 불가능하지. 아무리 천재라도 사람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올 수는 없잖아.”
“나도 아는데, 그래도 최건우 선생님이라면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어머, 어머. 너 요즘 선생님 동생들 하고 친하게 지내는 것 같더니 완전히 정우한테 물들었구나.”
그녀의 말처럼 강경준은 건우의 동생들과 상당히 친하게 지냈다. 예전에 동우가 그를 돕기 위해 끼어들었다가 싸움으로 번진 사건 이후 두 사람은 자주 어울렸다.
그러다 보니 정우나 은우와도 같이 있는 시간도 자연스럽게 많아졌다.
“친하게 지내는 건 맞다만, 물들 일이 뭐가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부터가 물들었다는 증거야. 동우는 약간 새침데기 기질이 있어서 별로 표현을 안 하지만, 정우랑 은우는 완전 최건우 선생님 빠돌이, 빠순이라고.”
“에이. 그건 표현이 좀 그렇다. 동생들이 형이나 오빠 좋아하는 걸 가지고 빠돌이, 빠순이라고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아? 그냥 당연히 따르는 거지.”
“쯧쯧쯧. 빠졌네, 빠졌어. 여기 최건우 선생님 빠돌이 한 명 추가요.”
“뭐? 하하하. 그런데 솔직히 최건우 선생님이라면 내가 빠돌이가 되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러는 넌 선생님이 싫어?”
“아니. 당연히 좋지. 너무너무 좋아 죽겠다. 나이도 겨우 두 살밖에 차이 안 나는데, 이참에 확 내 남자로 만들어 볼까? 호호호.”
“꿈 깨라. 너 같은 선머슴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실 거다. 요즘 보니 강남의 유명한 뚜쟁이들도 난리란다.”
김현주는 예쁘다기보다는 보이쉬한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 같이 근로장학생으로 있는 아이들은 그녀를 남자 취급하기도 한다.
“뭐? 이제 겨우 21살인데 무슨 뚜쟁이가 접근을 해!”
“그러니까 말이지. 고아라고 해도, 학벌 좋아, 돈 잘 벌어, 얼굴 잘생겨, 키 커, 기부도 1년에 수백억씩 하지. 게다가 인간성마저 좋아. 들리는 말로는 정치권에서 엄청난 관심을 보인다고 하더라.”
“정치? 설마 우리 선생님 정치계로 나가는 거야?”
정치라는 이야기에 지금까지 웃으며 이야기하던 김현주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김현주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들이 정치가다. 그녀에게 정치가들은 모두 가식적인 사람들이었다.
보육원 생활을 하다 보니 가끔씩 그곳을 찾아오는 정치가들을 볼 수 있는데, 하나같이 탐욕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서 실망만 했었다.
그걸 뻔히 아는지라 건우는 정치의 ‘ㅈ’자 근처에도 가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그녀의 솔직한 바람이었다.
“아니. 정치를 하신다는 게 아니라. 무슨 이야기냐면. 선생님이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워낙 인지도가 높으시잖아.”
“인지도가 높은 정도가 아니지. 그냥 폭발적인 사랑을 받고 계신 거지. 내가 생각할 때는 개그맨 유재석이나 김연아 선수 정도의 인기인으로 급부상하신 것 같아.”
“아직 그 정도는 아니지. 그래도 그 아래 정도는 될 것 같다. 아무튼. 국민들의 호감 어린 사랑을 많이 받다 보니 최건우 선생님의 장인이라는 타이틀만 가지고 있어도, 대권의 선두그룹에 속할 수 있다는 평가가 돌고 있어서 지금 눈치작전이 장난 아니래.”
“헐. 그건 정말 싫다. 정치가들이 얼마나 탐욕스러운데. 난 우리 선생님이 그런 사람들에게 이용당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어.”
“그건 나도 동감이야. 머리가 좋으신 분이니 누구에게 함부로 휘둘리고 그러진 않으실 거야. 아! 그리고 그런 있는 집 자식들뿐만 아니라 유명 연예인들도 은근히 접근하고 그러나 봐.”
“연예인? 그건 그럴 만도 하지. 그런데 대체 넌 그런 이야기를 어디서 다 들은 거야? 난 네가 공부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수다쟁이일 줄은 예상도 못 했다.”
“선생님 이야기니까. 그리고 그런 이야기야 대부분 동우에게 들었지. 그 녀석이 그래도 선생님 친동생 아니냐? 정말 이것저것 모르는 이야기가 없다니까.”
“하여간. 그 녀석은 선생님 별로 안 좋아하는 것처럼 말하더니, 자랑할 건 다하고 다니네. 덩치는 커가지고 하는 짓은 꼭 아줌마 같아.”
강경준과 김현주가 이렇게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다른 아이들도 속속 도착했다. 표정들을 보니 다들 시험을 잘 본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나름대로 수능 쫑파티 분위기를 내기 위해 과자와 음료수를 책상에 깔아놓고 떠들썩하게 수다도 떨었다. 지금 이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사치였다.
“자! 대충 먹을 것도 먹었고, 놀 만큼 놀았으니 할 건 해야지?”
“그러자. 아직 제2외국어 정답 발표는 나올 시간이 아니니까, 국어 과목부터 차례로 정답 맞춰 보자.”
수능이 끝났는데도 한강 에듀케이션에 모인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이들 다섯 명은 근로 장학생 생활을 하면서 다른 누구보다 끈끈한 우정을 쌓았다.
같이 고생한 만큼 수능의 마지막 과정인 정답체크도 왠지 함께 하고 싶었다. 항상 혼자 해결하는 것에 익숙한 그들이었지만, 이제는 함께 하면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다들 수험표 뒤에다가 정답을 모두 적어왔다. 모범생들이라서 시간이 부족한 아이들은 없었다.
가지고 온 수험표를 모두 꺼내자 공부방에 비치된 컴퓨터를 켜서 정답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B형 시험을 친 사람이 A형 정답을 우선 부르고, 끝나면 역할을 바꾸는 방식으로 채점을 시작했다.
역시 건우가 고르고 골라서 뽑은 아이들이었다. 채점하는 동안 과목당 한두 개 이상 틀리는 아이들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공부방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야! 강경준 이 자식 지금까지 하나도 안 틀렸다. 나 지금 내 것보다 저 녀석 결과가 더 궁금해. 그냥 우리건 잠깐 미루고 경준이부터 맞춰보자.”
“그래. 나도 아까부터 계속 경준이 수험표만 봤다니까. 미친놈. 대단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어떻게 4교시까지 하나도 안 틀리냐? 이제 제2외국어 하나만 남았지? 으아! 내가 다 긴장된다. 지금쯤이면 제2 외국어 정답도 나왔겠지?”
“잠깐만. 확인해보고. 아, 떴다! 조금 전에 올라왔나 보네. 경준이 제2외국어가 한문이지?”
“응. 한문이긴 한데, 다들 왜 그래? 부담스럽게. 다들 그렇게 노골적으로 지켜보면 쑥스럽잖아.”
“닥쳐! 사내자식이 부끄러워하기는. 넌 지금부터 감정 없는 기계야. 불러주는 대로 정답이나 맞춰.”
아이들의 관심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한편으로 강경준의 마음도 갑작스러운 기대감에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어디까지나 혼자만의 느낌이지만, 이번 수능은 난이도 조절에 실패한 것 같았다. 만점자는커녕 한두 개 틀린 사람도 나오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자신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이제 남은 과목은 한문 하나였다.
다른 외국어와는 달리 그냥 달달 외우기만 하면 되는 과목이 한문이었다.
1,800자만 외우면 만점은 떼놓은 당상인 과목.
보통의 학생들은 1,800자라는 말에 기가 질리겠지만, 기억력이 좋은 강경준에게 한문은 가장 공부하기 편한 과목 중 하나였다.
가장 자신 있는 과목 중 하나인 한문만 남겨놓은 상태이고, 지금까지는 모두 만점. 당연히 기대되었다.
“자! 그럼 부른다. 1번 1, 2번 3, 3번 5…, 25번 4.”
“미친! 다섯 문제 남았는데, 지금까지 다 맞았어. 나 지금 손에 땀 나는 것 봐라.”
“내가 남의 시험에 이렇게 긴장하는 건 처음인 것 같다.”
“야야. 지방방송 꺼라. 난 지금 화장실 가고 싶은 것도 참고 있거든. 그러니까 빨리빨리 정답이나 불러.”
“26번 5”
“와!”
“27번 2”
“우와!”
다섯 문제가 남자 지켜보는 아이들의 눈빛이 더욱 초롱초롱해졌다. 그리고 정답을 말할 때마다 자기일 인양 기뻐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럼 이제 마지막 30번. 정답은 두구두구두구.”
“야! 김현주. 너 죽을래? 빨리 말 안 해?”
“어. 미안. 정답은 사아…”
“뭐? 4번? 으악! 아쉽다. 왜 마지막에서 틀려서는.”
“아니. 아니. 사아암번이라고. 4번이 아니라 3번.”
김현주가 장난스럽게 마지막 정답을 발표하자, 아이들의 공부방은 순식간에 정적이 흘렸다.
1초, 2초, 3초, 4초, 5초.
침묵 속에서 시간이 흘렀다. 누군가 꿀꺽하고 침을 넘겼다. 잠시 멍하니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잠시 어리둥절한 모습이었지만 금방 정신을 차렸다.
모두의 눈동자가 일제히 강경준에게로 향했다.
“으아악! 미친!”
“강경준 너!”
“미친놈. 강경준! 결국, 해냈구나. 으하하하!”
“축하해, 경준아. 네 덕분에 내년에 들어올 우리 후배들은 다른 아이들에게 무시 받지 않고 당당하게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당연하지. 정말 네가 자랑스럽다, 경준아. 수능 전국 1등을 배출한 모임인데, 감히 누가 우릴 무시해. 흑흑.”
학원이 떠나가라는 듯 함성이 터졌다. 아이들의 축하가 쏟아졌다. 감수성이 풍부한 조동훈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정작 좋아해야할 강경준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만점을 기대하긴 했지만, 진짜로 만점을 받을 줄은 몰랐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아무 생각도 안 났다.
친구들이 어깨를 두들기며 손을 흔들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지금 이 순간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돌아가신 부모님도, 허리가 아픈 할머니도, 끔찍하게 아끼는 두 동생도 아니었다.
가족에게는 미안하지만, 자신에게 큰 기회를 준 건우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어떻게든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공부방을 나섰다.
“어! 저 녀석 인사받다 말고 어디가?”
“야야야! 놔도. 보나 마나 최건우 선생님에게 가겠지.”
“네가 어떻게 알아?”
“몰랐어? 경준이 저 녀석 선생님 빠돌이잖아. 호호호.”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