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87화 (87/256)

제87화

양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머리는 젤로 잔뜩 힘을 줬으나 평범함을 벗어날 수 없는 사나이.

그래도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그런지 왼손에 들고 있는 뻥튀기 봉지가 평소보다 조금은 덜 튀어 보였다.

이 남자의 정체는, 이젠 뻥튀기 봉지가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린, 초이스 에듀의 정보를 총괄하고 있는 차지훈 팀장이다.

정보를 총괄하네, 팀장이네 해도 아직은 팀원 하나 없는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다.

차지훈이 최근 감시하고 있는 기가 싱크빅의 보안실장 오대영. 어느 정도 거물급이라고 그런지 김용이나 현필수와 다르게 행동이 매우 조심스러웠다.

현필수를 미행해서 알아내지 않았다면, 이렇게 쉽게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몸이 하나이니 하루 종일 붙어 다닐 수도 없었고, 그의 행동반경까지 예측해서 곳곳에 도청장치나 몰래카메라를 설치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잘나갔던 전직 스파이라고 해도, 다른 팀원의 지원 없이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전부 다하는 건 불가능했다.

거기에 건우가 새로운 일거리를 주는 바람에, 업무량이 몇 배로 늘어났다.

정부의 지원 없이 은밀하게 교수나 교사의 행적을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행적을 파악해야 하는 대상들은 중, 고등학교 교사와 대학교 교수를 합쳐 10만 명이 넘는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차지훈에게 ‘나 휴가 가요.’라고 보고할 리도 없으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행적을 알아내야 한다.

그걸 할 수 있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수능예측 전문가 집단의 성공 여부가 결정된다. 차지훈이 평소와 다르게 양복을 차려입은 이유도 바로 여기 있었다.

서울 외곽의 작은 아파트 단지 옆 작은 카센터에 도착한 차지훈.

“어서 오십시오. 뭘 도와드릴까요? 오! 그런데 이 흰색 봉고는 엄청나게 낡았네요. 굴러다니는 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일단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점검부터 해드릴까요?”

똘똘하게 생긴 젊은 직원이 차지훈을 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차지훈의 봉고가 겉만 부실해 보일 뿐, 알맹이는 수억 원을 들여 개조한 비싼 몸이라는 것을 알 리 없는 직원이 자동차를 정비소 안으로 옮기려 했다.

“됐고. 너희 사장 어디 있어?”

“아! 우리 사장님 찾아오신 분이세요? 그런데 어떡하죠? 지금 사장님 부재중이신데.”

“부재중은 개뿔. 창고에 짱박혀 인터넷 고스톱이나 치고 있는 모양이네. 마. 비켜. 지나가게.”

“어어! 거기로 가시면 안 되는데.”

“안 되긴. 나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니까, 너는 그냥 내 봉고차 건드릴 생각일랑 말고 어서 하던 일이나 계속 해.”

뻔뻔한 기세에 눌린 직원이 물러나자 차지훈은 사무실 왼편 구석에 있는 창고로 발걸음을 옮겼다.

- 쌌다. 잉잉. 앗싸. 내가 먹어야지. 딱. 호호호. 한 장 주세요. 스톱. 멍박, 피박, 광박. 8배. 파이브 고 8배. 파바박. 파산으로 방에서 퇴장당하셨습니다.

“으악. 오링이야 또. 아이씨. 젠장. 빌어먹을. 이번 주만 해도 대체 몇 번째야. 하늘이시여! 대체 내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요란한 컴퓨터 사운드가 창고 전체를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털이 복슬복슬하게 난 털북숭이 남자의 입에서 이어지는 탄식. 차지훈은 한편의 희극과도 같은 모습을 보며 나직이 혀를 찼다.

“쯧쯧. 놀고 있네. 고자야. 형님 왔다.”

“뭐야! 누가 감히 내 이름을 그딴 식으로 불러! 어떤 자식…. 어라. 형님! 진짜 지훈 형님이우? 우와! 하하하. 이게 얼마 만이요?”

‘고자’라고 부르는 소리에 잔뜩 화가 나서 고개를 돌렸던 남자는, 차지훈을 발견하자마자 순종적인 강아지의 눈빛으로 변했다.

“그래 오랜만이다. 고자야. 잘 지냈고?”

“그럼요. 그런데 형님. 형님도 회사에서 모가지 댕강했다면서요? 어찌 된 일이래요? 형님이라면 평생 그 바닥에서 잘 지낼 줄 알았는데.”

“그러게 말이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데 나라고 별수 있겠냐?”

“그래도 형님은 다를 줄 알았죠. 아니다. 차라리 잘 된 일일수도 있죠. 회사에 있어봤자, 공무원 월급이 뻔하잖수. 위험수당을 제대로 주기를 하나, 야근수당이 있기를 하나, 일은 제일 위험한데 월급은 쥐꼬리만 해. 나 봐요. 얼마나 편하게 살아요?”

“편하긴 하겠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녀석이 허구한 날 컴퓨터로 고스톱이나 치고 앉아 있으니”

“아니 이…이건 그냥 취미 생활이우. 형님도 이미 겪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그 바닥에서 스펙터클하게 살다가 야인으로 돌아오면 삶이 좀 무료해집디다. 그런데 형님! 아까부터 계속 드시고 있는 그 뻥튀기는 대체 뭐요? 원래 그런 거 안 좋아했잖아요. 진정한 스파이는 그 어떤 특징도 드러내면 안 된다면서요.”

남자는 자신이 말하는 와중에도 계속 뻥튀기를 먹어대는 차지훈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다.

자신이 아는 차지훈이면 절대 저런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스파이 생활은 끝났잖아. 그런데 은퇴하고도 계속 그렇게 살다 보니 사람이 너무 포인트가 없는 거야. 무료한 거지. 회사 그만두고 한동안 집구석에 처박혀서 드라마나 영화 그런 것만 보는데 어느 날 케이블에서 부활이라는 드라마를 재방송하는 거야. 거기서 김윤식이 조연으로 등장하거든. 세상에! 영화배우 김윤식이 10년 전에는 드라마 조연을 하고 있더라니까. 너도 알잖아. 내가 김윤식 좋아하는 거.”

“좋아하신 건 모르겠고. 자고로 스파이는 저렇게 특징 없이 생겨야 한다며 귀가 닳도록 칭찬하시긴 했죠. 김윤석 그 양반이 스파이를 했으면 정말 대단한 스파이가 되었을 거라고도 하셨죠. 그런데 김윤식이랑 뻥튀기랑 무슨 상관인데, 갑자기 김윤식이 튀어나온대요?”

“너 부활 안 봤구나? 거기서 김윤식이 천공명 사장이라는 역할로 나오거든. 거기서 등장할 때마다 뻥튀기를 씹어. 그게 얼마나 맛있어 보이는지. 너도 잘 알잖아. 내가 군것질이든 뭐든 같은 걸 반복하는 걸 싫어하잖아.”

“그럼요 아주 잘 알죠. 예전에 아랍의 테러리스트 리더가 미국 유학 시절 즐겨 먹던 레드불스를 현지에서도 계속 수입해서 먹다가 결국 그것 때문에 꼬리가 잡혀서 사살당했다면서요.”

“바로 그거야. 시골에 숨어 살다가 자기가 좋아하는 담배를 못 잊어서 도심지로 기어 나와 체포된 멍청이도 있다고. 그러니 스파이에게 어떤 일정한 패턴을 보이는 버릇을 가지는 것은 매우 위험한 거야.”

이런 말을 하는 와중에도 차지훈은 뻥튀기 먹는 걸 쉬지 않았다.

“그렇게 잘 아는 양반이 뻥튀기는 왜?”

“먹어보니 맛있더라고. 재미도 있고. 내가 회사 그만둘 때 웃대가리랑 안 좋게 끝났잖아. 그래서 퇴직금도 제대로 못 받고. 그놈들 씹는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씹다 보니 스트레스도 풀리고, 이래저래 좋더라고.”

“에이. 포장은 그럴싸해도 김윤식 그 양반을 따라 하는 거네요.”

“따라 하다니! 그 사람과 난 서로 가는 길이 달라. 김윤식이 먹던 건 옥수수 뻥튀기고, 나는 쌀 뻥튀기기거든. 쌀도 그냥 쌀이 아니야. 맛있다고 소문난 지역의 햅쌀만을 골라서 먹는다니까. 여주쌀, 이천쌀, 철원오대미, 김포쌀. 지역마다 맛이 달라. 요즘은 해남쌀이 좋다고 해서 그것도 주문해놨어. 오늘 건 여주쌀 3, 이천쌀 5, 김포쌀 2 비율로 만든 차 팀장 표 스페셜 뻥튀기라고. 한 번 먹어볼래?”

“맙소사! 뻥튀기가 뻥튀기지 무슨. 커피 로스팅 하는 것도 아니고. 쌀을 섞긴 왜 섞어요.”

남자는 자신이 존경했던 차지훈이 이상하게 변한 것 같아 안타까웠다.

“왜 인마. 맛있다니까. 네가 아직 뻥튀기의 오묘한 맛을 몰라서 그래. 한 번 먹어봐. 맛이 달라.”

“됐거든요. 그나저나 차 팀장이라는 건 뭐요? 어디 좋은데 취직했나 보네요.”

“그럼. 대우도 좋고, 할 만해. 너처럼 지겹다고 컴퓨터로 고스톱 칠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쁘기도 하고.”

“에이. 형님이야 경력이 빠방하잖아요. 어휴. 전 크게 사고를 치고 회사를 나왔다는 소문이 쫙 퍼져버려서 그쪽 일은 꿈도 못 꿔요. 그런데 어디서 일하는 겁니까? 형님 정도면 뭐 대기업에서도 서로 데려가려고 할 것 같은데.”

“응. 학원에서 일해.”

“학원 좋죠. 역시 형님은 좋은 곳에서 일할 줄… 뭐라고요? 학원이요? 제가 잘못 들은 것 아니죠?”

“학원 맞아.”

“아니 왜요! 형님이 왜 학원에서 일해요? 학원에서 할 일이 있긴 해요? 설마 거기서 경비 일이나 하고 그런 건 아니죠?”

남자는 마치 자신이 모욕을 받은 것처럼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고자야. 그런 거 아니니까 흥분부터 가라앉혀라. 설마 내가 학원에서 경비나 서고 있겠냐? 나름대로 재미있다고 했잖아.”

“제가 흥분 안 하게 생겼어요? 학원 일이 재미있어 봤자 얼마나 재미있다고. 형님이 어떤 분인데 그런 일을 해요? 아! 갑자기 속상하려고 하네.”

“그놈 참. 네가 잘 몰라서 그렇지. 그 바닥도 꽤 경쟁이 치열해. 너도 들어 봤을 거야. 초이스 에듀의 최건우 대표라고.”

“그 사람은 저도 알죠.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데. 모르면 간첩이죠. 그러고 보니 우리가 가끔 간첩 일도 했구나. 흐흐흐. 그런데 형님이 같이 일한다는 사람이 최건우 대표예요?”

“그렇지. 너도 최건우 대표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잘 알 거 아니야?”

“뭐. 남들이 아는 만큼은 알죠. 군대 문제, 정신과 이력, 학력 위조. 이런 문제들로 한동안 구설수에 올랐잖아요.”

“그런데 말이야. 그게 그냥 우연이 아니라 누군가의 조작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라면?”

“네? 에이 설마요? 그걸 누가 조작할 정도라면, 엄청 스케일이 커야 하잖아요. 그런데 학원에 뭘 먹을 게 있다고 그런 일을 저질러요?”

학원은 먹을 게 별로 없다. 차지훈이 처음 했던 실수를 남자도 그대로 따라하고 있었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거든. 그런데 사교육 규모가 장난이 아니더라고. 수십조 규모야. 그러니 거기만 석권하면 대기업도 부럽지 않다는 이야기야. 그래서 나도 관심을 가지고 조사를 해봤거든.”

차지훈은 남자에게 자신이 조사하면서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큰둥하게 그의 설명을 듣던 남자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헐! 대박! 학원이 뭐가 그래요?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어디 최첨단 기술을 연구하는 연구소라도 되는 줄 알겠어요.”

차지훈의 설명이 모두 끝나자 남자는 입에 침을 튀어가며 흥분했다. 그리고 그동안 잠들어 있던 예전의 열망도 조금씩 다시 깨어났다.

“그렇다니까. 그래서 나도 놀랐잖아. 혼자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고자 널 찾아온 거고.”

“저요? 형님이 절 필요로 하신다고요? 이 고자성을요?”

“뭘 그렇게 흥분하고 그래. 예전에 우리 잘 맞았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너 같은 파트너가 없지.”

“하하하. 하긴 그렇죠? 그래서 제가 형님을 좋아하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생각은 있어?”

“물론이죠. 형님이 부르시는데, 거기가 지옥이라도 해도 마다할까요? 제 목숨을 두 번이나 살려주셨잖아요. 제가 그때 그랬죠. 지금부터 제 목숨은 제 것이 아니라 형님 것이라고요.”

“에이. 총알이 날아다니는 사선에서 있었던 일은 마음에 담아두지 마. 나 살려고 널 도와준 거니까. 네가 그렇게 말하면 괜히 나만 부담돼. 그냥 네가 이쪽 일을 다시 할 마음이 있는지가 중요하지.”

최근엔 볼 수 없었던 진지한 눈빛을 한 차지훈이 남자를 조용히 응시했다.

“당연합니다. 형님. 얼마나 무료했으면 허구한 날 컴퓨터로 고스톱이나 치겠습니까?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우리 둘만 일합니까?”

“아니지 그건. 종수랑 준규도 불러야지.”

“역시! 전설의 팀이 다시 모이는군요. 그럼 레전드가 다시 부활하는 건가요? 그런데 종수랑 준규는 뭐 하고 산대요?”

“너랑 비슷해. 종수는 PC방, 준규는 헬스장. 다들 무료하게 살고 있지.”

“하하하. 세계적인 해커가 PC방을 하고, 우리 회사 최고 파이터가 헬스장을 해요? 뭔가 웃기면서도 슬픈 이야기네요.”

“그래도 너보단 낫지. 걔들은 나름대로 자기 적성을 살리고 있잖아. 수준을 심각하게 낮춰서 살고 있긴 해도. 그런데 넌 뭐냐. 잠입과 미행이 주특기인 녀석 꼴이 이게 대체. 어휴.”

지훈은 털이 북슬북슬한 남자를 보며 잠깐 한숨을 쉬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꼴이 이래도 아침마다 꾸준히 운동은 해왔으니까요. 걱정 끼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고 사장! 고 사장 어디 있어? 어디? 창고? 하여간 이 미꾸라지 같은 녀석이.”

두 사람이 오랜만에 다시 의기투합하는 역사적인 순간, 창고 밖에서 남자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는지 목소리가 매우 험악했다.

덜컹!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왜소한 체구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남자 뒤로 검은색 양복을 입은, 거구 네 명이 따라 들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일이긴. 가격 잘 쳐준다고 여기 팔라고 했잖아. 왜 말을 안 들어.”

“아니 무슨 가격을 잘 쳐준다는 이야기입니까.”

“평당 10만 원에 샀는데, 평당 20만 원에 사겠다고 하면 잘 쳐주는 거지, 더는 어떻게 더 잘해주나? 너무 욕심부리면 안 좋아.”

“저도 귀 있거든요. 지금 시세가 평당 6~70만 원을 오가고 있고. 조금만 기다리면 100만 원까지 오른다는데 제가 총 맞았습니까? 그 가격에 팔게.”

“씨불. 그러니까 말로는 안 통한다는 이야기네. 그럼 어쩌겠어. 몸으로 대화를 해야지.”

왜소한 남자는 고 사장이라고 불렀던 남자가 평소와는 달리 매우 당당한 표정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보다는 뒤따라온 네 명의 덩치를 믿는 마음이 커서 남자가 당당하든 말든 상관이 없었다.

“에고. 고자야. 너 이러고 살았어?”

“어쩌겠습니까? 조용히 지내려면 참고 살아야죠.”

“그렇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잖아. 나랑 함께 일하기로 했으니.”

“크흐흐. 그럼 오랜만에 푸닥거리나 한번 해볼까요?”

“좋지.”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외모의 남자와 북슬북슬한 털 때문에 사람 좋게 생긴 남자. 네 명의 덩치들은 두 사람을 만만하게 보고 방심했으나, 방심의 대가는 참혹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날 밤 전투가 주특기라고 알려진 근육질이 남자가 합류했고, 그 지역을 주름잡던 ‘불나방’이라는 조직은 영문도 모른 채 처참하게 지워졌다.

후환은 남기지 않는다는 차지훈의 명에 의해.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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