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91화 (91/256)

제91화

건우네 집 최고의 말썽꾸러기는 과연 누구일까?

때론 까칠하고, 때론 촐랑거리며, 질투심도 많은 동우? 평소에는 선비가 따로 없을 정도로 점잖다가 건우의 일이라면 열혈남아로 변신하는 정우?

아직 성인이 안 된 어린 동생들이다 보니 말썽을 피우는 일이 종종 있긴 했지만, 그래도 두 명의 남동생 때문에 학교에 불려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건우네 집안의 막내, 그것도 여자아이인 은우가 말썽을 부려 학교에 불려간 것이 벌써 여러 번.

한동안 조용하다 싶더니 방학을 앞둔 12월 중순, 건우는 또다시 은우의 담임선생님에게 부름을 받고 학교에 가는 중이었다.

24살에 서울교대를 졸업하고 바로 지난해 가을부터 교사생활을 시작했고, 올해 처음 담임을 맡은 은우의 담임.

이제 겨우 25살이다. 21살 건우와 또래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은근히 그에게 사심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교사의 본분을 잊고 사적인 감정으로 아무 때나 학부형을 호출하는 그런 개념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분명 은우가 뭔가 또 사고를 친 게 분명했다.

‘그것참 이상하단 말이야. 내가 아무리 예전 삶과 다르게 행동한다고 해도, 동생들 모습이 이렇게 확 바뀔 수가 있어? 정우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 해도, 동우와 은우는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어. 나도 내가 알던 동생들이 맞나 헷갈릴 지경이니.’

시니컬하기만 했던 동우는 수다쟁이 아줌마같이 변했고, 얌전하고 말 잘 듣던 막내는 건우의 골치를 썩이는 최고의 말썽꾸러기가 되었다.

예전과 다르게 밝아진 모습은 보기가 좋으나, 가끔은 너무 극단적인 변화가 걱정되기도 했다.

‘그나저나 우리 막둥이가 이번에는 과연 어떤 사고를 쳤길래 호출을 한 걸까? 휴우. 은우 담임은 만나기 좀 껄끄러운데.’

은우 담임이 사람이 나쁜 건 아니다. 그런데 건우에게 은근히 사심을 드러내는 게 문제다.

노골적이진 않다. 차라리 노골적이면 거절이라도 하지, 노골적이지 않는 게 더 골치였다.

예를 들자면 나이가 비슷한 건우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리기 어색하다며 ‘지원 씨’라고 불러달라고 요청하는 식이다.

은우 담임이라 단호하게 행동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원 씨’라고 부르기도 싫었다. 괜히 이상한 오해를 받는 건 정말 사양하고 싶었다.

동생이 사고 쳐서 학교에 불려 가는데 빈손으로 가는 게 뭣해서 작은 조각 케이크 몇 개를 가지고 간 적이 있었다.

대단할 것도 없는 선물에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 그리고 그때부터 나긋나긋해지던 말투.

가끔은 은우와 관계없는 뜬금없는 문자로 건우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그녀는 은우의 담임. 잘 보여야 할 사람은 건우였다.

그래서 쓸데없는 오해를 받을 걸 알고 있었지만, 오늘도 마카롱 몇 개가 들어간 작은 선물세트를 구입해서 학교로 가는 중이었다.

과거로 돌아오는 바람에 아직 김영란 법이 시행 안 된 게 아쉬웠다.

그랬으면 차라리 그 핑계로 빈손으로 갔을 테지만, 아직은 작은 선물 정도는 허용되는 분위기다.

“어서 오세요. 건우 씨.”

‘헉. 거…건우 씨? 아니 언제부터 나를 부르던 명칭이 은우 오라버님에서 건우 씨로 바뀐 거지.’

은우의 담임인 지원은 건우가 도착하자,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예전보다 더욱 살가운 목소리로 인사했다.

건우는 ‘건우 씨’라고 부르는 그녀의 호칭에 당황해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도 못했다.

“아…안녕하세요. 선생님. 그동안 잘 지내셨죠.”

“어머. 선생님이라니요. 저번에 제 이름 가르쳐드렸죠. 따라 해보세요. 유.지.원.”

건우도 학원에서 강사를 하고 있지만, 누군가를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직업병 비슷한 버릇을 가지고 있다.

가장 흔한 버릇이 누군가를 가르치려는 듯한 말투다.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특히 심한 편인데, 은우의 담임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하하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은우 담임선생님의 성함을 함부로 부르겠습니까? 동생의 선생님이면 제게도 선생님입니다. 자고로 제자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저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이다 보니 동생들에게 항상 예의범절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려면 저부터 모범을 보여야죠.”

“어쩜…! 죄송해요. 건우 씨의 그런 예의 바름. 그리고 차가운 듯 도도해 보이는 시크함. 그래서 제가 반했나 보네요. 호호호.”

“네?”

“호호호. 아니에요. 말이 헛나왔어요. 혹시 들으셨어요?”

“예의 바르게 보이면서도 시크하다는 이야기요? 어휴. 별말씀을요. 제가 어딜 봐서 그런 게 있다고요. 그냥 동생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싶어서 그런 척 노력하고 있을 뿐입니다.”

조용한 교실에서 단둘이 대화를 나누는데, 그녀의 말을 못 들을 리가 없다.

지금의 건우는 순진한 20대 초반의 청년이 아니다. 능구렁이 같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못 들은 척했다. 괜히 아는 척해서 어색해지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아! 그러시구나. 같은 20대 초반인데 저와 다르게 어쩜 이렇게 듬직하시죠? 가족을 위해서 헌신하는 모습 정말 보기 좋아요.”

언제부터 25살이 20대 중반이 아니라 20대 초반이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여기서 갑은 건우가 아니라 은우의 담임이었다.

“듬직하다니요. 전혀 아닙니다. 저보다야 아직 어려서 통제하기도 어려운 초등학생들을 잘 지도하고 계신 선생님이 더 대단하시죠. 특히 우리 말썽꾸러기 은우 때문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시겠습니까?”

“어휴. 은우가 말썽꾸러기라니요. 전혀 아니에요. 평소에는 얼마나 성격이 밝고, 오빠를 닮아서 그런지 공부도 잘해요. 가끔 욱하는 성격이 약간 문제긴 해도, 별것 아닌 걸로 화를 내는 건 아니거든요. 오히려 정의로운 성격이에요.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는 마세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우리 은우가 무슨 말썽을 피운 건가요?”

“그게 참. 어떻게 보면 정말 별일 아니었거든요. 건우 씨도 알겠지만, 은우가 건우 씨를 정말 많이 따라요. 사실 두 사람 같은 남매 사이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죠.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 마음이 가끔 너무 과할 때가 있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돌려 말씀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정확하게 무슨 일인지 알아야 앞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나무라든 설득하든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그냥 있었던 일 그대로 말씀하시면 됩니다.”

“요즘 초등학교 1학년들은 예전과 달라서 참 조숙해요. 정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그래요. 고작 8살인데 중학생처럼 보일 정도로 발육이 빠른 아이도 있어요. 그런 초등학생 사이에서 건우 씨의 인기는 정말 높아요.”

지원은 푼수끼를 보이던 처음과 달리 은우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자 차분하면서 조곤조곤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그런 모습 때문에 건우도 그녀를 싫어할 수가 없었다.

“네? 초등학생들이 저를 좋아한다고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일이라 깜짝 놀랐다.

“그럼요. 요즘 초등학생은 정신적으로 빨리 성숙해지기 때문에, 중, 고등학생은 물론 20대를 좋아하는 경우도 꽤 많아요. 물론 좋아하는 20대 대부분은 연예인들이죠. 건우 씨가 연예인은 아니지만, 연예인 이상으로 인기가 있으니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도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에요.”

“민망한 일이긴 한데 어쩌겠습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은우랑 무슨 상관이….”

“그냥 좋아하기만 하면 되는데, 아이들끼리 건우 씨를 서로 ‘자기 것’ 이라며 다투기 시작한 게 문제였어요.”

“허참. 참 난감한 표현이네요.”

“호호호. 좀 어감이 이상하죠? 그냥 연예인 좋아하는 아이들이 ‘그 오빠는 내 거야’라고 서로 다투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보시면 돼요.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니까요. 요즘은 초등학생들만 되어도 빠순이…. 어머! 내가 왜 이런 이상한 말을. 학생들을 상대하다 보니 말투가 점점 아이들을 닮아가네요. 그게 아니라 열혈 팬들이 많아요. 건우 씨도 아이들에게는 연예인이나 마찬가지죠.”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초등학생들이 절 좋아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영 낯서네요.”

“요즘 초등학생은 우리 때와 달라요. 인기 연예인 소유권(?) 다툼은 굉장히 치열해요.”

“설마 저도 누군가의 소유가 된 건가요?”

건우의 입에 어이없는 웃음이 걸렸다.

“네. 건우 씨에 대한 소유권 다툼은, 우리 반에서 제일 덩치 좋은 여학생이 힘으로 평정하면서 막이 내렸죠. 그런데 문제는 그 여학생이 우리 반 전체에다 대고 ‘이제 건우 오빠는 내 것이다’라고 선언하면서 생겼어요. 다른 반이었다면 그러려니 넘어갔을 텐데, 우리 반에는 은우가 있잖아요. ‘네가 뭔데 우리 오빠를 네 것이라고 해!’라며 은우가 발끈했어요.”

“은우 녀석. 별일도 아닌 걸로.”

“그건 건우 씨가 이해해주셔야 해요. 은우 또래 아이들이 힘든 일을 겪게 되면,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지기 마련이니까요. 건우 씨는 은우에게 아빠이자 엄마이면서 오빠이기도 해요. 의지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 오빠니까 누구에게도 주기 싫은 마음이 생기는 거죠.”

“그런 마음은 저도 이해하지만, 너무 오냐오냐하면서 키워서 그런지 자꾸 사고만 치네요.”

“오빠 일만 아니라면 누구보다 착하고 예쁜 학생이에요.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어쨌든 그 일로 두 아이가 싸우게 됐어요. 은우는 ‘우리 오빠는 내 거니까 넌 빠져’라고 했고, 그 여학생은 ‘여동생은 오빠를 소유할 수 없다’며 맞섰어요. 그러자 은우는 ‘그런 게 어딨어? 커서 오빠랑 결혼할 거야’라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여학생은 ‘오빠랑 결혼하는 건 불륜이야’라며 한마디 했죠. 그 말에 은우는 또 ‘우리 오빠는 너처럼 뚱뚱한 여자 싫어해’라고 놀렸어요.”

“맙소사. 결혼이요? 불륜이요?”

갈수록 태산이다. 건우도 이젠 골치가 아픈지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냥 무슨 말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사용했을 거예요. TV에서 자꾸 불륜 드라마만 틀어주니 아이들에게까지 영향을 준 거죠. 그리고 은우의 말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왜 딸들은 어릴 때 ‘난 아빠랑 결혼할 거야’라고 말하잖아요.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불륜이라니. 끄응. 결국, 두 아이들이 서로 싸웠겠군요.”

“네. 교실에서 몸싸움을 벌였죠.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그 여학생 덩치가 참 좋아요. 1학년인데 벌써 150cm가 넘었어요. 은우보다 20cm 가까이 크니 제대로 된 싸움이 될 리가 없었죠.”

“아니 그런! 우리 은우는 어디 다친 곳은 없습니까?”

20cm가 더 큰 아이와 몸싸움을 벌였다는 이야기에 놀란 건우가 다급한 얼굴로 물었다.

뭔가 또 말썽을 부렸거니 생각하고 왔는데, 거의 성인에 가까운 덩치를 가진 아이와 싸웠다는 말에 걱정부터 앞섰다.

“네. 은우는 말짱해요. 덩치는 커도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그냥 힘으로 누르는 것밖에 모르는 아이랍니다. 보통은 그렇게 힘으로 누르면 상대방 학생이 겁에 질려 울면서 싸움이 끝나거든요. 남학생들도 그 아이에겐 함부로 못 덤벼요. 그런데 은우는 그런 게 없어요. 깡이 장난 아니게 좋아요.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으니, 머리로 얼굴을 받아버린 거죠. 여학생은 코피가 났고, 싸움은 그걸로 끝났어요.”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은우가 안 다친 건 다행인데 상대 여학생이 코피를 흘렸다고 하니 웃을 수도 없었다.

“어휴. 최은우 이 말썽꾸러기를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 이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제가 은우를 따끔하게 혼내겠습니다.”

“너무 혼내지는 마세요. 오빠 일에만 조금 과격해질 뿐이지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예요. 이런 일로 학교에 오시게 해서 죄송해요. 학교에서 잘 마무리했어야 했는데, 코피 난 학생의 부모님이 강력하게 항의를 하셔서요.”

“아닙니다. 당연히 저를 부르셨어야죠. 우리 은우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상담실에 혼자 반성하라고 뒀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은우 데리고 집에 가겠습니다. 제가 알아듣게 잘 이야기할 테니, 앞으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겁니다.”

건우는 담임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하고 은우가 있는 상담실로 향했다.

“큰오빠. 으아앙.”

“이 녀석이 뭘 잘했다고 눈물이야. 눈물 뚝.”

상담실에 도착하자 은우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게 보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 은우는 들어오는 사람이 건우인 것을 발견하고 울음을 터트리며 품에 안겼다. 우는 동생을 차마 밀어내지는 못하고, 품에 폭 안아주었다.

그래도 잔소리하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히이잉. 그게 아니라. 영희가 먼저 밀었단 말이야.”

“네가 뚱뚱하다고 놀렸다며.”

“치. 오빠가 자기 거라잖아. 오빤 내 건데.”

“네 것 내 것이 어딨어? 오빠는 오빠지. 그만 울고 오늘은 그만 집에 가자. 가면서 오빠가 맛있는 떡볶이 사줄게.”

“떡볶이? 정말?”

아직은 단순한 1학년. 울다가도 먹는 이야기에 눈물을 그쳤다.

“그럼. 튀김도 사줄 테니까, 어서 가자.”

“우와. 신 난다. 그런데 오빠.”

“왜 그래? 뭐 다른 것도 사줄까?”

“아니. 나 업어주면 안 돼?”

“어허. 요 녀석 왜 갑자기 응석이지?”

“그게 아니구우. 아까 영희랑 싸울 때 깔려서 그런지 다리가 아파서 그래.”

“뭐? 어디 봐. 어디 붓고 그러진 않았어?”

은우의 말에 깜짝 놀란 건우가 바지를 위로 올려 다리를 확인했다. 그러느라 은우의 표정이 장난스럽게 변하는 것은 미쳐보지 못했다.

“괜찮아. 그냥 놀라서 그런 것 같아.”

“다행히 붓고 그러진 않았네. 녀석. 그러니 왜 그렇게 덩치 큰 친구랑 싸워. 혹시라도 많이 아프면 이야기해. 병원 가봐야 하니까.”

“알았어. 그럼 업어주는 거야?”

“그래. 업혀. 오빠가 오늘만 특별히 업어준다.”

“오예. 히히히. 그럼 오빠. 분식집 앞으로!”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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