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92화 (92/256)

제92화

“최은우. 너 또 사고 쳤구나.”

수능시험이 끝나고 아현동으로 학원을 옮기는 동안, 건우의 동생들은 잠시 아르바이트를 쉬었다.

수업을 마치고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집에 와 거실을 지나던 동우는 무릎 꿇고 손들고 있는 은우를 발견하고는 놀려대기 시작했다.

“흥. 그냥 하던 일 하셔.”

“오늘은 또 무슨 일 때문에 그러고 있는 거야?”

“몰라도 돼. 치. 큰오빠도 나빴어. 떡볶이도 사주고 업어도 줘서 그냥 넘어갈 줄 알았는데, 집에 오자마자 벌세우는 건 뭐람. 이건 완전 뒤통수라고!”

“어허. 최은우. 팔 내려간다. 똑바로 안 올려? 떡볶이는 떡볶이고, 혼날 건 혼나야지. 어떻게 친구 코피를 터트릴 수 있어! 다시는 친구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을 안 한다고 약속했잖아. 어겼으니 벌을 받아야지.”

은우가 투덜거리며 팔을 살짝 내리려는 순간, 어떻게 알았는지 건우가 나타나 잔소리를 시작했다.

“헐. 이번엔 코피야? 정말 가지가지 한다. 최은우. 친구 머리카락을 자르질 않나, 옷을 찢어버리질 않나. 완전 폭력 삼 종 세트네, 삼 종 세트야.”

“작은오빠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그래?”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네가 잘못한 건 알지. 이유야 어찌 되었든, 친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건 곤란하단다. 꼬맹아! 그런데 무슨 일이야?”

“몰라도 되거든.”

“말 안 해주면 계속 놀릴 건데?”

“어휴. 그냥 애들이랑 싸웠어.”

동우의 집요함에 은우는 한숨을 내쉬며, 벌을 받게 된 이유를 간단하게나마 설명했다.

“그걸로 끝이야? 그건 알아. 싸웠겠지. 싸우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친구 코피를 터트리면 그게 사람이냐 또라이지. 우리 막내가 지나치게 발랄한 건 알아도, 또라이가 아닌 건 이 오빠도 알아. 그러니 왜 싸웠느냐가 중요하지 않겠어?”

“아니 글쎄. 영희가 갑자기 교탁 앞으로 나가더니, 이제부터 건우 오빠는 자기 거라고 하잖아.”

“영희? 혹시 키가 150cm가 넘는 김영희? 2년 전에는 정우보고 한눈에 반했다고 따라다녔고, 작년에는 내가 좋다며 편지까지 보냈던 그 영희?”

“응. 맞아. 그 영희.”

“아뿔싸. 그 영희는 우리 집안에 무슨 원한이 있길래, 우리 형제를 돌아가며 사랑한다니. 그래서 너는 고작 그 말 한마디에 코피를 터트린 거야?”

“아니. 작은오빠는 내가 무슨 또라인줄 알아?”

“그럼?”

“우리 오빠가 왜 네 거냐? 우리 큰오빠는 내 거다. 그랬지.”

“으이그. 네가 그렇지.”

처음엔 말도 하지 않으려던 은우는, 살살거리며 말을 잘 받아주는 동우에게 넘어가 오늘 있었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전부 이야기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집에서 서로 대화를 제일 많이 하는 두 사람이다. 그 중 말다툼이 절반 이상이긴 하지만.

“왜? 내가 왜?”

“넌 정말 형이랑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했냐?”

“흥. 못할 건 또 뭐람?”

“어이구. 그러셔? 아까 했던 말 취소다. 너 또라이 맞다.”

“또라이 아니거든!”

“그래. 그럼 지금부터 당당하게 이야기해.”

“뭐를?”

동우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실실 웃으며,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녹음기능 앱을 작동시켜 은우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뭐긴 뭐야? 형이랑 결혼하겠다며? 내가 증인이 되어 줄 테니까. 당당히 이야기하라고.”

“내가 못할 줄 알아? 나는 우리 큰오빠인 최건우랑 결혼할 거다.”

“크크크. 오케이. 녹음 완료. 이건 가보로 남겨둘 거야. 꼬맹이. 나중에 철들고 보자. 그때 가서 녹음내용 지워달라고 사정사정해도 안 된다.”

“흥! 그럴 일 없거든.”

“그럴 일이 있을지 없을지는 나중에 두고 보자고.”

녹음 파일을 드롭박스와 이메일로 각각 전송한 동우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기 방으로 들어갔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건우는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우리 어디 가는 거야?”

가족끼리 외식을 하는 날. 저녁 식사를 마친 건우가 동생들을 태우고 마포 쪽으로 향했다.

“안 알려줄래. 힌트를 주자면 가면 깜짝 놀랄 거라는 거?”

“오! 그렇게 말하니까 갑자기 엄청 기대가 되는데?”

건우의 자동차는 서울역을 지나 경찰청 앞 사거리에서 좌회전 후 아현동으로 향했다. 그리고 초이스 에듀의 본점 뒤편에 있는 커다란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 차를 세웠다.

“자! 도착했어. 모두 내려.”

“응? 형네 학원 바로 뒤편이네. 학원을 가려는 거야? 그럼 학원 앞에서 차를 세우지.”

“거기에 용무가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여기 아파트에 가려고 왔어.”

“아파트?”

“갑자기 웬 아파트?”

아파트라는 말에 동생들이 합창하듯 반문했다.

“응. 아파트. 학원도 옮기니까 우리도 다시 이쪽으로 이사 와야지 않겠어? 지금 살던 집은 우리 소유가 아니라 한강 에듀케이션에서 임대해준 곳이고, 너희 학교와도 너무 멀었잖아. 여긴 형이 지금까지 고생해서 번 돈으로 산, 우리의 진짜 보금자리.”

“우와! 큰 오빠가 그렇게 말하니까 왠지 더 많이 기대가 된다. 우리의 진짜 보금자리라는 말이 되게 듣기 좋아. 히히.”

“그러게. 그런데 지금 집도 괜찮았는데, 더 좋은 집인가?”

“후후. 녀석들. 가보면 깜짝 놀랄 거다.”

궁금해하는 동생들을 보며 건우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네 사람은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건우는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백라이트가 켜진 단말기에 가져다 댔다.

카드를 인식했다는 ‘삑’하는 소리가 들렸다. 건우는 제일 꼭대기기 층인 32라는 숫자를 눌렀고, 승강기는 빠른 속도로 목적지를 향해 올라갔다.

“우와! 엘리베이터를 타는데도 카드가 필요한가 봐. 되게 신기하다.”

“그러게. 이런 엘리베이터는 나도 처음 봤어.”

“그런데 32층이면 제일 꼭대기 층이네. 엘리베이터에 적힌 숫자가 32층까지밖에 없어.”

“나도 봤어, 작은형. 그러니 촌스럽게 호들갑 좀 떨지 마.”

오두방정을 떠는 동우와 달리 정우의 얼굴은 차분했다.

“어쭈. 촌스러? 그럼 넌 안 궁금하냐? 난 지금까지 30층은커녕 20층 아파트도 못 가봤다고. 그런데 갑자기 32층이래. 야, 얼음땡! 너도 솔직히 궁금하지? 궁금하잖아.”

“뭐? 얼음땡이 누구야?”

“누구긴 누구야? 최정우 바로 너지. 맨날 무표정한 얼굴로 있잖아. 뚱하니.”

“하나도 안 뚱하거든. 막내오빠는 차도남 스타일이야. 내 친구들이 얼마나 좋아하는데.”

“어쭈구리. 우리 막둥이가 자꾸 작은오빠에게 기어오른다 이거지. 너 많이 컸다?”

“흥. 원래부터 정신 연령은 내가 더 높았거든.”

“그렇게 정신 연령 높은 녀석이 친구 코피나 터트려?”

“그건 그…그럴 수도 있지!”

“내 동생이지만 참 대단해. 형이 너 때문에 학교에 불려 간 게 벌써 몇 번이야? 이러다 불쌍한 우리 형 기네스북에 오르는 건 아니겠지? 최대 학교 호출로.”

“으아악. 지금 뭐래? 그런 게 어디 있다고!”

동우와 은우가 아웅다웅하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 모습이 익숙해진 건우와 정우는 재미없는 흑백 TV라도 보듯 멀뚱멀뚱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땡!

역시 고속 엘리베이터였다. 잠깐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눴을 뿐인데 순식간에 32층에 도달했다.

“어라. 여긴 왜 문이 하나야?”

“그러게. 아까 보니 1층은 문이 두 곳이던데.”

“오호. 이 녀석들 눈치가 빠르네. 놀라지 마시라. 짜잔.”

건우는 장난 가득한 과장된 표정으로 재빨리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우와! 세상에! 대체 이게 몇 평이야?”

정갈하면서도 고급스럽게 꾸며진 현관을 거쳐 거실로 들어서는 순간 동우가 호들갑을 떨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100평.”

“우와!”

“어쩐지. 정말 넓게 느껴지더라. 이 정도면 농구를 해도 될 것 같은데.”

“농구가 뭐야. 축구를 해도 되겠는걸?”

건우가 동생들을 데리고 온 곳은 얼마 전 완공된 아현동 카이 아파트단지였다.

초이스 에듀 덕분에 엄청난 관심을 받고 있던 XX건설사는, 그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건우에게 전망이 가장 좋은 102동의 펜트하우스에 입주할 것을 제안했다.

가격을 크게 할인해준 건 아니었지만, XX건설사가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의 펜트하우스는 돈이 있다고 무조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아현동 카이 아파트뿐만 아니라 XX건설사가 지은 모든 아파트를 대변하는 자존심이었다.

그러니 건설사 또한 어중이떠중이에게 함부로 집을 분양하지 않고, 선택에 있어서 신중을 기하는 편이었다.

그만큼 신경 써서 만들었고, 정성 들여 인테리어까지 완료한 곳이 카이 아파트 펜트하우스였다.

나중에 매물로 내놓는다면, 수억 원 정도의 프리미엄은 충분히 붙을 수 있는 매력적인 곳이기도 하다.

XX건설사가 이렇게 좋은 곳을 제공하는 이유는, 단지 고마움의 표시만이 아니었다.

건우가 동생들과 함께 살 보금자리로 선택한 곳.

그것만 해도 엄청난 광고가 된다고 판단했다. 연예인은 아니지만, 그 이상으로 대중들에게 사랑받고 신뢰받는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광고 출연을 해주면, 수십억 원에 이르는 아파트를 그냥 주겠다고 설득했었다. 그러나 광고는 절대 출연하지 않겠다고 하자, XX건설사는 급히 제안을 바꿨다.

우리나라 최고의 인테리어 전문가들을 모셔와 건우가 원하는 대로 아파트 내부를 새롭게 꾸며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밖에도 건우가 거절하기 힘든 여러 가지 매력적인 혜택들을 함께 제안했다.

‘여자연예인 박XX이 레X 아파트에 살고 있다더라’ 또는 ‘연예인 김XX이 어디어디 건물을 샀다더라’라고 소문이 나면 그 주변 집값이나 건물값이 오른다.

그걸 연예인 프리미엄이라고 부르는데, 건우에게도 그런 기대를 한 것이다.

이곳저곳 동생들과 살 곳을 알아보던 건우도 결국은 XX건설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얼굴이 알려지다 보니 생활하기가 여러모로 힘들었는데, 이곳 카이 아파트는 입주민의 사생활 보호에 철저히 신경 써주는 편이라 안심이 되었다.

“세상에! 방마다 화장실이 딸려 있어. 게다가 욕조까지 다 있어.”

“헐! 방 하나하나가 지금 우리 집 거실보다 커. 청소하려면 힘들겠다.”

“다들 마음에 들어?”

“응!”

“형. 여긴 정말 완전 대박이야.”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잔뜩 들뜬 얼굴이 모든 걸 말해줬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그럼 방부터 정할까? 일단 우리 막둥이 은우부터.”

“형! 그런 게 어딨어?”

“여기 있어. 그러니 동우는 넌 조용. 은우. 마음에 드는 방 있었어?”

“히히. 왼쪽 가장 끝에 방. 그 방이 제일 마음에 들어, 오빠.”

“아! 거긴 내가 찜했는데.”

“최동우. 너 자꾸 쓸데없는 소리 하면, 선택권 박탈하고 제일 안 좋은 창고용 방으로 준다.”

“하하하. 농담이야, 형. 은우야! 정말 잘 생각했어. 탁월한 선택이야.”

은우가 방 선택을 끝내자, 정우와 동우 그리고 건우 순으로 방을 정했다.

100평이나 되는 큰 집이었고, 고급스러운 콘셉트로 만든 곳이라 약간의 차이만 있을 비슷비슷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저녁에 인테리어 전문가가 집으로 찾아올 거야. 너희가 평소 살고 싶었던 방으로 꾸미는 데 도움을 주시기로 했어. 그러니 대강 어떤 방으로 꾸미고 싶은지 미리미리 생각해 둬.”

“헉! 그게 정말이야? 고마워, 형. 난 완전히 도서관 콘셉트로 방을 만들어 버릴 거야.”

“나는 검도 고수의 풍모가 느껴지는 고풍스러우면서도 단아한 느낌의 방이 좋을 것 같아.”

“뭐? 고풍스러우면서도 단아한? 야! 너 아직 중학생이거든? 좀 어울리게 놀지?”

“내 마음이야.”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네 방을 부엌 콘셉트로 안 만드는 게 어디야.”

“히히히. 나는 핑크색 벽지에 레이스 달린 침대! 곰돌이 인형도 많이.”

“큰형은?”

“나?”

동생들의 이야기를 흐뭇하게 듣고 있던 건우는, 정우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다.

자신의 방을 꾸민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 큰형. 큰형은 뭐 하고 싶은 일 없어? 꿈이나 그게 아니면 꾸미고 싶은 스타일. 그런 건 있을 것 아니야?”

“그…글쎄. 그건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꿈.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스타일.

그런 걸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는지조차 가물가물했다.

부모님 돌아가시고 20여 년,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면서 다시 1년. 그 긴 세월 동안 건우는 꿈을 잊고 살았었다.

“응?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형. 형 아직 21살밖에 안 되었거든. 그런데 꿈이 없다고? 혹시 우리 때문에 꿈을 꿀 여유조차 없었던 아니야?”

“아니야. 그런 건. 너희도 알다시피 원래 내 꿈은 의사였잖아.”

“그러니까 결국, 형은 우리 때문에 꿈을 포기한 거잖아.”

한껏 분위기가 좋았는데, 건우의 꿈 이야기가 나오면서 분위기가 갑자기 굳어졌다.

“그건 아니야. 내가 원래 의사가 되고 싶었던 건,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였거든. 계속 의사공부를 했다면 남을 도와주기는커녕, 공부하느라 정신없었을 거야. 그런데 지금 봐. 훨씬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게 되었잖아. 그러니까 너희 때문에 꿈을 포기한 게 아니라 너희 덕분에 꿈을 이룬 거지.”

“그런가?”

“그럼! 너희도 뉴스 봤잖아. 소아암 앓고 있는 환아 어머님들이 형 돕겠다며, 팔 걷어붙이고 나서시던 모습.”

“봤지. 정말 감동이었어. 나도 그 모습 보고 눈물을 왈칵 쏟을 뻔했다니까.”

“그래. 형이 그걸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나도 감동 많이 받았거든. 원래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바로 그렇게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이야. 직접적으로 병을 고쳐주지는 못해도, 이렇게 열심히 후원해줄 수는 있잖아. 그리고 의사가 되는 것보다 더 많이 도울 수 있게 됐어. 나는 정말 만족해. 이게 다 너희 덕분인 것 같아 고마운 마음이 들 정도라니까.”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분위기만 망칠 것 같아, 건우는 재빨리 동생들이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둘러댔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둘러댄 이야기일 뿐, 이게 자신의 진짜 꿈인지 확신이 들진 않았다.

자신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겠다고 다짐했으면 진짜 꿈이 뭔지도 잊고 살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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