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95화 (95/256)

제95화

“휴…. 용 대표 덕분에 행사장 분위기가 엉망이 되어버렸어요.”

“그러게요. 남의 행사에 참석해서 제대로 폭탄을 터트리셨어요.”

“타이밍은 별로지만 용 대표가 정면승부를 걸어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차라리 이런 경우가 훨씬 상대하기 편하니까요. 전 대표님 실력을 믿거든요.”

“하하하. 그래요? 손 팀장님 말씀을 들으니 갑자기 책임감이 막중해지는데요. 하 선배라…. 용 대표님이 정말 예상 못 한 선물을 가지고 오셨어요.”

“선물은 무슨. 하기야 폭탄도 선물은 선물이죠. 그런데 하도훈 선생에 대해서 잘 아시나 봐요? 아까 보니 서로 웃으며 눈인사 나누는 것 같던데.”

“잘 알죠. 제 고등학교 2년 선배니까요.”

“아! 그래요? 친했어요?”

“예. 꽤 친했어요.”

“2년 선배면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거예요?”

“그건 아니고요. 그땐 서로 안면만 익힌 사이죠. 우리 학교는 2년 만에 졸업하는 학생들이 많아서, 2년 선배면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니지도 못했죠.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좋은 대학 간 훌륭하신(?) 선배들이 모교에 방문하셔서 ‘나는 이렇게 공부를 했단다, 후배들아’라고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곤 하잖아요. 그때 저도 꽤 도움을 받았어요. 친해진 건 그다음이고요.”

“그럼 언제 친해지신 거예요?”

“대학 가서요. 하버드 대학과 MIT는 굉장히 가깝거든요. 바로 옆에 붙어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연세대학교와 서강대학교 정도의 거리?”

“아! 그 정도면 굉장히 가깝네요.”

“그렇죠. 하 선배가 브로드웨이와 햄프셔스트리트 사이에 살았거든요. 가끔 놀러 가서 자고 오고 그랬죠. 방학 땐 미국 서부로 여행도 갔을 정도니 친해도 보통 친한 사이가 아니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친했는데 한국 오는 것도 몰랐어요?”

“평소에는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거든요. 시차도 있고, 전화로 닭살스럽게 미주알고주알 수다 떠는 스타일은 서로 아니라서. 마지막으로 이메일을 받았을 때 조만간 깜짝 놀랄 소식을 가지고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하긴 했어요.”

“그런데 정말 깜짝 놀랄만한 소식을 가지고 오셨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실력은 어떤 것 같아요?”

“아마 잘할 겁니다. 워낙 사람이 서글서글해서 후배들에게 인망이 두터웠어요. 저도 물리 쪽은 선배 도움을 받기도 했고요. 그때 경험을 돌이켜보면 알맹이만 쏙쏙 잘 집어내서 효율적으로 가르치는 스타일이었어요.”

“그럼 우리에게 타격이 올 수도 있겠네요.”

“글쎄요. 그건 두고 보면 알겠죠.”

건우가 여유롭게 웃었다.

“말씀은 그렇게 하면서도, 표정은 매우 여유가 있으시네요. 자신 있으신가 봐요.”

“하하하. 그것도 두고 보면 알겠죠.”

용 대표가 처음 하도훈을 데려와 인사를 소개했을 때는 많이 당황했었다.

예전 삶대로라면 그는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꽤 유명한 엔지니어가 된다.

그런데 난데없이 학원 강사라니. 건우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개입으로 또 한 사람의 미래가 바뀐 것이다. 처음엔 놀랍기도 했고,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치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을 그인데, 갑작스레 진로가 바뀌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금방 떨쳐버렸다. 어차피 자신의 개입으로 세상은 과거와 다르게 흘러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럴 때마다 미안해하고, 고민한다면 제대로 된 삶을 살기는 어렵다.

친했던 사람의 인생이 변한 것이라 잠시 당황했지만, 예전에 했던 결심처럼 건우는 ‘무소의 뿔처럼’ 흔들림 없이 나아가리라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자신 있으신 거죠?”

“왜요? 불안하세요?”

“그럼요. 이렇게 커다란 학원까지 지었는데 망하면 곤란하잖아요. 호호호.”

“그러는 손 팀장님도 그리 걱정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요?”

“한두 과목이야 특별할 수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표님 같은 사람은 다시 보기 힘들어요.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인재라고요. 그런 사람이 또 나온다고요? 에이. 말도 안 돼.”

지인의 바뀐 진로가 신경 쓰이긴 했어도, 학원에 큰 타격을 줄 것 같지는 않았다. 건우는 누구도 모르는 20여 년이 노하우가 있다.

그 세월은 가정교사 말고는 학생들을 가르쳐본 경험이 없는 하도훈이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나 마찬가지다.

아마 성공은 할 것이다.

과거의 건우도 꽤 유명한 강사였다. 그때의 건우처럼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다 보면 금방 적응하고 유명세를 떨칠 것은 분명했다.

단지 그로 인해 타격을 입을 곳은 건우가 아니라 세계교육이나 다른 학원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하도훈은 아무리 잘해도 건우의 아류다.

“자! 그럼 슬슬 시작해볼까요?”

“그래요. 분위가 너무 안 좋은 것 같아요. 이제 직접 나서서 어수선한 분위기를 한 번에 제압하셔야죠.”

사람들의 관심이 하도훈에게 모두 쏠렸지만, 건우와 다정의 대화에는 여유가 있었다.

겨울이라 주변은 금방 어두워졌고, 건우는 여유 있는 웃음을 지으며 행사장 앞 단상 앞으로 다가갔다.

잠시 후 MIT 출신이라는 이슈는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리고, 누군가에게는 충격을 누군가에게는 공포를 줄 새로운 비밀병기(?)가 등장할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알리듯 식장을 밝히는 불빛이 모두 꺼졌다.

***

갑작스레 불이 꺼지자 모두들 놀란 듯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밝은 빛줄기 하나가 건우가 있는 단상을 비췄다.

그제야 사고가 아니라 초이스 에듀에서 뭔가 준비를 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조용히 정면을 주시했다.

두둥!

사방에서 동시에 울리는 북소리와 함께 행사장 곳곳에 설치되어 있던 모니터에 전원이 켜졌고, 초이스 에듀의 로고인, ‘C.C.E’가 새겨진, 빨간색 풍선이 화면에 등장했다.

“안녕하십니까? 갑작스럽게 어두워져서 많이 놀라셨죠. 초이스 에듀 대표 최건우입니다. 오늘은 우리 학원의 아현동 본점이 처음으로 태동하는 날입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자리를 빛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아직 어려서 그런지 격식을 차린 행사가 좀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더군요. 날씨도 추운데 제가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처럼 한 시간씩 연설하는 것을 바라는 분은 안 계시죠?”

건우의 가벼운 농담에 장내의 사람들은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누군가는 들고 있는 잔을 들어 보이며 환영의 뜻을 표했다.

“그래서 딱 한 가지만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초이스 에듀가 제시하는 미래의 학습방법입니다. ‘이게 뭐야’라고 낯설어하시는 분들도 분명히 계실 것이고, ‘오! 최건우 저 자식 또 한 건 했는데’라고 감탄하실 분도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도 아니면 ‘삽질하네’라고 흉을 보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판단은 여러분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냥 하나의 쇼라고 생각하고 즐기시길 바랍니다. 그럼 잠시 후 여러분은 10년 후의 미래로 여행을 떠나게 될 겁니다.”

말을 마치고 등을 돌리고 돌아선 건우는, 재빨리 구글 글라스를 착용하고 손에는 회색 장갑을 꼈다.

“조금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저를 보지 마시고, 여러분 앞에 자리 잡은 모니터를 봐주십시오. 저를 봐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모든 것은 모니터 속에 숨어있으니까요.”

화면에 등장했던 로고가 사라지면서 건우가 등장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가상의 칠판이 나타났다. 건우가 살짝 손을 올리자, 화면 중앙에 ‘위치 에너지와 운동 에너지’라고 적힌 제목이 점멸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수학부터 영어, 물리, 지구과학, 화학, 생물까지 총 6과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슨 과목으로 여러분을 놀라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가장 많이 알고 있을 중학교 과정의 ‘위치 에너지와 운동 에너지’를 골라 봤습니다. 이 인간이 대체 뭘 하려고 이러나 궁금해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은 학생이 되는 겁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모니터의 화면이 바뀌고 처마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이 나타났다. ‘똑똑’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며 사람들은 여전히 의아해하는 표정들이었다.

그때 화면 속에서 건우가 등장했고, 떨어지던 물방울은 슬로우비디오처럼 느려지더니 잠시 후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위치 에너지가 뭘까요? 사전에서 찾아보면 ‘물체가 어떤 특정한 위치에서 표준 위치로 돌아갈 때까지 일할 수 있는 잠재적 에너지. 크기는 물체의 위치로 정하여진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설명이 참 어렵죠. 쉽게 설명하자면.”

건우가 손을 당기자 입체적 모양을 갖춘 물방울이 사람의 주먹 크기로 확대되었다.

“바로 여기 있는 물방울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 에너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학교에서는 위치 에너지를 9.8mh로, 고등학교에서는 mgh라고 배웠죠. 여러분들은 지금 중학생이니까 그냥 위치에너지 이꼴 9.8mh이라는 공식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사실 g값인 중력가속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위치 에너지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역시 높이인 h입니다. 그럼 이 녀석의 높이는 얼마나 될까요? 한 번 알아보도록 하죠.”

딱!

경쾌한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튕기자 화면은 다시 작아지고, 줄자가 나타나 지상에서부터 물방울 사이의 거리를 재기 시작했다.

“음. 줄자로 재보니 높이가 1m이군요. 쉽게 설명하기 위해 물방울의 무게를 1g이라고 가정한다면, 9.8 곱하기 1 곱하기 0.001이 되는 거죠. 그럼 결국 0.0098줄(J)이 물방울의 위치에너지가 됩니다. 그럼 처음 떨어질 때보다 얼마만큼의 위치 에너지가 줄었을까요? 물방울이 떨어지던 처마의 높이를 측정해봐야겠죠?”

화면은 아까보다 조금 더 작아지고 줄자가 나타나 지상에서부터 처마까지의 높이를 측정했다.

“높이가 2m네요. 그렇다면 처마에서 물방울의 위치 에너지는 0.0196줄이 됩니다. 높이가 1m 줄어들자 위치 에너지가 0.0098줄 줄어들었네요. 그렇다면 0.0098줄은 어디로 갔을까요? 여기서 바로 운동 에너지가 등장합니다. 위치 에너지가 0.0098줄 줄었다는 의미는 운동 에너지가 0.0098줄 늘어났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럼 운동 에너지에 대해서도 살짝 알아볼까요?”

건우의 말과 동시에 화면은 다시 확대되었고, 처마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의 모습을 클로즈업했다.

그리고 다양한 화면과 모션으로 위치 에너지에 대해 설명해나가기 시작했다.

모든 설명이 끝나자 ‘9.8mh = 1/2mv^2’라는 메모가 등장했다가 날개 달린 편지모양으로 변신해 화면의 오른쪽으로 날아갔다.

“위치 에너지와 운동 에너지에 대한 간단한 설명은 끝났습니다. 그리고 방금 말한 메모는 태블릿이나 스마트폰으로 제 수업을 듣는 모든 학생들의 참고서 이북에 자동 저장이 됩니다. 손 아프게 밑줄 긋고 필기할 필요가 없죠. 해당 챕터에 가면 자동으로 메모가 등장하는 시스템입니다. 오! 그렇지 않아도 질문을 받으려고 했는데, 벌써부터 손을 드는 분이 계시네요. 네. 뭐가 궁금하신가요?”

“설마 음성을 텍스트로 변환해서 학생들에게 전송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죠? 미리 만들어둔 텍스트를 짜여진 각본에 따라 등장시켜 전송하는 거죠?”

“하하하. 의심이 많으신 분이군요. 당연히 음성인식을 해서 전달합니다. 언제든 중요하다 싶으면 즉흥적으로 메모를 만들어 전송할 수 있습니다.”

“음성을 텍스트로 변환하는 기술이 벌써 상용화되었다고요?”

“물론입니다. 조금 또박또박하게 발음해야 하지만, 95% 이상 변환 가능합니다. 의심스러우시면 한번 실험을 해볼까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이소룡입니다만.”

“오! 이소룡 씨. 본명이라면 정말 멋진 이름이군요. 어떤 문구를 넣어 볼까요?”

“음.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간 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는 건 바나나. 이 문구를 한 번 넣어봐 주십시오.”

“하하하. 알겠습니다. 원숭이는 재미없으니 다른 걸로 하죠. 이소룡 씨 엉덩이는 빨개, 빨간 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는 건 바나나. 방금 문장 매우 중요합니다. 별표 세 개. 전송.”

건우의 말이 끝나자 ‘이소룡 씨 엉덩이는 빨개, 빨간 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는 건 바나나.’라는 문구가 나타났다가 아까처럼 날개 달린 편지모양으로 바뀐 뒤 오른쪽 구석으로 날아갔다.

“우와!”

그제야 사람들의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방금 공개한 건우의 강의 모습이 어떤 의미인지 여실히 깨달은 사람들이 경악하며 내뱉는 소리였다.

“만족하십니까, 이소룡 씨?”

“무…물론입니다. 직접 시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방금 공개한 것은 2월 공급을 목표로 하는 ‘퓨쳐’라는 이름의 애플리케이션입니다. 몇 달 전 우리가 인수해서 초이스 애플리케이션으로 이름을 바꾼 앱 개발회사에서 만든 작품입니다. 아직 안정적인 실시간 서비스 부분을 보강하고 있지만, 조만간 해결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냥 일방적으로 제가 가르치기만 하는 강의가 아니라 서로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실시간 인터넷 동영상 강의가 가능해지겠죠.”

“맙소사! 인터넷에서 실시간으로 라이브 강의를 한다고요? 기존의 모니터 강의를 업그레이드한 것이 아니라?”

조금 전 손을 들고 질문했던 자칭 이소룡이라는 사람이, 이번에는 손도 들지 않고 물었다.

그의 궁금증은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도 물어보고 싶었던 말이었다.

건우의 시범 강연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모니터 강의가 더욱 인기가 있겠구나’라고 쉽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라이브로 인터넷 실시간 강의를 한다고는 이야기에 대부분 사람은 경악했다.

그렇다는 건 서버만 받쳐준다면 수만 명의 학생이 동시에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만약 초이스 에듀에 등록을 실패한 학생들이 다른 학원을 가지 않고 건우의 실시간 인터넷 강의를 듣는다고 가정한다면?

이곳에 참석한 상당수는 이제 생존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 됐다.

엄청난 질문공세에 시달리며 몇 가지 추가적인 기능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개원식은 막을 내렸다.

오늘 받은 충격이 이만저만 아니었는지, 참석했던 사람들의 얼굴 표정은 잔칫집에 왔던 사람들 같지 않게 하나같이 침울했다.

깜짝 선물을 준비했던 용선재 대표도 침울하긴 매한가지.

건우의 발표에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MIT 출신 하도훈이 누군지 조차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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