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99화 (99/256)

제99화

“지금 보니까 참 젊네.”

“네?”

“아닙니다. 그냥 아는 사람 같아서요.”

“아 저 사람이요? 문진수 사장이네요.”

“손 팀장님도 아는 사람입니까?”

“그럼요. 아마 오늘 행사에서 게임부분 수상자일걸요? 게임계에서는 최근 들어 떠오르는 혜성 같은 존재였죠.”

“였죠? 표현이 좀 묘합니다. 어째 과거형이네요.”

“네. 과거형 맞죠. 요즘 들어 곤란한 일이 생겼다는 소문이 들렸거든요. 표정이 별로인 걸 보면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네요. 들리는 말에 의하면 회사가 부도가 날지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떠오르는 혜성에서 추락하는 샛별이 된 거죠.”

“네? 그건 무슨 이야기죠?”

‘뭐지? 천하의 문진수 씨에게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야?’

건우는 뜻밖의 이야기에, 손다정을 돌아보며 좀 더 자세히 물었다.

“저도 자세한 건 잘 몰라요. 재벌 쪽 누군가와 트러블이 생겼다는 소식이 들렸거든요.”

“그래요? 역시 항상 재벌이 문제네요. 제 얼굴에 금칠하는 꼴이 되지만,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상까지 준다는 걸 보면 보통은 아니라는 이야기일 텐데요.”

“보통이 아닌 정도가 아니죠. 그러니 혜성처럼 등장했다는 표현을 한 거예요. 게임에 관심 없으세요?”

“게임이요? 하하하. 글쎄요.”

“어머. 정말 게임에 관심이 없으셨나 보네요?”

“바쁘다보니까요. 고등학생까지는 집에 컴퓨터가 없어서 못 했고, 대학 가서는 학부 공부하는 시간도 부족해서 게임을 할 시간이 없었죠.”

“게임도 모르시는 분이 문진수 사장은 어떻게 알고 그렇게 놀라신 거예요?”

“그냥 아는 사람과 닮아서 그랬어요. 자세히 보니 아니네요. 그 사람도 저분처럼 평범한 얼굴이었거든요.”

지금이 아니라 예전 삶에서 알던 사람이었다. 워낙 대단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건우가 가장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가장 찬란하게 빛나던 사람이라 더욱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그때는 문진수라는 사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뭔가 서로 처지가 바뀐 것 같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정확한 사정은 몰라도 지금 현재 그의 회사가 부도나기 직전 상황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버텨냈기 때문에, 건우가 마흔 살이었을 무렵 문진수는 그렇게 찬란하게 빛날 수 있었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예전 삶에서는 엄청나게 성공한 모습만 봐서, 오늘처럼 누군가에게 굴욕을 당하는 날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문진수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지금 건우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미래를 아는 그만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기회.

“그래요? 하긴 좀 평범하게 생기긴 했죠?”

“그런데 회사가 어려워도 상을 주긴 하나 보죠?”

“회사가 어려워도 워낙 평가가 좋았으니까요. 그리고 게임 개발과 경영은 별개의 일이기도 하죠.”

“좀 이상하네요. 아무리 정부에서 상을 준다고 해도 부도 직전이면 상을 받으러 올 정신도 없을 텐데요.”

“사정하러 온 것 같더라고요. 아까 얼핏 봤는데,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붙잡고 하소연하는 것 같았어요.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을 봐서는 결과가 좋은 것 같지는 않아요.”

“그래서 저렇게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는 거군요.”

“아마도 그런 게 아닐까요? 그런데 왜 자꾸 물어보세요? 설마 대표님이 도와주시려는 건 아니죠? 참으세요. 지난번 코니 애플리케이션은 교육용 앱을 개발하고 있었잖아요.”

“그래서요?”

“우리 초이스 에듀와 아주 연관이 없다고 하기는 어려워 그냥 넘어갔지만, 게임은 아니죠. 교육과 게임은 완전 상극이라고요. 대표님이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를 망칠 수도 있어요. 한국에서 게임 인식이 그래요?”

“한국에서 게임 인식이 어떻길래요? 우리나라가 게임 강국 아니었나요?”

게임에 관심이 없었기에 건우는 단편적인 사실만 알고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세상 물정을 모르시다니. 우리나라에서 게임은 마약과 동급이라고요.”

“헉! 설마요?”

“궁금하시면 직접 찾아보세요. 검색어에 ‘게임, 마약’ 이렇게 두 단어만 쳐도 관련 자료가 쏟아질 거예요. 아무튼, 대표님. 도와줄 생각은 절대 하시면 안 돼요. 앱 개발과 게임 개발은 비용에서부터 차원이 다르다고요. 자칫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수도 있다고요. 그러니 대표님, 제발….”

“누가 뭐래요? 그냥 이야기만 나눠보려고요. 대화를 나눈다고 큰일이야 나겠어요?”

“대화만 하려는 게 아니잖아요. 제가 대표님 표정을 잘 아는데, 지금 그 모습 호기심 정도로 그칠 얼굴이 아니라고요. 잘나가던 게임 회사가 왜 갑자기 부도 직전까지 몰렸겠어요? 대기업이 대놓고 노리는 회사라고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작은 회사는 대기업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밟아 죽일 수 있는 개미 정도밖에 안 된다고요.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그냥 계세요. 아…! 대표님!”

건우의 표정에서 뭔가 불안함을 느낀 손다정이 열심히 설득하려고 노력했으나, 건우는 이미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발걸음을 옮겨 문진수 사장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대기업이라. 그러고 보면 요즘 들어 자꾸 대기업하고 엇갈리네. 세계그룹도 그렇고 코니 애플리케이션을 그렇게 만든 와룡그룹도 그렇고. 이번엔 또 어디 대기업이려나. 그걸 안 물어봤네.’

건우는 자신이 생각해도 최근 대기업과 자꾸 엇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만 두렵다는 생각이나 피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미국 시장에 내놓은 동영상 강의가 기대 이상으로 성공을 거두자 더욱 자신감이 생겼다.

혹시 대기업의 등쌀에 못 이겨 학원이 망하게 되더라도, 외국에 나가면 얼마든지 다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런 자신감 덕분에 대기업도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

한편으론 운명일지 모른다고 느꼈다. 계속 대기업들과 엇갈리는 것도 그렇고, 선별적으로 가지고 있는 미래지식 중에 문진수를 기억하는 것도 의미심장했다.

문진수에게 걸어가면서 스마트폰을 꺼내 바나나 앱을 열고 ‘문진수’라는 이름을 입력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후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건우가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문진수. 1983년생. 올해 나이 서른셋.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컴퓨터공학과 학사, 석사. 서울대 컴퓨터 연구회 활동. 파워에디팅 공동 개발. 와! 파워에디팅을 이 사람이 개발했단 말이야? 대단하네. 설강전자 보스턴 R&D Center 파견 근무. 설강전자 소프트웨어사업부문 개발 팀장. 2012년 레브 소프트 창립. 레브? rêve를 말하는 건가? 레브는 프랑스어로 꿈, 환상, 공상 이런 뜻인데.’

건우는 스마트폰으로 확인한 진수의 이력을 숙지하고 그의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 아! 최건우 대표님. 여긴 어쩐 일로. 이런. 내 정신 좀 봐. 상을 받으러 오셨겠군요. 하긴 작년 활약이 워낙 대단하셨으니 그럴 만도 하겠죠. 그런데 저를 만나러 오신 건가요?”

건우는 이제 유명인이었고, 문진수 또한 그를 한 번에 알아봤다.

문진수는 많이 당황한 듯 횡설수설하는 모습이었다. 예전 삶에서 뉴스나 신문을 통해 봤던 당당한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뭔가 애잔한 생각이 건우의 마음을 맴돌았다.

동병상련이랄까.

“네. 사실 제 사촌 동생이 문 사장님의 열렬한 팬이거든요. 나이트 오디세이 게임 때문에 저희 외숙모님이 골치가 아프다고 성화가 대단하십니다. 하하하.”

다짜고짜 힘드시죠? 제가 도와드릴까요? 이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사촌 동생을 팔았다. 건우의 외사촌 동생인 현수가 게임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무슨 게임을 좋아하는지는 몰라도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여전히 게임에 푹 빠져 산다며 외숙모가 푸념하는 소리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

건우는 그걸 소재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도했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솔직히 여기저기서 부모님들의 원성이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최건우 대표님이 제일 부러웠습니다.”

“제가요? 왜 제가 부러웠습니까?”

“제가 부모님들의 공적이라면, 최 대표님은 부모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존재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얼마나 최 대표님을 부러워했겠습니까?”

건우의 자연스러운 대화 시도 덕분인지 처음엔 횡설수설하던 문진수도 금세 여유를 찾고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자기 자식을 우리 학원에 수강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협박을 서슴지 않는 학부모도 있고, 다른 아이들은 다들 성적이 올랐는데 왜 자기 아들만 성적이 떨어졌느냐며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도 정말 골치 아픈 일이에요.”

“에이. 그 정도는 귀엽게 봐줄 수 있죠. 우리 회사가 입주해 있는 빌딩 앞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시위가 벌어집니다. ‘아이들을 악의 구렁텅이로 빠트리는 문진수는 물러가라’ 이런 식의 구호를 외치면서 말이죠. 게임을 만들었다고 사람을 악마나 악의 축으로 몰고 가는데, 정말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죠.”

“저런. 제가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은 거군요. 그런데 아까 얼핏 보니 표정이 좋지 않아 보이던데요. 문 사장님도 여기에 상을 받으러 오셨을 텐데,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그게….”

건우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문진수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뻔뻔해지기로 마음먹은 날이지만, 오늘 처음 만난 건우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아차. 제가 너무 난처한 질문을 한 모양이군요. 죄송합니다. 신색이 워낙 안 좋으셔서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질문을 드렸는데….”

“도움이요?”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도 있고, 제가 도움이 될 수도 있을까 생각했거든요. 제가 초면에 너무 주제넘었나 봅니다.”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제가 상당히 곤란한 처지입니다. 그런데 초면에 제 사정 이야기를 하면 실례를 하는 건 아닐까, 망설였습니다. 그래도 궁금해하시는 것 같으니 말씀드리죠.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말이죠….”

문진수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건우에게 자신의 처지를 설명했다.

건우가 문진수의 이력을 살펴봤을 때에도 나왔듯, 그가 처음 취직한 곳은 설강그룹 산하의 설강 전자였다.

제계 서열 10위 안에 드는 대기업이지만, 전자 계통은 우리나라에서 4~5위권 정도의 비교적 낮은 순위였다.

이에 대한 타개책 중 하나로 회사 안에 소프트웨어 사업부문을 신설하게 되었고, 인재를 물색하던 중 대학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던 문진수를 발견하고 스카우트했다.

문진수 정도의 수재면 우리나라 4~5위권의 전자회사 정도는 눈에 차지도 않는다. 그러나 제시하는 연봉 자체가 워낙 좋았고, 아무 조건 없이 개인 연구비까지 지원해주겠다는 약속에 설강전자를 선택했다.

처음은 사이가 좋았다. 설강전자는 문진수에게 미국에 가서 공부할 기회를 제공했고, 그 덕분에 게임 강국인 미국에서 많은 것을 배워올 수 있었다.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그는,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파워에디팅이라는 프로그램과 피니쉬라는 게임 개발에 성공했다.

파워에디팅은 사진 및 동영상을 한꺼번에 편집할 수 있는 강력한 편집 유틸리티로, 포토샵을 위협하는 강력한 대항마가 되었다.

그리고 피니쉬라는 게임 또한 전체 게임 순위 10위 안에 드는 효자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설강전자는 파워에디팅과 피니쉬의 개발로 주가가 세 배 가까이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렇게 대단한 프로그램을 두 가지나 개발했으나, 우리나라 대기업 대부분이 그렇듯 개발자에게는 성과급 말고는 그 어떤 보상도 없었다.

설강 전자에 막대한 이득을 안겨줬음에도 그에 대한 보상이 미미하자 문진수는 직장생활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게다가 너무 바빠서 개인 연구는 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자, 견디다 못한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레브 소프트라는 게임 회사를 설립했다.

문제는 나이트 오디세이가 개발 완료되면서부터였다. 갑자기 설강 전자에서 문진수가 개발한 나이트 오디세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해당 게임을 처음 기획한 것은 설강 전자를 다닐 때부터였고, 개인적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연구비도 지원했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문진수가 설강전자에서 사용하던 컴퓨터에서는 실제로 나이트 오디세이에 대한 기획서가 나왔고, 그 사실이 그를 더욱 궁지로 몰아갔다.

그냥 심심풀이 삼아 몇 자 끼적인 것이 전부였는데, 그게 소송의 주요 근거가 되었다. 거기에 더해 파워에디팅과 피니쉬의 개발에 대한 성과급 명목으로 지급받았던 3억 원의 돈은 어느새 나이트 오디세이 개발에 지원한 연구비로 탈바꿈해 있었다.

누가 봐도 억지스러운 주장이었으나, 법원은 설강전자에 호의적이었다.

재판은 길어졌다. 설강전자는 앞서 제출한 기획서와 연구비 지원 근거를 가지고 나이트 오디세이에 대한 가처분 신청을 했고, 레브 소프트의 자금줄은 꽁꽁 묶이고 말았다.

사실 설강전자의 주장은 억지에 가까웠기 때문에 언젠간 문진수가 이길 싸움이다. 그러나 시간과 자금력이 문제였다.

돈이 없으니 재판을 계속할 능력이 없었고, 어떻게든 재판을 계속한다고 해도 승소하기 전에 회사가 망할 판이었다.

정부에 억울함을 호소하고, 아는 사람에게 자금 지원을 요청해봤으나 모두 설강전자의 눈치를 보느라 문진수를 외면했다.

“어떻습니까? 조금 구질구질한 이야기죠?”

설명을 마친 문진수는 자신의 처지를 다시 한 번 깨달았는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파워에디팅과 피니쉬 그리고 나이트 오디세이까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그게 뭐죠?”

“왜 나이트 오디세이에 집착하시는 겁니까?”

“네? 그거야 당연히 제가 1년 넘게 피땀 흘려가며 만든 제 자식 같은 녀석이니까요.”

“하지만 자식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혹시라도 도움을 받지 않을까 기대를 했는데, 건우의 이야기는 그런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실망감이 커지자 말투도 퉁명스러워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옜다 이놈들아! 먹고 떨어져라’라고 하며 쿨하게 넘겨버릴 수는 없습니까?”

“네? 그게 무슨?”

“이미 세 번이나 성공했지 않습니까? 처음보다 노하우가 더욱 많이 쌓였을 겁니다. 그렇다면 예전보다 더욱 대단한 게임을 만들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괜히 설강전자와 싸우면서 시간 낭비하는 것보다 나이트 오디세이는 비교도 되지 않는 멋진 게임을 만들어 복수하는 것이 문 사장님에게 더 큰 이득이 되진 않을까요?”

“그게 어디 쉽습니까? 이젠 설강전자 눈치 보느라 제대로 투자를 해주는 곳도 없을 겁니다.”

“그건 제가 도와 드리죠.”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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