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초이스 에듀 아현동 본점의 가동 건물.
주차장이 있는 지하 3층 구석에는 ‘기계실.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푯말이 붙은 철제 문이 있다.
일반적으로 빌딩이라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내부는 전혀 평범하지 않다.
문을 열고 들어가 오른쪽으로 돌면, 어떤 안내문도 없이 디지털 도어록만 설치된 또 다른 문이 등장한다.
그 문 너머가 바로 초이스 에듀의 정보를 담당하는 정보팀의 아지트이다.
팀원은 고작 4명밖에 없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여러 종류의 기계과 다양한 크기의 모니터들이 사무실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초기 시설 투자비용만 10억 원이 넘었다. 확실히 학원에서 운영하는 정보팀치고는 설비가 너무 과했다.
그러나 건우는 이곳에 대한 투자에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다.
지금의 투자가 불확실한 변수를 줄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믿음과 지금보다 미래에 더욱 빛을 발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심지어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며 만날 때마다 강조하는 바람에 팀원들이 황송해할 정도였다.
별도로 마련된 회의실에는 건우와 정보팀장인 차지훈, 앨버트로스팀장 안우현 그리고 해커 출신의 윤종수가 모여앉아 대형 모니터 화면 속에 등장하는 한 남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안우현의 합류였다.
처음엔 그에게 이곳을 알릴 생각이 없었다. 안우현은 그냥 머리 좋은 과외교사였지,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초이스 에듀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을 덜컥 믿긴 어려웠다.
그런데 수능 분석팀으로 합류하자마자 자신이 건우의 왼팔임을 자처하더니, 학원 이곳저곳 구석구석까지 알아야 한다며 싸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정보팀의 존재를 알아채 버렸다.
세계적으로 놀았다던 정보팀에게 개망신을 준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우현은 그때부터 건우를 졸졸 따라다니며 자신도 그곳에 합류시켜달라고 졸라댔다.
처음엔 모르쇠로 일관하던 건우도 그의 집요함에 두 손 들고 말았다.
결국에는 정보팀과 논의 끝에 객원 멤버(?)로 그의 합류를 승인하게 되었고, 신이 난 안우현은 이후 정보팀 사무실을 제집 앞마당처럼 들락날락거리기 시작했다.
딱히 어떤 기대를 한 건 아니었는데 은근히 도움이 됐다.
카이스트 공대 출신답게 컴퓨터에도 상당히 능했고, 어떤 기계에 대해서는 해킹 및 전자기기 담당인 윤종수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의외인 것은 사람 사귀는 일에 익숙하지 못할 것 같은 그가 어느새 윤종수와 단짝이 되었고, 다른 멤버와도 금방 친해져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름 오대영. 나이 43세. 한강 에듀케이션을 감시하던 김용철이나, 김용철에게 지시를 내리던 현필수와 다르게 경찰 출신이었습니다.”
“김용철과 현필수는 조직폭력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김용철 현필수 두 사람 모두 강남에 있는 불곰파 소속입니다.”
“전직 경찰과 조폭이라. 안 어울리는 조합이군요.”
“기록을 살펴봤더니 재미있는 사실이 나왔습니다. 오대영이 강남경찰서 강력반에 있을 때, 두 놈 모두 체포 이력이 있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걸렸더군요.”
해커 출신의 윤종수가 합류한 것은 정보팀에 상당한 힘이 되었다.
차지훈, 자성, 준규의 경우는 아무리 노련하다고 해도 현장업무 전문가들이었다.
누군가를 미행하거나 상대의 비밀장소에 은밀히 침입하는 일 따위가 그들의 전문 분야지, 해킹 등 온라인을 통한 정보 수집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러 번이라. 그걸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보면 악연일 수도 있는데.”
“정보통으로 만들기 위한 일종의 길들이기라고 보면 됩니다. 조서를 보니 그렇게 큰일도 아니었습니다. 별것도 아닌 일로 자꾸 체포하는 거죠. 그리고 며칠 가둬놓고 풀어주고, 다시 잡아오고. 몇 번 그런 일을 반복하다 보면 웬만큼 성격 대찬 놈이 아닌 이상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조폭들이 그렇게 강단이 없습니까?”
“전과가 몇 범인데 그런 걸 무서워하겠습니까? 내부에 의심을 심는 겁니다.”
“의심이요?”
“네. 비슷한 일로 잡아와서 다른 놈들은 콩밥 먹이고, 현필수는 며칠 지나 풀어주는 거죠. 처음에는 운이 좋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일이 반복되면 주변에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 저 자식은 뭔데 매번 쉽게 풀려나지? 경찰 끄나풀 아니야? 의심스러운데’ 이런 식의 이야기가 오고 가기 시작하면 당사자는 견디기 힘들어집니다. 내부의 불신만큼 견디기 어려운 일은 없으니까 말이죠.”
“그게 사실이면 오대영은 머리가 좋은 데다 꽤 야비한 인간이군요.”
“맞습니다. 경찰로 있을 때도 상당히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경찰청장 표창장도 두 차례나 받을 정도로 베테랑 경찰이었습니다.”
“그런 경력을 가지고 기가 싱크빅 보안실장이 되었다. 음. 상황 자체는 자연스럽군요. 만약 용선재 대표가 직접 스카우트해온 사람이라면, 용 대표부터 의심을 해봐야겠군요.”
“그런데 조사해보니 언론을 통해 대표님을 음해한 세력이 용 대표는 아닐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지금까지 윤종수와 건우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차지훈이 나섰다.
“그래요?”
“용선재 대표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 그걸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과외로 시작했고, 학원을 운영하면서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리고 온라인 강의 서비스에 발 빠르게 뛰어들면서 지금의 기가 싱크빅을 만들었죠. 운도 따랐지만, 실력도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실패는 거의 해보지 않고 지금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뒷공작보다는 정당한 대결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언제든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바탕에 깔려 있거든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MIT 다니던 도훈 선배를 스카우트해온 것만 봐도, 뒤에서 뭔가를 꾸미기보다는 정면에서 승부를 걸어왔다고 볼 수 있겠어요.”
“잘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번 개원식 영상을 정밀 분석해본 결과 재미있는 장면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요? 어떤 거죠?”
건우가 궁금해하자 윤종수가 멈췄던 화면을 다시 플레이하기 시작했다.
영상은 잠시 돌아가다 세계교육의 정도식 실장과 마주치는 부분에서 멈췄다. 그리고 오대영과 정 실장이 서로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반복구간으로 설정해 느리게 재생시켰다.
“저희도 몰랐는데 안 팀장님이 발견한 부분입니다.”
“에이. 종수 형님. 우연입니다. 우연. 어디까지나 초심자의 운이라고 할 수 있죠. 하하하.”
윤종수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안우현이 손사래를 쳤지만, 득의의 미소를 감추지는 못했다.
“초심자의 운이든 아니든 저희가 놓친 부분을 발견했다는 건 대단한 겁니다. 영상을 잘 보시면 오대영과 정도식이 서로 미소를 지으며 의미심장하게 눈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보일 겁니다.”
“느리게 보니 확실히 보이네요. 그런데 동종업계의 사람들끼리 눈인사를 나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 장면 하나로 용 대표에 대한 의심을 지우는 건 너무 섣부른 판단 같은데요.”
“그냥 촉이 그렇게 왔다고 하면 대표님은 수긍하시기 어려우실 것 같아, 오대영과 정도식의 연관성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봤습니다. 거의 접점이 없었는데, 초등학교 4~5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아냈습니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서 데이터베이스화되지 않은 자료들이었고, 거기에 오대영이 5학년 말에 전학을 가는 바람에 졸업한 학교가 달랐습니다. 그것 때문에 둘의 연관성을 찾는 데 오래 걸렸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의미심장한 정보네요. 두 사람이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그것도 같은 반. 그렇다면 저렇게 가볍게 눈인사만 나누는 건 확실히 이상해 보이네요. 감출 게 없는 사이였다면, 조심스럽게 인사를 나눌 필요는 없었겠죠. 둘 중 누군가가 다른 한 명에게 포섭되었을 가능성이 높겠군요. 그리고 그건 용선재 대표보다….”
“박유하 이사일 가능성이 더 높겠죠.”
이제야 건우를 직접적으로 노리는 적이 누군지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베일에 가려진 적보다 정체가 드러난 난 적이 상대하기 쉬운 법이다. 세계그룹이 만만한 곳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모를 때보단 나았다.
“여전히 크레이듀를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만, 세계교육이 지난번 사건의 배후일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게다가 지금까지 크레이듀의 행보는 상당히 거침없었습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향후 세계교육보다 더 무서운 적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그렇겠죠. 와룡그룹이나 세계그룹이나 둘 다 대단한 기업임은 확실하지만, 와룡그룹은 세계적인 규모니까요. 그래도 다행인 것은 우리가 모기업 전체를 상대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 아닙니까? 더군다나 세계교육의 박유하 이사는 본사 사촌 형제들하고 사이도 좋지 않다면서요?”
“사생아라서 그런지 사촌뿐만 아니라 이복형제들에게도 무시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독하게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항상 조심하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전 여러분만 믿습니다. 혹시 다른 내용도 있나요?”
“네. 지난번에 보고 드린 것처럼 개원식 곳곳에 도청장치를 설치해뒀습니다.”
“그랬죠. 효과는 좀 봤습니까?”
“설마 식장에 대놓고 도청장치를 설치할 거라는 생각은 못 했는지 괜찮은 대화내용도 있었습니다. 종수야. 박유하 이사와 정도식 실장이 나누는 대화 좀 틀어봐.”
“알겠습니다.”
차지훈의 지시에 윤종수는 음성파일 하나를 찾아 재생했다.
박 이사와 정 실장이 조용히 대화를 나눴지만, 도청장치의 성능이 좋아서 두 사람의 음성이 또렷하게 들렸다.
- 이런. 이빨 빠진 늙은 호랑이인 줄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사람 뒤통수를 치네요. 하버드에 이어 MIT라. 이러다가 학원 강사도 외국물을 먹고 와야 인정받는 세상이 올까 걱정입니다. 그런데 정 실장님은 모르고 계셨습니까?
용선재 대표가 MIT 출신인 도훈을 사람들에게 소개한 직후에 나누는 대화였다. 박 이사는 짜증이 났는지 음성이 상기되어 있었다.
- 죄송합니다, 이사님. 수행원도 없이 혼자 미국을 다녀왔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큰아들이 그곳에서 공부하고 있어, 저는 당연히 가족을 만나고 오는 것이리라 생각했습니다.”
-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보아하니 기가 싱크빅 직원들도 전혀 몰랐던 눈치더군요. 아까도 말했지만, 하도훈이라는 작자까지 성공하면 우리도 외국 명문대생을 스카우트해와야 할지도 모릅니다. 전 그런 상황이 오지 않길 바랍니다. 한국 대학이 외국 대학에 비교해 뒤질 게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 네, 이사님. 이번에는 절대 실망 안겨드리지 않겠습니다.”
- 그래요. 저는 정 실장님만 믿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여기까지였다.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고, 어떻게 보면 누군가에게는 상당히 위협적인 대화내용이었다.
“박유하 이사의 목소리에서 해외파에 대한 적대감이 느껴지는군요.”
“그럴 겁니다. 대표님 때문에 상당한 타격을 입은 것도 문제지만, 사촌 형제들 대부분이 해외 유수의 명문대학 출신입니다. 그로 인한 콤플렉스가 상당하다는 소문입니다. 사생아라서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해 외국에 안 나간 거지, 실력은 그들에 비해 전혀 뒤질 게 없다고 감정을 드러낸 적도 있다고 합니다.”
“평소 냉철하기로 소문난 사람이 그렇게 감정을 쉽게 드러냈단 말이죠? 만약 언론까지 움직여 저를 공격한 사람이 박유하 이사라면, 제가 하버드대학 출신이라는 것도 상당한 이유가 되겠군요.”
“저희 분석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대화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새로 스카우트된 하도훈 씨에 대해 뭔가 일을 벌일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대표님은 운이 따랐지만, 하도훈 씨도 그럴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자칫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도 있을 겁니다. 어떻게 할까요?”
“원래라면 이런 일은 같은 경우는 어떻게 처리하십니까?”
“어부지리를 노리는 게 정석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선배라는 사실이 조금 걸립니다. 몰랐으면 몰라도 알게 된 마당에 모른척하면 대표님 마음이 불편할 수도 있고.”
“그렇긴 하네요. 제가 신세를 많이 졌던 고마운 선배니까요. 그런데 음모를 시작하기도 전에 분쇄할 방법은 있나요?”
“충분히 가능합니다. 하지만 위험부담이 큽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존재는 드러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은밀함의 장점은 사라지게 되겠죠.”
“흠.”
차지훈의 말에 고민이 된 건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른 사람들도 쉽지 않은 결정이라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에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하도훈 선배에게는 미안하지만,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습니다. 어려운 상황이 된다면 개인적으로 돕겠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여러분의 존재 여부는 최대한 늦게 밝혀져야 합니다. 영원히 모르는 게 가장 좋겠죠.”
“어려운 결정 하셨습니다. 저도 대표님 생각에 동의합니다. 세계교육뿐만 아니라 크레이듀까지 생각하신다면, 꼭 필요한 결정입니다. 괜히 하도훈 씨를 도우려다가 같이 망할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알기로 와룡그룹은 절대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재계 서열 3위 안에 드는 대기업은 만만할 이가 없겠죠.”
“그렇습니다. 지금은 그냥 조그마한 사교육 시장이라고 적극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시장의 성장 속도를 봤을 때 분명히 공세로 돌아서는 날이 올 겁니다. 그때를 대비하셔야 합니다. 그러니 양심의 가책 같은 건 느끼지 마세요.”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 멘탈이 그렇게 약하지는 않습니다. 제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입니다. 가족 일만 아니라면 제가 흔들릴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세계교육에서 하 선배를 공격한다면 우린 그걸 기회로 잡아야 합니다.”
“기회요?”
“지난번에 제가 당했던 일을 생각한다면, 그냥 하 선배 개인만을 타깃으로 삼지는 않을 겁니다. 분명히 기가 싱크빅까지 흔들려고 할 겁니다. 그럼 차 팀장님은 그 일을 벌이는 쪽이 세계교육이라는 증거를 최대한 많이 수집하세요.”
“직접적인 증거는 찾기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심증이 될 수 있는 자료만 수집해도 충분합니다. 범인을 잡으려고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자료로 용 대표와 협상을 벌일 생각입니다.”
“용 대표와 어떤 협상을요? 어떤…?”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세계교육으로 인해 기가 싱크빅이 어느 정도 흔들리느냐가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될 겁니다. 혹시 압니까. 잘만 된다면 기가 싱크빅을 인수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죠.”
“아! 일종의 어부지리를 노리시는군요. 그렇다면 기가 싱크빅이 될 수 있으면 많이 흔들려야 좋을 텐데. 지금부터 세계교육을 응원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하하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