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116화 (116/256)

제116화

“이 원장은 모르겠지만, 지금 정치계에서 최 대표의 명성이 엄청나오. 조금 과장을 섞으면 김구 선생 이후 국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요. 심지어 우리 당의 총재님께서는 최 대표를 손주 사위로 욕심내고 있을 지경이란 말이오.”

“그…그 정도입니까?”

“그건 약과요. 최 대표만 잡으면 대권을 잡을 수 있다. 이 말이 지금 여의도에서는 가장 유행하는 말인데, 나보고 지금 그런 사람을 쳐 달라? 진심으로 하는 소리요?”

“그…그게 의원님?”

“이건 나보고 죽으라는 소리와 마찬가지요. 아무리 내가 신세를 진 일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 원장이 야당의 스파이가 아닌 이상 내게 이딴 부탁을 하면 안 된단 말이지.”

“죄…죄송합니다. 의원님.”

온화하게 말하던 강 의원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거칠어졌고, 그의 돌발 행동에 놀란 이 원장은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사과부터 했다.

“죄송할 것 없소. 오늘은 내 이만 일어나리라. 그리고 그런 일로 나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으니 과일 선물은 고맙게 잘 받겠소. 혹시 뭐 문제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처음 말씀 드린 것처럼 어디까지나 흠모의 의미일 뿐 절대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닙니다. 아무 사심도 없습니다. 드려야 할 걸 드렸으니 당연히 의원님 것이지요.”

“그렇게 말하니 안심하고 내 나라를 위해 잘 쓰겠소. 수고하시오.”

정치계에서 잔뼈가 굵은 정치인답게 한 번 들어온 돈은 절대 놓지 않는 강 의원이었다. 하지만 이 원장은 그의 그런 뻔뻔한 행동을 보면서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운이 좋아 종종 어울렸다고 해도, 돈을 돌려달라고 따지기에는 강 의원은 너무 대단한 거물이었다.

그랬다간 초이스 에듀에 밀리기 전에 강 의원 때문에 학원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 원장은 오늘 일이 모두 틀어지자 낙담한 얼굴로 힘없이 가게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도, 먼저 나간 강 의원도 누군가가 자신들을 모습을 찍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

“강 의원과 이 원장이 조금 전에 헤어졌다고 합니다.”

“벌써요?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헤어지나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 원장이 나갈 때 표정이 좋지 않은 걸로 봐서는 이야기가 그렇게 잘된 건 아닌 모양입니다.”

“형님.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도청 못 했어요?”

최근 들어 스파이 놀이에 점점 재미를 붙이고 있는 수능예측팀 팀장 안우현이 재빨리 나서서 질문을 던졌다.

“이봐. 안 팀장. 너는 가끔 우리를 너무 전지전능한 존재로 보는 경향이 있어. 제발 부탁인데 스파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는 이제 그만 좀 보면 안 될까?”

“왜요? 형님들 하시는 걸 보면 영화나 드라마가 아주 허무맹랑한 건 아닌 것 같던데.”

“그게 허무맹랑이 아니면 어떤 게 허무맹랑하다는 건데? 범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파악하고, 동선까지 모두 예측해서 도청장치를 설치하는 게 쉬운 줄 알아? 설사 예측했다고 해도 두 사람이 만난 그런 밀실에 어떻게 도청장치를 설치해?”

“자성이 형님이나 준규 형님이 그런 일의 전문가잖아요. 힘들까요?”

“어휴. 너도 생각이라는 걸 해봐라. 자성이나 준규가 거기서 일하는 사람으로 분장해서 도청장치를 설치한다고?”

차지훈이 안우현을 보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네. 그러면 되잖아요.”

“그건 영화니까 가능한 거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인데 서로 얼굴도 모를까?”

“신입이라고 하면 안 될까요?”

“쯧쯧. 너 같으면 그냥 국회의원도 아니고 여당 실세가 만나는 자리에 신입을 잘도 들여보내겠다. 생각 좀 하고 질문을 해. 머리 좋다더니만 솔직히 말해봐. 개뻥 아니야?”

“개뻥 아니거든요. 궁금하면 지금 당장 테스트해보던지요.”

“됐고. 자꾸 이렇게 귀찮게 하면 다시는 여기 못 들어오게 한다.”

“치사하게 협박은. 정말 실망입니다.”

“그래. 너 혼자 실망 많이 하세요.”

“자자.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두 사람은 왜 만난 것 같습니까?”

차지훈과 안우현의 만담(?)이 생각보다 길어지는 것 같자, 건우가 나서서 두 사람을 말렸다.

“자성이 말로는 강 의원 트렁크에 과일 박스를 실었다고 하더군요.”

“네? 과일 박스요? 우와. 뇌물을 줬나보네. 크기가 좀 큰 사과박스의 경우는 박스 하나당 25억 원까지 들어간다던데.”

“무슨 돈이 있다고 25억 원이나 뇌물로 줘. 자성이 말로는 5억 정도 들어갈 조그마한 과일 상자라고 하더라.”

“5억 원이라. 적은 돈은 아니네요. 그런데 그렇게 큰돈을 바쳤는데 나올 때 표정은 왜 안 좋았을까요? 게다가 식사도 안 하고 금방 헤어졌다고요?”

“네. 아무래도 일이 틀어진 것 아니겠습니까? 이 원장이야 초이스 에듀의 독점을 견제하게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을 게 뻔합니다. 문제는 강 의원인데. 아무리 요즘 들어 강 의원이 잘 나간다고 해도 그래 봐야 호가호위입니다.”

“무슨 의미죠?”

“권력자의 신임을 받고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지 자기가 권력을 쥐고 있는 건 아닙니다. 그 정도 위치로는 대표님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솔직히 그 양반 정치 생명을 걸어도 쉽지 않은 일인데, 고작 5억 원에 그런 모험을 하겠습니까?”

일명 윤은영 사태는 건우가 대중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지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였다.

언젠가 인기가 떨어져 대중들의 관심이 줄어든다면 모를까 지금 당장은 누구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위치에 있다.

“그건 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볼 때 저 사람들은 뭔가 단단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표님은 그냥 학원 원장이 아닙니다. 그런 위치는 이미 훌쩍 넘어서고도 남았죠. 그런데 다른 학원 원장들 눈에는 그렇게 안 보이나 봅니다. 그냥 자기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학원 원장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뻔한 일에 박유하 이사가 동참하고 있는지 의문이네요. 동참하고 있다기보다는 주도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상당히 영리하다고 소문난 사람인데 왜 이런 자충수를 두고 있는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건우가 보기에도 이번 일은 굉장히 어리숙했다.

“조급함이 원인이 아닐까요? 한때 학원 순위 1위를 넘보던 곳이었는데, 초이스 에듀의 등장으로 여러모로 타격이 크다고 합니다. 세계교육 매출의 50% 이상을 차지하던 인터넷 동영상 강의는 예년과 비교해 1/4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게다가 기가 싱크빅의 MIT 출신 강사인 하도훈 씨의 인기도 꽤 괜찮다고 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비슷한 매출을 기록했던 기가 싱크빅과의 차이도 크게 벌어졌습니다.”

“맞습니다. 솔직히 하도훈 선생이 대표님 강의 실력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라지만, 그래도 MIT출신의 유학파라는 이름값이 꽤 큰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워낙 학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라 아닙니까? 우리 학원에 등록하지 못한 학생들의 상당수가 기가 싱크빅으로 갔다고 보면 될 겁니다. 같은 유학파이니 뭔가 있지 않을까 기대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리고 박유하 이사가 조급할 수밖에 없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제가 알아본 바로 박유하 이사는 세계교육에 만족할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사생아라는 이유로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엄청난 구박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 유년시절을 보내서 그런지 성격이 편협하고 욕심이 많다는 평가입니다. 열등감도 상당하고요.”

“어쩐지 음침해 보이더라니.”

“그래도 능력은 있어서 쓰러져가던 세계교육을 다시 살려냈고, 그 일 때문에 그룹 본사에도 평이 좋습니다. 박 이사의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사촌들도 그리 능력이 뛰어나고는 보기 힘든 상황. 잘만하면 본사로 입성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겠죠.”

“그런데 진짜 박유하 이사가 사생아였어요? 그럼 재벌가에서 볼 수 있는 뻔한 스토리 중 하나겠군요. 어릴 때 받았던 서러움으로 열등감에 똘똘 뭉친 주인공. 그 아픔을 되갚아주기 위해 복수의 칼날을 갈아왔다. 이거 흥미진진한데요. 스파이 물에 재벌 이야기가 짬뽕 된 드라마인가요? 아니 그런데 형님은 그런 중요한 사실을 제게 말씀 안 해주셨습니까?”

“안 팀장. 네가 대표님이야?”

“그건 아니지만, 이래 봬도 제가 대표님의 왼팔 아닙니까? 하하하.”

“왼팔은 무슨. 왼쪽 새끼손가락에 박힌 가시겠지.”

톰과 제리처럼 두 사람은 또다시 티격태격이다.

“하하하. 두 분은 갈수록 친해지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제 생각도 두 분과 비슷합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원장이 강 의원에게 뇌물을 건네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놨으니 언론에 풀기라도 해야 하나요?”

“아니요. 그건 좀 위험부담이 큽니다. 일단 그냥 작은 과일 박스를 건네받는 장면만 찍었으니 거기에 돈이 들어갔는지 과일이 들어갔는지 우리가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원장이라면 모를까 굳이 강 의원하고 트러블을 일으킬 필요가 있을까요? 이번 건은 훗날을 위해 그냥 뻥카로 가지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뻥카요?”

“네. 그냥 과일박스 건네는 사진밖에 없지만, 마치 더 자세한 사진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는 겁니다. 분명히 유용하게 쓰일 날이 올 겁니다. 아니라도 보험으로 가지고 있는 게 좋습니다.”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군요. 그럼 이번 건은 차 팀장님 말씀처럼 하겠습니다. 그리고 차 팀장님.”

“네. 대표님.”

“지금까지 제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너무 잘해주고 계십니다. 큰 도움이 되네요. 앞으로도 계속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잘 부탁이라니요. 별말씀을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 하는 것뿐입니다.”

***

“결국 다들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이 말씀입니까?”

“그렇소. 박 이사. 면목없지만 최건우 대표에 대한 이야기만 꺼내면 다들 쉬쉬하는 분위기가 된다오. 괜히 욕심부리며 무리한 청탁을 하다가 아까운 라인이 날아간 사람도 꽤 있소. 내가 생각할 땐 최 대표는 우리가 생각하던 그런 만만한 사람이 아닌 것 같소.”

“우리가 생각했던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수준이 높아봐야 학원 원장 아닙니까? 최건우나 우리나 얼마나 차이가 난다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누가 들으면 어디 재벌가 적장자라도 되는 줄 알겠습니다.”

일의 진행이 뜻대로 되지 않자 회의 분위기가 지난번과 달리 상당히 경직되어 있었다.

“그런 말이 아니잖소.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공무원뿐만 아니라 여당 실세라고 불리는 사람까지 주저하는 모습이란 말이오. 국민들로부터 받는 신뢰가 그만큼 높다는 이야기 아니겠소? 우리가 쉽게 찍어누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소.”

“그럼 이대로 당하고만 계실 겁니까? 가만히 있다가 학원이 망하고 길바닥에 나앉아야 정신을 차릴 수 있으십니까? 어떻게 그런 일 하나 제대로 못 하는지….”

“으흠. 그러는 박 이사는 대체 뭘 했단 말이오? 우리도 면목이 없긴 하지만, 박 이사도 딱히 우리를 나무랄 처지는 아니잖소. 정 뭣하면 세계그룹에 부탁을 해보든지. 들어줄까 모르겠지만.”

박유하 이사가 빡빡하게 굴자 그 모습이 아니꼬워진 조 원장이 그의 치부를 건드렸다.

말은 세계그룹에 부탁해보라고 이야기했지만, 사생아라서 본사가 도와주지도 않느냐며 비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 원장님. 그 말씀은 지금 저랑 한번 해보자는 뜻입니까?”

“어허. 조 원장은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나? 다 같이 잘해보자고 만난 자리에서. 그만하시게. 서로 얼굴 붉혀봐야 뭐가 좋다고. 이보게, 박 이사. 우리가 큰소리친 만큼 성과를 못 보여줘서 미안하네. 하지만 박 이사가 말한 것처럼 그렇다고 그냥 손 놓고 당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정관계 인사의 도움 없이 우리 힘으로만은 쉽지 않습니다. 이미 겪어보셨지 않습니까?”

“그러니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겠나? 우리가 가지고 있던 라인은 대부분 막혔네. 믿을 건 박 이사밖에 없네.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저도 이번 일을 겪으면서 제가 너무 조급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말씀을 들어보니 최건우를 너무 무시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된 바에 괜히 서두르는 것보다는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는 게 낫습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일단은 가볍게 잽을 날리며 국민들의 최 대표에 대한 신뢰부터 조금씩 무너뜨릴 필요가 있습니다.”

정 원장의 중재에 회의장 분위기가 다시 차분해졌다. 잠시 흥분했던 박유하 이사도 침착함을 찾았다.

“어떻게 말인가?”

“지금 당장은 저도 묘책이 없습니다. 일단은 계속 언론플레이를 하는 수밖에요. 그래도 독점을 막아달라는 진정서에 서명한 학원이 적지는 않으니 그걸 언론에 풀어서, 어쩌면 최건우가 욕심 많은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대중들에게 심어줘야 합니다. 그게 시작입니다.”

“그래. 박 이사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우리는 따라야지. 혹시 다른 좋은 방법이 떠오르면 주저하지 말고 말하라고. 언제든지 도와줄 테니까.”

“당연히 그러셔야죠. 아니면 우리 전부 학원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릅니다.”

***

[초이스 에듀 최건우 대표의 욕심은 어디까지?]

[최건우 대표. 인터넷 온라인 시장 점유율 80% 넘어. 능력인가, 탐욕인가?]

[초이스 에듀 때문에 죽어나는 동네 보습학원들.]

“쯧쯧. 언론플레이는 안 통한다니까 자꾸 이딴 쓰레기 기사를 내보내고 그래.”

“그러게요. 학습효과가 없나 봅니다. 닭대가리도 아니고.”

“그래도 가랑비에 옷 젖을 수도 있으니 바로 대응 기사 내보내.”

“알겠습니다.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초이스 에듀의 독점에 대한 비난 기사가 올라와서 관심을 끌었지만, 그 기사에 달린 댓글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니들이 무능력해서 사람들이 안 보는 걸 가지고 독점이라니, 그게 말이 되냐. 능력이 안 되면 학원을 접어야지 왜 국가보고 해결해달라고 하지? 우리나라는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다.’

‘이건 말이 안 된다. 이게 말이 되면 영화 관객 수 2,000만 명이 넘는 것도 독과점이다. 나중에 관람객도 제한할 거냐, 무식한 놈들아.’

라는 식의 반응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초이스 에듀에 대한 새로운 기사가 하나 올라왔다.

[초이스 에듀. 준호텔급 급식 결정.]

[단돈 천 원에 학원에 등록한 모든 학생들에게 저녁 제공하기로 한 최건우 대표.]

[학생들에게 받은 것은 다시 돌려주는 것이 도리다.]

[유명 호텔 주방장 전격 스카우트. 급식의 품격을 바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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