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122화 (122/256)

제122화

“대체 무슨 일이지. 이 시간에 갑자기 호텔이라니.”

박유하 이사는 지금 벼랑 끝에 몰린 상황이었다.

쥐도 구석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속담이 있듯 온갖 비열한 수단으로 지금의 위치에 올라선 그라면 이대로 무너지지는 않을 거라는 게 차지훈의 분석이었다.

안심할 수 없다는 판단에 당분간은 박유하 이사와 그의 수하인 정도식 실장을 밀착 마크하라고 지시했다.

박유하 이사의 미행을 맡은 고자성은 저녁 시간에 갑자기 서울의 외곽에 위치한 호텔로 들어가는 그를 보며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Rrrr

- 네. 자성이 형님.

고자성은 곧바로 윤종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 종수야. 방금 박유하 이사가 XX호텔로 들어갔거든. 뭐 하는지 알 수 있을까?”

- 잠시만요. XX호텔요? 어디 보자. 방금 예약자 명단을 확인해봤는데, 12XX호에 예약을 해뒀네요. 여자라도 만나나.

“그럴 수도 있지. 혹시 지금 바로 호텔 CCTV로 확인 못 하나?”

- 에이. 잘 아시면서. 힘들어요. 그런 건 인터넷으로 해킹이 거의 불가능해요. 된다고 해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요.

“역시 그렇지? 이것 참. 올라가서 기다릴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볼일 끝나고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미국 정보국처럼 인공위성을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전처럼 국가 시스템을 이용할 수도 없다.

이럴 땐 전통적(?)인 방법이 최고다. 무작정 잠복하고 기다리기.

- 그래야죠. 아니면 영화처럼 자성이 형님이 호텔 벽을 타고 12XX호 창문에 도달하시면 됩니다. 그럼 어떻게든 방법이 생기겠죠.

“아서라. 그랬다간 웬 미친 인간이 호텔 벽을 타고 있다고 바로 신고 들어간다.”

- 그건 그렇죠? 옆에서 우현이가 자꾸 침투해야 한다고 그래서. 하하하.

“미친놈. 그놈 또 통제실에 있어? 수능 출제 경향이나 수시모집 분석은 안 해도 된대?”

- 자기는 알아서 잘하고 있으니 얼른 미션 임파서블의 톰 크루즈처럼 빌딩을 오르라고 합니다. 오버.

“지랄 쌈 싸먹는 소리 하고 있네. 자꾸 헛소리하면 우현이 자식 아파트에 침투해버린다고 전해라. 오버.”

- 어차피 대부분 숙식을 학원에서 해결하고 있기 때문에 아파트에 침투해도 만날 일은 없다고 전하랍니다. 오버.

“미친. 닥치고 그냥 끊자. 변동 사항이 있으면 다시 연락할게.”

-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이것 참 뭔가 마음에 걸리는데 뭔지 모르겠단 말이야. 일단 로비에 올라가서 박유하 그 자식이 누구랑 나오는지 그거나 확인해야겠다.”

***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늘도 잘 모르는 게 있어서 찾아왔어요. 시간 괜찮으시죠?”

“아! 그래. 지영이구나. 녀석 요즘 정말 열심히 하네.”

“그럼요. 이제 고등학생인데 열심히 해야죠.”

“하하하. 녀석도 참. 다른 아이들은 고등학생 아닌가? 다들 너처럼만 열심히 하면 정말 좋을 텐데 말이야.”

얼마 전부터 초롱초롱한 눈으로 수업에 열중하고, 쉬는 시간이면 항상 모르는 걸 들고 질문하러 오는 지영이라는 학생이 하도훈은 정말 기특했다.

체형도 성숙하고 미인형이라 유혹도 많을 텐데 흔들림 없이 묵묵하게 공부만 하는 성실한 학생이었다.

“에이. 저도 놀고 싶은 거 참고 있는 거예요. 열심히 공부해 대학 가면 그때 놀아도 안 늦잖아요.”

“그래. 지금처럼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에 꼭 갈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오늘은 어떤 문제가 궁금해서 찾아온 거야?”

“이 문제요. 이게 잘 이해가 안 가더라고요.”

지영은 품에 들고 있던 참고서를 꺼내 하도훈에게 내밀었다.

“어디 보자. 생물이네. 그림은 세포 A~C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나타낸 것이다. A~C는 각각 대장균, 동물의 간세포, 식물의 엽육 세포 중 하나이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만을 <보기>에서 있는 대로 고른 것은? 이 문제가 헷갈렸어?”

“네. 선생님.”

“그렇게 어려운 문제는 아닌데. 네가 뭔가 착각한 것 같네. 대장균은 핵이 없고 세포벽만 있어. 그리고 동물 세포는 세포벽이 없어. 엽육 세포는 미토콘드리아가 있기 때문에 산화적 인산화가 일어나거든. 그러므로 A가 대장균, B가 엽육 세포, C가 간세포야. 이건 원핵세포와 진핵 세포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를 묻는 질문인데, 귀찮더라도 기본 성질은 외우고 있으면 좋아.”

“아. 그렇군요. 매번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이것 좀 드세요.”

“응? 박카스 아니야?”

“네. 별거 아니지만, 이거 드시고 힘내시라고요.”

“와. 이거 고마운걸. 고맙게 잘 마실게.”

지영은 그의 설명을 이해했는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박카스를 꺼내 하도훈에게 수줍게 건넸다.

요즘 학생들은 학원 강사를 선생이 아니라 서비스업 종사자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지영은 달랐다.

하도훈은 오랜만에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얼굴에 푸근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리고 선생님. 부탁이 있어요.”

“부탁? 그게 뭔데?”

“선생님 전화번호 좀 알 수 있을까요? 아니면 바나나톡 아이디라도.”

“전화번호나 바나나톡? 그건 갑자기 왜?”

“집에서 공부하다 보면 가끔 막힐 때가 있거든요. 그럴 땐 어떻게든 알고 싶은데 마땅히 물어볼 사람도 없어서 항상 아쉬웠어요. 모르고 넘어가면 답답해서 잠도 안 와요. 그리고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하고 다르게 과학 말고 다른 과목도 다 잘하시잖아요.”

“그래서 모르는 게 있으면 전화나 문자로 물어보고 싶다? 음. 어쩌지 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스타일인데.”

“히잉.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앞으로도 계속 모르는 문제 때문에 잠을 설치는 수밖에요.”

“하하하. 농담이야. 지영이 너처럼 열심히 하는 학생이 모르는 문제 때문에 잠을 설치면 곤란하지. 언제든 괜찮으니까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봐. 번호는 010-2XXX-1234야.”

어쩌면 영악한 행동이지만 공부를 하려는 의지가 대견해서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우와! 감사해요. 선생님.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그럼 전 다음 수업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먼저 가볼게요.”

“그래. 하지만 너무 무리하면서 공부하면 안 돼. 벌써부터 페이스 올렸다가 막상 힘을 내야 할 고3 때 지쳐버리면 그것도 곤란해. 알았지?”

“네. 꼭 명심할게요.”

하도훈이 자신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자 지영은 더욱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감사인사를 했다.

박유하 이사의 지시사항을 무사히 완수했다는 안도감에 절로 나오는 기쁨의 표정이었지만, 하도훈이 그 사실을 알 수는 없었다.

“녀석 참. 그렇게 좋을까?”

“하 선생님. 방금 그 여학생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주신 건가요?”

그런데 옆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강사 중 한 명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도훈에게 다가와 물었다.

“네.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고 싶다고 하는데 거절하기 좀 그렇더라고요.”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그래도 조심하세요.”

“네? 뭘 조심해요?”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요즘 애들 정말 영악해요. 연락 주고받다가 친해지면 밥 사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그 정도에서 그치면 다행인데, 은근히 유혹하는 애들도 있어요. 멋모르고 그런 유혹에 넘어갔다가 합의금만 왕창 날린 강사도 몇몇 있어요. 그러니 항상 조심하세요.”

“에이. 지영이는 그럴 아이가 아니에요.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인데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안 만나면 괜찮지 않을까요? 문자로 질문만 주고받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건너편 강사의 조언도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처음 학원 강사를 시작한 하도훈은 그런 말을 주의 깊게 듣기에 의욕이 넘쳤다.

“그래요. 사실 그럴 일이 일어날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냥 얼마 전에 가까운 사람이 그런 일을 당해서 제가 좀 오버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정말 걱정해서 하는 말이니 너무 고깝게 듣지는 마시고요.”

“그럼요. 전혀 고깝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생님. 제가 강사 생활을 하는 동안 얼마나 고마운 조언을 많이 해주셨는데요. 조언해주신 것처럼 개인적으로 만나고 그런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는 마세요.”

***

냐톡!

[선생님. 오늘 풀이해주신 2번 문제가 잘 이해가 안 가요. ㅠ]

[지면에서 물체의 역학적 에너지는 처음 높이에서의 위치 에너지와 같아. 역학적 에너지는 위치 에너지 + 운동 에너지거든. 그런데 처음 높이에서는 운동 에너지가 0이니까 역학적 에너지 = 0 + 위치 에너지가 되는 거야.]

냐톡! 냐톡!

[선생님. 화학은 너무 어려워요. ㅠ 오늘 수업은 절반도 알아듣기 힘들었어요. 전 과학에 소질이 없나 봐요. 히잉.]

[그래도 과학에서 2과목은 무조건 선택해야 하는 건 알지? 포기하면 안 돼. 지영이는 똑똑하니까 조금만 공부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믿어.]

[히히. 믿어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오늘 마지막에 설명해주신 문제 풀이는 정말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아, 그거? 그건 탄소 동소체의 구조와 성질을 제대로 이해해야 풀 수 있는 문제야. 다이아몬드와 동소체인 탄소 나노 튜브는 탄소 원자 1개당 3개의 탄소 원자들이 공유결합을 형성하여 정육각형 모양으로 연결된 원통 모양을 하고 있거든. 그 물질에서는 공유결합에 참여하지 않은 원자가 전자 1개가 자유 전자와 같은 역할을 하므로 전기 전도성을 가지게 되는 거야.]

[우엑. 그거 한국어 맞아요? 그런데 왜 전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죠? 역시 화학은 너무 어려워요. 으흑 ㅠㅜ]

냐톡!

[선생님. 전 역시 과학 바보인가 봐요. 화학뿐만 아니라 생물도 도저히 모르겠어요. 히잉.]

[뭐가 이해가 안 가는데?]

[오늘 나왔던 문제 중에 신경계 어쩌고 하는 부분 있었잖아요. 거기요.]

[아! 그 문제? A는 운동 뉴런, B는 교감 신경의 신경절 이후 뉴런, C는 감각 뉴런이야. 자율 신경은 운동 뉴런으로만 구성되어 있거든. (가)는 척수 반사이므로 중추는 척수야. 그리고 교감 신경의 신경절 이후 뉴런 말단에서는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거든. 그러니 교감 신경이 흥분하면 소화액 분비가 억제될 수밖에 없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선생님 항상 감사해요. ♡]

평범한 문자였지만 지영의 반응이 처음보다 살가워졌다는 걸 하도훈은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눈치는 챘다. 하트는 물론이고 ‘선생님이 최고다’, ‘선생님 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 ‘사랑해요. 선생님’ 같은 문자가 계속 날아오는 데 그걸 눈치채지 못하면 그게 더 이상하다.

그렇지만 그런 문자가 전부였다. 지영은 문자 외에 문제가 될만한 행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처음엔 조금 불편했던 하도훈도 지영의 행동에 익숙해져, 서로 친해져서 그렇다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

“어떻게 됐어? 시킨 대로 잘하고 있어?”

오랜만에 만난 박유하 이사가 지영을 보며 다그치듯 물었다. 몸은 괜찮지, 아기는 잘 크고 있는지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눈치였다.

“네. 무슨 일인진 몰라도 이사님이 하라는 대로 전부 했어요.”

“그래? 하루에 한 번 이상은 무조건 문자를 주고받은 거지?”

“물론이에요. 그리고 며칠 전에는 문자에 하트도 자연스럽게 같이 보냈어요.”

“그래서 하도훈이 뭐라고 그러디?”

“그냥 앞으로도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라고 그렇게만 답문이 왔어요.”

“흠…. 혹시 너를 뭔가 느끼하게 바라보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고? 흑심을 품은 듯한 그런 행동 말이야.”

“평소보다 가까이 밀착해서 질문을 해봤는데도 별다른 반응은 없었어요.”

“그건 좀 아쉽네. 네게 관심이 보였으면 일이 훨씬 쉽게 풀렸을 텐데. 물론 아니라고 해도 크게 상관은 없지만.”

“그런데 이사님.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런 일을 시키시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하면 정말 이사님에게 도움이 되는 건가요?”

“물론이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일단 어머님에게 네가 임신한 사실을 알려.”

“네? 엄마가 알면 난리가 날 텐데요? 이사님이 아이 아빠라는 사실을 알면 가만있진 않을 거예요.”

“당연히 그렇겠지. 세상 어느 어머니가 미성년자 딸이 임신했는데 잘했다고 칭찬하겠어. 그러니까 아이 아빠는 내가 아니라 하도훈이라고 하는 거야. 그것도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라 성폭행을 당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이야기해.”

“네에? 어떻게 그래요. 하도훈 선생님은 알게 된 지 한 달도 안 되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성폭행이라니….

깜짝 놀라 벌어진 지영의 입이 다물어질 줄 몰랐다.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지시였다.

“그건 걱정할 것 없어. 사람들은 두 사람이 언제 알게 되었는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을걸? 학원 강사가 미성년자를 성폭행해서 임신까지 시켰다. 전부 그 말 하나에만 집중해서 냄비처럼 금방 끓어오를 거야. 그렇게만 하면 나머지는 내가 전부 알아서 할게.”

“하지만. 하지만 나중에 아기를 낳아서 검사를 해보면 알게 되잖아요.”

“상관없어. 그때쯤이면 상황은 종료됐을 거야. 이미 미성년자를 성폭행한 인면수심의 학원 강사라고 전국에 알려졌을 테니까. 나중에 누가 추궁하면 넌 그냥 임신한 사실이 너무 무서워 평소 알고 지내던 하도훈이 생각났다. 죄송하다. 그렇게만 말하면 돼. 미성년자라서 제대로 처벌받을 일도 없으니 안심해.”

“하지만 이사님. 아무리 그래도….”

“내가 이야기했지. 나를 돕는 일이라고. 전에 네가 그랬잖아. 나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며? 그 말은 전부 거짓말이었어?”

“아니에요. 할 수 있어요. 이사님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그래. 지영아. 그래야지. 그리고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절대, 절대 내가 네 아이의 아빠라는 사실을 밝히면 안 돼. 그럼 너와 난 완전히 끝장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하늘이 두 쪽 나도 이사님 이야기는 절대 꺼내지 않을게요. 저를 믿어주세요.”

반드시 해내겠다고 다짐하는 지영의 눈빛은 마치 자살테러를 각오한 광신도의 모습과 흡사했다.

박유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지영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어줬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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