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하도훈 선배라고 하셨는데, 두 분은 친한 사이입니까?”
“네. 제가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도움을 주신 선배였습니다. 같이 생활도 많이 했고, 그래서 도훈 선배의 가족을 제외하면 선배 인성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라고 자부합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어떻게 범인이 아니라고 확신하십니까?”
“제가 몇 년간 지켜본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자관계에 있어서 누구보다 담백한 선배였습니다. 절대 그런 일을 벌일지 않을 사람이라고 확신합니다.”
하도훈에 대한 믿음도 믿음이지만, 차지훈이 조사해온 내용이 건우에게 확신을 줬다.
“피해자 당사자가 이미 자신을 성폭행한 범인으로 하도훈 씨를 지목했습니다. 그런데도 확신을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물론입니다. 저는 선배를 절대적으로 신뢰합니다. 가족들을 위해 자신의 커리어를 모두 포기하고 귀국한 사람입니다. 그런 허튼짓을 할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여학생이 거짓말을 한다는 이야기입니까?”
“네. 제가 알아본 바로는 그 여학생은 임신 5개월째라고 합니다. 그런데 선배는 한국에 귀국한 지 이제 4개월이 조금 넘었습니다. 경찰은 그런 기초적인 조사도 하지 않고 선배를 체포했습니다. 오직 피해자의 진술에만 의존한 채 말이죠. 더욱 놀라운 것은 검찰이 곧바로 체포 영장을 청구했고, 법원은 그 영장을 승인했다는 사실입니다. 정확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고, 피해자 진술에만 의존해서요.”
“하지만 두 사람이 정겹게 나눈 바나나톡 메시지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냥 모르는 문제에 대해 질문하고 거기에 대해 성실하게 답변한 내용이 전부입니다. 거기에 하트가 들어갔다고 해서 큰 의미부여를 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요즘 여고생들에게 그런 이모티콘은 일상용어나 마찬가지니까요. 오히려 묻고 싶습니다. 바나나톡 메시지에는 성폭행에 대한 그 어떤 내용도 없는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선배를 체포한 걸까요?”
“그만큼 범죄 입증의 자신감의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입증하지 못할 겁니다.”
“최 대표님. 제가 생각할 때 최 대표님은 지금 매우 위험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민들에게 받는 인기를 가지고 우리나라 법질서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거든요. 그냥 기자 회견을 열어서 ‘나는 선배의 무죄를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행동 아닙니까?”
기자들은 건우를 비난하듯 거세게 몰아붙였다. 반짝 인기에 편승해 감히 국가 공권력에 도전한다고 건방지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기자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선배의 무죄를 믿습니다. 하지만 말만 앞세우지 않겠습니다.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제 모든 것을 걸겠습니다.”
“모든 것이라고 하면, 어떤 걸 의미하는 건가요?”
“만약 선배의 유죄가 밝혀지면 제가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국가에 기부하겠습니다.”
“학원을 포함한 모든 재산 말인가요? 학원 가치까지 포함하면 재산이 이미 천억 원이 넘는 것으로 아는데요.”
“네. 물론입니다. 그렇다고 여론몰이를 해서 유죄인 선배를 무죄로 만들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냥 도훈 선배가 무죄인지 유죄인지 확실해질 때까지 마녀사냥을 자제해달라고 부탁드리는 겁니다.”
“지금 언론이 하도훈 씨를 마녀사냥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짜증이 섞인 신경질적인 질문이었다. 언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발표 순서도 기다리지 않고 무작정 던진 말이었다.
“오히려 제가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도훈 선배의 유죄를 확신합니까? 여러분의 성급한 판단이 앞길이 창창하던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트릴 수 있다고 생각 안 하셨습니까? 한 남자의 인생이 걸렸고, 또한 방금 제 인생도 걸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도훈이라는 남자가 유죄라는데 인생을 거실 수 있습니까?”
불편한 침묵이 강의실 전체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나는 내 인생을 걸었다. 너는 네 인생을 걸 수 있느냐.’
이 뒤에 생략된 말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쫄리면 뒈지시든지’가 아닐까?
기자들도 쉽게 반박하지 못했다.
경찰의 발표를 믿고 그대로 기사화했을 뿐, 그 발표가 진실인지 아닌지 사실관계를 확인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건우의 말처럼 여학생은 임신 5개월인데 하도훈이 귀국한 지 4개월밖에 안 됐다면 경찰의 발표가 거짓일 확률이 높다.
아무리 전 재산을 걸었다고 해도 그 정도 모순이면 무죄를 확신했으리라. 그러니 저렇게 당당하게 기자회견을 하고 있으리라.
기자회견 내내 반감을 보였던 기자들은 행여나 건우의 눈과 마주칠세라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지금 우리에게 인생을 걸라고 강요하시는 겁니까?”
중년 나이의 한 기자가 목소리를 쥐어짜며 물었다.
“아닙니다. 그런 걸 바란 게 아닙니다. 조금만 신중해 달라는 겁니다. 오늘 기자회견 이후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그 어떤 언론플레이도 하지 않겠습니다. 어떤 압력도 행사하지 않겠습니다. 경찰을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니 국민 여러분과 이곳에 참석하신 기자분들도 선입견 없이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고 조사 결과를 기다려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건우가 이렇게 강경하게 나서지 않는다면, 나중에 하도훈이 무죄를 받는다고 해도 대중들은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관심이 없다면 다행이다. 꽤 많은 사람들은 하도훈을 여전히 미성년자 성폭행범이라고 기억할지도 모른다. 억측이 아니라 예전 삶에서 건우가 직접 겪었던 일들이다.
하지만 건우의 개입으로 일명 하도훈 사태의 결말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
DXX 사이트 모 게시판
[님들. 최건우 기자회견 봤음? 패기 오지던데 어떻게 생각함?]
- 최건우가 미쳤다고 본다. 이번 기자회견으로 경찰, 검찰, 법원에 언론까지 적으로 뒀다. 지가 대기업 총수도 아니고 무슨 깡인지 모르겠음.
└ 동감합니다. 기자들은 모르겠고 경찰, 검찰, 법원 지금 분위기 장난 아니라던데.
└ ㅋㅋㅋ 최건우 그 자식 잘난 척하더니 결국 이렇게 패가망신하는 건가요?
└ 패가망신? 개뿔. 얘들아. 최건우가 너희처럼 닭대가리인 줄 알아? 저거 절대 감정적으로 움직인 거 아니야. 머리가 얼마나 좋은 놈인데. 이미 무죄라는 확신이 생겼으니까 저러는 거지. 하여간 멍청한 놈들.
└ 기자회견 봤는데 패기에 소오름.
└ 계산이니 어쩌니 하는 사람들 있는데, 너흰 네 친구를 위해서 전 재산 걸어본 적 있어? 전 재산은커녕 돈 천만 원도 안 걸어봤을 봤을 놈들이 지랄들 해요.
- 솔직히 개 멋지더라. 근데 좀 짱났음. 머리 좋고, 얼굴 잘생기고, 키 크고, 능력 있고, 가정적이고, 기부도 잘하는데…. 의리도 있네. 젠장.
└ 저게 22살이 할 수 있는 일인가? 놀랍다.
└ 22살이니까 할 수 있는 패기지. 나이 들면 생각이 많아져서 저런 거 절대 못 함.
└ 내 생각엔 최건우가 전 재산 걸 때 이미 게임 오버. 그만큼 확신이 있다는 이야기지. 동생들을 그렇게 아끼는 애가 함부로 전 재산을 걸겠냐?
- 임신 5개월인데 그때 하도훈은 미국에 있었다. 그 여자애 최소 성모마리아. 그럼 뱃속 아기는 예수님인가? ㅋㅋㅋㅋㅋ
└ 신성모독은 하지 맙시다.
└ 지금 경찰, 검찰, 법원 전부 난리 남. 들리는 말로는 수사팀 싹 다 교체된다고 합니다.
└ 헐. 대박! 최건우 또 한 건 하네. 말 한마디에 수사팀까지 바꾸는 포스.
└ 몰랐냐? 원래 최건우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였어.
***
“너희도 내가 한 기자회견 봤지?”
“응”
“그래.”
“미안하다. 너희와 상의 없이 내 마음대로 그런 결정을 내려서.”
기자회견을 마친 건우는 동생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부터 했다.
만약 이번 일이 잘못되면 건우뿐만 아니라 동생들에게도 심각한 영향을 준다.
최악의 경우 한국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동생들에게 어떤 동의도 없이 혼자 결정을 내렸다.
“아니야. 형이 아니었으면 우린 이미 길거리에 나앉았을 텐데 뭐. 그리고 형의 능력으로 이뤄낸 재산이잖아. 그 돈을 구워 먹든 지저 먹든 그건 형이 결정할 일이지 우리가 상관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해. 그리고 도훈이 형 일이잖아. 내가 형이었어도 그런 같은 결정을 내렸을 거야.”
“난 큰형이 존경스러워.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고 해도 전 재산을 걸면서까지 믿음을 보여주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형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결정을 내린 거잖아. 내가 형이라면 솔직히 고민 많이 했을 것 같아. 그래서 더 대단해 보여.”
“그런데 큰오빠.”
“그래. 막내. 뭐, 궁금한 거라도 있어?”
“혹시, 정말 만약에 도훈이 아저씨가 유죄면 말이야. 그래서 오빠 재산을 모두 기부하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되는 거야? 혹시 뿔뿔이 흩어지는 거야?”
“아니. 그럴 일은 절대 없어. 만약 그런 일이 생겨도 이 오빠가 그렇게 무능력한 사람은 아니랍니다. 우리 막둥이 시집갈 때까지는 네가 싫다고 해도 나랑 같이 살아야 하니까 우리가 헤어질 걱정은 하지 마.”
“그럼 됐어. 우리 가족만 같이 살 수 있으면 난 어디든 좋아.”
은우가 건우의 결정을 완전히 이해하긴 아직 어린 나이였다. 그녀는 하도훈의 유죄 여부보다 가족이 계속 같이 살 수 있느냐가 더 중요했다.
“아! 아쉽다. 막둥이랑 따로 살 수 있는 기회였는데.”
“쳇. 됐거든. 나도 작은오빠랑은 같이 살기 싫거든.”
“그래? 그럼 오늘부터 따로 살까? 외숙모가 항상 그러셨잖아. 은우 같은 딸 있으면 참 좋겠다고. 이참에 외삼촌 집에 가는 게 어때? 혼자 가기 무서우면 내가 데려다 줄게.”
“싫거든. 나가려면 작은오빠나 나가.”
“내가 왜? 나가려면 한 살이라도 어린 네가 나가야지.”
“나이가 뭔 상관? 집 주인 마음이지. 큰오빠한테 물어볼까?”
동우가 슬쩍 눈치를 봤다.
건우의 눈빛을 보니 물어보나 마나 쫓겨나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이럴 땐 작전상 후퇴다.
“아니. 그냥 같이 살자. 한 가족인데 계속 같이 살아야지. 암!”
***
[유학파 출신 학원 강사 A씨 그는 과연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최초 뉴스를 통해 A씨가 미성년자를 성폭행하고 임신시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이 사건은 학원 강사가 공부를 미끼로 여고생을 꼬여내서 성폭행한 아주 죄질 나쁜 범죄라고만 생각했었다. 너무 뻔했다.
학원 강사, 학생, 미성년자, 임신. 누가 봐도 A씨가 가해자처럼 보였다. 언론과 여론도 모두 A씨를 가해자로 몰았다. 범죄 사실이 확실히 입증되기도 전에 여론 재판은 이미 끝난 셈.
그런데 초이스 에듀 최건우 대표의 충격적인 기자회견이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사회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뒀고, 전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최 대표가 왜 이런 위험한 기자회견을 자처했을까? 단순히 가재는 게 편이라고 학원 강사라서 옹호해주는 것일까? 아니면 미국에서 생활하며 신세를 진 일이 있어서?
이번 기자회견은 일종의 프로파간다(어떤 것의 존재나 효능 또는 주장 따위를 남에게 설명하여 동의를 구하는 일이나 활동)나 마찬가지라며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고, 미국 유학 시절 최 대표가 저질렀던 실수를 빌미로 A씨가 협박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추측도 조심스레 나오고 있다.
여러 가지 추측이 어떻든 최 대표가 단순히 비슷한 처지의 학원 강사라거나 유학시절 절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걸고 A씨 편을 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일반적인 사건의 용의자도 아니고 미성년자 성폭행 사건의 용의자이다. 아무리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최 대표라고 해도 이런 사건에 잘못 개입했다가는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을 만큼 민감한 사안이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최 대표의 기자회견으로 A씨에 대한 맹목적인 비난은 잦아들었고, 대다수 사람들은 일단 수사과정을 지켜보자는 신중론으로 돌아섰다는 사실에 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보며 최 대표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얼마나 대단한지 또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이번 사태는 단순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명망 있는 젊은 실업가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A씨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번 사태의 결론은? 둘 중 하나다. A씨가 유죄냐 아니냐. 표현을 살짝 바꾸면 피해자 여고생의 주장이 사실이냐 아니냐 여부에 따라 최 대표가 객기를 부린 것이 될지, 의리 있는 행동이 될지 결정 나게 된다.
경찰 발표를 기다리기 힘들어 경찰서와 기가 싱크빅, 그리고 피해자가 다니고 있는 학교를 중심으로 열심히 조사해봤다.
조사 결과, 이번 사건에 허점이 너무나도 많았다. 지금부터 그 허점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도록 하겠다.
첫째, 귀국 시기와 임신시기가 일치하느냐는 점이다. 실제로 A씨는 2015년 12월 16일에 한국에 귀국했다. 지금은 2016년 4월이다. 임신 5개월은 시기적으로 문제가 있다.
억지를 부려 도착하자마자 피해자를 만나 성폭행을 했다면 5개월도 가능하다. 정확한 임신 시기는 오차가 생길 수 있으니.
그러나 A씨가 실제로 학원 강사를 시작한 것은 거의 두 달 뒤의 일이다. 만약 학원 강사와 학생으로 만난 뒤 일어난 일이라면, 시간상으로 임신 5개월은 불가능하다.
둘째, 피해자는 원래 세계교육이라는 학원에 다녔다. 기가 싱크빅으로 학원을 옮기기 전까지, 피해자는 중학생 시절부터 몇 년간 세계교육만 다녔다. 그런데 갑자기 한 달 전에 학원을 옮겼다.
물론 A씨의 협박으로 학원을 옮겼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서로 다른 학원에 다니던 두 사람이 어떤 계기로 친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경찰 발표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셋째, 두 사람이 나눈 바나나톡 내용이 너무나도 평범하다. 경찰에서는 수사에 혼선이 생긴다며 바나나톡 내용을 공개하기 거부했으나, A씨의 변호인 측에서 모든 대화 내용을 전격적으로 공개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도무지 성폭행 가해자와 피해자가 나누는 대화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대화상으로만 보면 피해자가 A씨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지, A씨는 강사로서 본분을 분명 지켰다. 물론 바나나톡 상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 진실은 알 수 없다.
지금까지 제시한 3가지만으로 무조건 A씨가 무죄라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아무리 성폭행 사건이 피해자의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해도 최소한의 확인절차도 거치지 않고 무작정 사람을 체포하고 성급하게 수사 발표를 한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성폭행당한 사람은 있는데 성폭행한 사람은 없는 묘한 상황이다. 임신은 했는데 물리적으로 A씨의 아이일 확률은 희박해 보인다.
과연 진실은 언제쯤 밝혀질지 모든 이목이 경찰의 새로운 조사 결과에 쏠리고 있다.
오늘뉴스 장소원 기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