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도훈이 형. 수고하셨어요. 자, 이거 먹어요.”
지영의 진술 번복으로 인해 하도훈은 구치소에서 풀려났다. 그 소식을 들은 건우는 반가운 마음에 직접 두부까지 사서 달려왔다.
사실 건우도 자신 때문에 이번 일이 벌어졌다는 생각에 마음고생이 심했었다.
“건우야. 바쁜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에이. 아무리 바빠도 형이 풀려나는 날인데 제가 직접 와야지. 그동안 힘들었지?”
“그래. 처음엔 솔직히 힘들긴 했어. 특히 기가 싱크빅이 계약을 해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 황당했어. 난 무죄가 분명한데,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상황. 미치고 팔짝 뛰겠다는 말이 이럴 때 나오는 건가 싶더라. 정말 내 심정 아무도 모를 거야.”
“알죠. 그 마음.”
“뭐? 네가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아?”
건우도 순간 뜨끔했다.
“그…그게. 그냥 형 마음을 알 것 같다는 말이지. 전에 내가 군 면제문제와 정신과 상담 이력으로 크게 곤란한 상황에 직면했었잖아. 그때 주변 사람들 시선이 정말 견디기 힘들었거든.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상황. 서서히 고립되는 느낌.”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생각해보니 너도 정말 힘들었겠다. 건우야. 정말 고맙다. 그런 외로운 상황에서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너뿐이었어. 심지어 내 동생도 ‘오빠, 정말 아니지?’라고 묻더라. 그런데 넌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믿어줬잖아. 네 전 재산까지 걸면서 말이야. 나라면 절대 너처럼 행동 못 했을 거야.”
“형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 내가 유학시절 가까이서 지켜봤는데 그걸 모를까? 왜 그때 기억 안 나? 애나라고 금발에 엄청 글래머였던 여학생. 형 좋다고 그렇게 매달렸는데도 여자 친구 있다며 단호하게 거절했잖아. 완전 스칼렛 요한슨 판박이 미녀가 대쉬해도 거절하는 사람이 성폭행이라니 그건 정말 말이 안 되지.”
“하하하. 애나를 기억하고 있었어?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나중에 후회하긴 했어. 내가 왜 그런 미녀를 마다했는지. 내가 정신이 나갔었나 봐.”
건우의 믿음에 하도훈도 농담을 던질 여유를 찾았다.
“그래요? 그럼 지금이라도 애나에게 연락해보지 그래요. 형이 부른다면 한국까지 날아올지도 몰라요.”
“아서라. 지금 난 여자라면 아주 치가 떨린다. 당분간 연애는 못 할 것 같아. 여자가 싫어. 무서워. 지영이 걔가 나를 그런 파렴치한으로 몰고 갈 줄은 생각도 못 했거든.”
“운이 없었다고 생각해. 그리고 형이라면 금방 극복할 수 있을 거야.”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데 형. 좀 이른 질문이지만 앞으로 어떡할 계획이야? 기가 싱크빅이 계약을 해지한 상황이라 당장 강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시 공부할 생각은 없어? 형이 할 생각이 있으면 내가 도와줄게. 나중에 성공한 다음에 갚으면 되잖아.”
무죄로 풀려났지만 하도훈에 대한 부채감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사양하련다. 아직 빚이 남아있어. 그걸 갚아야 하는데 공부는 무슨. 그리고 학원 강사를 해보니 생각보다 보람이 있더라. 생각 이상으로 적성에 맞는 것 같아. 지영이 일만 아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사람 일이 자기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말인데. 건우야. 혹시 너희 학원에 날 고용할 생각은 없어?”
“뭐?”
“용선재 대표님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어쨌든 날 믿어주지 않은 곳과 다시 일하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 너한테 받은 은혜를 이렇게라도 갚고 싶어. 너랑 나랑 가르치는 과목이 겹치니까 2호점이나 새로운 분점을 만들면 거기서 일하는 것도 좋을 것 같고. 네 생각은 어때?”
“진심이야?”
뜻밖의 제안이다.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기도 했다.
“그럼!”
“그럼 나야 좋지. 그렇지 않아도 나 혼자 너무 힘들었는데. 사실 이승훈 선생님과 윤은영 선생님 말고는 실력 있는 강사가 없어서 조금 아쉬웠거든. 게다가 나는 강의 말고도 할 일이 너무 많아서 항상 시간이 부족했어. 형이 와준다면 진심으로 환영이지.”
***
“부르셨습니까? 대표님.”
“어서 오세요. 차 팀장님. 이번 일 고생 많으셨어요.”
“고생이랄 게 있나요. 대표님이 전 재산을 걸 정도로 확신하신 덕분이죠. 저 정말 감동 먹었습니다. 친우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사람. 요즘 세상에 참 보기 드문 일 아닙니까? 저뿐만 아니라 인터넷에서도 온통 난리입니다. 의리의 남자 최건우라고. 혹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차지훈은 건우 밑에서 일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비즈니스 관계가 아니라 존경할 수 있는 직장 상사가 있다는 게 정말 자랑스러웠다.
정말 최선을 다해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하하. 저도 동생들에게 들었습니다. 예전에 한창 유행했던 ‘으리’ 시리즈가 저 때문에 다시 유행한다더군요. 솔직히 좀 민망합니다. 저는 모험을 건 게 아니었거든요. 그만큼 선배를 믿었고, 차 팀장님의 분석을 믿었기 때문이죠. 그런 확신이 없었으면 아무리 저라도 전 재산을 걸지 못했을 겁니다. 이 모든 게 정보팀 덕분입니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저희 팀원들도 정말 좋아할 겁니다.”
“여유 생기면 같이 회식이라도 하시죠. 그리고 오늘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전에 남겨뒀던 비장의 카드를 이제 꺼내야 할 것 같아서요.”
“아. 그렇다면 전에 그 노기수 그 녀석 사건을 지금 사용하시려고요?”
일명 노기수 사건.
차지훈의 예전 부하 직원이었던 노기수를 섭외해서 가짜 기자로 분장시킨 다음 납치를 유도하고 그 장면으로 카메라에 전부 담아뒀던 일.
당장 사용하기에는 사안이 너무 커서 비장의 카드처럼 남겨두고 있었다. 지금 사용하면 비장의 카드가 비수로 변할 게 분명했다.
“그냥 놔두면 또 어떤 돌발 변수가 생길지 예측하기 힘들잖아요. 이참에 완전히 숨통을 끊어버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차 팀장님 생각은 어떠세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신문기자를 납치, 감금, 폭행까지 했으니 그냥 넘어가긴 힘들 겁니다. 거기다 이번 성폭행 사건을 세계교육에서 꾸민 일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양념으로 푼다면 효과는 더욱 높아질 겁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그럼 차 팀장님이 판단해서 자연스럽게 진행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
에브리데이 신문에서 기자로 있는 권 기자 요즘 은근히 눈칫밥을 먹으며 회사에 다니고 있다.
신문사에 입사한 지 벌써 3년. 이렇다 할 특종 없이 신변잡기식의 허접한 기사들이나 쓰기 시작한 것도 3년째이다.
그래도 그동안은 자극적인 기사들로 근근이 먹고살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그보다 훨씬 자극적이고 요란한 제목의 기사들이 넘쳐나는 바람에 기자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다.
좀 더 자극적이고 현란한 기사를 내보내고 싶지만 그러기엔 뻔뻔함이 부족했다. 두 눈 질끈 감고 야시시한 기사를 쓰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된다.
“아! 진짜. 뭔가 특종이 하나 터져줘야 하는데. 남들은 쉽게 쉽게 특종을 터트리고 그러던데 난 왜 이렇게 그런 운도 안 따라주는 거야. 빌어먹을. 세상 참 불공평하다.”
“거기 권 기자. 잠깐 이리로 와 봐.”
오늘도 마땅한 기사가 없는지 열심히 인터넷을 뒤적이고 있는데 편집장이 그를 호출했다.
그동안 잘 피해 다녔는데, 항상 늦게 출근하던 편집장이 오늘따라 일찍 출근하는 바람에 딱 걸리고 말았다.
“네. 편집장님. 부르셨습니까?”
피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니 후다닥 뛰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봐 권 기자. 요즘 너 기사를 쓰는 거야 마는 거야?”
역시 예상했던 이야기였다.
이럴 줄 알고 계속 피해 다녔는데.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편집장님.”
“열심히 쓰고 있어? 그래서 ‘매끈한 비키니 자태. 진짜 아름답구나’ 따위의 기사를 쓰고 있는 거야? 내가 이야기했지. 하려면 제대로 하라고. 좋은 기자가 되고 싶으면 열심히 발로 뛰어서 제대로 된 기사를 쓰든가, 아니면 두 눈 꼭 감고 찌라시만 다루는 기자가 되든가. 이렇게 어설픈 제목의 기사만 써서 어쩌자는 거야?”
“그럼 어떻게…?”
“그걸 내게 물어? 기자 생활 3년이나 했다는 녀석이. 매끈한 비키니가 아름답다고 쓰면 사람들은 별 관심을 안 가진다고 내가 몇 번이나 이야기했어. ‘비키니 노출 사고, 은밀한 부위의 노출’, ‘비키니로 가릴 수 없는 가슴골’, ‘중요 부위만 살짝 가린 비키니’, ‘입은 거야 벗은 거야’, ‘아찔한 비키니 화보, 노출 눈에 띄네’ 이런 제목들 많잖아. 어때? 비키니가 아름답다고 헛소리 하는 것보다 훨씬 자극적이지. 안 그래?”
편집장이라서 그런지 나열하는 제목부터 확실히 다르다.
“하지만 편집장님. 이 비키니 사진은 그렇게 노출이 심한 게 아니라 서요. 노출 보다는 여성의 아름다움이 강조된 사진 아닙니까. 사람들이 제목 보고 왔다가 기대했던 모습과 다르면 얼마나 실망하겠습니까?”
“염병. 아주 그냥 지랄을 쌈 싸 드세요. 어휴. 이걸 그냥 확. 여성의 아름다움? 좋다 이거야. 그런데 그것도 보는 사람이 있어야 그런 아름다움을 어필하지. 조회 수 고작 10이야. 신문 기사를 겨우 10명밖에 안 봤다는 건 정말 심각한 거라고. 서버 비용이 아깝다 이 자식아. 내가 이야기하면 반성을 좀 해라.”
“죄송합니다.”
“죄송이고 뭐고 간에. 나도 더 이상은 네게 시간을 주기 힘들 것 같아. 한 달이야. 앞으로 한 달 안에 뭔가 성과를 내지 않는다면 옷 벗을 각오를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만 나가 봐.”
“그건…. 알겠습니다. 편집장님.”
편집장실이 따로 없는 사무실. 주변 동료들이 편집장에게 깨지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며 키득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부끄러워 자괴감이 들었다. 후배들도 있는 앞에서 망신을 주는 편집장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제길. 누군 뭐 그런 걸 몰라서 안 쓰나. 고작 비키니 화보 하나에 은밀한 노출이니 어쩌니 하면서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있으니 사람들이 우리를 기레기라고 무시하는 것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켜야지. 그나저나 한 달 동안 대체 무슨 수로 특종을 얻지?’
권 기자는 속으로 불만을 토로하며 또다시 노트북을 깨작이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팝업창에서 새로운 메일이 도착했음을 알려줬다.
“응? 기자 납치, 감금, 폭행 제보. 뭐야 이게.”
별생각 없이 메일 창을 열던 그는 심상치 않은 내용을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순간 자라목이 되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그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용히 노트북을 가방에 집어넣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이 보면 특종을 빼앗길까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다.
“야! 권 기자. 어디가? 아니 저 자식이 이젠 내 말이 말 같지도 않아? 야! 인마. 한 달이야, 한 달.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조용히 빠져나가는 권 기자의 모습을 보며 편집장이 호통을 쳤지만,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어디 보자. 안녕하십니까. 권 기자님. 평소 권 기자님의 기사를 열심히 챙겨보는 열혈 독자입니다. 와. 내 기사를 챙겨보는 독자가 있었어? 이거 감동인데. 흐흐흐.”
[저는 얼마 전 아는 사람으로부터 안타까운 자료를 건네받았습니다. 확인해보니 어떤 남자를 납치, 감금, 폭행한 증거가 담긴 동영상과 사진들이더군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남자가 권 기자님 같은 기자라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겁이 덜컥 나더군요.]
아무도 없는 옥상에 올라온 권 기자는 메일에 설명된 내용을 보며 화들짝 놀랐다.
다른 것도 아니고 기자를 납치한 사건이란다.
아직 확인은 안 해봤지만 감금에 폭행까지 했다면 기자를 고문했다는 것이다.
군사정권 시대도 아니고 21세기 대한민국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게 솔직히 믿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생각 난 사람이 권 기자님입니다. 권 기자님이라면 분명히 영상 속 남자의 억울한 사연을 풀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전해 듣기로 납치당한 남자는 노기수라는 기자이고, 그런 대담한 일을 벌인 사람은 세계교육의 정도식 실장이라고 합니다.]
“세계교육? 거기면 세계그룹 계열사인데…. 얼마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미성년자 성폭행사건도 세계교육에서 벌인 일이라는 소문이 있더군요. 해당 자료는 첨부파일에 동봉했으니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멀리서나마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뭐야, 이거. 정말이야? 정말인 거야?”
재빨리 첨부파일을 열어봤다. 동영상이나 사진 자료들은 아무리 봐도 조작된 흔적이 없었다.
솔직히 기자를 납치까지 하는 대담한 세력이라는 생각에 겁도 났다.
하지만 지금까지 3년간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특종 아닌가? 게다가 조금 전에 자신에게 호통치던 편집장이나 그 모습을 보며 비웃던 동료들의 모습이 떠오르자 없던 용기도 불끈 생겨났다.
회사에서 쫓겨나느니 제대로 사고 한 번 쳐보자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어차피 인생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계속 이렇게 무시당하며 사는 것보다 위험해도 모험을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보통의 신문사라면 기사가 나가기 전에 편집장의 검토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권 기자가 속한 에브리데이 신문은 그런 일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기자가 기사를 작성해서 회사 홈페이지에 등록하면 자동으로 포털사이트까지 전송되는 시스템이었다.
가끔은 엉터리 기사를 올린다고 욕을 먹기도 하지만 스피드가 생명인 온라인 신문사들이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시스템이었다.
권 기자는 기사 작성 툴을 열었다. 사진이나 동영상은 건드릴 필요도 없이 알맞게 잘 편집되어 있었다. 증거가 확실하니 메일에 적힌 내용을 약간만 수정해 기사로 옮기면 된다.
이제 시작이다. 호흡을 가다듬고 제목부터 작성했다.
[세계교육의 끔찍한 만행. 기자를 납치, 감금, 고문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