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127화 (127/256)

제127화

“어떻게 됐어?”

차지훈이 윤종수에게 물었다.

“권 기자라는 사람이 방금 기사를 올렸습니다.”

“역시 그렇지? 하여간 인터넷 기자들을 달리 기레기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니까. 어떻게 사실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고 기사부터 올릴 수 있지? 덕분에 우리는 편하게 되었지만 말이야.”

“그런데 저 사람은 괜찮을까요? 기수 선배처럼 납치당하는 일이 생기거나 그러진 않겠죠?”

“염려하지 마. 아무리 세계교육이 미쳤다고 해도 권 기자까지 납치할 수는 없을 거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기자를 납치한다고? 그랬다간 세계교육이 아니라 세계그룹이라고 해도 수습하기 힘들 거야. 사진하고 동영상은 움직일 수 없는 증거거든. 그래도 혹시 모르니 얼른 기사 순위를 올려야지. 할 수 있지?”

“물론이죠. 맡겨만 주세요. 대표님이 서버 확충을 할 수 있게 넉넉한 지원을 해주셔서 포털사이트 조회 수쯤은 언제든지 조작할 수 있습니다. 흐흐흐.”

“네 실력은 알지만, 너무 티나지 않게 하는 거 잊지 말고.”

“당연하죠. 기사 내용 자체가 워낙 엄청나지 않습니까? 아마 초기 조회 수만 살짝 올려주면 제가 건드리지 않아도 알아서 뻥튀기할 겁니다.”

***

21세기 대한민국에 신문 기자가 납치에 고문까지 당했다?

기사 내용도 엄청 충격적인 데다가 초이스 에듀의 정보팀이 적절하게 조회 수까지 조작하는 바람에 세계교육의 기자 납치 사건은 사회적으로 어마어마한 파장을 몰고 왔다.

사무실에서 기자를 납치하는 과정이 담긴 CCTV 영상, 허름한 창고에 끌려가는 모습, 그리고 만신창이가 되어 풀려나는 장면까지 포함된 기사를 본 사람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세계교육이 뒤늦게 소식을 듣고 수습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을 대로 늦었다.

학원 앞에서 비인간적인 고문을 자행한 세계교육에 대한 규탄시위가 벌어지는 바람에 정상적인 수업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오프라인 수업뿐만이 아니었다. 세계교육의 모든 사업 부문에서 보이콧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 움직임은 점점 더 조직적으로 변해 세계그룹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짝.

“병신 같은 새끼. 고작 학원 하나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죄…죄송합니다. 형님.”

세계그룹 제품까지 보이콧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그룹 수뇌부는 사건 수습을 위해 부랴부랴 태스크포스 팀을 구성했고, 팀 책임자로 박유하 이사의 사촌 형인 박준하 상무를 임명했다.

막중한 책임을 진 박준하 상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세계교육을 방문하는 일이었다.

그의 방문에 평소 카리스마 넘치던 박유하 이사도 고양이 앞 쥐 신세가 되었다.

“누가 형님이야? 내가 언제부터 네놈의 형님이 된 거지? 반쪽 피라도 같은 피가 흐르니 형님이라 이거야? 주제도 모르는 놈.”

“죄송합니다. 사…상무님.”

모멸감을 느꼈지만 지금은 참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천한 피를 타고났으면 조용히 콩고물이나 받아먹으면서 살 일이지. 괜한 욕심을 부리다가 일이 이 지경이 된 거잖아. 네 주제에 세계그룹을 욕심낼 때부터 알아봤지.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 거야. 솔직히 손바닥만 한 세계교육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지만 세계그룹까지 안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이 멍청한 자식아.”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제가 어떻게든 해결해보겠습니다.”

“그럴 능력이 있었으면 이런 상황을 안 만들었겠지. 지금부터 너는 가만히 있는 게 우리를 돕는 일이야. 이 봐. 정 실장.”

“네. 상무님.”

“이번 일은 정 실장이 책임져야겠어. 무슨 말인지 알지?”

박준하 상무는 비웃음 섞인 얼굴로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정도식 실장을 바라봤다.

“물론입니다. 상무님.”

“그건 안 됩니다. 상무님.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정 실장은 그냥 제 지시에 따랐을 뿐입니다. 제가 책임지겠으니 정 실장은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한심한 놈. 지금 이게 네가 책임진다고 해서 될 일 같아? 우리 박씨 일가가 이번 일에 직접 관련되었다고 알려지면 수습하기 더욱 어려워져. 아무리 반쪽이라도 박 씨는 박 씨. 또한, 작은아버지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일을 그런 식으로 마무리할 수는 없어.”

“당연합니다. 이사님. 이번 일은 제가 책임지는 게 맞습니다. 그러니 진정하십시오.”

박유하 이사에 대한 정도식 실장의 충성심은 진짜배기였다.

“하지만 정 실장.”

“이사님 마음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하 직원의 과잉충성으로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입니다. 이사님은 그냥 몰랐다고만 하시면 됩니다.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과잉충성.

‘나는 몰랐다. 그냥 아랫사람이 너무 과잉충성을 해서 일어난 일이다. 정말 안타깝게 생각한다. 도의적인 책임은 지도록 하겠다.’

이런 식의 말과 함께 책임회피를 하는 일은 권력자들이 정말 많이 애용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쯧쯧. 눈물겹구먼. 그래도 저 멍청한 것보다 정 실장이 머리 회전이 빨리 돌아가네. 너도 귀가 있으면 똑똑히 잘 들어둬. 아무리 사생아라고 해도 세상 사람들은 너를 세계그룹의 구성원으로 봐. 우리가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해도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런데 네가 사람을, 그것도 기자를 납치, 고문했다? 이건 너 하나로 끝나는 일이 아니야. 자칫 우리 그룹 전체에까지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단 말이야. 절대로 네가 예뻐서 그러는 것이 아니니까 닥치고 가만있어. 쓸모없는 것 같으니.”

“상무님. 그럼 학원은, 학원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학원? 학원이 어떻게 될지는 더 이상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그래도 한 가지 사실만은 알려주지. 세계그룹은 세계교육에서 손을 뗄 거야.”

“네? 그건 안 됩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얼마나 아끼던 곳인데요.”

“돌아가신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를 네가 얼마나 만났다고 그딴 소리야? 만나도 내가 더 많이 만났고, 존경해도 내가 더 존경했어. 이 자식아. 할아버지께서 아끼던 곳인 줄 알았으면 이번 같은 사고는 치지 말았어야지. 세계교육은 이미 매각 결정이 났으니 넌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마.”

“아니! 어떻게 제게 일언반구 없이 매각 결정을 할 수 있습니까?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말이 되고 안 되고는 내가 결정해. 아! 마침 저기 오시네. 저분이 이번에 세계교육을 인수하기로 결정하셨어. 덕분에 우리 세계그룹은 쉽게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어. 여기입니다. 대표님!”

박준하 상무의 손짓에 고개를 돌린 박유하 이사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등장에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하하하.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박 상무님.”

“아닙니다. 저도 방금 왔습니다. 나 대표님. 박 이사. 이리 와서 인사드려. 박 이사도 잘 아는 분이지? 크레이듀의 나성천 대표님이셔. 이번에 세계교육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과감하게 손을 내밀어 주셨지. 덕분에 세계그룹까지 불똥이 튀는 일은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뭘 그렇게 멀뚱멀뚱 서 있어? 감사하다고 어서 인사드리지 않고.”

도대체 누가 세계교육을 인수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정말 의외라면 의외의 인물이었다.

크레이듀는 외국어 학원 시장에만 관심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갑자기 훅 치고들어올 줄이야.

“가…감사합니다. 나 대표님.”

크레이듀는 우리나라 재계서열 3위의 와룡그룹이 설립한 영어 전문 학원이었다.

처음에는 토익, 토플, 텝스(TEPS)를 공부하는 성인 대상의 학원이었으나 공격적인 투자로 순식간에 그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중국어, 일본어 같은 영어 외의 외국어 교육은 물론이거니와 유명 편입학원을 인수하면서 편입 영어분야에서도 강자로 떠올랐다.

그뿐만 아니라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들이 영어를 쉬우면서도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는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학부모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와룡그룹은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상당한 명성을 자랑하는 대그룹이다.

비슷한 교육 시스템이라도 와룡그룹이라면 믿을 수 있다는 신뢰. 대중들의 그런 믿음은 크레이듀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였다.

앞으로 외국어교육사업이 전망이 있을 거라는 예측으로 시작했던 크레이듀가 예상보다 훨씬 큰 수익을 올리자 와룡그룹도 생각을 달리했다.

외국어뿐만 아니라 다른 과목까지 모두 다룬다면 어마어마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학원 사업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었다. 절대 1강이었던 기가 싱크빅과 교육 사업 분야에서는 와룡그룹보다 훨씬 많은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세계그룹이 지원하는 세계교육.

이들뿐만 아니라 D학원이나 J학원 같은 전통의 강자도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어 도저히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입맛만 다시며 교육시장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는데, 최근 1년 사이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변화의 중심에는 건우가 있었고, 그의 등장은 단단하기만 하던 사교육 시장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가장 큰 피해자는 세계교육이었다. 오프라인 학원 부문 2위, 온라인 학원 부문 2위, 재수학원 2위, 방문학습지 부문 1위. 학습지 판매 1위, 유료진학 상담 1위.

박유하 이사가 경영에 참여한 이후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며 부동의 1위 기가 싱크빅을 위협하던 세계교육이었다.

그랬던 곳이 초이스 에듀와의 대결에서 처참하게 패배하면서 순식간에 벼랑 끝까지 밀려나 버렸다.

기자를 납치 고문했다는 이야기는 성폭행 조작 사건과 맞물리면서 완전히 회생불능 상태에 이르렀고, 거기에 더해 모기업에까지 악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놓칠 크레이듀가 아니었다.

와룡그룹의 마케팅 실장 출신답게 세계그룹과 발 빠르게 협상을 시작했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박준하 상무는 생각보다 괜찮은 조건에 만족하며 세계교육의 매각을 결정했다.

아무리 폐업 직전의 학원이라고 해도 세계교육이 가지고 있는 노하우는 절대 무시할 수 없다.

거기다 강사와 진학 상담사, 그리고 방문학습지 교사라는 인력은 천하의 크레이듀라고 해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괜히 값을 깎으려고 협상을 질질 끌다가 고급 인력들이 모두 빠져나가는 것보다는 적절한 대가를 지불하고 학원을 인수하는 게 낫다는 것이 나성천 대표의 판단이었다.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고, 건우의 연이은 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박유하 이사는 이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게 어디 감사받을 일인가요. 저는 자선 사업가가 아니라 이윤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세계교육이 지금은 안 좋은 일에 휩싸여 잠시 흔들리고 있지만, 원체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던 학원 아닙니까. 이번 고비만 잘 넘기면 예전보다 더욱 높이 도약할 수 있을 거라 믿고 인수한 겁니다.”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하하하. 제가 더 고맙죠. 이런 훌륭한 학원을 저렴하게 인수할 기회를 주셨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박 이사님은 많이 서운하겠죠? 그동안 정이 들었을 텐데 말입니다.”

“아닙니다. 모두 제가 부족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걸 알고 있으니 다행이구나. 너 같은 풋내기와는 비교도 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하신 분이 나 대표님이야. 자숙하면서 세계교육이 어떻게 커 가는지 잘 지켜보도록 해. 그것만으로도 네겐 큰 공부가 될 테니까.”

“자숙이요?”

“물론이지. 그럼 학원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해 말아 먹은 녀석에게 다른 기회가 금방 생길 줄 알았어? 최소 2~3년은 푹 쉬면서 심신을 단련해. 원한다면 외국에 나가서 공부를 해도 좋고.”

말이 외국에서 공부하라는 것이지 사실상 경영권에서 완전히 배제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쉽게 말해 일종의 유배생활이라고 보면 된다. 그 말을 들은 박유하 이사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이대로 물러나면 언제 다시 기회가 올지 장담할 수 없다.

“그럴 순 없습니다.”

“뭐? 너 이 자식. 이게 무슨 짓이지? 하하하. 나 대표님. 이거 죄송합니다. 박유하 이사가 아직 어려서 조금 철이 없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박준하 상무가 화를 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나 대표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제게요? 말씀해보시죠.”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외국어 학원과 종합 학원은 많이 다릅니다. 크레이듀가 세계교육을 인수한다고 해도 당장은 큰 효과를 거두기 힘듭니다. 제 예상엔 1년 정도는 적응 기간을 거쳐야 하는데 세계교육을 가장 잘 아는 저라면 그 기간을 줄여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나 대표님을 도울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시오.”

“이봐. 박 이사. 이게 대체 무슨 경우 없는 짓이야. 나 대표님이 너 따위 풋내기랑 같은 줄 알아? 세계교육쯤은 지금이라도 당장 정상화시킬 수 있는 능력 있는 분이라고. 그런데 네 주제에 누굴 돕는다고?”

“아아! 아닙니다. 박 상무님. 일단 들어나 보도록 하죠. 방금 말처럼 지금 세계교육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박 이사님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박준하 상무가 그만두게 하려는 걸 나성천 대표가 말렸다.

“기회를 주셔 감사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세계교육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제가 매우 체계적으로 시스템을 구축해놨기 때문에 여론만 조용히 만들 수 있다면 학원을 다시 정상화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럼 뭘 돕겠다는 거죠?”

“제가 도와드리면 인수인계조차 필요 없이 원하시는 대로 학원을 운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더 중요한 거라….”

“바로 최건우 그 자식의 정체입니다.”

“최건우 대표의 정체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여기서 최 대표의 능력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뭔가 있을 줄 모른다고 기대했는데 박유하 이사의 대답은 좀 황당했다.

“혹시 알고 계십니까? 저와 세계교육이 이렇게 된 게 전부 최건우 그 자식 때문입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초이스 에듀 때문에 사업 전 분야에 걸쳐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면서요.”

“단순히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속고 있지만, 저는 그놈의 이중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 있죠. 그러나 그 이면은 정말 음흉하기 짝이 없는 놈입니다.”

지금 박유하 이사를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은 건우에 대한 복수심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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