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137화 (137/256)

제137화

“방법이 없을까요? 방법이.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아니면 EBS 방송국의 필요성조차 의심받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냥 최건우 대표의 커리큘럼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뭐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최 대표가 지난번 인터뷰에서 자신이 만든 커리큘럼을 학교나 EBS에서는 얼마든지 무료로 사용해도 괜찮다고 밝혔습니다. 솔직히 저도 최 대표가 만든 커리큘럼을 검토해봤는데, 정말 놀랄 만큼 혁신적인 내용이 많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냉정하게 말해 이제 대세는….”

“이것 보세요. 안 교수.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뭐가 혁신적이라는 이야기입니까! 방금 냉정하게 말한다고 했습니까? 냉정한 게 뭔지는 알고 그런 엉터리 말을 하는 겁니까?”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솔직하게 속마음을 털어놨던 안 교수는 다른 사람들의 격앙된 반응에 말문이 막혔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내용들은 수십 년간 수많은 석학에게 검증을 받고 만들어진 커리큘럼입니다. 영구불변의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 대표가 만든 교습법은 뭔가 튀긴 하지만 그 어떤 권위자들의 검증과정도 거치지 않았습니다. 언제든지 문제가 될 수 있는 소지가 있어요.”

“맞습니다. 학원에서야 그런 검증 안 된 커리큘럼을 가지고 학생을 가르치든 말든 상관없지만, 우리 EBS 방송은 다릅니다. 편법이 아니라 정석을 가르쳐야 합니다. 최 대표의 교습법을 방송을 통해 가르쳤다가 나중에 문제가 되면 누가 책임질 겁니까? 네? 안 교수. 안 교수가 책임질 겁니까?”

“아…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생각 없이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얼핏 굉장히 획기적이라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안 교수의 마음은 이해합니다. 원래 정석에 익숙한 사람들이 편법을 처음 접하게 되면 획기적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편법은 결국에는 편법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편법이나 꼼수는 절대 정석을 이길 수 없거든요. 시간이 지나면 분명히 문제가 생길 겁니다. 그러니 안 교수도 최 대표의 커리큘럼에 대해서는 관심도 두지 마세요.”

“그런데 문제는 무지한 학생들은 그런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애들이 우리 때와는 완전히 달라요. 잔머리만 늘어서 노력은 하지 않고 어떻게든 꼼수만 부릴 생각을 하죠. 복잡하고 어려워도 제대로 공부할 해야 하는데,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공부하는 학생들을 찾아보기 힘든 게 요즘입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최 대표의 커리큘럼은 정말 반가워 보였을 겁니다. 하지만 요행은 곧 바닥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 수학능력시험에서 큰 낭패를 볼 걸요?”

안 교수는 몇몇 나이 있는 임원들의 억지 논리를 수긍할 수 없었다.

비록 사과는 했지만 솔직히 건우의 커리큘럼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획기적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수학능력시험에서 큰 낭패를 볼 거라는 이야기에는 코웃음만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아! 그래서 역대 수능에서 2등과 가장 많은 점수 차이로 수석을 차지한 사람이 강경준 군이 된 거군요. 강경준 군뿐만이 아니죠. 일명 최건우의 아이들이라고 불리는 학생 전원이 서울대에 장학생으로 합격했다는 건 대체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라고 비꼬고 싶었지만, 그러긴 쉽지 않았다.

교육계는 예전부터 굉장히 보수적인 편이다. 괜히 입바른 소리 했다가 잘못 찍히면 두고두고 교수생활이 피곤해질 수 있으니 그냥 입 다물고 조용히 듣기만 하는 게 상책이었다.

안타깝지만 그도 먹고사는 게 먼저다.

“맞습니다. 그걸 아이들도 알아야 할 텐데 말이죠.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한시라도 빨리 편법이 아니라 정석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유도를 해야 하는데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네요.”

“우리가 돈벌이에 급급한 학원 강사라면 모를까, 아이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의무가 있는 교육자 아닙니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죠. EBS가 망하면 그건 정말 곤란합니다. EBS가 대체 왜 있는 겁니까? 비싼 고액과외를 받지 못하는 서민 가정의 학생들이 금전적 부담 없이 편안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곳입니다.

부유한 학생들과 비교하면 아직 많이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학원 다닐 형편이 되지 않는 아이들에게는 이것만큼 소중한 기회도 없습니다. 우리 EBS는 교육 평등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이러한 사명감을 절대 잊으시면 안 됩니다.”

안 교수도 마지막 말에는 동감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나마 공평한 게 교육이다. 다른 것과 달리 공부는 노력한 만큼 성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의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에 회의가 느껴졌다.

서울의 강남·서초구, 대구 수성구 등 이른바 ‘교육특구’로 불리는 인기 학군지역의 강세현상이 뚜렷했고, 이런 곳들은 각 지역에서 부자 동네로 소문난 곳이었다.

과거와 달리 있는 집 자식들이 더 좋은 대학을 가는 비율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 이젠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다양한 재능을 갖춘 아이들을 뽑기 위한 수시 모집도 있는 집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꼼수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돈이 없어 공부를 못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게 하려면 EBS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정작 EBS의 발전에 앞장서야 할 교육부와 EBS 관계자 및 강사들은 자신들의 아집에 사로잡혀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게 안타까웠다.

자신이 아는 건우는 절대 돈벌이에 급급한 속물이 아니었다. 게다가 머리도 좋다. EBS의 당위성에 대해 달리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필요성을 느끼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교육부에서 먼저 고개를 숙이고 부탁한다면 EBS가 예전 이상의 인기를 끌 방법도 찾을 수 있을 텐데, 융통성이 부족해서 그런지 너무 적대적으로만 대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여기 계신 분 중에 그런 사명감을 모르는 분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사명감만 가지고 있다고 당면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 전에 장관님과 EBS 책임자가 긴급회동을 가졌습니다.”

“그래요? 무슨 일로 만났답니까?”

“아무래도 최근 EBS 시청률이나 교재 판매가 워낙 부진하니 대책 마련을 위해 만난 게 아니겠습니까.”

“정확한 것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최 대표의 독주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압박이 윗선에서부터 내려오고 있다는 이야기는 얼핏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윗선이요? 엉덩이 무겁기로 소문난 장관님을 이렇게 빠릿빠릿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압박을 줄 정도의 힘이 있는 곳이라…. 그렇다면 어딘지 뻔하군요. 쯧쯧. 결국은 남의 집 밥그릇 싸움에 우리는 구경만 하면 되는 거였군요.”

“허허허. 누가 나서든 무슨 상관입니까. 그렇게라도 나서주면 고마운 일이죠. 우리야 싸움 구경하다가 어부지리만 취하면 될 일입니다. 진흙탕 싸움이 되면 될수록 EBS의 인기는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그렇지요. 어떻게 보면 참 시기적절하다고 볼 수도 있겠군요.”

조 이사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 두 분이서만 이야기 나누지 말고, 대체 뻔하다는 곳이 어디인지 같이 좀 압시다. 저처럼 눈치 없는 사람은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먹을 수가 없어요.”

“지금 초이스 에듀를 견제할 만큼 힘 있는 곳이 한 곳밖에 더 있습니까?”

“그러니까 거기가 어딥니까.”

“크레이듀입니다.”

***

크레이듀 나성천 대표의 사무실.

“그동안 크레이듀와 세계교육의 합병하고 안정화하느라 고생했어.”

“고생이라니요. 아닙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내가 굳이 박 이사를 데리고 있었던 것도, 자네가 가지고 있는 이런 노하우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야. 그렇지만 학원이 이렇게 빨리 안정화 되리라고는 나도 예상하지 못했어.”

“그게 어디 저의 힘만으로 되었겠습니까. 대표님의 전폭적인 지지와 와룡그룹의 이름값 덕분에 일이 쉬웠습니다. 솔직히 이번에 일을 하면서 제가 얼마나 우물 안의 개구리였는지 여실히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동안 세계그룹의 틀 안에서만 자라서 그런지 같은 대기업끼리 이렇게 엄청난 격차라 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나성천 대표 앞에서 공손한 자세로 이야기하는 박유하 이사.

그는 나성천 대표에게 기분이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와룡그룹의 힘에 감복하고 있었다.

“하하하. 그건 당연한 것 아닌가. 내가 세계그룹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솔직한 말로 세계그룹의 전체 시가 총액이 우리 와룡전자의 시가총액에도 못 미치지 않는가. 같은 대기업이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어.”

“맞습니다. 연예인 마약 스캔들 같은 큼지막한 사건을 세계교육에 대한 이목을 돌리기 위해 사용하는 것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솔직히 세계그룹이라면 그룹이 위기에 직면했을 때나 사용했을 법한 카드를 고작 학원 인수하는 일에 써버리는 것을 보고 스케일 자체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제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세계그룹에 집착했는지 후회가 될 정도입니다.”

박유하 이사는 이제 세계그룹은 안중에도 없는 듯 와룡그룹을 추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사람은 큰물에서 놀라는 말이 생긴 거라네. 자! 그럼. 크레이듀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으니 이제부터는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겠지?”

“물론입니다. 안정이 되었으면 그걸 기반으로 이제 성장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걸 보니 뭔가 생각해둔 게 있나 보군.”

“우선 크레이듀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야 합니다.”

“크레이듀의 장점을 살린다? 그게 뭐지?”

“제가 생각하는 크레이듀의 최대 장점은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영역입니다. 수능 영어가 토익이나 텝스 같은 시험과는 조금 다르게 출제되지만, 그렇다고 판이하게 다른 건 아닙니다. 기존의 크레이듀 강사진 역량이라면 수능 영어도 충분히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토익이나 텝스 스타 강사들을 수능 영어 강사로도 활용하자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토익 만점의 신화를 만들어낸 강사가 이제 수능 영어 만점에 도전한다’어떻습니까? 문구부터 뭔가 학생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럴싸하긴 하군. 그런데 토익 전문 강사만 해도 수입이 엄청난데 굳이 수능 영어 강사를 하려고 할까?”

“막상 수능 영어 강사를 하게 되면 토익 강사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 겁니다. 토익 과외를 받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수능 영어 과외를 받는 학생들은 여전히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도 그렇군.”

“돈 있는 집안은 토익 공부를 위해 외국으로 자식을 보내지만, 수능 공부를 위해서는 고액 과외를 시킵니다. 마인드 자체가 다릅니다. 몇 달만 이쪽 세계에서 일하다 보면 수능 영어만 전담하고 싶어 하는 강사도 생길 겁니다.”

토익과 수능은 분명 다르다. 그러나 크게 다르진 않다.

박유하 이사는 크레이듀가 보유한 강력한 영어 강사진 풀을 단지 토익과 편입에만 활용하는 게 굉장히 아쉬웠다. 그들 중에는 수능 영어 강의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일 사람이 분명 있었다.

토익의 경우는 수강생 대부분이 취업 준비생이거나 직장인이다. 강의 시간은 오후 늦게나 저녁이 많다. 오전부터 오후 2~3시까지는 시간이 남을 것이고 그 시간을 이용할 계획을 세웠다.

원래라면 쉽지 않은 계획이지만 크레이듀가 세계교육을 인수했기 때문에 가능해졌다. 영어 강사들도 특강 형식으로 부담 없이 도전해볼 수 있다.

실패해도 계속 토익 강사를 하면 그만이고 성공하면 수능 영어 전문 강사로 나가면 된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네. 그런데 영어 쪽에만 그렇게 신경을 쓰면 곤란하지 않을까?”

“골고루 어설프게 잘하는 것보다 확실하게 한 과목을 잘하는 게 훨씬 이득입니다. 학생들은 확실한 한 과목을 듣기 위해 학원에 등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시간 낭비를 하지 않기 위해 다른 과목도 함께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초이스 에듀에서 가장 약점이 영어라는 사실입니다.”

“영어라고? 영어는 최건우 대표가 직접 가르치는 과목 아닌가? 차라리 국어나 사회탐구 분야가 약점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아닙니다. 국어의 이승훈 선생이나 역사의 윤은영 선생에 대한 인지도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습니다. 저도 인터넷으로 수업하는 모습을 봤는데, 솔직히 우리나라 톱클래스 수준이었습니다. 과거에는 약점이었는지 몰라도 이젠 강점이 되었습니다.”

“그렇군.”

나성천 대표가 경영 능력은 뛰어날지 몰라도 학원 생태계를 완전히 파악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부족했다.

“그리고 과학탐구는 최 대표와 얼마 전에 기가 싱크빅에서 초이스 에듀로 옮긴 하도훈 선생까지 버티고 있습니다. 그쪽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우리나라 최강 라인업입니다. 하지만 영어는 그렇지 않습니다. 최건우 대표가 가르치고 있지만, 수학이나 과학탐구에 비하면 아쉽다는 평가입니다.”

“그건 수학이나 과학과목 강의 실력이 워낙 대단해서 그렇지 영어 강의 실력이 부족해서는 아니라는 걸로 알고 있네만.”

“솔직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다. 다른 과목이 워낙 출중하니 뭔가 상대적으로 영어가 부족하게 보이는 겁니다. 기대치라는 것 때문에 오히려 손해를 보는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수학과 과학에 집중해달라는 의견이 많습니다.”

“그래서 박 이사 생각은 우리가 그 틈을 파고들자?”

“네. 대표님. 크레이듀에 대한민국에서 수능 영어를 가장 잘 가르치는 학원이라는 이미지를 입히는 겁니다. 냉정하게 말해 우리 크레이듀가 영어를 제외하면 초이스 에듀나 기가 싱크빅에 한 수 이상 밀리는 게 현실입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약점을 아무리 보강하려고 애를 써봐야 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봐야 초이스 에듀나 기가 싱크빅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받을 테니까요. 이럴 땐 강점을 더욱 강화해서 다른 두 학원과 차별화하는 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세계교육을 맡아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그래. 괜찮아 보이는군. 하지만 이미지가 굳어진다는 것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오히려 손해가 될 수 있다네. 만년 3위 학원, 영어만 잘 가르치는 학원으로 사람들이 인식해버리면 영원히 3인자가 될 수도 있어. 그건 곤란해.”

“물론입니다. 그래서 다른 방안도 함께 준비했습니다.”

박유하 이사의 얼굴은 여전히 자신감이 넘쳤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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