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139화 (139/256)

제139화

성윤기 실장이 처음 크레이듀의 새로운 정보실장 자리를 제안받았을 때만 해도 굉장히 얼떨떨했었다.

자신은 정보 수집 분야의 베테랑인데, 다른 곳도 아니고 왜 하필 학생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입시학원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했는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솔직히 자존심이 조금 상하기도 했었다. 자신의 경력이라면 당연히 대기업이나 메이저 경호업체 등에서 연락이 오리라 믿었는데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곳에서 가장 먼저 제의가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다른 곳보다 훨씬 조건이 좋은 크레이듀의 제안을 수락했다.

성윤기 실장은 출근하기로 한 날까지 열흘의 시간을 얻은 후 그때부터 대한민국 학원들에 대해 전반적인 조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크레이듀에 출근하기 전에 사전조사의 개념으로 가볍게 생각했던 일은, 예상외의 암초를 만나며 난항을 거듭했다.

세계교육이 무너진 이유를 알아보던 성윤기 실장은 세계교육과 초이스 에듀의 싸움이 첩보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치열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 치열한 싸움에서 승리한 초이스 에듀 정보팀에 관심이 가는 건 당연한 일.

물론 아마추어치고는 굉장히 단단한 실력을 지녔다는 정도의 감탄이 전부였다. 아무리 수준 높은 정보팀이라고 해도 자신은 진짜 프로라는 자부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금방 알아낼 수 있다고 믿었던 처음 생각과 달리 예전에 몸담았던 기무사를 포함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라인을 가동해도 만족할만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

겉으로 봤을 때는 왕종범 시설관리 과장이 가장 유력한데 그의 경력은 의심할 거리가 전혀 없이 깨끗했다.

그렇다는 건 시설관리과 안에 별도의 정보팀이 가동되고 있다는 의미인데 아무리 파도 도무지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파도 안 나오자 초이스 에듀와 세계교육의 싸움은 첩보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치열했던 것이 아니라, 그냥 우연에 우연이 겹쳐 일어난 불행한 사고가 아니었을까 하는 엉뚱한 의심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정보계에 몸담은 사람들이 즐겨하는 격언 중 하나가 ‘세상에 우연은 없다’라는 말이다.

한 번이라면 모를까 여러 번 일어났다면 절대 우연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종적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상대가 그만큼 뛰어나다는 의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적.

성윤기 실장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자마자 얕볼 수 없는 상대를 만났다는 사실에 강렬한 호기심과 함께 호승심이 일었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살아남는 사람이 자신이 될 거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자기가 모른다고 해서 상대도 모를 거라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나중에 치명적인 독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다는 사실.

“어서 오세요. 차 팀장님. 알아보셨습니까?”

“네. 대표님.”

“그래 어떤 사람입니까? 정도식 실장이 박유하 이사를 대신해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감방에 들어갔으니 새로운 인물은 그보다는 좀 더 나은 인물이겠죠?”

“기무사에서 잔뼈가 굵은 소령 출신의 군인이었습니다. 이름은 성윤기. 나이 36살.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ROTC로 소위 임관. 정보 수집 쪽에 능력을 인정받아, 소대장 중대장 시절을 제외한다면 줄곧 기무사에서 계속 근무했습니다.”

크레이듀가 세계교육을 인수한 이후, 건우는 크레이듀에 대한 경계를 더욱 강화했다.

최소 일주일에 한 번은 동향 보고를 받는다.

“능력을 인정받았는데 왜 군인을 그만둔 겁니까?”

“알력다툼에서 밀린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줄을 잘못 선 케이스입니다. 대표님도 아시겠지만 고려대학교가 다른 학교에 비해 동문 간의 유대감이 강한 편입니다. 작년에 새로운 기무사령관 후보로 두 명이 물망에 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한 명은 성윤기 실장과 같은 고려대 ROTC 출신이고 다른 한 명은 육사 출신이었는데, 그 경쟁에서 육사 출신이 새로운 기무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제대를 선택하는 건 이상하군요. 반대로 육사 출신이 미끄러지고 고려대 ROTC가 사령관이 되었다고 해서 육사 출신 장교들이 전부 그만둬야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육군이야 육사 출신이 워낙 막강한 파워를 발휘하니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만, 반대의 경우는 종종 일어나는 편입니다. 일반사회와 달리 군대에선 고려대 출신이 소수라서 같은 동문 ROTC끼리 결속력이 대단합니다. 특히 성윤기 실장은 고려대 출신 후보의 최측근 중 한 명이라서 미운털이 제대로 박혔다고 합니다.”

건우의 표정이 못마땅한 듯 일그러졌다. 미국에서라면 모를까 한국에서는 건우도 학연 지연의 피해자였다.

“쯧쯧. 이놈의 나라는 어디를 가든 학연이 문제군요. 그런데 실력은 있다는 건가요? 기무사, 기무사 그동안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그곳이 정확히 뭐 하는 곳인지는 저도 잘 몰라서 말입니다.”

“기무사는 쉽게 말해 군 유일의 정보수사기관입니다. 하는 일은 군사보안 및 군 방청업무, 군 및 군 관련 첩보의 수집·처리, 정보작전 방호태세 및 정보전 지원, 내란·외환·반란·이적의 죄와 같은 특정범죄 수사 등 다양하게 있습니다. 성윤기 실장은 정보 및 첩보 방면에서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휘유…! 내란, 외환, 반란, 이적이라…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하군요. 간첩도 잡고 그러나 봐요?”

“간첩뿐만 아니라 테러범이나 방위산업 관련 외국 스파이를 추적하는 일도 합니다.”

“그런 곳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다면 조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다른 건 몰라도 행동력 하나는 끝내주더군요. 출근하기 전부터 기무사 정보통까지 이용해서 우리 팀을 파악하려 들었습니다.”

보고를 하는 차지훈의 얼굴에 여유가 넘쳤다. 자신감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안심하십시오. 우리 팀원이 노출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노는 물이 다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군바리는 군바리의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국정원 내부에서도 우리 팀 정체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군바리 머리로 알아내는 건 어렵습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허수아비도 세워뒀습니다.”

“허수아비요?”

“일부러 가짜 팀을 만들어뒀다는 뜻입니다. 일부러 살짝 노출시켜 놈들이 허수아비만 쫓도록 할 생각입니다.”

가짜 팀도 정보팀 소속이지만 그들의 주된 임무는 상대의 교란이다.

끊임없이, 그리고 쓸데없이 돌아다니며 상대가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게 하는 게 가짜 팀이 하는 일이다.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역시 차 팀장님이십니다. 항상 든든합니다.”

“하하하. 대표님이 여유 있게 지원을 해주셔서 가짜 팀까지 돌릴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더 많이 지원해드려야겠군요. 그래도 방심하면 안 되는 거 아시죠?”

“물론입니다. 대표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정보 수집보다는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요. 제게 우선인 것은 차 팀장님과 팀원들입니다. 항상 명심하세요. 그럼 언제나 그렇듯 크레이듀의 새로운 정보팀 수장 문제는 차 팀장님에게 일임하겠습니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곽 장관은 며칠 전 크레이듀의 나성천 대표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장관님. 교육은 백년지대계입니다. 다른 부문은 몰라도 교육은 절대로 부익부 빈익빈의 논리에 휘둘려서는 안 됩니다. 있는 집안의 자식은 좋은 대학에 가고 가난한 집 자식은 돈이 없어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나라는 미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사교육 비중이 너무 커졌습니다. 이러다 보면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어린 동량 중에는 돈이 없어 공부를 못 하는 경우도 생기게 됩니다. 그게 국가적으로 얼마나 손해인지 아십니까?’

‘아니, 나 대표님. 골프 잘 치시다가 갑자기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요? 부익부 빈익빈의 논리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학원을 운영하시는 분이 할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사교육 1번지 대치동, 그곳의 터줏대감이자 알짜배기 학원인 세계교육을 인수한 크레이듀의 대표이사가 할 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저런. 장관님은 우리 크레이듀에 대해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정말 서운합니다. 우리는 절대 돈을 목적으로 학원을 운영하지 않습니다. 처음 크레이듀가 출발했을 때를 생각해주십시오. 국경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는 요즘, 세계무대에서 통하는 글로벌형 인재의 육성을 목적으로 학원을 처음 시작했습니다.’

‘우리 학원을 거쳐 간 인재들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대기업에 취직해 세계무대를 누비고 있습니다. 가끔은 취직에 성공하고 고맙다며 찾아오는 학생들이 있는데, 저는 그 모습이 너무 기특하고 고마워서 몰래 눈물까지 훔쳤습니다.’

냉정하게 말해 글로벌형 인재의 육성이 아니라 토익, 텝스라는 죽은 영어를 가르치는 전문 학원이었다.

그러나 저렇게 열변을 토하는 나성천 대표에게 그런 말로 찬물을 끼얹을 순 없었다.

‘하하하.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제가 나 대표님의 노고는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영어라는 영역을 벗어나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 또한 전문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진정한 글로벌형 인재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5년 전에는 편입학원을 인수해,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도록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습니다. 이번에 입시학원을 인수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액 과외를 해야 들을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명강의를 아주 저렴한 가격에 최대한 많은 학생이 수강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알지요. 저도 잘 알지요.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나 대표님 말씀처럼 최근 들어 공교육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좀 예민해졌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니요. 나라를 위해 밤낮으로 고심하는 장관님이니 그러실 수 있습니다. 걱정이 되셨겠죠. 다른 분야도 아니고 교육 분야 아닙니까? 가장 중요하면서도 정말 어려운 일이 교육정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꺼내신 겁니까? 제게 무슨 부탁하실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장관님께 부탁을 하겠습니까? 그냥 나라 돌아가는 꼴이 우스워서 안타까운 마음에 저절로 말이 나온 것 같습니다.’

끝까지 의뭉스럽게 나오는 나성천 대표를 보며, 곽 장관은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동안 얻어먹은 게 있으니 외면할 수도 없고, 왠지 귀찮은 짐을 떠맡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쨌거나 말이 이렇게까지 나왔으니 모른 척하기는 이미 늦었다.

‘나 대표님의 연륜과 안목이라면 뭔가 괜찮은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저라도 무슨 괜찮은 방법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굳이 방법을 찾으라면 정도를 걸어 원칙을 지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도요? 어떤 원칙을 지키라는 말씀인지?’

‘올해 들어 사교육이 기승을 부리는 이유가 뭡니까? 바로 지난해 수능시험의 난이도 조절 실패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처음 원칙대로 시험 난이도를 낮추고, EBS 교재의 연계율을 높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6월에 대 수학능력 모의평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정부의 제대로 된 의지를 보여주는 게 어떨까요?’

‘하지만 너무 뻔한 문제들이 많이 나와도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초이스 에듀의 최건우 대표의 예측 능력은 정말 대단합니다. 평범했다가 자칫 예측률을 높여주면 그쪽만 도와주는 꼴이 됩니다.’

‘저도 인정합니다. 최건우 대표의 능력은 정말 불가사의하긴 하죠. 그 친구를 보면 진짜 천재가 있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떻습니까?’

‘어떻게요?’

‘EBS교재의 연계율을 더욱 높여 80% 아니 90%에 가깝게 만들고 연계문제의 유사성도 매우 가깝게 만든다면, 학생들이 굳이 비싼 돈을 줘가며 최 대표의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게 됩니다. 왜? EBS만 들어도 충분하니까요. 제가 장담하는데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방법을 따른다면, 바닥을 쳤던 EBS의 시청률도 6월 모의고사를 계기로 금방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장관님.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도착했습니다.”

“음. 벌써? 그렇군.”

기사의 말에 상념에서 깨어난 곽 장관은 차에서 내리자 오늘 약속이 되어있던 교육과정 본부장, 교육평가 본부장, 대학수학능력시험 본부장이 입구에서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장관님.”

“오. 그래. 감 부장, 홍 부장, 교 부장. 일하느라 바쁠 텐데 뭐하러 이렇게 나와 있나?”

“세종시에서 여기까지 장관님이 직접 오신다는데 당연히 나와 있어야죠.”

“그러게 말입니다. 장관님이 호출하시면 저희가 직접 세종시로 찾아갈 텐데 어쩐 일로 여기까지 직접 오셨습니까?”

“하하하. 이 사람들 참. 나보다 훨씬 바쁜 사람이 여러분인 걸 아는데, 좀 더 시간적 여유가 있는 내가 직접 움직이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자.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들어가서 이야기하세.”

간단한 안부 인사를 나눈 곽 장관과 세 명의 부장은 미리 준비해둔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제일 상석에 앉은 곽 장관은 며칠 전 크레이듀 나성천 대표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기 시작했다.

“아니. 나성천 대표가 정말 그렇게 이야기했단 말입니까? 이건 명백한 내정간섭입니다. 고작 학원이나 운영하는 주제에 감히 장관님에게 그런 충고를 하다니요. 자기가 아직도 와룡 그룹의 마케팅 실장이라고 착각하는 것 아닙니까?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옵니다.”

대학수학능력시험본부장인 교 부장은 곽 장관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발끈했다. 나성천 대표의 발언을 곽 장관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곽 장관의 최측근을 자처하는 사람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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