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0화
“어허. 진정하게. 자네는 다 좋은데 가끔 너무 욱할 때가 있어.”
“죄송합니다. 나성천 대표의 말이 너무 건방지게 들려서 말입니다.”
“쯧쯧. 학원 운영을 한다고 절대 나성천 대표를 무시하지 말게나.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네. 설사 한직으로 밀려났다고 해도, 크레이듀의 대표이사로 임명받은 이후 학원매출을 10배 이상 성장시켰어. 전국 주요도시에 크레이듀 어학원 지점을 만들고, 편입학원을 인수해 사업도 확장했어. 그런데 이번에는 세계교육까지 먹어치웠네. 그게 와룡그룹의 전폭적인 지지 없이 가능했을 것 같은가?”
“저도 장관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처음에는 별다른 실책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크레이듀의 대표이사로 임명된다고 해서 굉장히 의아하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행보를 보면 절대 한직으로 밀려난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와룡그룹이 교육시장의 가능성을 미리 깨닫고 다른 그룹보다 한발 앞서 시장을 선점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나도 홍 부장의 말과 같은 생각이야. 그러니 더더욱 나 대표의 말을 무시하기는 어렵네. 솔직히 그 사람의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지 않은가? 최 대표를 견제하려고 너무 신경 쓰는 바람에 큰 실패를 맛봤어. 전 장관님을 포함해서 수능 난이도 실패에 책임지고 옷을 벗은 사람이 대체 몇 명인가? 그럴 바에는 최 대표에 대한 신경은 끄고 원칙대로 수능시험을 출제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럼 나 대표의 말처럼 연계율을 정말 90% 이상으로 올려버릴까요?”
“그러고 싶긴 한데 시험이 너무 쉽다며 변별력을 문제 삼지 않을까?”
둥둥둥!
“……. 각성하라. 각성하라.”
둥둥! 둥둥둥!
“당장 각성하라. 각성하라.”
“응?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각성하라니?”
본격적으로 EBS 연계율에 대해서 논의를 하려는데, 갑자기 들려오는 북소리와 사람들의 고함에 회의가 중단되었다.
“어휴. 또 시작이네요.”
“뭐가 또 시작이란 말인가?”
“무슨 ‘구국 학부모연합’인가 하는 단체인데, 공교육을 정상화하라며 며칠 전부터 계속 저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보다 사람들이 많이 몰렸습니다.”
“들어보니 국회와 광화문을 번갈아가며 시위를 벌인다고 합니다.”
“조만간 세종시 정부종합청사에 원정 시위도 갈 계획이라고 합니다.”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던 그들은,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앞에 모여 있는 시위대를 보며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허허. 그것참. 대체 저들이 주장하는 내용이 뭔가?”
“사교육비가 너무 부담스러우니, 공교육만으로도 대학을 갈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하라는 게 저들의 가장 큰 주장입니다.”
“구체적인 내용도 있습니다. 입시학원이나 보습학원에 대해 더욱 강력한 규제. EBS 강의의 질적 향상. EBS 교재 연계율 강화. 공교육 정상화법의 실효성 발동. 대충 이런 주장들을 하고 있습니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군, 그래. 그런데 원래 저렇게 시위대 인원이 많았나? 500명은 훌쩍 넘을 것 같은데.”
“아닙니다. 평소에는 100여 명 내외였는데 오늘은 시위대 인원이 평소보다 훨씬 많습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1,000명은 넘어 보입니다. 오늘 시위대가 제대로 마음먹은 것 같습니다. 저기 왼편을 보십시오. 신문기자에 방송국기자까지 출동했습니다.”
“쯧쯧. 왜 하필 오늘 이런 일이. 골치 아프게 되었어. 괜히 방관해서 사태를 키우는 것보다는 한시라도 빨리 입장발표를 하는 게 낫겠군. 그렇지 않아도 EBS 교재 연계율 때문에 고민이었는데 시기가 참 절묘해. 이게 바로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인가?”
일이 점점 커지는 것 같자 곽 장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크레이듀 나성천 대표의 압박에, 시위대 압박에, 기자들까지 출동했으니 조금 있으면 언론의 압박까지 시작되겠군요. 그런데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나성천 대표는 학원을 운영하는 사람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왜 갑자기 사교육 시장을 위축시킬 방안을 추천하는 겁니까?”
“그게 나도 의문이야. 왜 자기 발목을 자기가 잡으려고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아. 자기 말로는 국가의 미래와 교육을 걱정하는 진실 된 마음밖에 없다고 하더군.”
“웃기는 소리군요. 차라리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지나친다는 말을 믿겠습니다.”
“뭔가 꿍꿍이가 있을 것 같은데….”
“자! 잡담은 그만하고 논의를 마무리하세. 시위대의 규모나 언론까지 출동한 모양새를 보아하니 우리가 빠르게 입장발표를 해야 할 것 같아. 이번 6월에 있을 대 수학능력 모의시험은 난이도는 낮추고 EBS 교재 연계율은 높이는 방향으로 진행하고, 이 사실을 최대한 빨리 언론에 알리도록 하게. 무슨 말인지 알겠나?”
“알겠습니다.”
***
“다음 소식입니다. 최근 들어 가계의 사교육비 부담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정부가 오는 6월 실시할 전국 연합 학력평가에 대한 브리핑 및 학부모 설명회를 개최했습니다. 자세한 소식, 현장에 나가 있는 임대수 기자를 통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임대수 기자!”
“네. 임대수입니다. 저는 지금 서울시청 뒤편에 위치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나와 있습니다.”
“임대수 기자. 정부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아닌 전국 연합 학력평가를 앞두고 브리핑을 개최했는데요. 그 배경이 어떻게 됩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언급되고 있지만, 전문가들이 하나로 꼽는 배경은 가계의 사교육비 부담 증가에 있습니다. 그로 인해 최근 몇몇 학부모모임에서는 공교육 정상화를 요구하며 직접 행동에 나서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교육비 증가요? 사교육비가 얼마나 증가했길래 학부모들이 시위에 나서게 된 겁니까?”
“2003년 29만 9,000원, 2006년 24만 2,000원, 2009년 24만 1,000원, 2013년 23만 9,000원으로 점점 줄어들던 사교육비가 2014년부터 대폭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조사에 의하면 올 초 전국 가계의 월평균 사교육비 지출액은 정부가 마지노선으로 생각하던 30만 원 선을 넘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전국 평균 사교육비가 30만 원이면 적지 않은 금액인데요. 그렇다면 임 기자. 서울지역 학생들의 월평균 사교육비 지출은 어떻게 됩니까?”
“사실 전국적으로 월평균 사교육비 지출이 줄어들고 있을 때에도, 서울지역 가계의 경우는 사교육비 지출이 계속 늘어나고 있었는데요. 23만 9,000원이던 2013년의 경우 서울 지역은 42만 7,000원이었고, 특히 강남의 경우는 월평균 65만 원을 넘은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올해의 경우 서울은 50만 원, 강남은 80만 원에 육박하고 있어, 사교육비의 비중이 가계에 상당한 부담을 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서울 지역 월평균 사교육비가 50만 원을 넘었다고요? 정말 부담이 아닐 수 없는데요. 갑자기 그렇게 늘어난 이유는 뭡니까?”
“그건 아무래도 지난해 치러진 대학수학능력평가시험의 난이도 실패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관계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문제가 너무 어렵게 나와서 낭패를 본 학생들이 많아지자, 정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겁니다. 공교육만으로는 믿을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졌고,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사교육에 대한 의존도를 높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스마트 기기의 보급이 사교육비 증가에 영향을 줬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스마트 기기의 보급이 교육비의 증가를 가져왔다고요? 그건 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오프라인 강의보다 온라인 강의가 훨씬 저렴한 것으로 아는데요.”
“가격은 저렴한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온라인 강의가 오프라인 강의의 대체재가 되지 못하고 보완재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학생들은 동영상 강의로 학원 강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집에서는 동영상 강의를 복습하는 모습이 생활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학교 수업에, 학원 수업에, 이제는 인터넷 강의까지. 학생들에게는 정말 부담이 될 것 같군요. 그래서 정부는 어떤 대책을 발표한 것입니까?”
“정책 자체는 평범합니다. 우선은 EBS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으로 보입니다. EBS 교재의 연계율을 기존의 70%에서 최소 80% ~ 90%까지 조정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EBS와 학교 수업만 충실히 공부하면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도록 난이도 또한 낮출 계획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학교 수업만 충실히 하면 좋은 성적을 받도록 하겠다. 수능 난이도를 쉽게 만들겠다. 이건 항상 들어보던 말이군요. 그밖에 특별한 정책 발표는 없었습니까?”
“네. 특별한 정책은 없지만, 원칙을 철저히 지켜 국민들이 실망하는 일이 절대로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설명이었습니다.”
“원칙을 지키겠다? 그것 또한 처음 듣는 이야기는 아니군요. 어쨌든 6월 모의평가 결과를 봐야 정부가 2017학년도 수능에 대해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윤곽이 드러나겠군요. 임 기자. 그렇다면 이번 정부의 발표를 들은 시민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시민들 대부분은 정부의 이번 발표에 여전히 의구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동안 정부의 교육정책이 워낙 갈팡질팡해서 신뢰가 생기지 않는다는 의견입니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확실하게 원칙을 지키겠다고 하니, 믿고 지켜보자는 시민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신뢰를 잃은 정부가 과연 잃었던 신뢰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 소식입니다.”
삐빅.
뉴스가 다음 소식으로 넘어가자 TV가 꺼졌다.
회의실에는 정부의 6월 모의평가에 대한 브리핑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건우를 비롯한 초이스 에듀의 몇몇 관계자들이 모여 있었다.
“세상에. 방금 저 뉴스 앵커의 어이없다는 표정 보셨어요? 제 기분이 지금 그래요. 이게 무슨 말장난도 아니고, 살다 살다 저렇게 바보 같은 정부 브리핑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TV가 꺼지자 손다정이 가장 먼저 불만을 털어놓았다.
자리하고 있던 대부분 사람도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르게 볼 수도 있습니다. 별다른 정책 발표 없이 원칙을 지켜나가겠다며 브리핑을 했으니, 그만큼 확실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 아닐까요?”
“우리 정보팀의 분석에 의하면 이번 정부발표의 배후에 크레이듀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네? 크레이듀가요? 아니, 왜요? 그건 지나친 음모론 같은데요. 방금 발표한 정책. 그러니까 EBS 교재의 연계율을 높이고 난이도를 낮추겠다는 것은 사교육 시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요소들이에요. 자기들도 피해 보는 일에 굳이 크레이듀가 개입할 필요가 있을까요?”
차지훈 팀장의 말에 손다정이 의문을 표했다. 그녀의 말처럼 상식적으로 보면 크레이듀의 개입은 말이 되지 않았다.
“저나 다른 팀원들도 그 사실이 마음에 걸려 아직 100% 확신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크레이듀의 움직임들이 심상치 않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오늘 아침에 저도 차 팀장님에게 보고를 받았는데, 걸리는 게 많았습니다. 얼마 전 크레이듀 나성천 대표가 교육부 장관을 만나 골프회동을 한 것도 그렇고. 구국 학부모연합이라고 최근 공교육 정상화 시위를 주도하는 단체가 있는데, 그곳 회장과 크레이듀의 정보실 직원이 잠깐 만나는 모습을 우리 정보팀이 포착했다고 합니다.”
“그럼 이게 뭐예요? 지금 방금 발표한 브리핑 내용이 전부 크레이듀 때문이라는 거예요? 대체 무슨 그런 일을 다 벌인대요? 와룡그룹이 모기업이니 정부도 좌지우지할 수 있다 이건가요? 게다가 시위대까지 고용해가면서 여론조작도 하고요? 차 팀장님. 두 사람이 만나는 모습을 포착했다면서요. 언론에 확 뿌릴 수 없어요?”
이런 쪽으로 익숙하지 않은 손다정이 너무 일차원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진이 있어도 워낙 짧은 시간의 만남이라 별다른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그런데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있어요. 대체 크레이듀는 왜 제 살 깎아 먹기를 하는 걸까요? 사교육 시장을 위축시키면 자기들도 손해를 볼 텐데 말이죠.”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크레이듀의 나성천 대표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와룡그룹의 마케팅 실장이면 이사급입니다. 그리고 하는 일의 중요도를 봤을 때는, 오너 일가족을 제외하고는 그룹 서열 5위 안에 들 정도의 엄청난 파워를 가지고 있던 사람입니다. 와룡그룹에서 그 정도 위치에 오르려면 단순히 머리만 좋아서만은 안 됩니다. 계책이나 책략 같은 모략에도 능해야 합니다. 운도 따라야 하고요. 그런 사람이 아무 생각도 없이 제 살 깎아 먹기를 할 리가 없습니다.”
천하의 차지훈 팀장도 크레이듀의 의도를 완벽하게 파악하는 건 불가능했다.
“어머. 계속 모르시기만 하네요. 그럼 차 팀장님이 아는 건 뭔가요?”
“네? 그…그게. 저…저. 아니. 그러니까.”
“호호호. 농담이에요. 그렇게 당황하시면 제가 미안하잖아요.”
“죄…죄송합니다.”
요즘 손다정은 한결같이 지극정성인 차지훈 팀장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고 있었다.
완전히 받아준 건 아니지만 가끔 이렇게 장난을 치며 호감을 조금씩 드러냈다.
아끼는 두 사람이 맺어진다는 건 건우로서도 기꺼운 일이었다.
“두 분. 그러다가 조만간 결혼식 한다고 청첩장 돌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헉! 대표님 너무하세요. 농담 두 번 했다간 돌잔치 초대장 돌린다고 하시겠어요.”
“하하하. 얼른 그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자! 그럼 다시 회의에 집중하죠. 크레이듀의 이번 행동은 저 또한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그 속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나성천 대표뿐만 아니라 세계교육의 핵심 역할을 했던 박유하 이사도 잊으면 안 됩니다. 머리 굴리기를 좋아하는 두 사람이 만났으니 어떤 시너지효과가 나올지 걱정이 됩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조용히 의견을 듣고 있던 안우현 팀 앨버트로스 팀장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크레이듀는 이미 어학원 시장과 편입학원 시장을 석권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세계교육을 인수했습니다. 입시학원 시장에 진입했으니 그들의 목표는 당연히 이곳 시장도 석권하는 것이겠죠. 그런데 어학원이나 편입학원과는 달리 입시학원 시장에는 대표님이라는 거대한 벽이 있습니다. 실력도 대단하지만, 무엇보다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어 함부로 건드리기도 어렵습니다.”
“이런. 그런 낯간지러운 칭찬은 민망하네요. 그래서요?”
“낯간지러운 칭찬이 아니라 사실을 말씀드린 겁니다. 지금 대표님의 영향력은 정말 어마어마하고 막강합니다. 천하의 와룡그룹이라고 해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만큼요. 대표님을 꺾어야 시장을 석권할 수 있는데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상황. 쉽게 생각하고 함부로 덤볐다가는 세계교육처럼 한 방에 훅 갈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크레이듀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습니다.”
“무슨 방법이 있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