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1화
“대표님은 이미 대한민국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거목이 되었습니다. 크레이듀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있을 겁니다. 박유하 이사가 그 당사자였으니까요. 대표님이나 초이스 에듀를 직접 공략할 방법은 없고, 그렇지만 공략은 해야 하고. 그러니 제 살을 깎아 먹더라도 사교육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 대표님의 이미지를 나쁘게 만들려는 속셈이 아닐까요?”
“오직 제 이미지를 하락시키기 위해 교육부 장관을 움직이고, 구국 학부모연합이라는 모임을 섭외해 시위까지 벌인단 말입니까? 좀 과한 것 같은데요.”
“다른 곳도 아니고 와룡그룹이라면 가능합니다. 그 정도 역량은 충분히 가지고 있으니까요. 지난번에 보셨지 않습니까? 연예인 마약 사건을 터트려서 세계교육에 대한 대중들의 시선을 돌려버린 일 말입니다. 고작 세계교육 하나 때문에 A급 연예인 카드 하나를 날려버렸습니다. 물량은 충분한 곳입니다. 그리고 사교육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대표님의 이미지가 하락하면 그때는 쉽게 대표님을 공략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는 거죠.”
“그건 저도 동감입니다. 와룡그룹은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라는 유훈이 있을 정도로 약자를 대할 때 무자비한 곳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죠. 이번 일도 와룡그룹이 벌였다면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저도 차 팀장님의 의견에 동감해요. 대표님만 몰락시킬 수 있다면 그 정도 희생은 충분히 치를 가치가 있다고 봐요. 지난 3월 매출이 계속 유지만 된다고 해도, 국내 매출 규모가 1조 원을 넘겨요. 선행학습을 생각하는 초등학교 6학년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재수생까지. 심지어 기초가 부족한 대학생들도 전공 수업을 듣기 전에 대표님의 수학과 과학 동영상 강의를 듣는다고 해요. 500만 명이 넘는 엄청난 규모의 시장이고, 교육열 하나만큼은 세계 최고인 국가가 대한민국이에요. 아무리 잘나가는 와룡그룹이라도 탐낼만하죠.”
안우현의 추측에 차지훈 팀장과 손다정도 동감하는 모습이었다.
“세 분의 의견이 일치하니까 저도 뭐라고 반박하기는 어렵군요. 그렇다면 EBS 교재의 연계율 상승도 결국에는 저를 타깃으로 한 것이군요. 수능시험 예측률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게 저의 가장 큰 장점인데, EBS 교재만 공부해도 충분하다면 그런 저의 장점은 사라지게 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군요.”
“그럼 서둘러 대책 마련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당장 해결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 아닌지 호들갑을 떠는 사람도 있었지만 건우의 표정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그렇지 않아도 고민하고 있었는데 시기가 좋군요. 차라리 잘되었습니다. 이참에 강의 동영상과 참고서 이북 그리고 학원비까지 모두 가격을 내리도록 합시다. 3,000원인 동영상 강의는 2,000원으로, 5,000원인 참고서 이북은 3,000원으로, 학원비는 10만 원에서 7만 원으로 조정합니다.”
“네? 대표님 그렇게 되면 수익이 반 토막 날 텐데요.”
“뭐 어떻습니까? 1년에 1조 원을 버나, 5,000억 원을 버나 무슨 차이가 있다고요. 어차피 죽을 때까지 써도 다 쓰지 못하고 죽을 돈입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수익이 줄어도 가격을 다운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1조나 5,000억이나 그게 그거라니 대표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 왠지 설득력이 있는 것 같군요.”
평생 써도 1조를 다 쓸 수 있을까?
건우는 얼마 전 미국에 다녀온 이후 돈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그때 만났던 빌 게이츠처럼 ‘전 재산을 다 기부하겠어.’ 이런 결심을 한 건 아니지만, 돈에 대한 집착은 어느 정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은 별도의 확인절차를 거쳐 무료로 이북 동영상을 볼 수 있도록 조치해주세요. 아, 참. 이에 대한 발표는 바로 하지 마세요. 정말 크레이듀의 개입이라면, 조만간 사교육 전체에 향했던 비난의 화살이 초이스 에듀로 향하는 날이 올 겁니다. 그때를 대비해두세요. 문제없죠?”
“물론이에요, 대표님. 제가 이래서 대표님을 존경한다니까요. 99석 가진 부자가 100석을 채우려고 없는 사람의 1석을 뺏는다는 말이 있는데, 대표님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어요. 젊은 나이에 어떻게 그런 집착을 떨칠 수 있는지 정말 놀라워요.”
“이런. 저도 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늙어 죽을 때까지 놀고먹을 수 있는 충분한 돈을 모았는데도 이렇게 열심히 일할 리가 있습니까? 그냥 욕심을 조금 내려놨을 뿐입니다. 그리고 EBS 교재의 연계율이 높아지는 문제는 일단 두고 보도록 합시다.”
“네? 아무 조치도 안 취하고요?”
“시험이 쉽게 나온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분명히 무슨 문제가 생길 겁니다. 조치는 그 이후에 취해도 늦지 않습니다.”
눈앞에 수능시험을 앞둔 것도 아니고 모의시험 한 번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문제가 생겨요? 무슨 문제인지 말씀해주시면 안 되나요?”
“확실한 건 아니니 일단 결과가 나오면 그때 이야기합시다. 그렇다고 해도 완전히 손 놓을 수는 없으니. 안 팀장님.”
“네. 대표님.”
“방금 뉴스를 봐서 알겠지만, EBS 교재 연계율을 높인다고 하네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물론입니다. 지금부터 우리 팀 앨버트로스를 풀가동해서 EBS 교재를 완벽하게 분석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오는 곳이 정해졌다면, 나올 문제는 뻔합니다. 대표님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그럼. 회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무슨 일이세요?”
회의가 끝나자 건우는 손다정만 따로 호출했다.
“뻘짓 좀 하려고요.”
“네? 뻘짓이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금부터 제가 학원 사업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터무니없는 일을 벌일 생각이거든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초이스 에듀의 무서운 시어머니인 손 팀장님에게는 우선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아서요.”
“제가 달리 시어머니같이 행동하겠어요? 대표님이 자꾸 이상한 짓을 하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요! 어휴. 게임회사 인수하고 잠잠하다 싶더니 그 병이 또 도지셨나 보네요. 게임회사도 보세요. 제가 반대했는데도 바득바득 우겨서 인수하더니, 벌어온 돈은 없고 그동안 개발비다 뭐다 해서 들어간 돈만 수십억 원이잖아요.”
10여 년 후에 세계 최고의 게임을 만들어 내는 레브 소프트의 문진수 사장을 우연히 만난 건우. 설강그룹과의 문제로 어려움에 처한 그를 건우는 도저히 모른척할 수 없었다.
휴머니즘이 아니라 계산적으로만 봐도 문진수 사장은 수십조 원의 부가가치가 있는 게임을 만들어 낼, 무궁무진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손다정 입장에서야 그런 사실을 알 길이 없으니 들어가는 돈만 있고 나오는 돈은 없는 게임 회사가 당연히 눈에 거슬렸을 테지만.
“하하. 아직은 투자라고 생각하세요. 혹시 알아요. 세계 최고의 게임이라도 개발할지. 그렇게만 되면 학원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어다 줄 수도 있어요. 괜히 그때 가서 민망해하지 말고요.”
“그래요. 대표님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 거겠죠. 믿어지진 않지만 그래도 어쩌겠어요. 대표님이 지금까지 허튼짓은 해도 허튼소리를 한 적은 없으니 말이죠. 그래서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벌이시려고요? 게임회사에 이어 만화회사라도 인수하게요?”
“오! 만화회사를 인수해도 되나요?”
“당연히 안 되죠! 절대 게임이나 만화를 비하하는 건 아니지만요. 대표님은 교육사업을 하시는 분이라고요. 그런 분이 게임에 이어 만화사업에까지 진출한다고 해보세요. 사람들이 어떤 시선으로 볼지.”
“빨리 그런 선입견이 없어져야 할 텐데.”
“어쩌겠어요.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하잖아요. 지금 대표님의 가장 강점은 강의 능력이 아니에요. 그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게 국민들의 대표님에 대한 신뢰라고요. 와룡그룹 보세요. 그 대단한 기업이 대표님의 신뢰를 깨뜨리려고 하는 짓을 보세요. 정말 기도 안 찰 노릇이지만, 그런 대단한 그룹도 껄끄러워할 만큼 대표님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는 대단하다고요.”
“알죠. 당연히. 만화회사를 인수한다는 건 농담입니다, 농담.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것보다 더 심한 뻘짓일 수도 있습니다.”
“뭐…뭐라고요?”
“수십, 수백억 원 규모가 아니라 최소 조 단위 이상이 들어갈 수도 있거든요.”
“네? 조 단위 이상이요? 제가 지금 잘못들은 게 아니죠?”
“맞게 들었어요.”
“대…대체 무슨 일을 벌이시려고요?”
상상도 못 한 엄청난 스케일에 손다정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쉽게 말해 인벤션 컴퍼니를 만들려고요.”
“인벤션 컴퍼니요? 대표님! 제가 진짜 대표님을 존경하거든요. 하지만 갑자기 회사라니요. 이건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대표님이 공대 출신이면 또 이해하겠어요. 그런데 생물학과에 의대 중퇴잖아요. 물건을 개발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 갑자기 인벤션 컴퍼니라니요!”
“지금의 S그룹을 만든 이군희 회장도 공대 출신이 아닙니다. 심지어 이과 출신도 아닙니다. 와세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거든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전 회장도 하버드대학교 법대 중퇴를 하고 세계적인 소프트웨어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전공이 꼭 중요한 것은 아니죠.”
“하지만 대표님과는 달라요. 이군희 회장은 재벌집 자식이었잖아요. 이미 체계가 잡힌 회사를 잘 운영하면 되는 거지, 직접 현장에서 제품을 개발할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빌 게이츠는 법대 출신이라고 해도 컴퓨터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어요.”
“음. 그건 그러네요. 지금부터라도 공부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대표님!”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헤실헤실 웃는 모습에 손다정은 더욱 열이 받았다.
“제가 이번에 미국에서 하버드 기초과학 교수님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죠. 믿기 힘들겠지만, 갑자기 수많은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하게 샘솟기 시작했어요. 물론 손 팀장님 말처럼 제가 그 모든 걸 발명할 수 있는 능력도 시간도 없어요. 그래서 인벤션 컴퍼니 만들려는 거예요. 제 아이디어를 실현해줄 수 있는 창의력 넘치는 기술자들이 필요하거든요.”
건우의 미국행은 알 속에 갇혀 있던 그를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손다정에게 방금 했던 말처럼 빌 게이츠, 그리고 하버드대학교의 기초과학 교수들과의 대화는 건우를 예전보다 정신적으로 몇 배 더 성장시켰다.
무궁무진하게 샘솟기 시작했다는 아이디어가 그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 예전 삶을 통해 얻은 미래 지식이지만, 별로 개의치 않기로 했다.
결과적으로만 보면 누군가의 아이디를 빼앗고 그 사람의 미래를 바꿔버리는 몰염치하고 몰지각한 행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삶에서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불확실한 미래의 이야기일 뿐이다.
어차피 자신의 개입으로 인해 조금씩이지만 바뀌게 되는 미래라면 방관하는 자세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서서 좋은 일에 이용하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지 않을까?
건우는 그렇게 편하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결심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결심을 한 이후에도 세상에 대해서 여전히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지만, 이번 미국 방문이 건우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휴우. 제가 반대를 해도 무슨 소용 있겠어요. 솔직히 저 같은 범재가 대표님 같은 천재를 어떻게 재단하겠어요. 이건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이에요. 차라리 어설픈 수재였다면 제가 바지 끄덩이라도 붙잡고 반대하겠지만, 대표님이라면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지도 모르죠.”
“드디어 저를 알아주시는 건가요?”
“알기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사실 마이크로소프트와 합자회사까지 만드는 마당에, 학원 강사만 하라며 주저앉히는 것도 웃긴 일이잖아요. 그러니 제 눈치 보지 마시고 편안하게 하세요.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와! 시어머니 같은 손 팀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갑자기 적응이 안 되려고 해요. 어쨌든 믿어줘서 고마워요. 회사 이름은 ‘초이스 이노베이션’이라고 지었어요. 말 그대로 그 회사를 통해 혁신을 이룰 생각이거든요. 우선은 회사를 지을 수 있는 부지를 알아봐 주세요. 아주아주 넓은 부지로요.”
“얼마나 넓은 부지를 원하시는데요.”
“장기적으로는 하나의 타운을 만들 생각이에요. 창의적인 인재들이 키울 수 있는 교육 도시를 만드는 게 저의 목표거든요. 초이스 이노베이션 건물이 그 첫 발걸음이 되겠네요. 그러니 건물 몇 개 들어설 공간이 아니라 작은 도시 정도는 만들 수 있는 넓은 부지가 필요해요.”
꿈을 이야기하는 건우의 얼굴은 행복 그 자체였다. 그 모습을 보며 손다정은 도저히 건우를 말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도시라고 하셨어요? 맙소사! 그 정도면 너비면 아무리 값이 싼 곳이라도 해도 최소 수천억 원은 들어갈걸요? 수도권 근처면 조 단위의 비용이 발생할지도 몰라요.”
“그렇죠. 당연히 혼자서는 불가능해요. 투자를 받을 생각이에요. 도시를 만드는 일은 돈만 있어서는 불가능하거든요. 투자자들의 배경도 필요해요. 그래야 날파리들이 끼어드는 걸 미연에 방지할 수 있어요. 운이 좋았는지 마이크로소프트의 사이티 카푸르 회장에게 이야기를 꺼냈더니 곧바로 투자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네? 어떤 세부적인 기획서도 없이 무작정 회사를 만든다고 했는데도 투자를 하겠다고 해요? 다른 곳도 아니고 마이크로소프트가요?”
“그러게요. 좀 의외였는데, 그 양반 말로는 제가 세계의 혁신을 이끌어 갈 차세대 인재라나 뭐라나. 하하하.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니 좀 민망하긴 하네요. 마이크로소프트는 마땅히 투자할 곳이 없어서 걱정이지, 돈이 없어서 걱정인 곳은 아니거든요. 얼핏 들었는데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돈이 금고에 쌓여있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리 회장이라고 하지만, 이사회에서 반대하면 어떻게 하려고요?”
“그건 크게 걱정이 없을 것 같아요. 일단 대주주인 빌 게이츠 전 회장님이 저를 굉장히 좋게 봤고. 윌리암 이사나 마이클 이사도 제게 굉장히 호의적이에요. 그리고 신중한 성격으로 알려진 사이티 카푸르 회장이 장담했으니 투자를 받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듯해요.”
“그래서 얼마나 투자한다고 해요?”
“많이는 못 하고 우선 30억 달러 정도?”
“네? 30억 달러면 3조가 넘는 돈이잖아요! 그게 많이 못 하는 거예요? 우리 대표님 정말 스케일 너무 커지셨어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