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5화
- 듣긴 누구한테 들어, 예전 매니저한테 들었지. 그 친구가 이영희 걔가 남긴 유서를 가지고 있더라고. 그래서 몇천 던져주고 받아왔어. 그 친구가 원한이 많은지 유서를 넘기는 자리에서 미주알고주알 당신이 저지른 죄를 전부 까발려 준 덕분에 이것저것 알아낸 게 많아.
“대체 원하는 게 뭐야? 돈이야? 얼마를 원하는 거야? 말해.”
- 새끼 안 믿네. 와룡그룹이라니까.
“지랄 말고 원하는 돈을 말해. 너도 돈이 필요하니까 이 지랄 떠는 거 아니야?”
- 자꾸 이렇게 멍청하게 굴면 내일 아침에 기사 하나 내줄게. 원하는 기사가 뭐야? 원정도박? 소속사 여가수 성폭행? 탈세? 성 접대? 이건 뭐 거의 죄짓지 않는 걸 찾는 게 더 힘들어. 너 같은 쓰레기도 찾기 힘든데. 말해. 뭘 기사로 만들어 줄까?
“돈이 필요 없으면 대체 원하는 게 뭐야? 말을 하라고.”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위상백은 그제야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상대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겁이 났지만 티를 안 내려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 반말 그거 되게 듣기 거북하네. 일단 존댓말을 듣고 싶은데.
“뭐? 당신 나랑 지금 장난하자는 거야?”
- 싫어? 싫음 내일 아침 기사를 확인해 보든지.
“워, 원하는 게 뭡니까? 신고하실 건 아니지 않습니까? 원하는 걸 말씀해주셔야 저도 들어드릴 수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불리한 싸움이었다. 상대는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 잘 있는데 자신은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다.
위상백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을 높였다.
- 그래. 바로 그거야. 그렇게 존댓말을 하니까 얼마나 듣기 좋아.
“알았으니까 원하는 것부터 말씀하시죠.”
- 후훗. 끝까지 자존심은 세우겠다는 거네. 좋아.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런 깡다구가 있어야 우리가 원하는 걸 들어줄 수 있을 테니까.
우리?
위상백은 전화 속 남자의 ‘우리’라는 말이 신경 쓰였다. 혼자가 아니라는 뜻이고, 거기에 전문적인 냄새까지 났다.
“자존심을 세우는 게 아니라 시간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 원하는 건 이미 아까 이야기했잖아. 나는 와룡그룹 사람이고. 만나자고. 지금까지 무슨 말을 들은 거야?
“아…! 정말 와룡그룹 사람이란 말입니까?”
- 내가 그런 걸로 거짓말할 이유가 있나?
“그건 아니지만.”
- 그러니까 바쁘니 어쩌니 헛소리 그만하고 지금 당장 이리로 와줬으면 좋겠어. 무서우면 너랑 호형호제한다는 불곰파 보스한테 연락해도 되고.
남자의 마지막 말에 위상백은 완전히 무너졌다. 믿고 있는 마지막 카드가 완전히 까발려진 탓이다.
“아닙니다. 그럴 일 없습니다. 어딘지 알려주시면 지금 당장 달려가겠습니다.”
***
“이…이게 다 뭡니까?”
정체불명 남자의 전화를 받고 송파구에 있는 카인드 호텔 객실에 들어선 위상백은 내부 벽면에 가득 붙어 있는 사진을 보며 놀라 물었다.
“뭐긴 뭐야. 왼쪽 벽면에 붙어 있는 사진은 위상백 당신이 저지른 나쁜 짓들에 대한 증거야. 전화 통화로 이야기했지? 굉장히 많아. 원정 도박, 외화 밀반출, 성폭행, 성 접대, 탈세, 투기 등등. 나도 놀랐어.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거든.”
가면을 쓰고 있어서 남자의 정체는 알 길이 없었다. 건장한 체격의 남자라는 사실 말고는.
얼굴을 가렸음에도 유들거리는 모습이 굉장히 재수 없어 보였지만 위상백은 부들부들 떨며 두 주먹을 꽉 쥐고 참았다.
지금 칼자루를 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눈앞의 남자였다.
혹시나 싶어 사진을 천천히 훑어 봤다. 그러나 모두 사실이었다. 남자가 자신 있어 할 만했다.
사진을 보던 위상백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체념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증거가 분명한 이상 반항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와룡그룹에서 나오셨다고 하셨죠? 거기서 제게 원하는 게 있으니 여기로 부른 것일 테죠. 전화로도 계속 물었지만 원하는 게 대체 뭡니까? 우리 애들 성 접대를 원하는 겁니까? 그렇다면 이런 방법을 동원하지 않아도 들어드렸을 텐데요.”
“생각보다 훨씬 멍청하군. 설마 겨우 그딴 것 때문에 이런 귀찮은 짓을 하는 것 같아? 왼쪽 사진을 다 봤으면 이젠 오른쪽 사진을 봐. 그럼 내가 왜 당신을 이곳에 불렀는지 알게 될 거야.”
쉽게 원하는 걸 말하지 않는 상대를 보며 위상백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로서는 성윤기 실장의 말을 따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무기력하게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 벽면에는 스칼라 사진이 가득했다.
아니라고 하더니 스칼라의 성 접대를 원하는 건가 싶어 사진을 유심히 훑었다.
사진이 좀 이상했다. 스칼라 옆에 남자가 같이 있는 모습이 많이 찍혔다. 요즘 인기가 높아져서 좀 풀어줬더니 남자를 사귀는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인기 좀 생겼다고 풀어주는 게 아니었는데.’
위상백은 이런 후회를 하며 사진을 좀 더 자세히 봤다. 남자가 눈에 익었다.
“어! 이 남자 최건우 같은데.”
“맞아. 최건우. 두 사람이 연애 중이더라고. 사장 몰래. 그런데 재미있는 건 마지막 사진들이야. 스칼라가 취해서 최건우에게 업혀서 나가. 잠시 후 최건우의 차가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 그리고 다음날 스칼라는 원래 입었던 옷이 아니라 트레이닝복을 입고 아파트 단지를 몰래 빠져나가지. 여기서 문제. 저 날 두 사람은 무슨 일이 있었을까?”
“보나 마나 뻔한 것 아닙니까? 저 둘이 밤새 떡…이 아니라 하룻밤을 보냈겠네요. 혹시 저 둘을 헤어지게 하는 걸 원하십니까?”
위상백은 혼자 이런 추측을 했다.
현재 최건우는 대한민국 최고의 신랑감으로 꼽힌다. 정치권뿐만 아니라 재계에서도 상당히 탐을 낸다고 한다.
그건 와룡그룹도 마찬가지. 그룹 직계 딸 중 한 명을 최건우와 결혼시키고 싶은데 조사해보니 옆에 스칼라가 있었다.
그 사살이 못마땅한 와룡그룹이 귀찮지만 위상백을 협박해 두 사람을 헤어지게 하려고 한다.
왜?
스칼라와 헤어지게 만든 배후에 와룡그룹이 있다는 걸 최건우가 안다면, 와룡그룹에 원한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에.
말이 안 되는 추측이라는 건 아는데 이것 말고는 마땅히 생각나는 이유가 없었다.
“틀렸어. 두 사람이 사귀든 헤어지든 그건 우리와 상관없어. 우리가 원하는 건 최건우의 몰락이야.”
“네? 제가 최건우를 어떻게 몰락시킵니까? 세계그룹도 실패한 일이라고 들었는데.”
“그러니까 이야기를 만들어야지. 지금부터 잘 들어. 스칼라는 최건우한테 성폭행을 당한 거야.”
“네? 성폭행이라니요. 그게 갑자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쓸데없는 지방방송 끄고 끝까지 들어. 지지든 볶든 삶든 당신이 스칼라를 설득해서 최건우에게 성폭행당했다는 말이 나오도록 만들어. 협박을 해도 되고 돈을 쥐여줘도 돼. 감방에 들어가 썩고 싶지 않으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을 거야.”
“스칼라가 제 말을 들을 리가 없습니다. 지금 한창 인기몰이 중인데 미쳤다고 그런 걸 고백하겠습니까? 스칼라 걔가 돈 욕심이 제법 많습니다. 이대로 가면 금방 부자가 될 수 있는데 굳이 그런 거짓말을 꾸며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리가 없습니다.”
거기엔 위상백 본인의 마음도 담겨 있었다. 지금 그에게 돈줄은 옐로우 레이디 밖에 없는데 스스로 그 줄을 끊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까 이야기했지. 지지든 볶든 삶든 그건 당신 알아서 하라고. 그런 것까지 내가 설명해줘야 하나? 싫으면 감방에 기어들어 가면 돼.”
“아니, 그게 아니라. 저기 선생님. 그냥 협박만 해서는 스칼라는 절대 말을 들을 애가 아닙니다.”
“그럼 돈을 쥐여주면 말을 듣나?”
“한두 푼으론 안 될 겁니다.”
“여기 가방 받아.”
가면을 쓴 남자는 구석에 있던 보스턴백을 가지고 와 바닥에 던졌다.
“이게 뭡니까?”
“돈이야. 10억.”
“이걸 스칼라에 전하라는 겁니까?”
“그건 당신 알아서 해. 혼자 꿀꺽하든 그걸로 스칼라를 구워삶든. 얼마를 쓰던지 남은 돈은 전부 당신 게 되겠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계속 채찍질만 하던 남자가 처음으로 내민 사탕에 위상백의 두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급격히 흔들렸다.
‘그럼 뭐야. 스칼라한테 5억을 건네면 남은 5억은 내 거라는 거야? 아니지. 그년한테 5억이나 줄 필요는 없지. 어르고 달래면 돈은 안 줘도 될지 몰라. 그럼 가만히 앉아서 10억이 생기는 건가. 흐흐흐.’
스칼라와 옐로우 레이디는 위상백 입장에서 보면 잘 나가는 상품이다.
그 상품에 흠집이 나는 게 아쉽지만 지은 죄가 있어 감방에 안 가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성폭행을 한 것도 아니고 성폭행을 당한 거라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대중들의 동정을 받다가 적당한 시기에 다시 활동을 시작하면 된다.
위상백은 머리를 빠르게 굴리며 계산을 끝냈다. 욕심이 많아서 그렇지 절대 멍청한 인간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기, 다음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그냥 믿어. 이번 일만 끝나면 서로 볼 일이 없으니까. 우리가 그렇게 무대포였으면 대가로 이렇게 돈을 주지도 않았을 거야. 나름 상식적이니까 그냥 믿으면 돼.”
“네. 그럼 선생님만 믿고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여기서 증거를 모두 지워달라고 생떼를 부리기도 힘들었다.
어차피 칼자루는 저쪽이 쥐고 있다. 가면을 쓴 남자의 말처럼 그냥 믿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위상백은 바닥에 떨어진 보스턴백을 가슴에 품고 조심스레 호텔을 빠져나갔다.
호텔 방에 혼자 남게 된 남자는 눈을 가리고 있던 가면을 천천히 벗었다.
Rrrr
- 네. 여보세요.
“박 이사님. 저 성윤기 실장입니다.”
- 네. 성 실장님. 어떻게 되었습니까?
“방금 위상백을 만나 돈을 건넸습니다. 그런데 쓰레기 같은 놈에게 그런 거액을 넘겨도 되겠습니까?
- 그래야 안전합니다. 쥐도 구석에 몰리면 문다고 했습니다. 이래도 저래도 거지가 된다면 이판사판이라며 언론에 자신이 협박당했다고 폭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놈들은 적당히 돈을 쥐여 줘야 안전합니다.
“워낙 인생을 막 사는 놈이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런데 이렇게 비밀스럽게 일을 진행하실 거면서 와룡그룹이라는 건 굳이 왜 알리라고 하신 겁니까?”
- 그래야 우리를 의심 안 합니다. 대놓고 와룡그룹이라고 했으니까 와룡그룹은 빼고 생각할 걸요. 뭐,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진짜 와룡그룹이 끼어들었다고 알게 된다면 무서워서라도 딴생각을 못 할 겁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
“당장 스칼라 나한테 오라고 해.”
회사에 복귀한 위상백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스칼라를 호출했다.
거액을 받았지만 협박당한 것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게 다 스칼라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짜증이 났다.
“사장님. 부르셨어요.”
잠시 후 스칼라가 사장실로 찾아왔다. 갑작스러운 호출에 대박 광고라도 들어온 건가 싶어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던 그녀는 충혈된 위상백의 눈을 보고 흠칫 놀랐다.
“야! 복금실이 너. 대체 행동거지를 어떻게 하고 다니는 거야?”
“네?”
촌스러운 본명을 부르는 건 위상백이 화가 났을 때만 하는 행동이다.
“대체 행동거지를 어떻게 하고 다니느냐고!”
“제가 뭘요.”
“뭘요? 요것 봐라. 지금 내 앞에서 시치미를 떼네. 너 요즘 남자 만나지?”
“나…남자는 무슨 남자요. 남자 안 만나요.”
순간 건우가 생각났지만 설마 했다. 차라리 만나는 사이면 좋으련만 친구 사이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고 있었다.
“끝까지 오리발이네. 최건우. 이래도 몰라?”
“건우요? 에이. 건우는 그냥 친구예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
“친구? 친군데 친구 집에 가서 자고 다음날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나와? X발. 복금실 너 똑바로 이야기 안 해?”
“그…그걸 사장님이 어떻게 아세요? 저 미행했어요?”
그날은 죽도록 잊고 싶은 스칼라 인생 최악의 흑역사였다.
한껏 멋을 부렸는데 정작 당사자는 봐주지 않았고, 홧김에 술을 마시다가 실려 가지를 않나, 건우 집에 가서는 자다 토하는 바람에 이불이며 협찬 받은 옷이며 전부 걸레로 만들어 버렸다.
옷값도 옷값이지만 건우 앞에서 개망신을 당한 날인데 그걸 위상백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말이 날카롭게 나갔다.
“미행은 개뿔. 내가 항상 이야기했지. 행동거지 조심하라고. 인기 좀 올랐다고 까불면 한방에 갈 수 있다고 했어, 안 했어?”
“하셨어요.”
“그런데 왜 그딴 짓을 해서 기자들에게 사진을 찍히느냐고 이년아!”
“기자들이요?”
“그래 기자들. 너도 눈이 있으면 한 번 봐라.”
하나의 쇼였다. 자기가 저지른 일로 협박을 받았다고 이야기를 할 순 없으니 있지도 않은 기자를 팔았다.
“이…이게 전부.”
제멋대로 바닥에 떨어진 사진들을 재빨리 줍던 스칼라의 손이 잘게 떨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