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147화 (147/256)

제147화

“어디 마음대로 해봐요. 내가 당하고 가만히 있나. 사장님도 제 성격 알죠. 한번 원한을 가지면 반드시 갚고야 마는 지랄 같은 성격이라는 거요. 한번 해봐요. 두 배, 아니 열 배로 갚을 테니까. 어디 해봐요. 해보라니까.”

참다못한 제니퍼가 위상백 사장의 협박에 악이 받쳐 바득바득 대들기 시작했다.

그룹 멤버 중 가장 성격이 독하고 강단 있기로 유명했다.

지하철에서 성추행하는 중년 남자와 난투극을 벌이기도 하고, 자기 돈을 떼먹고 도망간 친구를 잡으려고 맹장이 터진 줄도 모르고 잠복을 하다가 3일 만에 병원에 실려간 적도 있었다.

독하기로 따지면 산전수전 다 겪은 위상백도 한 수 물러야 할 만큼 대단한 그녀였지만, 그런 그녀를 온순한 양으로 만드는 사람이 바로 스칼라였다.

연습생 시절 독한 성격으로 몇 번이나 곤란한 지경에 처했던 제니퍼를 스칼라가 자주 도와주면서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믿고 의지하는 언니가 지금 위기에 처했다. 제니퍼로서는 절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때려죽일 듯 펄펄 뛰는 위성백 사장의 모습이 흉흉했지만, 전혀 굴하지 않고 오히려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스칼라의 방문을 굳건히 지켰다.

“미친. 네가 그렇게 겁을 준다고 내가 못할 것 같아?”

“그러니까 해보라고요. 내가 정말 미X년이 어떤 모습인지 제대로 보여드릴게요.”

“이런 썅!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언제까지 이럴 수 있는지 한 번 두고 보자.”

마음 같아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 네 명 모두 요절을 내버리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아무리 남자라도 한번에 여자 네 명을 상대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고,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한 명이 마음먹고 도망가서 경찰에 신고라도 해버리면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린다.

화가 났지만 일단 마음을 식혔다.

‘겁도 없이 기어오르는 걸 보니 그동안 내가 너무 풀어줬어. 다시는 대들지 못하도록 제대로 손을 봐줘야 해.’

위상백은 평소 친하게 지내는 불곰파를 떠올렸다. 잔인하기로 소문난 조직이다. 그들이라면 옐로우 레이디를 제대로 교육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교육 과정에서 다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상관없었다. 지금 자기 코가 석자다. 그런 것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제니퍼의 철벽 방어에 막힌 위성백은 숙소에서 빠져나와 불곰파 조직 사무실로 향했다.

***

“갔어?”

“응. 갔어. 방금 차 타고 떠났어.”

제니퍼의 물음에 창가를 내다보던 셋째 소린이 대답했다.

“미안해. 얘들아. 이런 일을 겪게 해서.”

“아니야. 언니. 미안해하지 마. 이건 언니 잘못이 아니잖아.”

“그래 언니. 그리고 아직 기사가 나간 것도 아니야. 방법을 찾아보면 무슨 수가 생길 거야.”

걱정이 산더미 같았지만 동그랗게 모여앉아 서로를 다독여 주는 네 사람.

제니퍼뿐만 아니라 소린과 은아가 곤란한 일을 겪어도 두 팔 걷고 자기 일처럼 나서서 해결해주었던 스칼라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언니. 우리 그냥 이렇게 있어도 되는 거야. 아까 사장 눈빛 장난 아니었어. 눈알이 갑자기 희번덕거리는데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더라.”

“나도나도. 공포영화 같은 곳에서 나오는 사이코패스 살인마를 보는 것 같았어. 사장 놈 그렇게 눈 뒤집히면 제대로 사고를 치던데.”

“예전에 우리 소속사에서 연기하던 언니 있잖아. 사장이 눈 뒤집히고 며칠 있다가 자살했다고 해서, 그때 나랑 같이 있던 애들이 사장 때문 아니냐고 수군수군 거렸어. 무섭다고 그만둔 애들도 있었어.”

“그거 정말이야?”

동생들이 저마다 조금 전 상황을 이야기하는 사이 스칼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아까 방에 피신해 있는다고 위상백의 얼굴이 어떤지 못 봤다.

그리고 옐로우 레이디 멤버 중 위상백의 두 얼굴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뭐가?”

“사장 눈알이 뒤집혔다는 거 정말이야?”

“응. 나도 봤고, 소린이도 봤다고 그러잖아. 소린아 맞지?”

“응. 언니. 그런 건 공포영화에서나 나오는 줄 알았어. 너무 이상해서 우리한테 겁주려고 일부러 저러나 했다니까.”

“안 되겠다. 일단 너희들이라도 자리를 피해.”

“뭐? 갑자기 왜?”

“조용히 하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예감이 안 좋아.”

“언니. 정말 예감이 안 좋으면 같이 나가야지!”

“괜찮을 거야. 그냥 예감만 그래. 아마 별일 없을 거야. 이따 사장 화 좀 풀려서 오면 그때 내가 다시 차분히 이야기해볼게.”

괜찮다고 하지만 스칼라의 안색은 더욱 나빠졌다. 그녀의 얼굴을 보며 세 사람도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지 말고 같이 가.”

“제니퍼 너, 언니 말 안 들을래? 지금 숙소 앞에 매니저 오빠가 지키고 있을 거 아니야. 너희는 몰라도 나까지 나간다면 분명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일단 내가 가서 한 번 물어볼게.”

제니퍼는 믿기지 않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얼른 숙소 밖으로 나갔다가 금방 시무룩한 얼굴로 돌아왔다.

“뭐래?”

“오늘은 사장 놈이 엄명을 내려서 외출금지래. 어쩌지?”

“언니. 불안하면 경찰에 신고할까?”

“신고해서 뭐라고 할 건데? 사장 눈이 뒤집혀서 무서우니 도와달라고 할 거야?”

“그건 아니지만. 그럼 어떡해? 도움 청할 사람 없어? 엄마 아빠한테라도 이야기해볼까?”

“무슨 수로. 아침에 매니저 오빠가 우리 휴대폰 다 압수해갔는데.”

스칼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지만 온몸에 오돌토돌 소름이 돋는 게 느낌이 안 좋았다. 꼭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예전에 연기하던 언니도 그런 기분을 느끼고 얼마 되지 않아 자살 소식을 들었다.

무섭기도 해서 그냥 설마설마 하며 넘어갔지만 동생들이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다.

대체 도움이 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사장이 함부로 행동하지 못할 만큼 힘 있는 사람이야 한다.

그녀 주변에 그 정도 힘이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만 있었다. 사실 이미 한참 전부터 생각났던 사람이었다.

혼자만의 짝사랑이었지만 가장 의지하고 싶은 사람이었으니까.

이런 부탁을 해도 될까 망설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건우밖에 없었다.

“은아야.”

“응. 언니.”

“매니저 오빠가 너를 유독 귀여워하잖아. 우린 안 돼도, 잠깐 나갔다 온다고 하면 너는 될 거야. 생리 시작해서 생리대 사러 가야 한다고 졸라봐. 그럼 들어줄 거야.”

“나 혼자만 빠져나가라고?”

은아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절대 그럴 수 없다는 듯 양팔로 팔짱을 낀 채.

“그게 아니야. 이 돈으로 택시를 타고 초이스 에듀 본점으로 가자고 해. 그리고 건우를 만나게 해달라고 해. 내가 보냈다고 하면 만나게 해줄 거야. 만나면 사정 이야기하고 도와달라고 해.”

스칼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지갑에 넣어둔 오만원권을 은아에게 건넸다.

“건우면 최건우 오빠님?”

‘오빠님’은 은아의 독특한 말투다.

“그래, 최건우. 건우라면 사장도 절대 함부로 못 대할 거야.”

“우릴 도와줄까?”

“건우라면 도와줄 거야. 게다가 건우도 관련된 일이잖아. 무조건 도와줄 거니까 안심해. 할 수 있지?”

“알았어. 언니. 내가 최대한 빨리 최건우 오빠님 데리고 올게. 그러니까 안심하고 기다려.”

“천천히 가도 되니까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알았지?”

“치. 언니는 아직도 날 어린애 취급한다니까. 알았어, 조심할게. 그럼 나 나갔다 올게.”

모두의 배웅을 받은 은아는 모자를 눌러쓰고 검은색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밖으로 나갔다.

“넌 또 왜?”

문을 나서 계단을 내려오자 입구를 지키고 있던 매니저가 앞을 막았다.

옐로우 레이디 숙소는 소속사 근처 5층짜리 허름한 빌라에 자리했다.

숙소로 올라가는 같은 통로에 층마다 각각 2개씩 총 10개의 집이 있는데 그곳은 모두 늪 매니지먼트 소속 연예인들 또는 연습생들이 사용하고 있다.

그 통로는 빌라의 가장 안쪽에 있고, 들어가는 1층 입구에 경비실을 만들었다. 그리고 직원들이 상주해 경비처럼 그곳을 관리하고 있어 외부인 출입이 어렵다.

좋게 보면 사생활 보호가 편한 시스템이지만, 그곳에서 나쁜 일이 일어나도 외부에 알리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저 잠깐 편의점에 다녀오면 안 돼요?”

“편의점은 뭐하려고? 아까 사장님이 너희들 절대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고 했단 말이야.”

“생리를 시작했는데 생리대가 떨어져서요. 생리대만 사서 빨리 돌아올게요.”

“새…생리대?”

아무리 매니저라도 남자인지라 여자 멤버의 생리 문제는 영 어색했다.

“네.”

“아이참. 사장님이 절대 안 된다고 했는데.”

“그럼 매니저 오빠님이 사다 주실래요? 좋은 느낌에서 나오는 날개 달린 대형….”

“아…아니야.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 없어. 난 여기 지켜야 해서 못 가니까 어디 가지 말고 생리대만 사서 곧장 돌아와야 한다.”

“그럼요. 사장님 무서워서라도 곧장 돌아와야죠. 헤헤.”

“그래. 아까 보니까 사장님 엄청나게 화나신 것 같더라. 스칼라 때문이라고 해도 일단 몸조심하는 게 좋아.”

“네. 그럼 다녀올게요.”

빠른 걸음으로 빌라를 빠져나가는 은아의 손엔 스칼라가 준 오만원권 지폐가 꼭 쥐어져 있었다.

***

은아를 태운 택시가 무사히 초이스 에듀 본점에 도착했다.

은아는 스칼라가 준 돈을 던지듯 건네고 거스름돈도 챙기지 않고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쌍둥이 건물을 향해 뛰었다.

입구에 있는 유리문을 힘껏 밀었다. 수업 중인지 로비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은아는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문 왼편에 있는 접수처로 향했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직원이 물었다.

“최건우 오빠님 아니, 최건우 선생님을 뵙고 싶어서 왔어요.”

“아…! 최건우 선생님을요. 실례지만 무슨 일이시죠?”

건우를 직접 만나고 싶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하루에도 수십 명이다.

기자도 있고, 학부모도 있고, 학생도 있다. 하지만 그들 중 건우를 직접 만났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꼭 만나야 할 일이 있어서요.”

“꼭 만나야 할 일이요? 아, 그러시구나. 그런데 고객님. 죄송하지만 최건우 대표님이 바쁘셔서 개인 면담은 어렵습니다. 원하는 상담내용이 있으시면 해당 부서에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저는 최건우 선생님을 꼭 만나야 하는데요. 어떻게 안 될까요?”

“죄송합니다. 합당한 사유가 없는 한 개별 면담은 어렵습니다.”

건우와 개인 면담을 원할 때 대응 매뉴얼이 있다. 지금처럼 웃는 얼굴을 하고 앵무새처럼 ‘개별 면담은 어렵다’고 반복하는 게 첫 번째 방법이다.

행패를 부릴 기미가 보인다면 관리팀 직원을 호출한다. 그게 두 번째 방법이다. 그것도 안 되면 마지막 방법으로 경찰에 신고한다.

“저는 꼭 최건우 선생님을 만나야 할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까 무슨 일인지 말씀해주시면 제가 판단해서 적절한 조처를 해드리겠습니다.”

마음은 다급한데 직원의 얼굴은 이런 일을 자주 겪었다는 듯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은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하는 수 없이 모자와 마스크를 벗었다.

“안녕하세요. 옐로우 레이디 은아입니다.”

“어…! 어!”

평소 하듯이 90도로 꾸벅 인사하자 직원은 깜짝 놀란 얼굴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죄송한데 정말 급한 일이라서요. 최건우 선생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아. 잠시만요. 관리팀에 연락해보겠습니다.”

은아는 다른 사람이 알아보고 몰려들까 봐 재빨리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고, 그 사이 직원은 관리팀에 전화해 담당 팀원을 호출했다.

조치는 빨랐다. 2분도 걸리지 않고 건장한 체형의 남자가 은아에게 다가왔다.

“대표님을 만나러 오셨다고요?”

“대표님이 최건우 선생님 맞는 거죠?”

“네. 맞습니다.”

“대표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정말 급하신 일인 것 같아 방금 대표님에게 연락드렸더니 사무실에서 잠시 기다려달라고 하셨습니다. 대표님 사무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죠.”

다행히 옐로우 레이디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은 달랐다. 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관리팀 직원이 건우의 사무실까지 안내하고 나가자 은아는 발을 동동거리며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초조할 때 나오는 버릇이다. 스칼라의 잔소리에 한동안 잠잠했었는데 오랜만에 그 버릇이 나왔다.

덜컹!

잠시 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은아의 시선의 그곳으로 향하기도 전에 건우가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정말 초초했는데 걱정 가득한 건우의 얼굴을 보고 은아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이런 표정이라면 스칼라를 도와줄 수 있겠구나 그런 느낌이 들었다.

“으아앙. 어떡해요. 건우 오빠님.”

같이 공익 광고를 찍은 이후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긴장이 풀린 은아는 자신도 모르게 건우의 품에 파고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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