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148화 (148/256)

제148화

“어. 은아 씨. 무슨 일인데 울어요? 혹시 스칼라한테 무슨 일이 있어요?”

건우는 갑자기 품에 안겨 울기 시작하는 은아를 보며 어쩔 줄 모르다가 어깨를 몇 번 토닥여줬다.

“언니가요. 흑. 언니가 있죠.”

긴장이 풀린 은아는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하염없이 울었다.

“스칼라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데요? 울지 말고 차분히 이야기 좀 해줘요. 그래야 제가 돕죠.”

스칼라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초조했지만 건우는 다그치지 않고 차분히 은아를 달랬다.

여동생을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워본 경험으론, 이럴 땐 조용히 기다려주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그러니까요.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느냐면요….”

다행히 은아는 금방 마음을 추슬렀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커다란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또박또박 알아듣게 설명을 할 정도는 됐다.

말에 조리가 없었고 우왕좌왕했지만 20분 정도 시간이 지나자 그녀의 이야기가 모두 끝났다.

한참을 차분히 설명을 듣던 건우는 ‘성폭행’이라는 말에 표정을 굳혔다.

예전 삶부터 성 관련 스캔들은 참 끊임없이 자신을 쫓아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만약 스칼라가 위상백의 위협에 굴복해 성폭행 사실을 거짓 고백했다면 어땠을까?

생각이 그렇게 미치자 뒷목이 쭈뼛쭈뼛 섰다.

번거롭더라도 소속사에 연락해서 숙소로 데려다줬어야 했는데 괜한 오지랖을 부려 집으로 데려갔다가 정말 큰 곤욕을 치를 뻔했다.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도 조심성 없이 행동하는 자신이 한심했고, 자칫 같은 멤버들에게까지 피해를 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신의를 지켜준 스칼라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감동을 느낄 적절한 시간이 아니었다. 눈이 뒤집힌 위상백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자신에게 그런 누명을 씌우려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도 나중 일이다.

지금은 신뢰를 보여준 스칼라에게 신뢰로 보답해야 할 순간이었다.

건우는 재빨리 손다정과 차지훈을 호출했다. 두 사람은 연락을 받자마자 곧장 건우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혹시 몰라 이미 옆방에서 건우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손 팀장님.”

“네. 대표님.”

“여기 은아 씨를 데리고 나가서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먹이세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손다정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궁금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건우의 얼굴이 이렇게까지 차갑게 굳은 건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싫어요. 건우 오빠님.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되나요?”

“은아 씨.”

“네. 건우 오빠님.”

“나 믿어요?”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스칼라 언니가 믿을 수 있다고 했으니 믿을 거예요.”

“그랬구나. 스칼라가 그렇게 말했구나. 그럼 언니 말을 믿어요. 저는 지금부터 옆에 아저씨랑 어른들 이야기를 나눌 거예요. 그래서 은아 씨가 자리를 비켜줬으면 좋겠어요.”

“어른들 이야기요? 그게 어떤 건데요?”

“은아 씨는 안 들어줬으면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대신 한 가지만 약속할게요. 내일이 되기 전에 은아 씨 앞에 꼭 스칼라를 데려올게요. 그러니까 조금만 쉬고 있을래요?”

잠시 고민에 잠겼던 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그런데 제니퍼 언니랑 소린 언니도 같이 볼 수 있는 거예요?”

“물론이죠. 옐로우 레이디 멤버 모두 볼 수 있어요.”

“그럼 믿을게요. 건우 오빠님. 우리 언니들. 잘 부탁드려요.”

이야기가 끝나자 손다정이 은아의 왼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아주고 함께 사무실을 나갔다.

은아 때문에 잠시 미소를 지었던 건우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돌아왔다.

“차 팀장님.”

“네. 대표님.”

“예전에 저한테 스칼라 소속사 사장인 위상백 행실에 꽤 문제가 있다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도박 문제, 여자 문제, 술 문제. 대표님께서 너무 깊이는 파지 말라고 하셔서 조사를 중단했지만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때 어디 조직 폭력 조직이랑 연관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은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불곰파라고 강남 지역에서 꽤 악명을 날리는 조직입니다. 지금은 자제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불곰파를 통해서 소속사 연습생 매춘까지 했다는 소문이 들었습니다.”

“스칼라랑 다른 옐로우 레이디 멤버를 데려와야겠습니다. 최악의 경우 불곰파와 충돌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차 팀장님에게 믿고 맡겨도 되겠습니까?”

“충분합니다. 제게 맡겨주시면 충돌을 최소화하면서 세 사람을 데려오겠습니다. 시끄러워져 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요.”

궁금한 게 많았지만 차지훈도 손다장과 마찬가지로 건우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무슨 일이지 알게 될 일. 지금은 조용히 건우의 물음에 착실히 대답만 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차로 이동하면서 하시죠.”

“30분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 시간 안에 준비 완료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밑에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탕탕탕!

“이 망할 년들! 당장 문 안 열어?”

불곰파 행동대장과 조직원들 몇 명을 대동해 다시 돌아온 위상백은 흉흉한 기운을 내뿜으며 문을 두들겼다.

다행히 베란다에서 망을 보던 제니퍼가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문을 걸어 잠근 덕분에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쾅쾅쾅!

“이런 X년들. 문 안 열 거야? 자꾸 이러면 정말 섬으로 팔아버린다.”

위상백의 협박이 계속되었지만 세 사람은 문 앞에 가구를 쌓아놓고 귀를 막았다. 지금은 그저 은아가 무사히 건우를 만났기를 기도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X발 어쩌지. 어떻게 걸어 잠갔는지 열쇠로 열어도 안 열리는데. 철문이라 발로 차도 안 부서질 텐데, 용접공이라도 불러야 하나?”

“용접공 불러 문 녹여서 열라카면 한세월입니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

이름은 이대구. 불곰파의 행동대장이다.

“그럼 어떡해?”

“우리 애들 차에 해머가 있는데 그걸로 부수면 됩니다.”

“해머로 때린다고 문이 부서질까?”

“문을 뭐하려고 때립니까? 그냥 손잡이만 때려 부수면 열리게 돼 있습니다. 마, 형님은 그냥 애들 믿고 기다리고 계시소.”

서울말과 정체불명의 사투리가 섞인 묘한 억양이 꽤 거칠었다.

‘형님’이라고 부르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위상백을 위협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 그럼 나는 이 상무 너만 믿을게.”

이대구의 지시에 같이 온 행동대원 한 명이 재빨리 아래로 내려갔다.

“쬐끔만 기다리면 문은 금방 열립니다. 어이! 거기 안에. 거기 다 들리는 거 안다. 좋게 이야기할 때 얼른 문 열어라. 만약 우리가 문 부술 때까지 안 열면 내 절대 가만 안 있는다. 알았나?”

“안 있으면 어쩔 건데?”

벽을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소린이 겁을 먹고 부들부들 떨자 제니퍼가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어허. 지금 니 내한테 반말했나?”

“그래 했다. 어쩔래?”

“미친년. 니 제니퍼 맞지? 싸가지 없는 년. 지금 니, 뭘 믿고 이래 까부는지 모르겠는데 좀 이따 문 따고 들어가서도 그럴 수 있는지 두고 보자.”

“미친놈. 할 수 있으면 해봐. 좀 이따 보자는 놈 치고 제대로 된 놈 못 봤으니까.”

“이런 개 같은…. 하! 아니지, 아니야. 천하의 이대구가 고작 계집년 하나 때문에 화를 내면 안 되지. 그래. 시간이 누구 편인지 두고 보자. 상백이 형님.”

“어. 그래. 이 상무.”

“여기 통로 전체가 형님 거라고 했지요?”

“그렇지.”

“그럼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다른 사람은 모르겠네요? 내가 저년을 때려 쥑이도.”

“그렇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때려죽이면 안 돼.”

“설마 제가 진짜 때려 쥑이겠습니꺼. 그냥 쥑일 만큼 두들겨 패버린다 이거지요.”

“하하하. 그렇지? 그럴 것 같았는데 혹시나 해서.”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마, 제가 좀 무식해 보여도 때와 장소는 좀 가립니다.”

사소한 대화 같지만 한편으로는 문 너머 세 사람을 가만 안 두겠다는 무시무시한 협박이었다.

잠시 후 해머가 도착하자 함께 온 조직원 중 제일 덩치가 좋은 남자가 그걸 들고 문을 향해 내리찍었다.

콰앙! 파직.

벼락같은 소리가 들렸고 단 한방에 쇠로 만든 현관 손잡이가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쾅! 쾅! 철컥. 철컥.

함께 가져온 망치로 몇 번 더 두들기자 반대편 손잡이도 밖으로 밀려 떨어져 버렸다.

덜컹. 덜컹.

보조자물쇠 때문인지 손잡이가 완전히 떨어져 나갔는데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이대구의 눈짓에 마른 체구의 남자가 구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덜컥덜컥. 찰칵!

몇 번의 시도 끝에 보조자물쇠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그제야 손을 집어넣어 문을 열려고 한다는 걸 깨닫고 막으려 했지만 이미 잠금장치가 돌아간 뒤였다.

끼이익!

단단히 막고 있던 현관문이 힘겨운 소리를 내며 기어코 열렸다.

세 명의 여자는 엄청나게 당황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춤주춤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위상백이 앞장서고 그 뒤로 네 명의 남자들이 구두를 신은 채 거실로 올라섰다. 이대구의 얼굴에는 살벌한 미소가 가득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실례합니다. 여기가 혹시 옐로우 레이디 숙소인가요?”

그 순간 갑자기 들려온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옐로우 레이디 숙소 전체가 정지 화면이 된 것처럼 멈춰버렸다.

“어! 스칼라다. 어어! 제니퍼랑 소린도 있네. 안녕하세요. 잘 찾아왔네. 앞에 아저씨들 잠깐만 비켜봐요. 하하하. 반가워요.”

남자의 정체는 차지훈이었다.

차지훈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옐로우 레이디 앞으로 다가가 반가운 얼굴로 스칼라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너 뭐야? 이 새끼야.”

위상백과 네 명의 남자들은 차지훈의 뻔뻔한 행동에 얼떨결에 자리를 비켜줬다가 뒤늦게 이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화를 내기 시작했다.

“사생팬인데요. 옐로우 레이디.”

“뭐? 이런 미친 새끼. 다 늙어서 사생팬은 무슨 사생팬이야!”

“다 늙었다니요? 되게 억울하네. 아직 마흔도 안 됐는데. 그리고 늙으면 연예인 좋아하고 그러면 안 됩니까?”

“그건 아니지만…. 이런 X발! 이게 아니지. 너 여기 어떻게 왔어?”

“택시 타고 왔는데요.”

“이 새끼가 정말 미쳤나.”

“미쳤으면 여길 찾아올 수나 있었겠어요? 정신병원에 갇혔겠지.”

차지훈과의 대화가 자꾸 말리자 성격 급한 이대구가 버럭 화를 냈다.

이대구는 키 185cm에 몸무게가 100kg이나 나가는 상당한 거구다.

얼굴엔 자잘한 흉터가 있고 산적처럼 털이 북슬북슬해 눈만 찡긋해도 평범한 사람들은 겁을 먹고 몸이 굳어버린다.

얼굴을 최대한 사납게 찌푸리며 겁을 주려는 했는데 차지훈은 눈 한번 꿈쩍하지 않고 말간 웃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히려 뉘 집 개가 짖느냐는 듯 편안한 모습으로 여유를 부렸다.

대체로 이런 인간은 둘 중 하나다.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또라이 같은 하룻강아지거나 아니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거나.

분명 딱히 특출날 것 없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외모인데 이대구는 자신의 눈앞에서 여유를 부리는 남자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느낌이 좋지 않다고 해야 하나? 자꾸 속에서 간질간질 뭔가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느낌을 애써 무시했다.

상대는 혼자고 자신들은 위상백을 제외해도 네 명이다.

그냥 단순한 숫자로 네 명이 아니라 한 명 한 명이 불곰파 최정예로 분류되는 실력자들이다.

눈앞의 남자가 설사 싸움의 신이라고 해도 자신을 포함한 불곰파 최정예 네 명을 이길 순 없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여차하면 밑에서 대기하고 있는 나머지 애들까지 불러들이면 된….

상념을 이어가던 이대구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옐로우 레이디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놓는 사이 누군가 방문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밑에 애들 세 명을 입구에 세워뒀었다.

‘밑에 애들이 내 말을 안 듣고 자리를 비운 건 말이 안 돼. 그럼 어떻게 된 거지?’

“너 이 X발 놈. 여기 어떻게 올라왔어?”

“어떻게 올라오긴 계단으로 올라왔죠.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올라오는데 힘들었어요. 에휴. 다리 떨려.”

누가 봐도 이죽거리는 말투다. 스칼라가 그러면 안 된다고 눈짓을 했지만 차지훈은 들은 척도 안 했다.

“지키고 있던 애들은?”

“애들? 아! 깍두기처럼 생긴 애들? 걔들은 전부 자고 있던데.”

“어디서 개소리야. 헛소리하지 마! 걔들이 그럴 리가 없어.”

“그래. 그럴 리 없겠죠. 설마 신체 건강한 남자 셋이 동시에 잠들 리가 있겠어요? 자꾸 안 자려고 하길래 내가 조용히 재워줬어요.”

“저런 미친놈이. 형님! 더 들어 볼 것도 없습니다. 저런 놈은 매가 약입니다. 몇 대 맞다 보면 질질 짜면서 어떻게 된 일인지 솔직하게 털어놓을 겁니다.”

해머로 문을 부쉈던 커다란 덩치가 씩씩거리며 나섰다.

“밑에 세 놈이 아무 소리도 없이 당했어. 한 가닥 하는 놈일 수 있으니 셋이 동시에 덤벼서 제압해.”

“예. 형님.”

이대구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머지 두 남자가 커다란 덩치 옆에 섰다.

“야야! 스톱. 너희는 상도덕도 없어? 치사하게 어떻게 세 명이 한 번에 덤벼. 그리고 거기 가운데 돼지. 손에 있는 해머는 좀 내려놓지. 그걸로 사람 때리면 죽어.”

“X발 놈아. 해머로 주둥이부터 찍어버리기 전에 그 입 다무는 게 좋을 거다.”

“으아. 준규야! 이놈들이 날 잡아 죽이려고 한다. 이제 그만 나와라.”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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