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9화
“아이고, 그 양반 참. 그러니까 혼자 먼저 가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처음엔 커다란 해머에 겁을 먹은 차지훈이 쇼를 한다고 생각했던 위상백과 일당들은 갑자기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일제히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뒤늦게 나타난 사람은 이준규였다.
격투가 특기인 정보팀 팀원. 그 뒤를 이어 고자성과 건우도 모습을 드러냈다.
“건우야!”
차지훈이 나타난 이후 뭐가 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스칼라는 뒤늦게 나타난 건우를 발견하고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건우라면 이 사태를 해결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내가 좀 늦었지. 복실아.”
“아니야. 딱 맞게 왔어.”
“그래? 최대한 서둘러 왔는데 다행이네.”
“은아는? 만난 거지?”
“그럼. 은아 씨는 우리 직원이 안전하게 데리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
“이런 썅! 이것들이 대체 뭐하는 거야!”
자신과 조직원들을 사이에 두고 겁 없이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고 이대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놓고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어 참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이 스칼라와의 대화에 집중하던 건우의 시선이 그제야 다른 다섯 남자에게로 돌아갔다.
“뭐하는 건지 설명하기에 앞서 당신들이 지금 뭐 하고 있는지 설명을 듣고 싶은데요.”
우락부락한 외형에 팔이나 목에 살벌한 문신이 보이는 네 남자 앞에서도 건우는 당당했다. 그만큼 차지훈, 고자성, 이준규를 믿고 있었다.
“뭐가 어째? 한주먹감도 안 될 것 같은 새끼가!”
“잠시만. 이 상무. 지금부터는 내가 이야기할 게.”
건우를 알아본 위상백이 황급히 말렸다. 그리고 날카로운 인상의 조직원이 뭐라고 조용히 설명하자 이대구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한 걸음 물러섰다.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크흠. 일단 형님이 이야기해보소.”
“그래. 일이 이상하게 꼬인 것 같으니까 조금만 참고 있어봐. 최건우 대표님이 여긴 어쩐 일이시죠?”
화난 이대구를 달랜 위상백이 한 걸음 나서며 물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스칼라가 어릴 적 제 친구입니다.”
“그래서요?”
“그래서는요. 친구 얼굴이나 보러 왔죠.”
“그럼 얼굴은 보셨으니 그만 돌아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돌아가고 싶은데 혼자 갈 수는 없게 되었네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옐로우 레이디 세 사람도 저랑 가려고요.”
“최 대표님이 무슨 자격으로요.”
마음 같아서는 힘으로 밀어붙이고 싶었지만 건우는 절대 함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사회적 지위도 마음에 걸리고, 경찰과의 친분도 신경 쓰였다.
“…친구 자격으로는 안 됩니까?”
“저는 저 아이들 소속사 사장입니다. 절대 허락할 수 없습니다.”
“허락하고 말고 하기엔 지금 분위기가 굉장히 마음에 걸리는데요. 이 꼴을 봤는데 그냥 돌아가라고요?”
“그건 우리 회사 내부 일입니다. 그러니 상관 말고 그만 돌아가시죠.”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위상백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우락부락한 네 남자, 부서진 문, 커다란 해머.
바보가 아닌 이상 지금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주변이 엉망이었다.
더군다나 건우는 혼자가 아니고 다른 사람을 대동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뜻.
휴대폰을 뺏고 매니저에게 잘 감시하라고 지시했는데 상황이 변했다.
난감하기 짝이 없다. 불곰파 조직원들이 싸움에서 밀릴 리는 없겠지만, 그런 식으로 해결하기엔 너무 부담이 크다.
지금 여기에서 폭력은 안 된다. 만에 하나 건우의 몸에 작은 생채기라도 났다간 위상백 본인은 물론이고 불곰파도 끝장이다.
아무리 성질머리가 더러워도 그 정도 계산을 할 머리는 있었다.
설사 건우가 유명인이 아니라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한 번에 제압해 입막음 할 자신이 있지 않은 이상 폭력은 절대 안 된다.
경찰이나 기자도 필요 없다. 요즘은 SNS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다.
“내부 일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겠죠.”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최건우 대표님이 모르는 사정이 있습니다. 별일 아니니 그만 돌아가 주시죠. 친구를 위해서라도.”
“미안하지만 친구를 위해서 세 사람을 데려가야겠습니다.”
“그러다 스캔들이 나려면 어쩌려고요? 지금 자리에 오르기까지 우리 애들 정말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최 대표님이 그걸 망치시려는 겁니까?”
“옐로우 레이디를 망치려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위상백 사장님 같은데요. 한 가지 조언을 드리죠. 여기 올라오기 전에 경찰에 신고를 해뒀습니다. 저라면 여기서 말싸움을 할 게 아니라 얼른 자리를 뜨겠습니다. 밑에서 자고 있는 세 사람도 같이요.”
“정말 이렇게 나오실 겁니까? 이후 일어날 사태에 대해 감당하실 수 있으세요?”
“저야말로 묻고 싶네요. 저는 초이스 에듀를 포함해서 제가 가진 모든 걸 동원할 생각인데 감당하실 수 있으세요?”
위협이 아니라 진심이다. 건우에게 호의적인 언론은 물론이고 군인과 경찰은 물론이고 장만복 회장에게도 손을 빌릴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안 되면 마이크로소프트도 있다. 최후의 방법이지만 필요하다면 어떤 손해도 감수할 생각이었다.
스칼라가 보여준 의리를 생각하면 그 무엇도 것도 아깝지 않았다.
건우의 단호한 눈빛에 위상백은 말문이 막혔다. 이대로 돌아가기 찝찝했지만 만에 하나 조직폭력배까지 동원한 걸 언론이 안다면 상황이 너무 불리해진다.
지금은 조용히 물러나야 할 때라는 걸 깨달았다.
“지금은 물러나지만 각오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이 상무. 오늘은 그냥 돌아가야 할 것 같아.”
“이런 니미. 이보쇼. 젊은 양반. 경찰이 무서워서 가는 게 아니야. 시끄러워지는 게 귀찮아서 물러나는 거지. 그런데 앞으로 밤길 조심해야 할 거요. 돈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는데 칼에 찔리는 건 누구나 똑같거든. 얘들아. 이만 돌아가자.”
“네. 형님.”
이대구는 건우를 살벌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허세를 부리며 자리를 떴다.
시건방진 모습에 화가 난 이준규가 나서려고 했지만 차지훈이 고개를 저으며 말렸다.
이미 경찰도 부른 마당에 일을 키워서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이었다.
‘이상구 이 새끼, 감히 대표님에게 협박질을 해. 밤길을 누가 조심해야 할지 어디 두고 보자고.’
차지훈은 빌라를 빠져나가는 위상백과 일당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
“스칼라 건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성윤기 실장의 보고에 박유하 이사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실패요? 이유가 뭐랍니까? 위상백 그 인간 꽤 절박한 상황일 텐데.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무조건 성공했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번 일에 실패하면 위상백은 성폭행, 성접대, 탈세 등등 여러 가지 죄목으로 경찰에 잡혀들어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으려면 최건우를 성폭행범으로 몰아가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었다.
“옐로우 레이디 은아라는 아이가 숙소를 몰래 빠져나가 최건우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 같습니다.”
“숙소에는 감시가 심하다고 들었는데요.”
“잠깐 생리대를 사러 다녀온다고 해서 괜찮은 줄 알았답니다.”
“멍청하기는. 그래서 어떻게 됐답니까?”
“최건우가 나타나 옐로우 레이디 나머지 멤버를 모두 데려갔습니다.”
“위상백은 뭘 하고 있었길래 그걸 그냥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답니까?”
“위상백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최건우가 경찰에 신고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나 원 어이가 없군요. 경찰에 신고를 했는데 사장이 소속사 연예인을 두고 도망을 나왔다고요? 아니 왜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스칼라를 위협한다고 조폭까지 동원해서 경찰이 와도 유리할 게 없었습니다.”
“미치겠군.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군요. 허술한 구석이 많아도 궁지에 몰리면 제대로 일을 처리할 줄 알았는데 내가 어리석었습니다. 그래서 옐로우 레이디는 지금 뭐 하고 있습니까?”
“최건우가 마련한 아파트에 머물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참에 두 사람 스캔들이라도 내야 하나. 일단은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세요. 위생백이 이대로 물러나진 않을 것 같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이사님.”
***
건우가 스칼라를 비롯한 옐로우 레이디를 숙소에서 데리고 나오고 며칠이 지났다. 겁에 질렸던 네 사람은 건우와 손다정의 보살핌에 금방 안정을 되찾았다.
이대로만 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평상심을 되찾았겠지만, 문제는 언론과 팬들이었다.
한창 활동해야 할 옐로우 레이디가 공식 석상에서 사라진 지 5일이 지나면서 인터넷에서는 그녀들과 관련된 온갖 추측성 루머들이 범람하고 있었다.
임신설, 폭행설, 성형설, 교통사고설, 음주운전설, 필로폰 투약설 등등.
말도 안 되는 찌라시 수준의 기사들이 등장하면서 멤버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고 있었다.
원래 이런 일은 소속사에서 나서서 해결해야 하는데 위상백이 노코멘트로 일관하면서 오히려 논란을 부추기고 있었다.
논란이 계속 커지는 시점, 건우와 위상백이 기자들의 눈을 피해 모처에서 만났다.
“아! 최건우 대표님. 이거 오랜만이라고 해야 하나요? 반갑다 하긴 애매하게 되어버렸네요.”
“서로 반갑지는 않겠지만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인터넷 기사는 좀 보셨습니까?”
위상백 사장은 거만한 얼굴로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지금 상황이 자신에게 매우 유리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해서다.
“네. 얼토당토않은 기사들이 많더군요.”
“그러게 제가 경고를 했지 않습니까. 후회하게 될 거라고. 최 대표님의 어리석은 선택이 옐로우 레이디를 망쳤어요. 아시겠어요? 지금이라도 돌려보내겠다고 하면 그동안 있었던 서운함은 잊어드리겠습니다.”
“왜요? 깡패들 데려와서 또다시 협박하게요? 그래서 제가 스칼라를 성폭행했다고 거짓증언 하게 하려는 겁니까?”
“이런! 그건 저와 스칼라 사이에 오해가 있어서 그런 겁니다. 설마 제가 그런 짓을 벌이겠습니까?”
온갖 루머들이 범람하면서 옐로우 레이디의 인기는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재기불능이 될지도 모른다.
위상백도 분명 타격이겠지만 상황이 악화될수록 마음이 답답한 건 자신이 아니라 옐로우 레이디와 건우라고 믿었다.
경찰이 오기 전에 자리를 피한 덕분에 옐로우 레이디를 협박했다는 증거는 당사자들의 증언 말고는 없다.
하지만 건우가 옐로우 레이디를 데리고 있는 건 움직일 수 없는 명확한 사실. 지금 상황이라면 건우가 옐로우 레이디를 빼돌렸다고 언론에 하소연해도 통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위상백은 그런 사실로 건우를 협박할 생각이었다.
건우는 화가 났지만 어금니를 꽉 깨물고 참았다. 그리고 얼굴에 살짝 미소까지 지으며 자신의 감정을 감추려고 애썼다.
아직은 참아야 할 때였다.
“지금 돌고 있는 루머 중 몇 개는 위 사장님에게서 나왔다는 말이 있더군요. 그것도 오해입니까?”
“하하하. 설마요. 제가 제 새끼들 욕 먹이는 짓을 하겠습니까. 물론 제 새끼가 애미애비도 몰라보고 기어오르려고 한다면 따끔하게 훈계는 해야겠지만요.”
“그래서 그런 적이 없다는 겁니까?”
“저는 기자들의 질문에 가만히 있기만 했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별달리 부정을 하지 않았을 뿐인데 기자들이 알아서 추측성 기사를 내더군요. 그게 제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소속사 사장이라면 최소한 악의적인 소문에 대해서는 그런 일이 절대 없다고 부정했었어야지요.”
“제가 왜요? 지금 걔네들을 데리고 있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최 대표님인데요. 그 아이들을 그렇게 아낀다면 최 대표님이 절대 아니라고 기자들 불러서 기자회견이라도 하지 그러셨습니까. 지금 이렇게 된 건 전부 최 대표님 탓입니다. 앞날이 창창하던 걸그룹이 대표님 욕심으로 인해 풍비박산이 난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말싸움은 그만하시죠. 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
“제가 좀 쿨한 성격이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표님 때문에 일어난 금전적 손해를 보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흠. 금전적 보상이라…. 좋습니다. 그래 얼마를 원하십니까?”
건우가 별말 없이 수긍하자 위상백은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걔들 먹고 자고 입히고 로비하는데 그동안 오, 아니 십억 원 가까운 돈이 들었습니다. 그 정도는 보상해주셔야죠.”
“십억이요? 아이돌 그룹을 키우는 데 그렇게나 많은 돈이 들어가는군요.”
아이돌 그룹 하나를 키우는데 적지 않은 금액이 들어가는 건 사실이지만 10억은 과해도 너무 과했다. 하지만 위상백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럼요. 대표님이 아직 이 바닥을 잘 모르셔서 그런데, 로비가 없으면 라디오 방송 하나 따내기도 어려운 곳이 바로 여깁니다. 제가 그동안 옐로우 레이디를 방송에 내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접대를 하고 다녔는지 아십니까?”
“고생이 많으셨나 봅니다.”
“그럼요. 걔들은 자기들이 잘나서 인기를 얻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담당자들 만나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비위를 맞춘 덕분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준 겁니다. 제가 술 마시느라 위장병이 생길 정도로 열심히 안 돌아다녔으면 성공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렇게 고생했다면 이번 일로 배신감 같은 걸 느꼈을 수도 있겠네요.”
“말해 뭐합니까. 억장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마치 자식을 잃은 것 같은 절망감이 느껴지더군요. 옐로우 레이디는 제게 정말 친자식과 마찬가지인 아이들입니다. 그런 아이들과 오해가 생겨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제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위상백 사장은 정말 눈물이라도 뚝뚝 흘릴 것 같은 얼굴로 지신의 아픔을 표현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그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꼈겠지만, 건우 눈에는 가식적으로 보일 뿐이었다.
분노가 일었지만 옐로우 레이디를 위해 참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