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화
“사장님의 안타까움은 잘 알겠습니다. 오해로 시작된 일이라고 해도 사태가 이 지경이 된 것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은 공감하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원하시는 돈을 드리지요. 10억이 아니라 50억 어떻습니까?”
“네?”
예상치 못한 거액에 위상백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사실 10억도 기대하지 않았다. 일단 그렇게 질러놓고 협상을 통해 적당히 금액을 낮춰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5억도 아니고 50억이란다.
분명 좋아해야 할 일인데,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쉽게 감이 오지 않았다.
“늪 매니지먼트는 옐로우 레이디 말고 이렇다 할 유명 연예인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옐로우 레이디를 비롯해 늪 매니지먼트 전부를 그대로 저에게 넘기는 대가로 현금 50억 원을 드리겠습니다. 계약서에 사인하는 즉시 일시불로요.”
“아…아니 왜 갑자기 제 회사를 인수한다는 겁니까?”
위상백의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늪 매니지먼트와 50억 사이의 저울질이 시작되었다.
건우의 말처럼 옐로우 레이디를 제외하면 늪 매니지먼트의 가치는 제로에 가깝다.
그렇다면 지금 옐로우 레이디의 가치가 50억 원이 넘을까?
얼마 전까지의 옐로우 레이디 인기를 생각한다면 50억은 부족한 금액이 분명하다. 당장 50억을 벌기는 힘들 수 있어도 1년 정도 열심히 굴리면 손에 쥘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갑작스러운 잠적으로 온갖 루머들이 난무하면서 옐로우 레이디의 가치는 하루가 다르게 하락하고 있다.
거기에 위상백이 노코멘트로 일관해 논란에 기름을 부은 것도 타격이 컸다.
지금이라도 복귀해서 인기를 회복할 수 있다면 괜찮은데, 연예계는 워낙 변수가 많아 그걸 장담하기 어렵다.
네임벨류가 높은 가수가 갑자기 컴백할 수도 있고, 나라를 흔들만한 커다란 사건 사고가 뜬금없이 터질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아무런 이유도 없이 대중들의 관심이 식을 수도 있다.
미래 일은 아무도 모른다. 만약 그런 변수가 생기면 옐로우 레이디의 가치는 그날부로 똥값이 된다.
2집 앨범을 만들어 재도약을 꿈꾼다고 해도 그게 언제가 될지 하세월이다. 그 기간 동안 위상백은 손가락만 빨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뿐만이 아니다. 위상백과 옐로우 레이디 사이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어졌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조폭까지 동원해 위협한 마당에 예전처럼 돌아간다는 것도 웃긴 일이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바닥인 두 사람이 화해하고 힘을 합쳐 2집 앨범을 준비하는 건 지금으로써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이렇듯 아무것도 확신할 게 없는 상황에서 건우는 무려 50억을 제안했다. 그것도 일시불로, 계약 즉시 지급한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거액에 위상백의 눈이 뒤집혔다.
여기서 더 버티면 50억 이상의 돈을 받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유가 필요하십니까? 그렇다면 사장님이 아까 말씀하셨듯 그냥 도의적인 책임감이라고 해두죠. 단, 계약 이후 사장님께서는 늪 매니지먼트에 대해 어떤 권리도 행사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주셔야 합니다. 어떠십니까?”
“흐음. 제안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면….”
“생각할 게 뭐 있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옐로우 레이디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연예인도 없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그런 곳을 50억 원이나 주고 산다는 데 무슨 고민이 필요합니까?”
“그래도 하루 정도는 말미를 주셔야 저도 생각이란 걸 해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기회는 지금뿐입니다. 흥정할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싫다고 하시면 저는 그 돈을 전부 옐로우 레이디에게 줄 생각입니다. 사장님 말씀처럼 제가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해서요.”
“아니 왜 걔들에게 돈을 줍니까? 그 애들을 키운 건 접니다. 보상을 하려면 제게 하셔야죠.”
“논쟁은 사양하겠습니다. 자! 이제 결정을 하시죠. 제 제안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마시겠습니까?
건우는 위상백이 제대로 생각할 여유도 가지지 못하게 몰아붙였다.
“그럼… 파, 팔겠습니다.”
***
건우가 50억 원이라는 거액을 부른 건, 위상백이라는 인간에게 더 이상 스칼라가 휘둘리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이에나 같은 저런 인간은 처음에 몇억 원을 쥐어준다고 깔끔하게 물러날 부류가 절대 아니다.
분명 그녀를 볼모로 계속 해서 그를 귀찮게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럴 바에는 돈이 좀 들더라도 한 방에 깔끔하게 해결하는 편이 낫다.
50억 원이라면, 평범한 사람은 단순히 그 돈이 주는 무게감에 주눅이 들 만큼 큰 금액이다.
물론 위성백을 평범한 사람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50억 원 앞에서 배짱을 튕길 만큼 배포가 큰 인간도 아니었다.
50억쯤은 건우에게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돈이다.
그 돈으로 돈지랄을 해서라도 위상백을 위축되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야 나중에 가서도 그를 다루기가 편해진다.
갑작스러운 행운에 기분이 좋아진 위상백이 간신배처럼 히죽거리며 웃었다.
그 꼴이 보기 싫어진 건우는 송미주 법무팀장을 불러 늪 매니지먼트를 인수할 수 있는 법적 절차를 검토하도록 지시하고, 자세한 건 법무팀과 상의하라며 위상백을 사무실에서 쫓아내 버렸다.
잠시 후 연예 기획사를 인수한다는 소식을 들은 손다정이 화들짝 놀라 사무실을 찾아왔지만, 건우로부터 대강의 사정을 듣고는 별다른 말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그 뒤로 한참을 더 고민에 빠졌던 건우는 마침내 생각을 끝내고 차지훈을 호출했다.
“대표님. 부르셨습니까?”
“어서 오세요. 차 팀장님. 우선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만약 조직폭력배들과 시비가 붙으면 정보팀은 초이스 에듀를 지켜줄 수 있습니까?”
“흠. 상황마다 다릅니다. 정면으로 붙으면 쪽수 많은 조폭을 이기기는 힘듭니다. 우린 아직 열 명도 안 되고, 그쪽은 백 명이 넘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팀의 특기는 은밀함입니다. 원하신다면 오늘 밤에라도 불곰파를 지워드릴 수 있습니다. 대표님을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불곰파 두목 놈의 모가지를 따오겠습니다.”
“컥! 쿨럭쿨럭. 예? 무…뭐를 딴다고요?”
뜬금없이 살벌한 말에 건우는 놀란 얼굴로 차지훈을 쳐다봤다.
“하하하. 말하자면 그렇다는 겁니다. 너무 그렇게 놀란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대상이 국가 원수급 경호를 받지 않는다면 누가 되었든 제거할 수 있는 녀석이 대표님 밑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든 저희를 믿고 자신감 있게 행동하십시오.”
“국가 원수급 경호를 받지 않는 이상 누구나요? 제가 엄청난 분을 휘하에 두고 있었군요. 이걸 과분하다고 해야 할지, 든든하다고 해야 할지….”
“그냥 든든해하시면 됩니다. 그 녀석뿐만 아니라 정보팀에서는 세계적인 해커도 있고, 일대일이라면 거의 질 일이 없는 최고의 파이터도 있습니다.”
“최고의 파이터 하면 역시 준규 씨인가요?”
“그렇습니다. 말 그대로 인간 흉기인 녀석입니다. 아마 작은 폭력조직 정도는 혼자서도 박살 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녀석도 사람이다 보니 치고빠지고 하며 아웃복싱 스타일로 싸워야겠지만요.”
“준규 씨는 파이터, 종수 씨는 당연히 해커일 테고. 그럼 국가 원수급 경호를 받지 않는 이상 누구든 제거할 수 있는 녀석이라는 게 설마…?”
“하하하. 그 설마가 맞습니다. 자성이가 바로 그 녀석입니다. 외모는 촌실빵한 게 딱 동네 아저씨처럼 보이지만, 생긴 게 전부는 아니라고나 할까요. 실력 하나만큼은 믿으셔도 됩니다.”
동네 백수 아저씨. 건우가 처음 고자성을 봤을 때 인상이 딱 그랬다.
그런데 알고 보니 무시무시한 킬러라고 한다. 이 사실을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정말 전 운이 좋네요. 차 팀장님을 비롯해 고자성 과장님, 준규 씨, 종수 씨 같은 걸출한 인재가 저와 함께 일을 해주셔서요. 거기에 수능예측팀을 이끌고 있는 안우현 팀장, 담당 과목에서 일인자 대접을 받고 있는 이승훈, 윤은영 선생님. 그리고 새롭게 합류한 도훈 선배까지 제게는 정말 든든한 분들이 많이 있죠. 그래서 한편으로는 제가 그동안 너무 안일하게 산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됩니다.”
“네? 대표님처럼 열심히 살아온 분이 어디 계신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십니까?”
“이번 일을 겪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 제게 악심을 품고 가족이나 제가 아끼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일이 생긴다면 과연 잘 대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와 적대적인 관계라도 제 사람을 건드릴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할 수 있을까? 좀 이상하죠?”
만약 은아가 숙소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면, 빠져나왔다고 해도 너무 늦게 건우를 찾아왔다면, 만약 건우에게 차지훈을 비롯한 정보팀이 없었다면.
이런 상념들이 건우를 괴롭혔다.
조금만 타이밍이 어긋났으면 스칼라를 비롯한 옐로우 레이디는 정말 큰 곤욕을 치를 뻔했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옐로우 레이디에게 일어날 뻔한 일이지만, 동생들에게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 사실이 건우를 더 두렵게 만들었다.
“아닙니다.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를 법치국가라고 하지만, 사실 법보다 주먹이 통하는 경우가 여전히 많습니다. 언론을 장악하고, 돈으로 권력을 사고, 지연이나 학연을 이용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주먹을 휘두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신 걸 보니 대표님도 이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신 것 같습니다.”
국가 정보국에서 일하면서 정말 더러운 꼴을 많이 본 차지훈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갈림길이요?”
“별것 아닙니다. 그들과 똑같은 인간이 되어 때로는 돈으로 회유하고 때로는 주먹을 휘두르는 그런 사회지도층이 되느냐, 아니면 타협하지 않고 고귀하게 살아가느냐. 둘 중 하나는 선택해야지 않겠습니까?”
“그게 별것 아닙니까? 그리고 정말 두 가지 선택밖에 없습니까? 저는 전자처럼 되기는 죽도록 싫고, 후자처럼 되는 건 내키지 않습니다. 가족들이나 친구가 아프든 말든 자기만 혼자 고고하게 살면 뭐합니까? 그런 건 싫습니다. 차라리 다른 방법을 택하겠습니다.”
“그러려면 사회 전체를 바꿔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것까진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차 팀장님이 있지 않습니까?”
“제가요? 대표님, 죄송합니다만 제겐 그럴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예전에 차 팀장님이 제게 보안정보회사 설립에 관해서 이야기하신 적 있으시죠?”
“아! 네. 최종적으로는 그런 회사를 만들어 운영하고 싶은 게 제 꿈이긴 합니다.”
건우가 차지훈을 호출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걸 지금 한 번 해보시는 건 어떠세요?”
“네? 지금 일은 어쩌고요?”
“당연히 지금 일도 병행하셔야죠. 그렇지만, 힘들어도 꿈이라면 한 번 도전해보셔야지 않겠습니까? 제가 다른 건 몰라도 금전적인 부분은 최대한 지원을 해드리겠습니다.”
“이건 돈이 한두 푼 드는 일이 아닙니다. 대표님도 아시겠지만, 우리 정보팀 하나 운영하는 데만 일 년에 수십억 원이 넘는 돈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초기 장비 비용이 많이 들었다는 점을 고려해야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본격적인 회사를 만들어 운영하려면 수백억 원 이상이 들어갑니다. 솔직히 그것도 부족할지 모릅니다.”
“괜찮습니다. 저, 돈 많습니다. 그렇지만 돈으로 권력을 주무르고 싶지도 않고, 고고하게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고민해봤는데, 저는 정보를 장악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머지않아 여주 쪽에 교육 타운을 만들고 그 안에 인벤션 컴퍼니를 설립할 계획입니다. 그렇게 되면 더더욱 정보, 보안이 중요해집니다.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정보, 보안 회사는 꼭 필요합니다.”
“교육 타운 이야기는 알고 있었는데, 인벤션 컴퍼니는 처음 들어봅니다.”
“일종의 신기술 개발 회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수백억 원이 아니라 수천억 원이 들어도 상관없습니다. 장만복 회장님 덕분에 비용이 확실하게 줄였고, 조만간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 조 단위의 천문학적인 투자금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 돈 걱정은 하지 말고 우리나라 국가 정보국을 압도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들어 주세요.”
국가 정보국은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가장 막강한 정보 수집 기관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건우는 그곳을 압도할 수 있는 정보 회사를 만들어 달란다. 분명 황당한 이야기인데 차지훈은 자신의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초이스 시큐리티를 설립하실 생각인 겁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차 팀장님을 통해 대한민국의 정보를 장악하고 싶습니다. 하실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국가 정보국은 국가의 권력에 따라 좌지우지되기 때문에 굉장히 비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금전적 지원만 확실하다면 압도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원하신다면 미국 대통령 영부인 속옷 색깔도 알아낼 수 있는 최고의 정보, 보안 회사를 만들어보겠습니다.”
“흠. 할머니 속옷 색깔은 관심이 없습니다. 참아주세요.”
“하하하. 죄송합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