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154화 (154/256)

제154화

“사실 그것 때문에 잠시 시간을 내달라고 연락을 드린 겁니다.”

“역시 다른 변수가 있었던 겁니까?”

원래는 차지훈도 위상백에게 50억 원을 가져올 생각이 없었다. 위상백이라는 인간이 아무리 미워도 정당한 거래로 받은 돈을 빼앗을 만큼 뻔뻔하지는 않았다.

건우를 앞에 두고 밤길 조심하라며 협박하던 이대구와 불곰파만 손봐주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건우와 스칼라 사이에 스캔들이 터진 것이다.

누가 봐도 위상백 짓이었다. 기사에 실린 사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건 스칼라를 협박할 때 위상백이 가지고 있던 사진과 동일했다.

하지만 여기서 위상백을 직접 건드리면 자칫 건우가 의심받을 수 있기 때문에 서로 안면이 있는 불곰파를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우리 정체는 드러내지 않고 불곰파를 이용해 위상백을 건드려봤더니 와룡그룹이 나오더군요.”

“와룡그룹이요? 그럼 크레이듀가 연관되어 있다는 뜻인가요?”

그렇게 놀라운 소식은 아니었다. 크레이듀가 세계교육을 인수하고 건우를 괴롭히던 박유하 이사가 그대로 남았다.

그게 뭔지 정확하게 파악은 못 해도 뭔가 일을 꾸미고 있으리라는 것 정도는 예측 가능했다.

“그런데 그게 확실한 건 아닙니다. 복면을 쓴 남자를 만났고, 그 남자는 자신이 와룡그룹에 나왔다고 했답니다.”

“그것참. 그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거죠? 그냥 아무 말도 안 했으면 높은 확률로 와룡그룹을 의심했을 텐데 와룡그룹이라고 밝혔다고 하니까 오히려 와룡그룹은 아닌 것같은 느낌이 드네요.”

“애초에 그런 혼란을 노렸을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건 세계교육 때와 다르게 상대하기 쉬운 놈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분명 상당한 프로가 개입했습니다. 저와 동종의 냄새가 납니다.”

초이스 에듀 정보망에 지금까지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 봐도 절대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그럼 어쩌죠? 진짜 프로라면 쉽지 않을 텐데.”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저와 동종이면서 저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나 봐야 제 아류밖에 안 됩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저는 차 팀장님만 믿겠습니다. 어쨌든 이번 일은 크레이듀가 개입했다고 상정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언론이 이렇게 갑자기 악화된 것도 위상백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저도 동감입니다. 아마 이중 트릭일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지금 초이스 에듀를 이 정도로 체계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곳은 크레이듀 말고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지금 학원가는 3강 체제다. 초이스 에듀가 한발 앞서나가긴 하지만 기가 싱크빅과 크레이듀의 추격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하도훈 문제로 기가 싱크빅과의 사이가 약간 삐끗거렸다고 해도 여전히 협력관계고, 크레이듀 말고는 이 정도로 체계적인 정보망을 갖춘 곳은 없다.

“일단 그 문제는 차 팀장님에게 일임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전에 제가 부탁했던 일이 하나 있었는데 일의 진척이 어느 정도 되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네? 어떤…일 말씀하시는 건가요?”

지하에 있는 정보팀 사무실을 찾아와 다짜고짜 부탁한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는 건우의 모습에 차지훈이 잠시 당황했다.

“전에 박유하 이사 운전기사에게 비자금을 받는 모습이 포착된 강 의원 있지 않습니까?”

“아! 기억합니다. 대표님이 조사만 해두고 나중을 위해 킵 해두자고 하셨던 그 강 의원 말씀하시는 것이라면요.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재미있는 아니죠, 상당히 역겨운 소식이 하나 보고되었습니다.”

“역겨운 소식이요?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길래요?”

“미성년자인 여학생을 성추행했는데 오히려 피해자 여학생 부모를 협박해서 조용히 사건을 덮었다고 하더군요. 경찰 사이에서도 굉장히 쉬쉬하는 분위기입니다.”

“네? 그런 일이 있었어요? 정말 인간 망종이었군요.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그런 쓰레기는 더 이상 봐줄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내일 당장 사회 1면에 특종으로 나갈 수 있도록 조치해주세요. 미성년자 성추행뿐만 아니라 뇌물 수수를 비롯한 자잘한 사건들도 차례로 계속 보도하시고요.”

“음. 지금 발표해도 상관은 없는데, 상황이 조금 뜬금없는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지금이 최적기입니다. 정치인들이나 재벌들 보면 연예인들을 물타기로 잘만 이용하지 않습니까? 툭하면 열애설이다 뭐다 해서 대중들의 이목을 그쪽으로 돌려놓고 뒤로 호박씨나 까는 게 한두 번이 아니잖아요. 효과가 좋은 것 같으니 저도 한 번 써먹어 보려고요. 저와의 열애설 이후 스칼라에 쏠려 있는 대중들의 관심을 정치인을 이용해 돌려보려고요.”

고심 끝에 건우가 꺼내 든 첫 번째 반격 카드였다.

어처구니없는 현 상황에 화가 났지만 지금은 그것에 분노하는 것보다 사태 수습이 먼저였다.

아무리 해명을 해도 소용이 없다면, 임시방편이라고 해도 일단 대중들의 시선을 다른 곳에 돌려야 했다.

“정치인을 이용해 역으로 물타기를 한다는 겁니까?”

“국회의원이 미성년자를 성추행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성추행이 끝이 아니다. 그것 말고도 엄청난 비리 혐의가 또 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 스칼라에게 향했던 대중들의 시선이 대부분 강 의원 그 인간에게 몰리지 않을까요?”

“허! 그것참. 정말 생각지도 못한 역발상이군요. 세상에 어느 누가 정치인을 이용해 물타기를 할 거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일단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거라는데 큰 점수를 드리고 싶습니다.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요? 대표님의 기상천외한 발상 전환을 보고 있으면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대중들의 이목을 돌린다고 해도 이미 떨어진 이미지는 회복하기 어렵지 않을까요?”

“그래도 우선은 급한 불부터 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후에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옐로우 레이디를 지원할 계획입니다. 솔직히 이번 일도 결국은 저 때문에 일어난 일 아닙니까? 모진 놈 옆에 있으면 벼락 맞는다더니, 지금 상황이 딱 그 짝입니다. 스칼라는 저한테 미안해하는데, 저는 지금 이게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솔직하게 말도 못하고 있습니다.”

건우는 진심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미안해하고 있었다.

“대표님 잘못이 아닙니다.”

“저도 압니다. 제 잘못이 아니라는 걸. 하지만 제 잘못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원인은 저니까요. 필요하면 성공할 때까지 계속 투자할 계획입니다. 돈으로 해결하려는 게 안 좋은 거라는 건 아는데, 마땅히 좋은 방법이 안 떠올라서요. 정 안 되면 골드 스타를 옐로우 레이디에게 줄 겁니다. 그렇게라도 보상을 해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방비했어야 하는데.”

“어휴! 아닙니다. 신이 아닌 이상 어떻게 이런 일까지 예측하고 방비하겠습니까? 대신 이번에 앞장서서 악의적인 댓글을 단 악플러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조사해주십시오. 절대 용서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저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로 전과자가 된 사람까지 있는데, 무슨 생각으로 또다시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날조해서 퍼트렸을까요?”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강경 대응책을 펼쳤는데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저도 이해가 안 갑니다. 악플 달다가 인생 망친 사람을 보면 조심해야 정상인데 말이죠.”

“한 번으로 부족했던 것 같으니, 이번에는 더욱 단호하게 조치하겠습니다. 처벌이 약하면 2심 3심까지 가서 어떻게 해서든 형량을 높게 받도록 할 겁니다. 민사 소송도 함께 걸어서 전 재산을 남김없이 탈탈 털어버리라고 하세요. 1심으로 안 됩니다. 2심 3심까지 끌어서 재판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도록 만드세요. ‘최건우’라는 이름만 들어도 부들부들 치가 떨릴 정도로 지독하게, 아셨죠?”

그동안 기부다 뭐다 해서 착하고 선량한 이미지만 쌓여 사람들이 자신을 너무 무르게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정말 독하게 굴어보리라 다짐했다.

“알겠습니다. 상대를 괴롭히는 건 진정한 저의 특기 중 하나입니다. 영혼까지 탈탈 털어버리겠습니다.”

***

건우는 이번 일로 정말 화가 많이 났다. 그리고 대책이라고 준비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았다. 홧김에 일을 벌이는 건지 냉정함을 유지하고 계산적으로 행동하는 건지.

이런 문제가 생기면 보통 조유미와의 상담으로 해결했는데 이번만큼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우선 급한 일만 재빨리 마무리한 건우는 장만복 회장에게 연락을 넣고 약속을 잡았다.

신뢰할 수 있으면서도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연륜 있는 사람이 장만복 회장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예로부터 무수히 많은 천재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찬란한 예술 작품을 남겼고, 누군가는 병든 사람들을 구원할 치료제를 개발했으며, 누군가는 세상을 바꿀 과학이론을 발표해 사람들을 충격에 몰아넣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놀라운 천재들도 넘지 못하는 벽이 있으니, 그게 바로 연륜이다.

책에서도 나오지 않는,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들. 연륜의 힘은 거기서 나온다.

특히 원만한 인간관계는 제아무리 천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려면 상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남들보다 뛰어났던 천재가 평범한 보통 사람을 이해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람의 행동은 아무리 천재적인 머리를 가지고 있어도 예측하기 어렵다. 책도 한계가 있다. 오직 많은 경험만이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사람을 많이 만나고 그들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타협하고 상처받으며 하나의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한다.

그런 과정을 오랜 시간 거치면 연륜이 생긴다. 물론 나이가 많다고 무조건 연륜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건우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뛰어난 머리에 심지어 미래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극복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작은 변수 하나에 행동이 완전히 달라지는 게 사람이었다. 사람은 통제할 수 없는 존재고, 함부로 예측할 수 없는 존재였다.

장만복 회장 정도의 연륜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조언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건우는 그런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연락에 흔쾌히 만나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회장님.”

“아니야. 최 대표답지 않아 좀 의외이긴 했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우린 앞으로 가족이 될 사이 아닌가. 허허.”

“아!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에 회장님 손녀를 만났는데, 정말 예쁘고 똑똑해서 제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제 나이에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들이 있다면 꼭 며느리 삼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우의 둘째 남동생과 장만복 회장의 손녀를 이어주자는 건 장난삼아 한 약속이었다.

정말 인연이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약속대로 장만복 회장의 손녀는 초이스 에듀 근로 장학생으로 합류했고 건우의 동생들과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어허. 아직 20대 초반인 사람이 할 말은 아니군. 최 대표. 가끔 최 대표를 보면 책임감이 너무 강한 것 같아. 그러니 동생들을 동생이 아니라 자식으로 느끼는 거야. 동생을 아끼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최 대표 행복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

“그렇게 보이십니까?”

이번 생에는 동생들보다 자신의 행복을 우선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

“그래. 자네가 아무리 동생들을 자식처럼 생각하고 돌본다고 해도 그들이 자식이 되는 건 아니야. 다른 말로 하면 동생들 또한 자네를 형이나 오빠로 생각하지 절대 부모로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뜻이야. 그러니 부모처럼 행동하지 않는 게 좋아. 지금은 몰라도 나중에는 분명 최 대표의 행동을 부담스러워 할 거야.”

“정말 그럴까요?”

사실이 그랬다. 예전 삶에서 동생들은 건우의 희생에 고마워하면서도 한편으론 숨 막혀 했었다.

분명 알고 있었는데 잊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 사실을 상기시키자 기분이 매우 색달랐다.

알고는 있었지만 왜 그런지 이유는 몰랐다. 그래서 한편으론 이유가 궁금했다.

장만복 회장은 그 이유를 알고 있을까?

“그렇고말고. 부모님의 내리사랑은 당연한 거야. 그래서 자식들은 부모의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하지만 형이나 오빠라면 달라.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생기지. 당연한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갚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그 빚이 쌓이고 쌓여 도저히 갚을 수 없을 만큼 커진다면 어떻겠나? 부담스럽지 않겠나? 사람에 따라서는 외면하고 도망하고 싶어질 수도 있어.”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왜 저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요?”

그렇게 열심히 동생들을 위하며 살았는데, 대체 그들은 왜 건우를 외면했을까?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은 의문이었는데, 장만복 회장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때 동생들의 마음이 어땠을지 조금이나마 짐작이 갔다.

다행히 장만복 회장에게 조언을 구하러 온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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