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최 대표 나이를 생각해. 지금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지 않은가? 갑작스레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동생들을 돌보랴 일을 하랴 얼마나 바빴어? 아직 20대 초반이니 앞만 보고 달려가기도 바쁠 수 있네. 하지만 가끔은 말일세, 뒤를 돌아보며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러게요. 생각해보면 저는 정말 앞만 보고 달리고 있었던 것 같군요.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가능하면 여유라는 걸 한번 부려봐야겠습니다. 조언 정말 감사합니다, 회장님.”
“아니야. 그냥 나 정도 나이가 되면 저절로 보이는 걸 말했을 뿐. 나는 최 대표가 지금 나이에 내 말을 진심으로 알아듣는 것 같아 그게 더 신기해. 나이 많은 노인네의 잔소리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오늘 갑자기 찾아온 이유가 뭔가?”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요즘 곤란한 일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 나도 들었어. 사실이든 아니든 젊은 남녀가 만나서 연애도 할 수 있는데, 일이 너무 커져버렸더군. 솔직히 꽤 인위적인 냄새가 느껴졌어. 차지훈 팀장이라면 지금쯤 어느 정도 이유를 알아냈을 것 같은데, 이번 일 혹시 최 대표를 겨냥한 건가?”
차지훈을 건우에게 소개해준 사람이 장만복 회장이다. 차지훈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역시 회장님 눈에도 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았군요. 저나 차 팀장의 의견도 회장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왜 제가 아닌 스칼라를 그렇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지 이해가 가지 않더군요.”
“상대방에서 최 대표를 끌어내리려고 단단히 마음먹은 거지. 지난번 사교육 논란에서도 그러더니 최 대표의 밝고 건강한 이미지를 조금씩 깎아내리려고 하고 있어. 당장 효과를 거두려는 게 아니라 장기적 관점에서 꾸준히 데미지를 주는 것이지. 보통 인내력을 가지고는 시도도 못 할 일인데 상대가 꽤 집요한 것 모양이야.”
“그래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회장님의 조언이 필요합니다.”
“허허. 든든한 차지훈 팀장이 있는데 나는 왜? 나 같은 늙은이가 알면 얼마나 안다고.”
겸손한척 말을 했지만, 장만복 회장은 흡족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20대 초반의 나이. 세상 무서울 것 없이 날뛰어도 하나 이상할 것 없는 혈기 넘치는 시기였다.
그런데 벌써 자신의 약점을 알고 겸손한 모습으로 연장자에게 조언을 구하는 모습이 장만복 회장에겐 기꺼웠다.
“당연히 차고 넘친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전에도 제게 큰 도움을 주셨지 않습니까?”
“그래. 최 대표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한번 이야기는 들어봄세.”
“감사합니다. 건방진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지금 저는 웬만한 재벌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많은 돈을 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게 끝이 아니라 시작일 정도로 미래도 밝은 편입니다.”
“그거야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 그래서?”
“그런데 돈이 넘칠 만큼 있어도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더군요. 물론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멍청이는 아닙니다. 하지만 저를 위해줬던 제 친구조차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지켜보고 있자니 마음이 너무나도 답답했습니다.”
“음….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나도 한때 최 대표와 비슷한 문제로 고민에 빠진 적이 있었지. 미국에서 꽤 좋은 성과를 얻었고, 일본에서도 남부럽지 않은 성공을 거두고 있었어. 정말이지 세상 무서울 것 없는 그런 시기였어. 하지만 그렇게 성공 가도를 달려 돈이 넘치게 많아도, 부모님을 살해한 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을 감방에 처넣지도 못했어. 범인은 일본인이고 부모님은 재일교포라는 이유만으로 유죄가 무죄가 되더군.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을 들여서라도 그놈을 집어넣고 싶었지만, 돈이 아무리 많아도 재일교포라는 딱지는 극복할 수 없었지.”
“아! 그런 일이 있으셨습니까? 그래서 저희 부모님을 살해한 범인을 잡기 위해 그렇게 도움을 주신 겁니까?”
건우의 부모님을 살해한 범인을 체포하고 체포하는 과정에서 그들을 반병신으로 만들어버린 최광우 경정을 소개해준 사람도 장만복 회장이었다.
“그래 맞아. 동병상련을 느꼈지. 그때 최 대표 마음이 어떤 마음일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거든. 그래서 범인을 잡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내 일인 것처럼 뛸 듯이 기뻤었지.”
“감사합니다. 회장님에게 받은 은혜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최광우에 이어 차지훈까지. 어쩌면 장만복 회장을 만난 게 건우에겐 가장 큰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고마워할 것 없어. 어떻게 보면 최 대표를 통해 과거에 내가 겪었던 억울함을 풀고 싶었으니까. 대리만족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다고 해도 회장님에게 받은 은혜가 어디로 가는 건 아닙니다.”
“허허. 사람 민망하게…. 어쨌든 이번 일로 최 대표가 느꼈을 좌절감이 어떨지 충분히 이해가 가. 그래서 최 대표가 원하는 게 뭔가?”
“무슨 일이 있어도 제 가족과 지인은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죄를 지었는데 벌을 안 받게 하고 싶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적어도 이번 일처럼 억울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게 하고 싶습니다.”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군. 그래. 뭘 그렇게 고민하나. 최 대표가 본인 입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돈은 많이 번다고. 그럼 고민할 게 뭐 있나? 돈으로 권력을 사고, 폭력을 사면 그만 아닌가?”
“그러고 싶지 않기 때문에 회장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돈으로 산 권력과 폭력에 제 가족이 피해 보는 일이 없도록 만들기 위해 제가 똑같은 짓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차지훈과 함께 ‘초이스 시큐리티’라는 정보·보안 회사를 준비하고 있지만, 그거면 되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 자네라면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로 돌아가고 싶겠지. 그런데 말일세. 뭐가 그렇게 조급한가?”
“네?”
“친구가 언론이 뭇매를 맞아 만신창이가 됐으니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은 이해가 가. 그런데 최 대표는 이제 22살 아닌가? 한 달 전인가, 나와 이야기하면서 분명히 말했었지. 최 대표 자신의 최고 장점은 시간이라고. 그 말은 거짓이었나?”
“아닙니다. 진심이었습니다.”
“그것 봐. 시간은 결국 최 대표 편이야. 인내심을 가져. 지금 최 대표의 행동, 내가 볼 땐 어떻게 보이는지 알아?”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볼 땐 꼭 밥이 자기 마음대로 안 떠진다고 땡강을 부리는 어린아이 같아. 세상일이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건 당연한 일이야.”
“아….”
“최 대표 같은 천재들은 뭐든지 쉽게 배우고 익혀서 인내심이 부족한 것 같아. 진득하게 참고 기다리며 준비할 줄도 알아야 해. 왜 항우가 유방을 이기지 못했는지 아는가? 다른 여러 가지 이유도 있겠지만, 나는 때를 기다리며 참을 줄 아는 유방의 인내심이 덕분이라고 생각해. 그게 유방의 최고 장점이거든. 모욕을 당해도, 억울해도 참고 기다리며 때를 기다리는 사람만큼 무서운 건 없어.”
“제가 조급한 걸까요?”
조급한 건 모르겠지만 화가 나서 과하게 흥분한 건 분명했다.
“당연하지. 느긋하게 행동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네. 철저히 준비하되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지. 대통령도 욕먹는 세상이야. 최 대표 친구를 건드리는 건 언론으로서는 어려운 일도 아니야. 그런 억울한 일이 없도록 만들고 싶다고 했나? 솔직히 물어보겠네. 우리나라에서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네? 아, 그게….”
“몇몇 재벌과 절대 권력자들이 아니면 언론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아. 게다가 그들과 다르게 정당한 방법으로 이뤄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기다려야지. 와신상담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야. 참고 기다려. 내가 생각할 때 최 대표에게 필요한 건 그것뿐이라고 보네.”
“와신상담이라. 그렇군요. 친구가 언론에 뭇매를 맞는 모습에 제가 잠시 이성을 잃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들과 다르지만, 그들보다 우위에 설 방법은 찾았습니다. 단지 이제 시작단계라 좀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것 봐. 내가 아는 최 대표는 절대 능력이 부족하지 않아. 아니지, 오히려 남들보다 월등히 뛰어나. 그러니 자기 자신을 믿고 기다려. 그리고 충분히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쾌도난마처럼 단숨에 잘라버리게. 그래도 한 가지 조언을 하자면, 최 대표의 최고 장점은 천재성이 아니라 국민들의 신뢰야. 그걸 잃으면 최 대표를 적대하는 세력은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승냥이처럼 달려들 거야. 그러니 어떤 일을 하더라도 국민들의 신뢰를 잃는 일은 하지 말게나.”
장만복 회장의 말처럼 건우의 가장 큰 장점은 국민들의 사랑과 신뢰였다.
재계 2위인 와룡그룹이나 못해도 100위 안에 드는 세계그룹이 건우를 쉽게 건드리지 못한 것은 건우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건우에 대한 국민들의 믿음이 그만큼 대단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정말 제게 가장 필요한 말씀을 해주신 것 같습니다. 정말 제게는 무엇보다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고. 나 또한 최 대표와의 대화가 정말 즐거워.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는 말이 지금까지는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최 대표 같은 천재를 두고 하는 말이었군. 최 대표의 눈빛을 보니 내가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이번 고비를 무사히 넘길 것 같네.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봄세.”
“네. 실망하시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와신상담, 쾌도난마도 잊지 않겠습니다.”
***
소학은 송나라 주자가 엮은 것이라 씌어 있으나 실제로는 그의 제자인 유자징이 주자의 지시를 받아 편찬한 책이다.
1187년 완성되었으며, 내편 4권, 외편 2권의 전 6권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8세 안팎의 아동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만든 수신서이다.
소학에는 경신구사(敬身九思)라는 문구가 있다. 군자가 행동에 앞서서 깊이 생각해야 할 9가지 조목을 의미하는데, 그중에서 분사난(忿思難)이라는 말이 나온다.
분노하거든 그다음을 생각하라. 분노는 불길보다 무섭다. 무엇이나 태워버린다. 재만 남긴다. 아니면 쉬운 것도 어렵게 한다.
그러므로 사물 앞에 ‘분노할 때는 어려움을 생각하라’며 군자는 평온하고 당당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건우는 장만복 회장이 선물이라고 쥐여 준 ‘소학’이라는 책을 읽으며 한 번 더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 아무리 화가 나도, 아무리 억울해도 그렇게 쓸쓸하게 죽어가던 과거의 나보다 고통스러울까? 회장님 말씀처럼 내가 너무 조급하게 군 것 같아. 참자. 참고 기다리자.”
그렇게 다짐하며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분노로 인해 용광로처럼 뜨겁게 들끓었던 눈빛은 어느새 차갑게 빛이 났다.
Rrrr
“네. 차 팀장님.”
- 강 의원의 미성년자 성추행사건, 언론보도 준비 모두 마쳤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준비하셨네요.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해주세요. 후속 비리 보도도 차질 없이 진행하시고요.”
-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리고 몇 시간 후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한 새로운 뉴스가 등장했다.
1일 차.
[강 모 의원. 미성년자 여학생 성추행 의혹?]
[기강이 해이해진 국회! 이번에는 미성년자 성추행. 이 나라 과연 어디로 가나?]
[무소불위 국회의원, 여중생 성추행 후 부모 협박까지.]
[강 모 의원. 성추행이 아니라 성폭행 미수설 모락모락.]
2일 차.
[불체포특권 때문에 발목 잡힌 경찰 수사.]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인가? 국회의원의 사설경비인가?]
[성추행 국회의원. 여당의 실세로 평가받는 강 모 의원으로 밝혀져 충격]
[계속되는 성 추문. 곤경에 빠진 여당.]
[강 모 의원, 가슴 접촉은 우연히 일어난 일. 억울하다 밝혀.]
[팔뚝이나 등을 만진 것은 ‘수고하라’는 의미. 다른 신체 접촉은 그냥 우연.]
3일 차.
[황제 출두한 전직 국회의장. 경찰, 봐주기 논란]
경찰은 ‘국민에게 책임을 다하는 희망의 새 경찰’이라는 슬로건답게 특급 대 국민 친절 서비스 4가지를 선보였다.
첫째. 경찰 출두 시간 선택제. 출두 시간은 언제든 내 맘대로 선택할 수 있다. 꼭두새벽이든 심야든 상관없다. 혹 예정일보다 일찍, 사전예고 없이 기습 출두를 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 경찰은 24시간 항상 대기 중이다.
둘째. 무한 차량 제공 서비스. 경찰서에서 조사받고 나와서 몸이 좀 피곤하다거나 아프다 싶으면 굳이 내 돈 써가면서 택시 탈 필요 없다. 왜? 담당 형사가 자기 차로 직접 원하는 장소까지 태워다주기 때문이다.
셋째. 개구멍 출입 서비스. 내가 사회적 지위가 있어서 경찰서에 정문으로 나가기가 좀 부담스럽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경찰서 뒷문이 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항상 열어 놓고 있다. 그것도 부담스러운 사람을 대비해, 특별히 직원 전용 지하주차장도 완비!
넷째. 형사과장이 제공하는 다과 서비스. 일단 경찰서에 오면 형사과장 방으로 모셔진다. 거기서 2시간 동안 향 좋은 커피와 주전부리를 느긋하게 즐기면 된다. 물론 그날 진행할 조사와 관련한 브리핑을 듣는 특전도 누릴 수 있다. 죄를 지어도 경찰서에서 온갖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우리나라 좋은 나라.
이게 무슨 개소리냐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있을까? 미안하지만 개소리가 아니다. 어제 새벽 강 모 국회의원이 실제로 경찰에 제공받았던 서비스이다.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니, 앞으로 경찰은 국회의원은 되고 일반인은 안 된다는 말은 절대 하면 안 된다.
- 여러분들의 빠른 제보를 기다립니다. 우리일보 강제보 기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