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157화 (157/256)

제157화

현관문이 닫히고 스칼라의 모습이 사라지자 건우는 휴대전화를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Rrrr

- 네. 대표님.

“수고가 많으십니다, 차 팀장님. 닦달하고 싶진 않은데 진행과정이 궁금해서요. 소송 건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 그렇지 않아도 그 일로 전화드리려고 했습니다. 악플러와 이번 사태를 주도한 몇몇 신문사에 대한 조사는 끝냈습니다. 빠져나갈 구멍은 절대 없게 조사를 완벽하게 끝내놨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수고하셨습니다. 바로 고소, 고발 조치해 주세요.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괴롭혀 줄 생각입니다. 최건우라는 사람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겁니다. 차 팀장님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주십시오. 얼마가 들던 돈은 상관없습니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면 악랄할 방법도 괜찮습니다.”

- 알겠습니다. 대표님이 만족하실만한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

70~80년대 영사실처럼 엔틱하고 빈티지 느낌이 물씬 풍기는 스튜디오. 네 명의 MC가 산만하게 오프닝 인사를 하고 있다.

스튜디오 밖에서 그 모습을 긴장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네 명의 늘씬한 미녀들. 그녀들은 옐로우 레이디다.

“들길은 마음에 들자 붉어지고 마을 골목은 들로 내려서자 푸르러졌다. 바람은 넘실 천(千)이랑 만(萬)이랑 이랑이랑 햇빛이 갈라지고 보리도 허리통이 부끄럽게 드러났다. 꾀꼬리는 여태 혼자 날아 볼 줄 모르나니 암컷이라 쫓을 뿐.”

“이봐요. 갑자기 뭐하는 겁니까?”

“뭐하긴요. 시 읊잖아요. 김영랑 시인의 오월 몰라요? 어허. 이 사람 은근히 무식하네.”

“아니. 모르긴 누가 모른다고. 알아요. 내가 왜 몰라.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다.”

“으잉? 김영랑 시인 이야기를 하다 말고 갑자기 뭐하는 건가요? 말 돌리기?”

“어허. 이런 무식한 양반 봤나. 피천득 시인의 오월이라는 시입니다. 시에 대해서 아는 척 좀 하길래 읊어 봤는데 전혀 모르는 눈치네요. 쯧쯧.”

“알죠. 알아요. 피천득 시인을 내가 왜 모른다고. 흠흠.”

아웅다웅하는 두 사람 때문에 스튜디오가 소란스러워졌다.

“자자. 두 사람 그만해. 그러니까 둘 다 무식해 보여. 시청자 여러분 죄송합니다. 실록이 더욱 푸른색으로 짙어지는 오월입니다. 가벼운 방송이라 매일 욕만 먹어서 고품격으로 오프닝을 열려고 했는데, 역시나 저 두 사람이 도와주지 않는군요. 그럼 거두절미하고 재빠르게 오늘의 초대손님을 소개하며 ‘비디오 스타’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정상의 자리까지 올랐다가 열애설 한 번에 바닥까지 떨어진 아이돌.”

“사실 그 스캔들만 아니었으면 우리 프로그램에 나올 사람들이 아니죠. 어쩌나. 그대들의 불행이 우리에겐 행운이 되었는데. 오늘 정말 할 말 많을 것 같아요. 흐흐흐.”

“이 사람이. 지금 초대 손님 앞에 두고 이게 무슨 망발입니까.”

“그럼 제가 없는 말을 했습니까? 솔직히 옐로우 레이디가 평소 같았으면 우리 방송 나올 리가 없잖아요. 우리 좀 솔직해지자고요.”

방정맞은 MC들이 조금은 기분 나쁘게 놀려대도 출연을 기다리고 있는 그녀들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긴장된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들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이럴 때 그들의 말에 발끈해봐야 오히려 역효과만 볼 뿐이다. 그녀들은 방송은 완전 처음이라는 신인의 마음가짐으로 지금의 이 상황을 즐기자 서로 다짐했었다.

“헉! 그룹 이름은 내가 말하려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선수를 치다니! 시청자 여러분. 오늘도 정신없이 시작해서 죄송합니다. 조금 전 대기실에 만났는데, 방송국에 천사가 강림한 줄 알았습니다. 얼굴이면 얼굴, 몸매면 몸매, 노래면 노래. 못하는 것 하나 없는 최고의 아이돌은 아니고 최고였던 여성 아이돌 그룹. 옐로우 레이디의 스칼라, 제니퍼, 소린, 은아. 네 명의 아름다운 레이디들을 소개합니다.”

“안녕하세요. 제니퍼입니다.”

“반갑습니다. 소린입니다.”

“막내 은아예요.”

“안녕하세요. 열애설로 우리 팀을 바닥으로 떨어지게 만든 장본인, 옐로우 레이디의 못난 리더 스칼라입니다.”

옐로우 레이디의 멤버들이 MC의 소개를 받으며 등장했다.

“아니. 스칼라 양. 처음부터 그렇게 돌직구를 날리시면 저희는… 좋습니다. 하하하.”

“네 분 모두 자리에 앉았으니 본격적인 토크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시작부터 스칼라 양이 스스로 돌직구를 날렸으니, 그것부터 이야기하죠. 열애설 그거 후속 보도를 보니 완전히 잘못된 소문이라면서요? 그런데 솔직히 믿을 수가 있나. 연예인들 맨날 하는 소리가 그냥 좋은 친구사이다. 아니면 친한 오빠 동생 사이다. 이런 식으로 해명하잖아요.”

“하지만 사실인걸요. 건우와 저는 어릴 적 소꿉친구였어요. 정말 아기일 때부터 10년 정도 알고 지냈고 건우 동생들하고도 친했어요. 그러다가 건우네 가족이 마포로 이사 가면서 연락이 끊겼어요.”

“단지 소꿉친구였다? 그런데 최건우 대표는 CF촬영 당시 스칼라 양을 못 알아봤다고 하던데요. 하버드 의대에 합격할 정도로 머리가 좋은 양반이 중간에 연락이 끊겼다고 해도 10년이나 알고 지낸 소꿉친구를 못 알아볼 수 있습니까?”

의도가 뻔히 보이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스칼라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모든 걸 털어놓겠다 마음먹은 이상 어떤 질문도 무섭지 않았다.

“호호호. 그건 제가 방송에서 몇 번이나 말씀드린 것처럼 성형수술 덕분이죠.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성형으로 얼굴이 바뀐 것까지 알아보지는 못하더라고요.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기가 조금 부끄럽지만, 어릴 적 제가 좀 남자 같이 생겼었어요.”

“아니 얼마나 바뀌었길래 천재로 불리는 최 대표가 몰라볼 정도가 된 겁니까?”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 어릴 적 사진을 가져왔어요.”

스칼라는 짓궂은 MC의 질문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미리 준비해둔 사진을 꺼냈다.

성형수술한 연예인이 자신의 과거 사진을 직접 공개하는 것은 보통 결심이 아니고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스칼라는 그녀에게 보여준 동생들의 의리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부끄러움 따위는 잊기로 했다.

“헉! 이런. 대체 이게 누굽니까? 두 사람 중에 누가 스칼라 양입니까? 아니지. 오른쪽 꼬마는 아무리 봐도 지금의 최건우 대표와 판박이군요. 그럼 그 옆에 이상하게 생긴…. 아! 죄송합니다. 착하게 생긴 왼쪽 꼬마가 스칼라 양입니까?”

“네. 맞아요. 착.하.게. 생긴 꼬마가 저 맞습니다. 오른쪽은 다들 알아보신 것처럼 건우가 맞아요. 우리 두 사람이 소꿉친구라는 사실을 안 믿는 분이 계실까 봐 일부러 사진을 가져왔어요. 이제 우리 둘이 소꿉친구라는 말 믿으시겠어요?”

“음. 사진 속 두 사람이 친한 친구라는 건 알겠는데, 왼쪽 꼬마가 스칼라 양이라는 건 도저히 안 믿기네요. 어디 하나 닮은 구석이 있어야죠. 괜히 최 대표의 어릴 적 사진 하나 가져와서 해명하는 건 아닌가요?”

“어휴. 이럴 줄 알았어요. 제가 좀 많이 변하긴 했죠? 이런 걸 그냥 넘어가면 절대 비디오 스타가 아니죠. 그래서 중학교 졸업사진도 가져왔어요. 자. 어때요?”

스칼라는 과장되게 한숨을 쉬며 함께 가져온 졸업 앨범을 확대한 사진을 공개했다.

어릴 적 얼굴이 그대로 남은 사진 밑에 ‘복금실’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헉. 이 여학생이 정말로 스칼라 양이라는 말입니까? 맙소사! 그런데 복금실? 스칼라 양 본명이 복금실이었습니까?”

“앗. 역시 눈썰미가 날카로우시네요. 맞습니다. TV에서는 처음 공개하는데, 제 본명이 복금실 맞습니다, 맞고요.”

“얼굴하고 이름이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하하하. 어쩌면 그동안 과거 사진이 인터넷에 안 돌았던 이유가 친구들도 저 사진 속의 복금실 양과 지금의 스칼라 양을 동일 인물로 생각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군요.”

“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정말 위대하고 존경하고 싶은 성형외과 의사선생님입니다. 이게 방송에 나가면 스칼라가 성형한 병원은 온통 난리가 나겠군요. 이 정도면 의사가 아니라 신이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이렇게 예쁘면서도 자연스러운 얼굴로 만들어 주신 선생님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건우도 제 얼굴 보고 그랬어요. 한국의 성형 기술은 미국을 넘어섰다고요. 호호호.”

당당한 스칼라의 행동에 오히려 MC들이 당황하는 눈치였다.

“아! 항상 점잖을 것 같은 최 대표가 그런 식의 농담도 했단 말입니까?”

“그럼요. 어릴 적 건우는 의젓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장난기 많은 소년이었어요. 저보고 복실이라고 놀리기도 많이 했고요. 지금도 그러고 놀고 있어요. 그러니 절대 연인 사이가 될 수 없죠.”

“하지만 말입니다. 사진에서 본 두 사람은 너무나 다정해 보였습니다. 게다가 술에 취해서 업혀갔지 않습니까? 그리고 두 사람이 탄 차가 최 대표 아파트로 들어가는 사진까지 찍혔고요. 그런데도 친구라고 할 수 있습니까?”

질문이 점점 수위를 높여갔다. 스칼라도 바라던 일이었다.

“친구니까 그럴 수 있지 않나요? 오히려 제가 물어보고 싶네요. 제가 지금 22살이거든요. MC 분들께서는 제 나이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업혀간 적 없었나요?”

“아… 그게 그랬던 적이 있긴 있었나? 기억이 잘….”

“뭘 기억 안 나는 척해요?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열 번이 넘는구먼. 너무 많아서 기억이 안 나는 거겠죠.”

“어허, 이 사람이 정말. 그러는 당신은 나보다 더하잖아. 내가 술 먹고 뻗은 당신을 업고 간 게 다섯 번은 넘어. 어디서 나만 진상으로 만들려고 그래. 어림도 없지.”

“그럼 두 분도 사귀시는 건가요?”

최대한 귀여운 표정으로 물었지만, 스튜디오는 마치 정지 장면처럼 잠시 굳었다.

“하하하. 스칼라 양. 우린 남자와 남자 사이라서 사귈 일이 없어요.”

“네? 그거 좀 위험한 발언이신데요. 성 소수자에 대해….”

“인정합니다. 친구끼리인데 당연히 술에 취해 쓰려지면 업어갈 수 있죠. 당연합니다. 혹시 그 사실에 부정하시는 분 있으면 저랑 이 친구랑 우리 두 사람하고 먼저 싸우셔야 할 겁니다.”

오랜만에 다정한 모습을 연출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메인MC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데 스칼라 양.”

“네.”

“술에 취한 친구를 업고 갈 수는 있어요. 그렇지만 자기 집에 같이 가는 건 좀 문제가 있지 않나요? 어쨌거나 남녀 사이 아닙니까? 시청자들은 오해할 수 있어요.”

“이번에도 제가 오히려 묻고 싶네요. 건우가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저를 호텔로 데려갔겠지 자기 집으로 데려갔겠어요? 혼자 사는 것도 아니고 동생들도 같이 사는 집으로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남동생 두 명은 저도 알고 지냈어요.”

“아하.”

“게다가 건우가 동생들을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아끼는지는 전 국민이 다 알아요. 그런 건우가 동생들이 있는 집에서 저랑 그렇고 그런 행동을 하려고 할까요? 제가 벗고 덤벼도 오히려 저를 나무랄 녀석이에요.”

“헉! 스칼라 양. 아무리 그래도 벗고 덤볐다는 말은 좀. 우리가 좀 인기 없는 프로그램이긴 한데 그래도 정규 방송이라 말조심을 해주셔야 해요.”

노골적인 발언에 남자 MC들이 손으로 얼굴을 부치는 시늉을 했다.

“죄송해요. 너무 말도 안 되는 루머에 시달리다 보니 저도 답답한 마음에 말이 과격하게 나왔어요. 그래도 의심하실 분들이 계셔서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건우에게 늦둥이 막내 여동생이 있는데 아직도 큰오빠 없으면 잠을 잘 못 자요. 한 마디로 이상한 일을 만들고 싶어도 만들 수 없는 환경이죠. 이 정도면 답변이 되었나요?”

“하하하. 충분합니다. 그럼 일진설에 대해서도 물어보겠습니다. 스칼라 양이 일진설이었다는 말이 들리던데 사실입니까?”

“아뇨. 절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럴 능력이 있었다고 해도, 시간이 없었어요. 학교 수업이 끝나면 늘 연습실로 달려갔으니까요. 제 어릴 적 사진이 인터넷에 돌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가, 너무 바빠서 사진 찍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언제부터 연습생이었길래요?”

“지금부터 10년 전이니까 제가 12살 때부터네요. 그때는 연습실에서 연습하는 게 너무 행복했어요. 심지어 수학여행도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고 안 갔어요. 그러니 학창 시절 사진이 있을 리가 없죠. 지금 생각하면 조금 아쉽긴 해요.”

“그건 언니 말이 맞아요. 저희는 1년 365일을 하루도 빼먹지 않고 열심히 연습만 했어요. 평일에도 학교 마치고 5시에 모여서 11시까지 미친 듯이 춤을 췄는데, 누굴 괴롭힐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요.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죠. 누가 그런 루머를 퍼트렸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천벌을 받을 거예요.”

“와우! 천벌을 받아요? 역시 열혈의 제니퍼 양다운 발언이었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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