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158화 (158/256)

제158화

그때 소린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제가 한 마디 덧붙여도 될까요?”

“그래요. 지금까지 조용히 있었던 소린 양. 뭐든지 말씀하세요. 전 소린 양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 드릴 용의가 있어요.”

“어허. 사심 방송 금지! 소린 양 놀라셨죠. 저런 인간은 잠시 잊으시고 덧붙이고 싶다는 말씀을 해주세요.”

“감사해요. 얼마 전에 스칼라 언니에게 폭행을 당하고 돈을 빼앗겼다는 글이 올라온 적이 있었어요.”

“알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인터넷이 엄청나게 시끄러웠었죠.”

“네. 저희는 그런 터무니없는 루머를 듣고 곧바로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어요. 그리고 며칠 전에 연락이 왔는데, 그 글을 올린 사람이 30대 중반의 남자라고 하더군요.”

“네? 올린 글이 너무 사실적이라 다들 그 글을 읽고 스칼라 양을 엄청나게 욕했었는데. 아! 물론 제가 그랬다는 건 아니고요. 하하하. 아무튼, 그 글을 올린 사람이 정말 30대 중반의 남자 맞습니까?”

“네. 확실해요. 궁금하면 경찰에 확인해보시면 됩니다. 언니는 여중, 여고를 나왔기 때문에 남학생과 같이 학교에 다닌 적도 없고, 나이로도 절대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사람이 글을 올렸습니다. 명백히 꾸며낸 이야기라는 증거죠. 저희는 그런 허위사실을 유포한 그분을 이미 경찰에 강력하게 처벌해 달라고 요청한 상태입니다.”

거짓 폭행글을 올린 사람뿐만 아니라 기자들과 다른 악플러들도 대부분 경찰 조사를 받고 있었다.

“소린 양이 조곤조곤할 말은 다 하는 스타일이라고 하더니, 소문이 사실인 모양입니다. 그리고 허위사실을 올린 30대 중반 아저씨는 콩밥 좀 먹어야겠군요. 쯧쯧쯧.”

“가장 떠들썩했던 루머 두 가지는 이렇게 해명이 되었는데, 나머지는 좀 묻기가 좀 조심스럽군요. 어떻게 질문을….”

“가슴 성형설과 임신설요?”

아무리 막 나가는 편인 비디오 스타의 MC들이라고 해도 이번 이야기는 함부로 꺼내기 어려운 이슈였다. 그들이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스칼라가 먼저 나서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그렇죠. 하하하. 사실 묻기가 조금 조심스럽습니다.”

“괜찮아요. 전부 사실이 아니니까요. 이건 아니라고 해명해도 안 믿으실 것 같아, 방송 날짜에 맞춰 우리 옐로우 레이디 홈페이지에 저의 검진 사진을 올릴 예정이에요.”

“네에?”

“보형물이 없는 제 가슴 X-ray 사진과 지금까지 한 번도 임신한 적이 없다는 산부인과 의사의 소견서요. 혹시라도 조작 의혹이 일까 봐 서울대 병원과 세브란스 병원에서 두 번 검진을 받았고, 사진과 소견서 또한 병원별로 게시할 생각이에요.”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하시는 건….”

“사람들이 안 믿으니까요. 뭐, 이렇게까지 해도 안 믿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스칼라는 별일 아닌 것처럼 어깨만 으쓱했다.

MC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들도 스칼라가 설마 이렇게까지 파격적으로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떠십니까?”

함께 비디오 스타를 지켜보고 있던 차지훈 팀장이 건우에게 물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차 팀장님. 이렇게 빨리 방송에 나갈 수 있을지 몰랐는데, 생각보다 빨리 기회가 생각 정말 다행입니다.”

“비디오 스타라는 프로그램이 원래 이슈가 많은 연예인을 섭외하는 걸 좋아해서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스칼라 양의 당당한 모습은 정말 보기가 좋군요. 확실히 이럴 땐 정면 돌파가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네. 괜히 저 때문에 안 해도 될 고생을 한 거죠. 이번에 있었던 논란이 전부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정말 미안했었습니다. 그러니 팀장님이 앞으로도 좀 더 많은 신경을 써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저도 스칼라 양과 옐로우 레이디의 팬이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서호영 골드 스타 사장과 잘 이야기해서 예전보다 더 잘나가는 아이돌 그룹으로 만들겠습니다. 전설로 남을 수 있도록요.”

“그리고 말입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위상백 사장 말입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 문제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건우가 약간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차지훈 팀장이 그의 의중을 재빨리 눈치채고 말을 받았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감사합니다. 조금 많이 신경 쓰이는 작자라서요. 언론을 겨우 좋은 쪽으로 바꿔놨는데, 그 작자가 또다시 산통을 깨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요.”

“네.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런 문제는 생기지 않도록 잘 정리하겠습니다.”

***

크레이듀 10억 원, 초이스 에듀 50억 원. 위상백이 최근 받은 돈이다.

그중 10억은 크레이듀에게 다시 돌려주고, 10억은 불곰파에게 위자료 명목으로 빼앗겼다.

처음에는 50억을 전부 빼앗으려고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스칼라의 스캔들을 터트리며 언론의 주목을 받는 바람에 억지로 빈털터리로 만드는 건 너무 위험부담이 컸다.

일단은 어느 정도 납득할만한 금액인 10억 원만 받아냈다. 위상백도 앞으로도 계속 불곰파와 친분을 유지하기 위해 두말하지 않고 10억 원을 넘겼다. 그래도 그의 수중에 40억 원이 남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차지훈은 절대 10억 원으로 만족할 사람이 아니었다. 불곰파를 압박해 위상백이 아무 소리도 못 하게 최대한 합법적으로 남은 40억 원을 빼앗아 오도록 지시했다.

위상백이 가장 좋아하는 건?

술도, 여자도 아니다.

바로 도박. 그는 도박 중독이다.

세상에서 가장 끊기 어려운 게 도박과 마약이라는 말이 있다. 여러 번 패가망신을 위상백은 아직도 도박을 끊지 못했다.

갑자기 생긴 거액. 처음에는 술과 여자에 빠져 허우적거렸지만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원하는 패를 간절히 바라며 패를 뒤집을 때의 쫄깃함, 그리고 원하는 패가 나왔을 때의 짜릿함.

대박 패가 나와 한 번에 수천만 원을 쓸어갈 때의 그 황홀함은 술이나 여자로도 도저히 대체되지 않았다. 전형적인 도박 중독자들의 특징이다.

차지훈은 불곰파에 지시를 내려 위상백이 다시금 도박판에 나오도록 만들었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냥 옆에서 화투 치는 모습만 몇 번 보여줬을 뿐인데도 위상백은 알아서 도박판에 발을 들이밀었다. 오히려 불곰파는 절대 안 된다고 말리는 시늉을 하며 위상백을 안달 나도록 했다.

그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위상백 수중엔 40억이라는 거액이 있었지만 그 돈을 전부 도박판에서 잃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억. 아니 5,000만 원만 빌려줘. 알잖아. 내가 한 방 있는 거. 이대로 여기서 나갈 수 없어. 그러니까 내 얼굴을 봐서 딱 5,000만 원만 더 빌려줘. 응?”

“어허. 잘 알만한 양반이 왜 이러실까? 여보세요. 위상백 사장님. 사장님이 지금까지 여기서 빌린 돈이 벌써 5억 원입니다. 더 이상은 빌려드릴 수 없어요. 헛소리하지 말고, 얼른 빌려간 돈이나 갚으세요. 일주일 내에 갚지 못하면 뒷일은 책임질 수 없습니다.”

“뭐라고? 이 자식아. 네가 내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내가 그동안 여기서 날린 돈이 얼만데. 내 전 재산 대부분을 날렸다고. 그런데 고작 5,000만 원을 못 빌려줘? 이 망할 자식아?”

남자의 말에 화가 난 위상백이 발악하듯 달려들었으나, 술과 도박에 빠져 몸이 엉망이 된 그는 팔다리도 제대로 놀리지 못했다.

“미친놈. 이 자식이 지금 뭐라는 거야? 아직까지 뭐가 똥인지 뭐가 된장인지 구분이 안 가? 넌 이제 거지야. 등신아. 돈이 있을 때나 사장님이지 땡전 한 푼 없는 지금도 사장인 줄 알아? 그러니까 여기서 주접떨지 말고 꺼져. 그리고 잊지 마. 일주일이야. 일주일 안에 5억 원 갚지 못하면 정말 후회할 일이 생길 거야. 명심해. 얘들아. 정중히 밖으로 모셔다 드려라.”

“네!”

“야. 이거 안 놔? 이거 놔. 야! 제발 이거 좀 놔. 정말 촉이 왔다니까. 오늘은 무조건 딸 수 있다고. 제발. 제발. 좀.”

위상백은 사설 도박장에서 끌려나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며 노력했지만, 100kg 가까운 두 덩치의 팔에 매달려 처량하게 문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X발!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그래 한 번 들어와 봐. 손이 넘어오면 손모가지를 발이 넘어오면 발모가지를 잘라줄 테니까. 내가 할 수 있을지 없을지 궁금하지? 한 번 넘어와 봐. 네 눈으로 네놈 신체 부위가 잘려나가는 모습을 똑똑히 보여줄 테니까.”

어떻게든 다시 도박장 안으로 들어가려 했던 위상백은, 살기등등한 남자의 말에 위축되어 발걸음을 돌렸다.

유명한 조직폭력 조직이 운영하는 도박판이다. 불곰파도 한 수 접어줄 정도로 위험한 작자들이다. 그래서 수십억 원을 잃고도 감히 신고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불곰파가 말릴 때 들었어야 하는데 너무 늦은 후회다.

***

졸지에 거지가 된 위상백은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되어 며칠째 길거리를 배회하고 다녔다.

5억 원이라는 거금을 빚으로 지고 있어서 혹시라도 자기를 찾아올까 봐 가족이나 지인에게 연락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잠은 그냥 공원 벤치에서 청하고, 밥은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급식해주는 곳을 찾아가 해결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러다 가전매장 윈도우에 설치된 커다란 TV 속에서 발랄한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옐로우 레이디의 모습을 발견했다.

“뭐야. 저것들. 얼씨구. 설마 그렇게 욕 처먹고도 또 재기에 성공한 거야? 대단하다, 대단해. 정말 난 년들이네. 최건우가 도와준 건가?”

위상백은 그동안 술과 여자 그리고 도박에 빠져 정신없이 사느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완전히 망가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옛 인연들을 TV를 통해 보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흐흐흐.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내가 제니퍼랑 소린이 약점을 몇 개 알고 있는데 그걸로 장난을 좀 쳐볼까? 이번엔 누굴 찾아가지? 기자? 아니야. 아무래도 골드 스타가 낫겠지? 이청수까지 데리고 있는 거 보면 돈은 썩어난다는 거잖아. 좋아, 그럼 골드 스타로. 기다려라, 이것들아! 사장님이 이뻐해 주러 간다.”

“미친. 하여간 이럴 줄 알았다니까.”

“누…누구요?”

옐로우 레이디를 보며 군침을 흘리던 위상백은 갑자기 등 뒤에서 나타난 검은 옷의 사내를 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누구긴 누구야. 빚쟁이지.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왜 하필 그런 생각을 해서 네 신세를 망치냐. 쯧쯧. 역시 나쁜 놈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자, 잘못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조용히 살겠습니다. 살려주십시오.”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그는 일단 무릎부터 꿇고 무조건 살려달라고 빌었다. 평범한 외모지만 풍기는 모습부터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다.

“살려달라니. 내가 망나니도 아니고. 나 사람 안 죽여. 그러니 살려달라고 하지 마. 어쨌든 5억 원이라는 거금이 빚이잖아. 갚아야지. 안 그래?”

“물론입니다. 어떻게든 갚겠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어허. 알 만한 사람이 이거 왜 이러실까? 완벽하게 개거지 신세잖아. 탈탈 털어봐야 10원짜리 하나 안 나올 놈이 무슨 수로 5억 원을 갚아? 그냥 내가 돈을 갚을 수 있도록 직장을 알선해 줄게.”

“직장이요?”

“그래. 나, 알고 보면 굉장히 인도주의자야. 돈 안 갚는다고 누구처럼 섬에 팔지도 않고, 장기를 적출할 생각도 없어. 그러니 안심하라고. 그냥 눈 딱 감고 10년만 배 타자.”

“네? 배…배를요?”

“그래. 원양어선이야. 거기서 10년 일하면 5억 원 탕감해줄게. 좋지? 그럼 당장 가자.”

“자, 잠시만요. 저도 잠깐 생각을 해보고.”

“미안한데 네놈에겐 선택권이라는 게 없어. 그러니 그냥 닥치고 따라와.”

“시, 싫어. 내가 왜 배를 타. 배를 타는 거나 섬에 팔아먹는 거나 뭐가 다르다고. 못해.”

위상백은 그렇게 도리질 치며 뒤를 돌아 재빨리 그곳을 빠져나갔다.

“쯧쯧. 도망가도 하필 우리 애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가냐. 하여간. 너도 참 재수가 없는 놈이다. 아닌가. 그래도 몸뚱이는 살아 있으니 완전히 재수 없는 건 아니려나.”

Rrrr

남자는 위상백의 뒷모습을 그냥 측은하다는 듯 바라보며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어. 그래.”

“과장님. 예상대로였습니다. 이번엔 제니퍼랑 소린을 약점을 가지고 협박하려고 하더군요. 그대로 두면 사고를 칠 것 같아서 예정보다 빨리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잡았어?”

“지금쯤 새로 들어온 애들이 붙잡았을 겁니다. 애들이 있는 곳으로 알아서 도망가서 잡기 수월했습니다.”

전화를 받는 사람은 고자성 과장이고, 그에게 보고하는 사람은 불곰파의 새로운 행동대장이었다.

원래 행동대장이었던 이대구는 건우를 협박한 죄로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새로운 인물로 행동대장을 뽑고 밑에 애들도 대부분 물갈이했다.

“원양어선은 확실한 곳을 수배해놓은 거지?”

“물론입니다. 선장 빼고 한국 선원이 없는 원양어선으로 특별히 골라놨습니다. 10년 안에는 절대 육지로 내려오지 못할 겁니다.”

“그렇군. 차질 생기지 않게 확실하게 마무리하고 다시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과장님.”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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