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165화 (165/256)

제165화

재계서열은 공정거래위원회가 대기업집단을 지정하여 공정거래법에 따라 매년 4월에 발표하는데, 대통령과 재계 총수 간담 시에 이 순서대로 진행된다.

그 기준은 대기업집단의 ‘자산’으로 하며 그중 금융자산(은행, 보험 등)은 제외된다. 또한, 공기업 역시 제외된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올 4월 발표한 재계서열을 보면 S그룹이 십수 년째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뒤를 와룡그룹과 동지그룹이 뒤따르고 있는 모습이다.

동지그룹의 경우 1980년대만 해도 기업순위 50위에도 들지 못했으나 고대성 회장이 취임한 이후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으며, 급기야 199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재계서열 5위에 드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러나 명이 있으면 암도 있는 법.

고대성 회장의 독단적인 운영방침이 그룹의 놀라운 발전을 가져왔지만, 그런 독단적인 운영이 더 이상의 발전을 가로막았다.

기업이 방대해지다 보니 한사람이 모든 것을 컨트롤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단지 발전을 가로막은 것이 아니라, 연로해진 회장이 사망하게 되면 심각한 경영난을 겪으리라 추측하는 경제 전문가들도 상당히 많았다.

이때 혜성과 같이 등장한 사람이 바로 권력 승계 가능성을 낮게 봤던 셋째 아들 고현호와 평범한 직장인 마동수였다.

우연한 기회에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은 그때부터 의기투합하여 정체기에 빠진 그룹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기 시작했고, 권력투쟁에서 살아남아 고대성 회장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다.

그 이후부터 동지그룹은 와룡그룹을 위협하며 강력한 라이벌로 빠르게 성장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한때 동지랜드라는 놀이공원을 운영하며 조용히 살던 고현호 이사는 그룹 본사의 전무로, 평사원이나 마찬가지였던 마동수 주임은 고씨 일가를 제외하고는 그룹 역사상 최연소 이사로 각각 승진했다.

“마 이사. 초이스 에듀 최건우 대표가 그 정도까지 투자할 가치가 있는 사람 분명해?”

“전무님. 저 마동수입니다. 하루이틀 보는 것도 아니고, 저 못 믿으십니까?”

이사답지 않은 껄렁한 언행을 내뱉는 마동수 이사였지만 그런 그를 보면서도 고현호 전무는 얼굴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만큼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단순히 우정이라고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각별한 사이였다.

고현호 전무가 그룹의 권력 투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두 사람의 능력만큼이나 서로에서 대한 굳건한 신뢰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 내가 너를 하루 이틀 본 게 아니라서 이러는 거잖아. 마 이사 네 말처럼 최건우 대표가 천재라는 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천재가 사업에 항상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다른 사업도 아니고 학원 사업이잖아. 애들 코 묻은 돈으로 사업을 해봐야 얼마나 번다고.”

“어허. 전무님의 방금 그 말씀은 정말 실망입니다. 대권을 확실하게 이어받게 되었다고 벌써 그렇게 긴장 푸시고 다니면 안 됩니다.”

“실망? 애들 코 묻은 돈을 코 묻은 돈이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놀이공원에서 유딩, 초딩애들 삥땅 치던 양반이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래도 최건우 대표는 중딩부터 상대합디다.”

“야! 다 지나간 이야기를 왜 갑자기 꺼내. 그때 나는…, 아니다. 변명해봐야 나만 추해지지. 그래, 네 말처럼 내가 애들 코 묻은 돈을 벌긴 했지. 그래서 그런 사업의 한계를 더 잘 아는 거야. 우리나라처럼 천연자원이 없고 땅덩어리가 작은 국가는 고부가가치 산업을 육성시켜 수출을….”

“수출 이미 하고 있습니다. 대체 언제적 이야기를.”

학원 사업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학원 사업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사실 학원 사업 아이템으로 수출할 수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건우가 학원 사업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는 걸 고현호 전무는 아직 알지 못했다.

“뭐? 학원 사업에 수출할 게 뭐 있다고?”

“이 전무님 진짜, 해도해도 너무하는 것 아닙니까? 새로운 교과 커리큘럼인지 뭔지 그걸 동영상 강의로 만들어 수출 시작한 게 언제인데요? 그리고 ‘퓨처 앱’이라고 교육 용 앱도 수출한다고 기사에도 났어요.”

“그랬어? 그런 기사를 봤던 것 같기도 하고.”

뒤늦게 기억나는 척하는 고현호 전무.

“그럼요. 수십, 수백만 원짜리 전자제품을 만들어 파는 게 고부가가치 사업인 시대는 지났어요. 요즘은 이런 게 진짜 고부가가치 사업이라고요.”

“크흠. 일단 우리가 초이스 에듀에 투자를 해야 하는 이유를 내가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설명해봐. 다짜고짜 방에 쳐들어와서 ‘초이스 에듀에 투자합시다’ 이러면 내가 ‘알겠습니다. 마동수 이사님’이라고 할 것 같아? 아무리 허물없는 우리 사이라고 해도 그러면 내가 너무 모양 빠지잖아. 나 동지그룹 차기 총수야, 왜 이래.”

고현호 전무의 무서운(?) 협박에 마동수 이사는 콧방귀도 안 뀌었다.

“저도 지금 당장 대대적인 투자를 하자는 건 아닙니다. 얼마 전 기사를 보니 최건우 대표가 자신의 라이브 강의를 무료로 서비스한다더군요. 혹시 보셨습니까?”

“봤지. 상당히 이슈였잖아. 경제연구소의 발표를 얼마나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수조 원이 아니라 수천억 원을 포기했다고 해도 대단한 일은 대단한 일이지. 나이도 나보다 한참 어린데 어쩜 그런 결정을 할 수 있는지 참 존경스러워.”

“말이 좋아 무료 서비스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EBS처럼 수신료와 정부 지원을 받는 것도 아니고 결국에는 자기 돈을 들여가며 인터넷으로 강의를 해야 합니다. 서버 관리나 그밖에 비용을 생각하면, 거액을 포기한 데 이어 만만찮은 관리비까지 들여야 하죠. 아무리 의도가 좋다고 해도 수익구조가 적자인 사업은 경영자 입장에서 꾸준하게 이끌어가기 부담스럽습니다.”

“그렇기야 하지. 열심히 해서 돈을 벌어들일 생각은 안 하고 일부러 손해를 보겠다는데, 그걸 좋아하는 투자자가 어디 있겠어?”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수익모델을 만들어 적자를 해소하려 들 게 분명합니다.”

“무료로 서비스하는데 무슨 수익구조가 생겨?”

“며칠 전 초이스 에듀와 KGT가 전국 학교를 대상으로 무료와이파이 서비스 공급 제휴 계약을 맺었습니다. 라이브 스트리밍 무료 서비스를 중학교까지 확대한다고 하니 무료와이파이를 공급 대상이 5,000곳 이상으로 늘어났습니다. 모든 학교가 무료와이파이를 신청하진 않더라도 KGT 입장에서는 상당한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이스 에듀와 제휴를 맺은 이유가 뭘까요?”

“당연히 광고효과겠지. KGT가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최건우 대표와 함께 학생들을 돕는다. 그것만 해도 엄청난 광고효과가 될걸?”

이미 그 발표 하나로 KGT의 인지도가 순식간에 상승했다. 발표 당일은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계속 포털 사이트에 KGT 세 글자가 오르내리고 있다.

“잘 아시네요. 그러니까 우리도 하자는 겁니다.”

“뭘? 광고를? 설마 우리도 와이파이 존 같은 걸 만들자고?”

“아니요. 강의 시간 45분. 쉬는 시간 10분. 그 사이에 뭘 하겠습니까?”

“마 이사 네 생각은 그 시간을 진짜 광고로 채울 것 같다 이 말이야?”

“아직 발표는 하지 않았지만 KGT와 제휴하는 것을 보면 최 대표가 기업 광고에 인색하지 않습니다. 노골적인 광고는 몰라도 기업 이미지 광고나 책이나 영화 같은 광고는 충분히 거절할 이유가 없죠. 이미 언론을 통해 수조 원의 손해를 감수하고 무료 서비스를 한다고 알려진 상황입니다. 적자를 막기 위해 강의 중간에 광고를 끼운다고 비난할 사람이 있을까요?”

마동수 이사는 대한민국 최고의 마케팅 실전 전문가로 불리는 실력자답게 무료 라이브 스트리밍 서비스에 광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단번에 꿰뚫어 봤다.

그렇지만 KGT 남한성 부장과 다르게 잠시 관망한 이유는 행동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두 회사의 처지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재계서열 2위 자리를 눈앞에 두고 있는 동지그룹과 이동통신사업분야에서 계륵 같은 존재로 전락해버린 KGT의 입장이 똑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학생들은 실질 구매층이 아니잖아.”

“전무님. 이제 곧 그룹 총수가 되실 분인데 눈앞에 이익에만 급급해서는 곤란하지 않습니까? 장기적으로 보셔야죠. 10년, 20년 후를 내다보셔야죠. 20년 넘게 총수 자리에 계실 거잖아요.”

“그거야 그렇지.”

“지금 당장 큰 이익이 안 된다고 해도, 지금 학생들이 우리가 만든 기업 이미지 광고를 보며 자란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미지 광고를 보며 우리 회사에 대해 호감을 느낀다면, 10년 후 구매력이 생기게 되었을 때 충성스러운 고객으로 변하게 될 겁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훗날 그 학생들이 우수한 인재가 되어 회사에 입사 원서를 낼 때도….”

“우리 솔직해지자, 마 이사?”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장기적으로 봤을 땐 나쁘지 않아. 그런데 그 정도는 마 이사 선에서 알아서 추진할 수도 있잖아. 사실 상 동지그룹 넘버 투인데 그 정도도 못해? 솔직히 털어놓지. 지금 이러는 이유.”

고현호 전무는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역할에 가까웠고 실질적으로 동지그룹을 재계서열 5위에서 3위로 끌어올린 장본인은 마동수 이사다.

지금 당장 그룹 넘버 투라고 부리근 이른 감이 있지만, 그만큼 그의 자리는 확고하다는 뜻이다.

“하하하. 안 그래도 진짜 이유를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최근 교육 사업 쪽에 흥미가 생겨 알아봤는데 와룡그룹이 눈에 띄었습니다.”

“와룡그룹이?”

“네. 교육 사업을 장악하려고 굉장히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몇 달 전에는 세계그룹이 운영하던 세계교육이라는 곳을 인수해서 입시학원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고 하더군요. 정당한 경쟁을 상관할 바 아닌데, 전무님도 와룡그룹 스타일 아시잖습니까? 지금 현재도 초이스 에듀를 무너뜨리고 1위 자리에 오르기 위해 온갖 치졸한 짓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하여간 와룡그룹 놈들은 하는 짓마다 그렇게 쪼잔하다니까.”

재계서열 2위 자리를 놓고 다투고 있는 와룡그룹과 동지그룹은 선의의 라이벌 관계가 아니다. 지금 동지그룹 총수인 고대성 회장이 젊은 시절부터 악연이 이어져 온 철천지원수에 가까웠다.

고현호 전무와도 이미 여러 번 충돌이 있었던 덕분에, 지금은 ‘와룡그룹’이라는 이름 하나에 이를 갈 정도가 되었다.

뿌드득 들리는 고현호 전무의 이 가는 소리에 마동수 이사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만약 초이스 에듀를 와룡그룹이 잡아먹어 버리면 우리에게도 큰 타격입니다. 교육 사업 시장이 생각보다 어마어마하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최건우 대표의 명성이 있는데 쉽게 잡아먹힐까?”

“와룡그룹이 지금보다 더 치졸하게 나오면요? 이번에 라이브 스트리밍 서비스를 무료로 선언한 것도 와룡그룹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는 게 우리 그룹 분석팀의 중론입니다.”

“그게 사실이야?”

“전무님도 분석팀 수준을 아시잖아요. 99% 확실합니다. 물론 최건우 대표처럼 걸출한 인물이 와룡그룹에 쉽게 당하지 않겠지만, 거거에 우리가 한 손 거들어 주면 절대 무너질 일은 생기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뭘 망설이십니까. 초이스 에듀와 제휴해서 재수 없는 와룡그룹에게 제대로 엿 먹여 줘야지 않겠습니까?”

“그래 까짓것 뭐! 좋아. 와룡그룹 엿 먹인다는데 무슨 고민이 필요하겠어. 내가 전폭적인 지원을 해줄 테니까 마 이사가 알아서 준비해.”

***

초이스 에듀 대표실.

“대표님. 광고 문의가 들어왔습니다.”

“네? 또요? 우리가 광고를 받겠다고 알리지도 않았는데 벌써 소문이 난 건가요? 되게 빠르네. 이번에는 어딥니까?”

굉장히 비밀스럽게 준비한다고 했는데 광고 문의가 들어온 게 벌써 두 번째다.

“동지그룹입니다. 제가 예전에 추천했던 ‘꼼수 마케팅’ 기억하시죠? 그 책 저자인 마동수 이사님이 직접 연락을 주셨습니다. 광고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업무 제휴도 하고 싶다고 하시네요.”

“아! 당연히 알죠. 그런데 마동수 이사님이 직접이요? 그분 책을 읽으면서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눈치도 정말 빠르시군요. 대외적으로 알려진 정보만으로 우리가 광고를 활용할 것이라는 걸 유추하기 어려웠을 텐데 말입니다.”

마동수 이사가 지은 ‘꼼수 마케팅’은 건우에게 굉장히 많은 영향을 줬다. 그런 마동수 이사에게 직접 연락이 왔다고 하니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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