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9화
“부추기기만 할 건데 피해를 볼 일이 있습니까? 사고가 나면 우리야 모르쇠로 일관하면 그만입니다. 그래도 마음에 걸린다면, 부추기는 사람을 우리와 전혀 연관 없는 인물로 대체해도 됩니다.”
“그렇군. 마음 같아서는 습격이라도 해버리면 좋겠는데 말이야.”
“쉽진 않을 겁니다. 최근에 보면 최 대표와 같이 다니는 수행비서가 보디가드도 겸하는 것 같았습니다. 여자 수행비서가 따로 있는 걸 보아 남자는 말이 수행비서지 경호원이 분명합니다. 아무리 원한이 사무친다고 해도, 평생 학원 강사나 한 사람이 체구 건장한 경호원을 뚫기는 힘들 겁니다.”
“그럼 실제로 효과를 얻기는 힘들겠군.”
“극히 미비한 확률로 습격에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만,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최건우가 파산 직전에 몰린 학원 원장들에게 습격을 당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이슈가 될 테니까요. 그때 우리가 사태의 원인이 최건우에게 있는 것처럼 몰고 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흠. ‘오죽했으면 그런 일을 벌였을까?’라는 생각이 들도록 동정론을 형성하자?”
“바로 그렇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이 생계를 위협받아 선택한 안타까운 일로 포장하는 겁니다. 상도의도 없이 돈벌이에 급급해서 만든 행동에 선량한 한 가장이 벼랑 끝에 내몰렸다. 전면 무료화를 선언했지만, 실제로 초이스 에듀의 수익은 예년보다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수입을 포기하고 아이들을 위한다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이런 식의 언론 플레이를 펼치는 겁니다.”
“큰 효과를 못 볼 수도 있지만, 손 놓고 멍하니 당하는 것보다는 낫겠군. 마음에 들어. 오랜만에 박 이사 자네의 원래 모습을 보는 것 같군. 좋아. 추진해 보게.”
“알겠습니다, 대표님.”
연이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박유하 이사는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회를 노렸다. 언젠간 꼭 성공하는 날이 오리라 믿으며.
“그런데 말이야. 박 이사는 마치 습격이 일어날 것을 기정사실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군?”
“아닙니다. 제가 직접 사주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일을 기정사실로 만들겠습니까? 그냥 예감이 그렇습니다. 예감이. 세계교육 때부터 알고 지내던 원장 중에 똘끼 충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전부터 돌발행동하기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냥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혹시라도 사고는 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말입니다. 후후후”
이야기를 시작할 때만 해도 나성천 대표의 카리스마에 눌려 어깨를 펴지 못하던 박유하 이사였지만, 그런 모습을 언제 보였느냐는 듯 신색을 회복하고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걱정이라? 그렇지 걱정. 자네 마음 알겠어. 행여나 최건우 대표가 다칠까 봐 걱정하는 것이었군. 어쨌든 자네의 걱정이 기우로 끝나야 할 텐데 말이지. 허허허.”
“설마 큰일이야 일어나겠습니까? 단지 워낙 럭비공 같은 인사라 예측하기 힘들 뿐이죠.”
“그렇지. 그게 문제겠지. 어떻게 될지 한 번 두고 보자고. 그건 그렇고. 학원생 숫자가 감소하는 일은 이대로 간과할 수 없네. 무슨 사업이든 고객을 모집하는 건 힘들어도 빠져나가는 건 정말 순식간이거든. 미봉책이라도 대책을 마련해두어야겠어.”
“혹시 생각해둔 방법이라도 있으십니까?”
“있기야 있지. 자존심 상하는 방법이라서 그렇지. 그래도 장사꾼은 돈 벌 생각을 해야지, 자존심을 생각하면 안 되겠지.”
자신이 말하고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나성천 대표의 인상이 굳었다.
“어떤 방법이길래 자존심이 상한다고 하시는 겁니까?”
“지금 초이스 에듀에서 라이브 스트리밍 서비스를 하는 강사가 누군가?”
“최건우 대표를 제외하면 MIT출신의 하도훈 선생과 국어의 이승훈, 역사의 윤은영 선생이 전부입니다. 다른 강사도 몇 명 있지만, 실력이나 인지도 면에서 라이브 스트리밍을 할 정도의 깜냥은 아니라는 평가입니다.”
“그렇지. 끽해야 네 명. 그런데 강의 대상은 고등학교 3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 총 6개 그룹. 그게 끝이 아니지. 고등학교 2학년부터는 인문계열과 자연계열로 나뉘니 강의할 대상은 더욱 늘어나.”
“중학생까지 강의 영역을 넓힌 것은 우리 크레이듀나 다른 입시학원 입장에서는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있습니다. 아니었으면 지금보다 타격이 훨씬 컸을 겁니다.”
“그래. 기분 나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그 덕분에 우리에겐 숨 쉴 수 있는 틈이 생긴 것이고. 그래서 말인데.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자존심은 버리고 라이브 스트리밍을 제대로 이용하자고.”
지금이 위기임은 분명하지만 나성천 대표는 위기에 강한 사람이었다.
“제대로 이용을요? 어떻게 말씀입니까?”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우리가 당장 초이스 에듀를 넘을 방법이 없어. 여기서 자존심 상해하며 아득바득 이기려고 애 써봤자 큰 효과를 거두기는 힘들어. 이럴 땐 한 발 뒤로 물러서서 판을 넓게 보는 시각이 필요해. 지금 우리에게는 2인자 전략이 필요해.”
“2인자 전략이요?”
“내가 와룡그룹 마케팅팀에서 20년 가까이 근무하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가 영원한 강자도 영원한 약자도 없다는 거야. 그렇게 위풍당당하던 기가 싱크빅이 하루아침에 1위 자리에서 밀려날지 누가 예상이나 했겠어? 시장 이치가 그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지.”
“그렇긴 합니다만.”
“2인자 전략은 그런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만들어졌어. 그런데 효과는 기대 이상인 경우가 많았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대기업 와룡그룹 마케팅팀에서 성장해 이사 직위까지 오른, 백전노장이라고 할 수 있는 나성천 대표의 강점이 바로 이런 부분이었다.
“그럼 우리 크레이듀도 2인자 전략을 사용하겠다는 말씀인가요?”
“일본 혼다가 미국 오토바이 시장에 진출한 과정을 생각해봐.”
“아! 니치마케팅을 통해서 2인자 자리로 올라서겠다는 말씀이셨군요.”
1950년대 미국 오토바이 시장은 스트리 데이비슨이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스트리는 60년 동안 미국 시장에서 경쟁업체들을 차례로 누르고 오토바이 시장의 70% 이상을 장악했다.
오토바이를 타는 모든 사람들에게 스트리는 미국의 상징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러한 시장에 일본 혼다가 진출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혼다는 1959년 미국 진출을 결정하고 도전장을 낸다.
혼다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스트리에 비해 작은 소형 오토바이로 전통적인 스트리 아성에 뛰어들어 정면승부를 한다는 것은 무의미해 보였다.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는 혼다는 정면승부보다는 우회의 길을 택한다.
미국의 오토바이 이용자들 가운데 스트리의 고객들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공략하기로 한 것이다.
혼다는 배기량이 큰 스트리가 자동차보다 가격이 비싸다는 것과 스트리를 타는 오토바이족들의 이미지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점을 발견하고 스트리가 그동안 신경을 쓰지 않았던 시장을 공략대상으로 삼는다.
오토바이가 저렴하고 편리한 교통수단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판매에 나섰다. 도로가 좁고 복잡한 일본에서 오토바이가 간편한 교통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에서 착안한 것이다.
스트리는 자신들도 과거 두 차례 배기량이 적은 오토바이를 시도했으나 실패한 경험이 있어 혼다의 도전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스트리는 배기량을 줄였으면서도 가격은 크게 낮추지 못했지만 혼다는 가격을 대폭 낮추고 연비를 높여 대학생들이나 호주머니가 가벼운 젊은 층이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이라고 홍보에 집중했다.
혼다의 이러한 전략은 오토바이를 구입할 생각조차 못 했거나 오토바이를 구입하고 싶어도 비싼 가격 때문에 망설였던 젊은 층의 마음을 움직이게 됐고 첫해 100여 대에 그쳤던 판매량은 점차 상승 곡선을 긋는다.
혼다를 처음 구입한 고객 3명 중 1명이 20세 이하였다는 사실에서 혼다의 전략이 성공을 거뒀는지를 알 수 있다.
혼다는 일단 소형 오토바이 부문에서 명성을 쌓은 후 스트리와 전면전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고가의 대형 오토바이를 선보이며 시장을 넓혀 나간다.
진출 5년 만에 총 27만대의 오토바이를 팔았고 시장 점유율도 50% 이상으로 높였다. 철옹성 같은 미국의 오토바이 시장을 개척한 혼다의 전략은 두고두고 기록에 남는다.
이걸 바로 니치 마케팅이라고 한다.
‘니치’란 틈새를 의미하는 말로서 ‘남이 모르는 좋은 낚시터’라는 은유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
대중시장 붕괴 후의 세분화한 시장 또는 소비상황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거기다 에이비스(Avis)의 전략을 혼합해야겠지.”
“Avis is only No.2 in rent a car.(에이비스는 렌터카 업계에서 2위에 불과합니다) 정말 유명한 카피죠. 그럼 크레이듀를 완전히 2인자로 포지셔닝 하실 생각입니까? 매력적인 방법이긴 한데 그룹에서 싫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박유하 이사가 말한 문구에서 ‘No.1’이 허츠(Hertz)라는 건 미국인이라면 다 안다. 물론 에이비스의 광고가 여기서 멈출 리 없다. ‘We try harder’라는 말과 함께 업계 2위인 자신들이 어찌 노력하지 않을 수 있겠냐고 호소했고, 그 호소가 대중들에게 먹혔다.
이 캠페인의 성공 덕분에 에이비스는 광고 집행 2개월 만에 적자를 상당량 해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흑자로 돌아섰다.
“그룹에서 뭘 어쩌겠어. 까놓고 이야기해서 와룡그룹부터 1인자는 아니잖아. 게다가 최근에는 동지그룹이 무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와서 2인자 자리도 위태로워. 그런 상황에서 누가 누굴 보고 뭐라 그래!”
“아무리 그래도 전통의 와룡그룹인데 쉽게 2위 자리를 내어주겠습니까?”
“모르는 소리. 이번에도 봐. 초이스 에듀를 압박하는 일에 난데없이 동지그룹이 끼어들어 산통을 다 깨버렸잖아. 그 자식들은 이제 우리 와룡그룹이 무섭지 않다는 자신감을 보인 거라고. 그게 아니라면 고작 학원 따위를 옹호하는 일에 그룹이 나설 리가 없지. 예전 같으면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 일어났는데도 그룹차원에서 아무 소리도 못 하잖아.”
“설마 전면전을 피하는 건가요?”
“바로 그거야. 시작도 하기 전에 쫀 거야. 기세 싸움에서 지고 들어갔는데 2위 자리를 쉽게 지킬 수 있을 것 같아? 쯧쯧. 아니지, 지금 우리가 본사 걱정할 때는 아니지. 어쨌거나 지금부터 우리 상대는 초이스 에듀가 아니라 기가 싱크빅이야. 그러니 박 이사도 거기에 맞는 방안들을 모색해봐.”
흔들리는 와룡그룹이 안타까웠지만 나성천 대표는 거기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처음은 에이비스를 그대로 카피해. ‘크레이듀는 대한민국 학원에서 2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래서 우리는 남들보다 훨씬 많이 노력합니다’ 문구는 방금 말한 것같이 해서 광고를 하도록 해. 어차피 초이스 에듀가 학원생을 수강할 규모는 한정되어 있어. 남은 학생들은 우리가 끌고 와야 해.”
“그런데 2위라고 광고를 하면 기가 싱크빅에서 과장 광고라고 항의할 수도 있습니….”
“어허! 순진하기는. 굳이 총 매출 2위일 필요가 뭐가 있어? 크레이듀가 영어에서는 기가 싱크빅보다 우위에 있는 게 사실이잖아. 누군가가 뭐라고 그러면, 영어 분야가 2위라는 의미였다고 둘러대면 그만이야. 다들 그렇게 하잖아. 문제 있어?”
매출 1위, 순이익 1위, 고객 유치 1위, 매출 증가율 1위, 품질 평가 1위 등등. 항목은 다르지만 세부 내용을 가린 채 자신들이 1위라고 주장하는 기업들이 비일비재하다.
“아닙니다. 없습니다.”
“그럼 됐어. 박 이사도 시간이 지나면 깨닫게 되겠지만, 싸움에서 반드시 이길 필요는 없어. 지더라도 어떻게 지느냐가 더 중요할 때가 많아. 이기는 자가 강한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크레이듀도 본점과 모든 지점에 무료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 될 수 있으면 빠른 시일 안에. 로테이션을 잘 조정해서 자습실로 사용할 수 있는 빈 강의실도 만들어 놓고.”
“네? 갑자기 무료 와이파이와 빈 강의실은 왜…?”
“왜긴 왜야. 다른 곳 말고, 학원에서 최건우 대표의 강의를 들으라는 의미지.”
“네? 그건 안 됩니다. 대표님.”
말도 안 되는 지시에 박유하 이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강의 시간도 조정해. 고등학교 3학년 수학 강의가 월요일에 있다면 월요일은 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자습시간으로 만들어.”
“학원에서 다른 학원 강사의 강의를 듣게 하다니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대표님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잖아. 자존심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고. 2인자가 되려고 마음먹었으면 철저하게 2인자가 되어야 하는 법이야. 그러니 나보다 더 나은 해결책이 있으면 제시하고, 아니면 그냥 시키는 대로 해. 좋은 해결책 있어?”
“아닙니다. 없습니다.”
“좋아. 그럼 더 이상의 반대는 없는 걸로 생각하지. 이번 일 최대한 빨리 진행하고 진행과정 꼼꼼하게 살펴서 이틀에 한 번은 보고할 수 있게 신경 쓰도록 해.”
“알겠습니다. 대표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