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172화 (172/256)

제172화

“와. 이건 너무 감동적인 말씀인데요.”

“그만큼 자신감이 생겼다는 겁니다. 완벽하게 체계를 갖추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지만, 상당수가 실력 있는 베테랑급 경력사원들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그래요. 멋진 활약 기대하겠습니다. 그런데 아까 보고하신 내용 중에 하나 걸리는 게 있습니다.”

“어떤 점이 말씀입니까?”

“잠실 A학원은 학원장이 가진 재산도 없고 정말 형편이 어렵다면서요.”

“네.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A학원뿐이지만 앞으로도 형편이 어려워질 학원들이 계속 등장할 겁니다. 그때마다 경영이 어려워진 학원을 도울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게다가 라이브 스트리밍 서비스는 무료라서 별다른 수익도 없습니다. 그냥 모르는 척하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웬만하면 사견은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건우가 A학원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아 차지훈이 나섰다.

“물론 그렇긴 한데 괜히 신경이 쓰이네요. 모임 사람 중에 유일하게 형편이 어렵다고 하니까요.”

“대표님.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대표님이 하시는 일만 해도 충분히 존경받을만한 일입니다만, 그렇다고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은 경영자의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셔야 합니다.”

“결국은 저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것 아닙니까?”

차지훈의 말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하지만 큰 꿈을 안고 학원을 운영하다 어이없는 누명을 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정리해야 했던 과거의 기억이 A학원을 자꾸 신경 쓰게 만들었다.

“그건 피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변하면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난 파편 같은 겁니다. 예를 들어, 불과 10년 전만 해도 MP3플레이어가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언제 그런 성세를 누렸냐는 듯 순식간에 사양산업으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스마트폰을 대중화시킨 스티브 잡스는 MP3플레이어를 만드는 회사에게 미안해해야 합니까?”

“그럴 필요는 없겠죠.”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커리큘럼에 최첨단 기기들을 이용한 시청각 강의까지. 대표님은 완전히 새로운 교육방법을 만들어 세상에 제시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을 위해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죠. 제가 볼 때 스티브 잡스나 대표님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머리는 알고 있는데 마음이 불편했었다. 그런 와중에 차지훈의 열변이 건우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스티브 잡스와 비교하는 건 과분한 이야기지만, 무슨 말씀인지는 잘 알겠습니다. 그래도 이상하게 마음이 걸립니다. 혼자만 형편이 어렵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왠지 그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대표님 말씀처럼 그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면 뭔가 구제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만족하십니까?”

“네. 그 정도만 해주셔도 됩니다. 이제야 마음이 편해지네요. 하하하.”

건우는 왜 갑자기 잠실 A학원과 과거 자신이 운영했던 학원을 동일시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구제할 방법을 찾아보겠다는 차 팀장의 말에 왠지 모를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기분이 들었다.

***

“망할 놈의 최건우 새끼. 똥물에 튀겨 죽여도 시원찮을 새끼. 뭐가 어째? 날개 없는 천사? 니미 니X이다. 빌어먹을. 멀쩡하게 잘 돌아가는 학원을 망하게 해서 다른 사람 생계를 막은 새끼가 천사는 개뿔.”

잠실 A학원의 한기원 원장은 다혈질로 유명한 사람이다. 평소에는 보통사람과 다를 바 없지만,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 욱하는 성격에 사고를 치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인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행인 것은 결혼하고 자식이 생기면서 다혈질적인 성격이 그나마 많이 누그러졌다는 사실이다.

다혈질적인 성격이 많이 누그러지고 차분해지자 원래부터 뛰어나다고 평가받던 그의 강의 실력은 더욱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 덕분에 그의 전공인 한국지리와 세계지리 두 과목에서는 대한민국 강사 중 탑클래스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명성이 쌓이자 수익이 늘어났고, 한기원 원장은 그 돈을 차근차근 모아 마침내 자신이 직접 운영하는 학원을 차릴 수 있었다.

절반 가까이는 빌린 돈이지만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 처음 몇 달은 그의 장담처럼 잘 운영되기도 했다.

비록 인기가 많지 않은 사회과목이라고 해도 한국지리와 세계지리 두 과목이나 우리나라 탑클래스로 인정받은 사실이 학생들에게는 큰 매력으로 다가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건우가 갑작스레 라이브 스트리밍 강의를 전부 무료로 서비스하겠다고 발표하고서부터 한 원장의 학원은 상황이 굉장히 위태롭게 변했다.

지리 과목은 여전히 인기가 있었지만, 나머지 과목들의 수강생 숫자가 예년보다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진 것이다.

수강생 숫자는 점점 줄어드는데, 대출받은 돈은 그대로였다. 이자 부담이 계속되자 학원은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차근차근 작은 규모에서 시작했으면 됐는데 처음부터 너무 욕심을 부린 게 문제였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간다면 파산은 당연하고, 거액의 빚을 떠안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비슷한 처지의 학원 원장들이 모여 모임을 만들었다면서 한기원 원장에게도 가입을 권유했다.

그들은 이 사태의 원흉이 최건우라고 주장했다. 처음엔 그들의 말을 곧이 듣지 않았다.

자신의 운이 나빴으며 큰 욕심만 부리지 않았으면 일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교묘했고 또 달콤했다. 최건우가 나쁜 것이지 한기원이 무능력하거나 욕심을 부려서 그런 게 아니라는 주장에 자꾸만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그가 저지른 실수에 면죄부를 받는 것 같았다.

마음이 편해지자 계속 어울렸다. 그러나 학원 사정은 악화일로를 걸었고, 그럴수록 건우에 대한 원망만 커져갔다.

***

“저 자식 지금 뭐하냐?”

“아마도 지도를 그리는 걸 겁니다.”

현장에 복귀한 고자성 과장은 제일 먼저 한 원장을 조사하고 있던 신입 황호동을 찾아갔다.

초이스 시큐리티가 만들어지면서 새롭게 보강된 인원이라고는 하지만 그 또한 국정원에서 일하던 상당한 베테랑이었다.

사실 한 원장은 밀착마크를 하고 있을 만큼 요주의 인물이었다. 성격도 워낙 다혈질이었고 학원이 망하면 큰 빚더미 위에 올라가야 할 처지인지라, 사고를 칠 가능성이 높은 폭탄 같은 존재라는 게 정보팀의 분석이었다. 베테랑인 황호동을 붙여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뭐? 지도? 달밤에 체조도 아니고 갑자기 지도는 왜?”

건너편 건물에서 한 원장을 지켜보던 고자성 과장은 어두운 밤 홀로 강의실에 남아 칠판에 뭔가를 그리고 있는 한 원장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리과목 강사라서 그런지 열 받는 일이 생기면 저렇게 칠판에 지도를 그리더라고요. 자기만의 독특한 취미가 아닐까요? 아니면 스트레스 해소 수단일 수도 있고요.”

“거참. 취미가 지도 그리기라. 취미 한번 고상하네. 어! 그런데 지도가 뭐가 저렇게 정밀해. 저거 지금 우리나라 남해를 그리고 있는 거 맞지?”

처음에는 구불구불 이상한 곡선을 그려나가는 듯 보였으나 영역이 점점 넓어지자 의미 없게 보였던 선들은 정교한 지도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정교해서 고자성 과장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지켜보니까 꽤 그리더라고요.”

“야 인마. 저건 꽤 그리는 정도가 아니잖아. 남해의 복잡한 다도해를 거의 오차 없이 그려내는 것 같은데. 사람이 무슨 컴퓨터도 아니고 어떻게 저렇게 정확할 수 있지? 넌 저 모습이 안 대단해 보이냐?”

“대단하긴 대단하죠. 그런데 거의 열흘 넘게 저 모습만 지켜보다 보니 적응이 되더라고요. 예전 지리 선생님이 지도를 끝내주게 잘 그리셔서 웬만하면 감탄 같은 건 안 하는데, 정말 차원이 다른 것 같긴 해요.”

“그러게 말이다. 어떻게 작은 섬 하나하나까지 저렇게 정밀하게 표현할 수 있지? 정말 신기한 인간일세.”

“그런데 과장님. 더 웃긴 게 뭔지 아십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오늘 처음 왔는데.”

“저게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뭐? 그럼 또 뭐가 있는데?”

“일본의 혼슈와 시코쿠 사이에도 섬이 되게 많거든요.”

“알지. 오노미치와 이마바리 사이에 있는 6개의 섬을 잇는 시마나미 해도 말하는 거지? 거긴 나도 가봤는데 꽤 볼만하더라고. 그런데 거기가 왜?”

“아니, 글쎄 한 원장 저 양반이 거기를 정확하게 그리고 있더라니까요. 처음에는 저게 뭔가 싶어 멍하니 보기만 했는데, 나중에 완성된 걸 보고 완전히 깜짝 놀랐잖아요.”

“헐, 진짜? 정말 특이한 인간이네. 나중에는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도 그리는 거 아니야?”

“벌써 그렸죠. 솔직히 필리핀도 좀 복잡해요? 산호세, 테블라스, 시부얀, 파나이, 세부, 보홀. 그리고 그 주변에 있는 더 작은 섬까지 하나도 안 놓쳐요. 지켜보고 있으면 무슨 지도 제작의 장인을 보는 것 같다니까요.”

황호동이 침을 튀겨가며 한 원장의 괴벽에 관해 설명하자 고자성 과장의 눈이 재미있는 걸 발견한 듯 반짝였다.

“실력은 어때?”

“네? 뭐가요? 지도 그리는 실력이요? 그건 방금 보셨잖아요.”

“아니 그거 말고. 지리 강사라며? 정밀 지도 그리는 게 취미인 지리 강사라. 왠지 강의도 잘할 것 같아서 그래.”

“강의 실력은 원래 탑클래스 수준이었죠. 제가 아직 이 바닥은 잘 몰라서 확언하긴 어렵지만, 다른 사람들 평가를 들어보면 우리나라에서 최소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드는 실력자라고 하더라고요. 그것도 성격이 지랄 맞아 호불호가 갈려서 그렇지 순수 실력으로는 거의 넘버 원이래요.”

“그래? 성격이 얼마나 지랄 맞은데 그런 평가야?”

“글쎄요. 예전에는 정말 심했다는데, 그래도 요즘은 많이 나아졌다고 해요. 그래도 그 성격이 어딜 가는 건 아닌지 가끔 학생들과 트러블을 일으켜요. 애들이 수업 시간에 딴짓하는 걸 절대 용납 못 하는 성격이라서 그런 것 같더라고요. 강압적이라서 학생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학부모들은 좋아하는 희한한 상황인 거죠.”

학부모 눈에는 학사 관리를 철저히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만족도가 높은 게 사실이었다.

“그래? 듣고 보니 갑자기 흥미가 생기는데.”

“갑자기 무슨 흥미요?”

“실력으로만 따지면 거의 최고 수준이라며?”

“사람들 말로는 그렇다고 그러더라고요.”

아직 신입인 황호동은 함부로 판단을 내리지 않으려고 했다.

“문제는 학생이잖아. 저기 잠실 A학원은 어떨지 몰라도, 초이스 에듀에서 딴짓하는 학생 있을 것 같아?”

“글쎄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이 바닥에서 일한 지 얼마 안 됐잖아요.”

“자랑이다. 짜식아. 모르면 좀 공부를 해. 너도 지내다 보면 알겠지만 초이스 에듀에 다니는 학생들은 진짜 공부에 목숨 건 애들이야. 솔직히 그 치열한 수강신청 경쟁을 뚫고 수업을 듣는데 딴짓을 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그 이야긴 들었어요. 경쟁률이 어마어마하다고. 강남에서도 수강 등록하려고 학원 근처로 이사 오는 일까지 있다면서요.”

“그래. 대표님 때문에 사교육의 1번지가 바뀌고 있을 정도야. 최근 들어 아현동 집값과 땅값이 미친 듯이 오르는 것도 전부 초이스 에듀 덕분이잖아.”

“저도 최근에 가까운 데로 집을 옮기려다가 포기했잖아요. 집값이 너무 올라서 초이스 에듀 근처로는 이사할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그렇다니까. 내가 굳이 널 여기로 데려온 이유가 뭐겠어? 그만큼 비전이 있기 때문이야. 그러니 열심히 일하란 말이야.”

황호동은 고자성 과장과 예전부터 굉장히 친하게 지냈던 사이였다. 황호동이 국가정보국에서 국정원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연락이 잠시 뜸해졌지만 말이다.

“넵. 각골명심하겠습니다. 저도 팀장님이나 과장님과 다시 일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 솔직히 종수나 준규만 데려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진짜 서운했거든요.”

“넌 유부남이잖아.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같이 모험하자고 부르긴 그랬지. 어쨌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딴짓하는 애들이 없다면 한 원장도 성깔 부릴 일이 있겠어?”

“그렇긴 한데 혹시 한 원장, 저 사람을 스카우트하려고요?”

“너, 우리 초이스 에듀의 약점 중 하나가 뭔지 알아?”

“약점이 있었어요?”

“이 자식이 정말 국정원에서 나왔다고 너무 빠진 거 아니야? 공부 좀 해, 공부. 국어 이승훈 선생님, 역사 윤은영 선생님, 과탐 하도훈 선생님. 그리고 수학, 과탐, 영어의 우리 대표님. 하도훈 선생님도 점점 더 실력을 인정받고 있지만, 우리 대표님과 이승훈, 윤은영 선생님은 초이스 에듀의 트로이카로 불릴 만큼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어.”

“아, 트로이카! 그건 저도 들어봤어요.”

“그런데 그 외 과목이 문제야. 특히 사탐은 역사를 제외하고는 그냥 평범한 수준에 지나지 않거든. 이런 상황에서 지리분야의 사실상 일인자인 한 원장이 가세한다고 생각해봐. 어떻겠어?”

차지훈에게 멍청하다고 구박받지만 사실 고자성 과정은 절대 멍청한 게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관심 없는 분야를 지루해 할 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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