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5화
“그렇긴 합니다만 과연 그 지랄 맞은 성격을 누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제 생각에는 당장 조 원장을 찾아가 깽판을 부릴 것 같은데요.”
“그럼 우리 내기할까요?”
“내기…를요?”
“네. 한 원장에서 연락이 오면 제가 이기는 거고, 그 외 다른 행동을 하면 이 주임님이 이기는 걸로 하죠. 어때요?”
“안 합니다.”
“아니 왜요? 이 주임님은 거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니었나요?”
“맞습니다. 하지만 초이스 에듀에서 일하는 직원들 사이에 불문율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대표님과 내기하지 마라’입니다. 저는 절대 그 내기 안 할 겁니다.”
“자신 없어요?”
“자신 있습니다.”
“그럼 내기해요.”
“안 합니다.”
“이런. 이제 보니 이 주임님 겁쟁이였군요.”
“거, 겁쟁이 아닙니다.”
건우의 도발에 이준규 주임의 눈꼬리가 살짝 흔들렸다. 건우는 그 모습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조금만 더 흔들면 넘어올 것도 같았다.
전화만 걸려오지 않았다면.
Rrrr
“이런. 한 원장님이 타이밍을 못 맞추시네요. 조금만 더 도발했으면 이 주임님도 넘어왔을 것 같은데.”
“네? 정말 한 원장 전화입니까?”
“네. 조금만 늦게 전화가 왔어도 내기할 수 있었는데 아쉽습니다. 잠시 통화 좀 하겠습니다. 이 주임님. 네, 여보세요.”
***
“오늘은 그래도 일찍 왔네요.”
한 원장이 집에 들어오자 와이프인 이은주가 그를 맞았다. 맨날 늦더니 오늘은 웬일로 이렇게 빨리 왔느냐, 질책하는 어투가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 가득한 얼굴이었다.
“아빠. 아빠 왔어. 왜 이렇게 늦게 와. 보고 싶었단 말이야.”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던 여섯 살배기 딸이 두 사람이 이야기 나누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리고 한 원장을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쪼르르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어이쿠. 우리 공주님. 아빠 때문에 깼어?”
“아니. 나 안 잤어. 아빠 보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어. 그냥 엄마 무릎에 누워서 눈만 감고 있었던 거야. 그지 엄마?”
“그럼. 우리 딸이 아까부터 아빠 기다린다고 잠도 안 자고 얼마나 열심히 기다렸는데.”
“그 봐. 엄마도 그러잖아. 나 안 잤다고.”
“하하하. 그래. 우리 딸 안 자고 있었는데, 자고 있었다고 해서 아빠가 미안해. 그리고 아빠 기다려줘서 고마워.”
“응응. 근데 아빠. 아빠는 바쁜 일 언제 끝나. 엄마가 아빠 열 밤만 더 자면 바쁜 일 끝난다던데, 진짜야?”
“그럼. 당연하지. 딱 열 밤만 자면 아빠가 열심히 일해서 바쁜 일 끝내 놓고 우리 공주님이랑 아주 많이 놀아줄게.”
“진짜? 진짜 많이 놀아줄 거야? 약속할 수 있어?”
“그럼. 자, 새끼손가락 걸고, 도장 찍고, 복사하고, 코팅까지 끝.”
다혈질로 유명한 한 원장도 딸 앞에서는 한없이 자상한 아빠였다. 그가 놀아준다는 말에 신이 난 딸은 한참을 더 재잘거리다 잠자리에 들었다.
“정말 괜찮아요?”
딸이 잠이 들자 이은주는 그제야 걱정스레 물었다.
“그럼. 괜찮고말고. 다 잘 될 거야.”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이 힘들다고 했잖아요. 초이스 에듀의 라이브 스트리밍 무료 서비스가 그렇게 타격이 컸다면서요.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괜찮아져요?”
“학원이 힘들면 학원을 포기하면 돼.”
“학원을요? 당신이 어렵게 일군 학원인데 포기할 수 있어요?”
“필요하면 해야지. 나, 더는 욕심 안 부리기로 했어. 당신에게 미안하지만 우리 조금만 더 고생하자. 학원 정리하고 내가 강사로 열심히 일하면 빚도 금방 갚을 수 있을 거야. 이번에는 정말 사고 안 치고 열심히 할 거니까 생각보다 훨씬 빨리 제기할 수 있어. 알잖아? 지리 하면 한기원이고, 한기원 하면 지리인 거.”
“그럼요. 한국 지리든, 세계 지리든 지리 과목은 당신이 최고예요.”
이은주의 칭찬에 한 원장은 힘을 낼 수 있었다.
“차라리 잘 됐어. 이제 학원 운영 같은 거 신경 안 쓰고 열심히 애들만 가르치면 되잖아. 얼마나 좋아? 그렇게 되면 여가 시간도 많이 만들 수 있을 거야.”
“빚이 한두 푼이 아닌데 정말 괜찮겠어요?”
“여보. 정말 괜찮아. 그리고 오늘 내가 누굴 만났는지 알아?”
“누굴 만났는데요?”
“최건우 대표가 날 찾아왔더라니까.”
“네? 최건우 대표를요? 그 사람이 왜요? 당신 최건우 대표 싫어하는 것 아니었어요?”
“싫고 자시고 할 게 어디 있어. 그냥 경쟁하는 사이니까 좋아할 수는 없었던 거지. 그 사람이 왜 찾아왔는지는 나도 잘 몰라. 내가 바쁘다고 했더니 내일 다시 보자고 하더라고. 이렇게 명함까지 주더라니까.”
한 원장은 걱정하는 와이프를 안심시키기 위해 약간의 허세를 부렸다. 그리고 아까 이준규 주임이 주고 간 명함을 자랑스레 꺼내 이은주에게 보여줬다.
“어, 진짜네. 최건우 대표가 왜 당신을 찾아왔지? 혹시 스카우트 제의라도 하러 왔나?”
“뭐? 스카우트? 에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왜요? 당신이 우리나라 지리 강사 중에는 최고잖아요. 최 대표가 욕심낼 수도 있죠. 솔직히 초이스 에듀가 잘 나간다고 해도 지리 과목은 다른 과목에 비해 많이 부족한 게 사실이니까요.”
“그렇긴 한데… 그럼 설마 진짜?”
한 원장은 아내의 말이 그럴싸하게 들렸다.
만약 다른 학원 원장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위한 게 목적이라면, 굳이 최건우 대표가 자신을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그냥 아랫사람을 시키면 그만이다.
그런데도,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만큼 바쁘다고 소문난 최건우 대표가 직접 찾아왔다면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게 아닐까?
“당신은 그것도 모르고 바쁘다고 튕긴 거예요? 다른 곳도 아니고 초이스 에듀인데? 지금 당장 연락해봐야 하는 것 아니에요?”
“그, 그런가?”
“그럼요. 최건우 대표가 직접 당신을 찾아왔다면서요? 그 정도 성의를 보였는데도 튕겼다면, 내가 최건우 대표라면 다시 생각해볼 것 같아요. 그러니까 마음 바뀌기 전에 지금이라도 얼른 전화해봐요.”
한 원장은 조금 전까지 건우에게 악담을 퍼부었다는 사실은 잊어버리고, 아내의 묘한 박력에 이끌려 명함에 적힌 번호를 찍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Rrrr
- 네. 여보세요.
“아…안녕하십니까. 최 대표님. 저 잠실의 한 원장입니다.”
- 네, 한 원장님. 다행히 깽판은 안 치셨나 보군요.
“아, 그게… 너무 화가 나니까 오히려 화가 안 나더군요. 찾아가서 주먹질 몇 번 해봤자 저만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리고… 최 대표님이 직접 저를 찾아온 것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 혹시 내일 시간 되십니까?
“내일이요?”
- 바쁜 일이 있으신 겁니까?
“아, 아닙니다. 바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 그럼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내일 뵙는 걸로 하죠. 자세한 건 오늘 저와 같이 갔던 이준규 주임이 내일 오전 중에 전화로 알려줄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한 원장이 신줏단지 모시듯 공손히 전화를 끊자, 이은주가 남편을 빤히 쳐다봤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
“궁금해서 그러죠. 최 대표가 뭐래요?”
“뭐래긴, 내일 만나자고 하지.”
“휴, 다행이다. 당신이 그렇게 푸대접을 했는데도 화가 안 났나 보네. 역시 국민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사람답다니까. 얼굴 잘생겨, 키 커, 머리 똑똑해. 잘 생겨. 착해….”
“얼씨구. 최 대표가 그렇게 좋아? 그럼 지금이라도 보내줄게, 결혼하자고 매달려 보던가.”
“호호호. 그래도 우리 남편 다음으로 좋은 거니까 질투하진 마세요. 여봉.”
“이 사람이 갑자기 웬 애교야?”
“왜 이러긴요. 당신이 좋아서 그러죠. 정말 최건우 대표가 당신을 스카우트했으면 좋겠어요. 당신 실력에 초이스 에듀 서포트만 받는다면 금방 이승훈 선생이나 윤은영 선생처럼 스타강사가 될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일은 성질 죽이고 이야기 잘 해요. 알았죠?”
“크흠. 이 사람이 내가 무슨 천지 분간 못 하는 어린애인 줄 아나. 걱정하지 마. 당신이랑 우리 딸을 생각해서라도 절대 안 그럴 테니까.”
***
“어서 오세요. 한 원장님.”
“안녕하세요. 최 대표님. 어제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제가 좀 무례했지요?”
한 원장은 어제 아내와 약속한 것처럼 건우를 만나자마자 사과부터 했다.
“괜찮습니다. 한 원장님 사정이 어렵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요. 좋은 의도로 라이브 스트리밍 강의를 무료 서비스하기로 결정했지만, 그로 인해 한 원장님과 같은 피해자가 생긴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야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사교육으로 밥 벌어 먹고사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게 웃기지만, 우리나라 사교육 시장이 너무 과열된 건 사실이니까요. 국민들 입장에서 봤을 때 대표님의 결정은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원장의 행동은 어제와 달리 건우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오늘 만남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아내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건우와의 만남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기회인지 깨달았다.
단지 금전적 이득 때문만이 아니었다.
최건우, 이승훈, 윤은영, 하도훈.
초이스 에듀가 자랑하는 이 네 사람은 유명세도 유명세지만 학생들에게 엄청난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었다.
건우야 시작부터 유명세를 떨쳤으니 그러려니 한다고 해도 하도훈, 이승훈, 윤은영은 경우가 다르다.
라이브 스트리밍 강의를 시작한 지 몇 달도 되지 않았는데 학부모나 학생들 사이에서는 국민 강사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
과거 EBS의 실력 있는 강사들 또한 제법 인기를 누린 적이 있으나 지금 그들이 받고 있는 스포트라이트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금전적 수익에 연연하지 않고 무료 강의에 참여한다는 사실에 학생들의 존경도 받고 있었다.
광고회사들은 미리부터 이들의 시장성을 파악하고 광고모델로 섭외하기 위해 애썼다.
아직은 사양하고 있지만, 좋은 의미를 가진 광고라면 출연의사가 있다는 답변에 맞춤 광고 콘티를 짜느라 분주하다는 소문까지 들렸다.
연예인이 아닐 뿐이지 유명 연예인 이상의 유명세다. 그 덕분에 라이브 스트리밍 강의의 다섯 번째 강사가 누가 될지 인터넷상에서 설전을 벌이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A학원의 김 모 강사가 유력한 후보다.’
‘아니다. 수학 강사라서 힘들 거다. 김 모 강사의 실력은 인정하지만 최건우 대표가 있는 한 영원한 이인자에 불과하다.’
‘그건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짧은 생각이다. 지금 초이스 에듀 라이브 스트리밍 무료 강의는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총 6개 학년이 대상이다.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부터는 인문계열과 자연계열이 나뉜다. 그렇게 따지면 총 8개 그룹을 가르쳐야 하는데, 다른 과목까지 강의하는 최건우 대표의 특성상 또 한 명의 수학강사는 꼭 필요하다.’
‘맞는 말이다. 하동훈 선생도 최건우 대표와 중복되는 과학탐구 강사지만 강의를 하고 있다. 그것만 봐도 김 모 강사가 가장 유력한 후보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렇지만 일에는 우선순위라는 게 있다. 라이브 스트리밍 강의에서 가르치지 않는 과목이 버젓이 존재하는데 수학 강사부터 영입할 리는 없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대전에서 천재 과외 강사로 이름을 날렸던 팀 앨버트로스 안우현 선생이 수학 강의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럼 김 모 강사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지 않나?’
‘그 말에 동의한다. 지금 급한 것은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가르치지 않고 있는 과목이다. 윤은영 선생의 역사를 제외하면 사회탐구는 초이스 에듀의 큰 약점이다. 제2외국어는 더욱 심하다. 이승훈 선생이 가르치는 한문을 제외하면 유능한 강사가 아예 한 명도 없다. 거기다 이승훈 선생은 국어교육학과 출신이기 때문에 한문에 대한 전문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약점을 보강하지 않고 김 모 강사를 영입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자칫 초이스 에듀는 국, 영, 수만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런 것까지 감안해서 생각하면 C학원의 박 모 선생이 가장 유력하다. 윤은영 선생과 사회탐구 영역에서는 거의 최고라고 평가받고 있다. 무엇보다 박 모 선생의 가장 큰 장점은 법과 정치, 경제, 사회·문화 이렇게 3가지 과목을 가르치면서도 3분야 모두에서 탑클래스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영입으로 1타 3피의 효과를 거둘 수 있으니 가장 유력한 후보라고 본다.’
‘나도 동감. 윤은영 선생도 3과목을 가르치지만 한국사, 동아시아사, 세계사까지 모두 역사과목이다. 거기에 비한다면 박 모 선생은 사회탐구계열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3분야에서 전문성을 보이고 있다. 가장 강력한 후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한마디로 정리해 줄게. 박 모 선생은 초이스 에듀로 안 간다. 지금 있는 학원이 그 양반 형이 운영하는 곳이다. 박 모 선생이 학원을 떠나면 그 바로 C학원은 망하는데 어떻게 떠나나?’
‘잠실의 한 원장도 있다. 성격이 좀 개차반이라서 그렇지 실력은 좋다.’
‘한 원장? 그 성질 더러운 한기원 선생을 말하는 건가? 개뿔. 초이스 에듀의 강사진을 보면 실력뿐만 아니라 인성도 보는 것 같다. 그런데 한기원이 말이 되나? 지나가는 개가 웃는다.’
‘동감X100. 실력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동안 사고를 너무 많이 쳤다. 술 먹고 학생을 폭행한 경력까지 있는 사람을 최건우 대표가 뽑을 리가 없다. 한기원은 안 된다는 데 내 왼손을 건다.’
‘겨우 왼손? 나는 왼손에 내 똘똘이까지 건다.’
한 토론 사이트에서는 이런 식의 논쟁이 오가기도 했고, 누군가는 라이브 스트리밍의 다섯 번째 강사는 누가 될지에 대해 장난삼아 내기판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초이스 에듀 입장에서는 굉장히 유의미한 일이었다. 기대받는 영화의 주인공 캐스팅도 아니고 단지 학원 강사를 뽑는 일에 국민들이 이토록 관심을 가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처음에는 단순히 라이브 스트리밍 때문에 자신이 운영하는 학원이 망해간다며 피해의식을 가졌던 한 원장.
그러나 어젯밤 뜬눈으로 인터넷을 검색하며 지금까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면서 초이스 에듀와 건우를 전혀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