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7화
“여러분의 마음 잘 알겠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우리끼리 단결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한 원장 같은 기회주의자가 다시는 나오지 않게 말입니다. 그래야 최건우 그 새파랗게 젊은 놈이 우리를 더 이상 무시하지 못합니다.”
“그럼 정말 시위라도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여기 모임에 참석한 학원장들은 대부분 부유한 편이지만, 그 안에서도 수준 차이는 분명 있다.
그중 굉장히 부유한 편에 속하는 부류들은 대부분 시위를 내켜 하지 않아 했다. 단지 손해를 보기 싫어서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해야죠. 당장 먹고 살 길이 걸려있는데 바보처럼 당하지 않으려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힘들어도, 고달파도, 제대로 우리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저…,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시위 대상은 당연히 초이스 에듀일 테고. 그렇다면 우린 뭘 요구할 생각이십니까?”
“당연히 라이브 스트리밍 무료 서비스 전면 중단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라이브 스트리밍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이 굉장히 뜨겁습니다. 그런 와중에 우리가 무료 서비스를 중단하라고 주장했다가는 호응은커녕 여론의 뭇매를 맞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럼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제가 왕년에 시위를 좀 해봤지 않습니까? 그때 제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시위가 힘을 얻기 위해서는 여론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어야 합니다. 전폭적인 지지가 힘들다? 그럼 최소한의 공감대는 형성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짖어라, 나는 내 할 일 하겠다’라는 식으로 무시당하기 쉽습니다.”
대학 시절 운동권에 있었던 박 원장이 자신의 경험을 살려 문제점을 지적했다.
사실 이들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이 ‘명분’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당위성을 증명하고 명분을 얻어야 하는데, 라이브 스트리밍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이 워낙 뜨거우니 그 방법이 여의치 않았다.
“그러니까 박 원장님 말씀은 우리에게 명분이 부족하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최소한 우리가 불쌍하게라도 보여야 시위를 해도 관심을 받고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명분 중요하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라이브 스트리밍 무료 서비스 중단이 아니라 합리적 보상을 요구하는 게 나을까요?”
“아무래도 그게 좋지 않겠습니까? 괜히 서비스 중단을 요구해봐야 역적으로 안 몰리면 다행입니다. 그럴 바에는 국민들의 동정을 얻어 보상이라도 제대로 받는 게 실리적입니다.”
“아쉽긴 하지만 저도 박 원장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고작 몇 달 만에 라이브 스트리밍은 대한민국의 대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에게 용빼는 재주가 있지 않은 이상 대세를 거스르기는 어렵죠. 그러니 최건우 대표를 압박해서 최대한 많은 돈을 뜯어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회의 내내 조용히 있던 남 원장이 처음으로 나섰다. 계속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다들 적극적이라 나서기 쉽지 않았었다.
그의 말처럼 건우의 라이브 스트리밍 무료 서비스 결정은 정부도 어쩌지 못할 만큼 엄청난 파급효과를 거두고 있다.
작은 학원까지 억지로 참석시켜봐야 만 명도 안 되는 학원 원장들의 시위로 그 결정을 되돌리는 건 어려운 일이다.
“어허. 최대한 많은 돈을 뜯어내다니요. 우리가 거지도 아니고. 그냥 당연히 받아야 할 합리적인 보상을 받는 거겠죠.”
“하하하. 죄송합니다. 흥분하는 바람에 제 표현이 과격해졌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합리적 보상을 받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최건우 대표가 한 원장 그 쥐새끼 같은… 아! 이번에도 제 표현이 과격했군요.”
“아닙니다. 한 원장은 쥐새끼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는 인간입니다. 그러니 계속 하시죠.”
“어쨌든, 한 원장 그 인간이 얌체같이 배신한 게 우리에게 그렇게 나쁜 일만은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최건우 스스로 전례를 만들었습니다. 한 원장의 경우가 있으니 절대 보상을 할 수 없다며 뻗댈 수만은 없게 되었습니다. 자승자박이 된 셈이죠.”
“오! 그렇군요. 쥐새끼가 도움 될 때도 있군요.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하하하.”
“그건 그렇군요, 하하하.”
정 원장의 비꼬는 말에 다들 웃으며 동감을 표했다. 덕분에 회의를 시작할 때만 해도 가라앉아있던 분위기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럼 우리는 어느 정도의 보상을 요구해야 합니까? 남 원장님, 혹시 한 원장이 초이스 에듀로부터 어느 정도의 보상을 받았는지 아는 게 있습니까?”
“저도 정확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원래 잠실 A학원의 부채가 5억 정도 되었는데 그걸 계약금 형식으로 탕감해줬다고 하더군요.”
“5억 원이요? 그거 반가운 소식입니다. A학원 정도 규모로 5억 원을 보상받았다면 우리는 최소 10억 원부터 시작해야겠군요. 소문에 의하면 최건우 대표의 재산이 수천억 원이 넘는다고 하던데, 그걸 생각하면 거리낌 없이 제대로 합.리.적. 보상을 받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의 몸집부터 불려야 합니다.”
“몸집을 불려요? 살을 찌우자는 말은 아닐 테고 무슨 의미입니까?”
“지금 우리 모임은 학원 레벨로 따지면 상급 이상에 속하는 원장님들만 모였지 않습니까? 이래서는 인원이 너무 적습니다. 시위대의 구색을 갖추려면 인원을 늘려야 합니다. 최소 중상, 가능하면 중급 수준의 학원장들도 모임에 가입할 수 있도록 해야 모양새가 갖추어집니다.”
“으흠. 꼭 그래야만 합니까? 그러면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모일 텐데요?”
사람이 많아지면 보상액이 줄어들까 봐 걱정하는 부류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보상받는 걸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었다.
“생각을 달리해보는 건 어떨까요?”
“어떻게요?”
“어중이떠중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장기판의 ‘졸(卒)’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여러분같이 점잖은 분들이 시위대의 전면에 나서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여러분들을 대신해서 적극적으로 나서줄 행동대장들이 필요합니다. 새로 영입하는 원장들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면 어떻습니까?”
“오호. 그거 좋은 방법입니다. 항상 조용히 계셔서 조용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모습입니다, 남 원장님.”
“필요할 땐 나서야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새로운 멤버를 영입하는 동안 언론을 통해 우리의 명분을 쌓아두는 것도 필요합니다. 최소한 우리가 시위에 나서는 당위성 정도는 확보해야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맞습니다. 아까 박 원장님도 말씀하셨다시피 우리에게 명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필요하다면 해야죠. 그런데 어떤 식으로 언론을 이용하실 생각입니까?”
“혹시 여기 계신 원장님들 중에 친분이 있는 언론이 없다면, 제가 가지고 있는 라인을 한번 이용해 보겠습니다. 친하게 지내는 후배인데, XX 신문사 편집장입니다.”
참석자들의 시선이 전부 남 원장에게로 쏠렸다.
“오. XX 신문사요? 거기라면 메이저까지는 아니라도 상당히 인지도 있는 언론사인 걸로 아는데 정말 가능합니까?”
“안 되어도 가능하게 만들어야죠. 제게 큰 신세를 진 일이 있으니 웬만하면 부탁을 들어줄 겁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제가 후배를 만나보고 운을 띄어본 다음 그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남 원장이 아는 언론사는 없었다. 이 또한 조금 전 옥상에서 전화통화를 하면서 지시받은 내용 중 하나였다.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자신감이 넘치시는 걸 보니 믿음이 절로 갑니다. 그럼 그 일은 남 원장님만 믿겠습니다.”
***
크레이듀는 지난번 언론플레이 실패를 거울삼아 이번에는 매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초이스 에듀를 비난하는 모습은 자제하고 라이브 스트리밍 무료 서비스 때문에 파산 직전에 몰린 학원 원장들의 불쌍한 처지를 조금씩 알리는 방식이었다.
새로 모임에 가담한 원장 중에는 이미 학원이 망한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안타까운 그런 처지를 언론을 통해 알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대표님. 동정 여론이 조금씩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차분하게 언론을 이용하고 있어서 서서히 효과가 꽤 있습니다. 그런 여론이 더 커지기 전에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학원장들의 이중성을 알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차지훈으로부터 피학모(피해 학원장들의 모임) 관련 보고를 듣던 건우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예전 삶에서 자신이 운영하던 학원이 망하는 걸 손 놓고 그냥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건우. 그 기억 때문인지 차지훈의 이야기가 편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흔들리는 마음을 이내 다잡았다. 라이브 스트리밍 무료 서비스 때문에 앞으로 절반 이상의 학원들이 폐업하게 될 텐데, 그때마다 신경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건우는 독해지자고 다짐했다.
“혹시라도 피학모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지도 모르니 준비해놓은 계획들을 곧바로 시행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
[파산 직전이라고 주장하던 학원장 알고 보니 수백억 원의 자산가.]
[강사가 학원생을 임신시켜 망한 학원, 초이스 에듀 탓으로 책임 전가?]
[피학모 원장들의 모임이 있던 날 주차장 모습.jpg]
라이브 스트리밍 무료 서비스로 파산 위기에 몰렸다고 주장하는 피학모 학원장들. 그런데 모임 장소에 주차된 자동차들이 하나같이 심상치 않다. 중형차도 몇 대 보였지만 대부분은 고급 승용차. 국내 최고급 차로 분류되는 에쿠스는 기본이요 수억 원을 호가하는 외제 자동차도 즐비하다.
본 기자가 알아본 결과, 주차장은 왕우(王牛) 식당 소유이며 이날 그곳은 피학모 모임으로 인해 다른 손님은 아무도 받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심지어 왕우 식당은 1++ 이상의 한우만 판매하는 고급 식당이라고 한다.
말로는 죽겠다고 엄살을 부리면서도 억대가 넘어가는 자동차는 아무렇지도 않게 몰고 다니는 그들.
먹고 살기 힘들다며 눈물을 흘렸던 그들이 향한 곳은, 서민들은 쉽게 가기도 힘든 고급 한우 전문 식당.
정말 힘들어서 죽겠다고 한 건지, 아니면 고급 승용차를 포기할 수 없어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 건지 그들의 진짜 속내가 궁금하다.
- 상성일보 이문오 기자 -
초이스 에듀의 반격은 강력했다. 특히 마지막에 올라간 주차장 사진은 네티즌 사이에서는 엄청난 이슈와 함께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명분을 얻으려고 했던 크레이듀의 언론플레이는 초이스 에듀 정보팀의 맹활약에 밀려 이번에도 역시 제대로 된 효과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초이스 에듀의 정보팀은 이 정도 효과에 만족하지 않았고 더욱 강력한 이슈 몰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
정체불명인 원양어선에서의 생활은 위상백에게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말이 통하는 유일한 한국인은 이 배의 선장인데 첫 만남 이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만나게 해달라고 아무리 부탁을 해도 선원들은 위상백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니, 말이 통하지 않으니 들어주고 싶어도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다가 죽을지도 몰라.”
망망대해를 떠도는 원양어선에서 지낸 지 어언 한 달. 매일 같이 갑판과 화장실 그리고 식당까지 청소해야 하는 게 그의 일이다.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일을 매일같이 무한 반복하다 보니 이러다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까지 들었다.
배 위에서는 모든 게 힘들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언어가 다를뿐더러 보디랭귀지를 나눠줄 만큼 선원들이 친절하지도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주변 사람들의 냉담한 시선도 위상백을 힘겹게 만들었다.
[망할! 선장이 또 짜증을 부렸어.]
[우리 잘못이 아니잖아.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
[참아. 그래도 다른 배처럼 때리고 기합을 주는 건 아니잖아. 이 정도면 천사라고.]
또다시 알 수 없는 말이 오가기 시작했다. 한국인보다 짙은 피부색을 봐서는 동남아 쪽 사람이 분명한데 도무지 어느 나라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어색하게 웃는 게 위상백이 하는 일이었다.
[뭐야, 저 자식. 지금 나보고 웃는 거야?]
[가끔 저렇게 히죽거리더라. 좀 모자란 것 같아.]
[재수 없는 새끼. 맞다! 저 자식, 선장 하고 똑같은 한국인이지?]
[아마 그럴걸?]
[그거 잘됐네. 오늘 선장한테 당한 거 전부 저 자식한테 풀어야 해야겠다. 너도 동참할래?]
[그렇고 싶긴 한데, 선장이 뭐라고 하지 않을까?]
[괜찮아. 갑판장이 그러는데 선장이 저놈 정말 싫어한데. 그러니까 같은 한국인인데도 갑판 청소 같은 잡일만 시키지.]
[그래? 그럼 좀 괴롭혀 볼까?]
[그것 좋지! 헤이, 샹백!]
둘 중 키 큰 남자의 고갯짓에 위상백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예감만으로 남자의 부름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지난 한 달이 천국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힘겨운, 진짜 지옥 같은 나날들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