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179화 (179/256)

제179화

크레이듀 대표실.

“그리니까 이번에도 또 실패했다는 이야기군.”

“면목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그놈의 ‘죄송합니다’는 말은 언제까지 들어야 하는지. 크레이듀에서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자신감 있게 나를 바라볼 때는 ‘이놈 이거 물건이네’라고 생각했는데, 같이 일해보니 완전히 속 빈 강정이었어. 나도 다 됐나 봐. 이렇게 사람 볼 줄을 모르니 본사에서 밀려날 수밖에. 이봐 박 이사. 자네도 이 정도에서 자네의 깜냥을 인정하고 그만두는 게 어때?”

“하지만 대표님. 대표님도 겪으셨지만 최건우 그놈은 보통 놈이 아닙니다. 하루 이틀 머리 굴려 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그런 시정잡배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장기적으로 봐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분은 대표님이었습니다.”

“그래. 내가 그랬지. 하지만 말이야. 될성부른 잎은 떡잎부터 알아보는 법이야. 이제껏 자네에게 맡겨놓은 일의 결과들을 봐. 뭐 하나 진척을 본 게 있어? 전부 실패했잖아. 아니, 하는 일마다 결국 최건우의 명성만 높여주고 있어. 그런데 내가 어떻게 박 이사를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느냐는 말이지?”

나성천 대표가 아무리 성격이 불같고 불도저처럼 강한 추진력이 있어도 박유하 이사를 내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생아라고 해도 세계그룹의 직계. 그런 박 이사를 무리해서 데리고 있겠다고 말한 것은 다름 아니라 나성천 대표 자신이었다.

그런데 인제 와서 쓸모가 없어졌다고 버려버리면 그건 세계그룹을 굉장히 무시하는 처사가 되어 버린다.

가장 좋은 방법은 박유하 이사가 능력부족을 인정하고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인데, 어떻게든 능력을 인정받아 세계그룹으로 복귀해야 하는 그의 처지를 봤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박유하 이사만큼 학원가 사정을 잘 아는 마땅한 대체자가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교육용 앱이 이제 곧 완성됩니다. 그게 완성되고 정부와 프로그램 조달계약을 마치면 상당한 수익이 보장됩니다. 지금 정부에서는 선진교육, 창조경제를 캐치프레이즈로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시적인 성과를 보인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개발할 교육용 앱 크리에이터(creator)는 정부 시책에 대한 대국민 선전물로도 이용가치가 높습니다.”

“그건 대체 언제 개발 완료되는 거야? 지난번에 열흘이면 된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아직 소식이 없는 거지?”

“이번 주 안에 베타 버전이 나옵니다. 그럼 곧바로 상용화에 들어갈 겁니다.”

“교육부에서는 뭐라고 해?”

이미 구두 합의는 해뒀지만 계약서에 사인은 하지 않은 이상 정치판에서의 약속은 믿을 게 못 된다.

“얼마 전 교육부 관계자와 미팅을 가졌는데, 우리가 보여준 가상 시뮬레이션을 보고 완전히 몸이 달았습니다. 지금 분위기를 보면 베타 버전만으로 선계약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계약? 확실히 가능해?”

“원래라면 힘들겠지만 조금 있으면 선거가 있습니다.”

“그렇지, 선거가 있었지. 정부 입장에서는 선거용 선전물이 절실히 필요하겠군. 몸이 달을 만도 해. 그런데 선 계약이 오히려 발목을 잡을 수도 있어. 그건 생각해봤어?”

“네? 아니요. 그건…. 선계약이 오히려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

박유하 이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순진하군그래. 선계약이라고 해봤자 가계약에 지나지 않아. 선계약을 맺었다고 안심했다가는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어. 끝나고 입을 싹 닦을 수도 있다는 뜻이야. 선거 결과가 좋으면 그럴 가능성이 낮지만, 만약 선거에서 진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모르쇠로 나올걸?”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지금 여론 조사를 보면 여당이 매우 유리합니다. 선거에서 참패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쯧쯧. 똑똑한 척하더니 아직도 정치판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이 세상에 절대 믿지 말아야 할 게 두 가지 있어. 하나는 장사꾼이 남는 게 없다고 하는 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유권자 마음이야. 지지율? 그런 건 하루아침에 뒤집힐 수도 있어.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이 김대중보다 지지율이 줄곧 앞섰지만, 갑자기 터진 아들 병역문제 때문에 결과가 뒤집혔어.”

“우리나라에서 병역문제야 워낙 예민하니까 그럴 수 있을 것 같군요.”

“변수는 병역만 있는 게 아니야. 노무현 전 대통령을 봐. 그때도 상대는 이회창이었어. 예전에 이슈가 한번 되었기 때문에 병역비리는 더 이상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어. 거기다 5월 지방선거에서 당시 한나라당이 압승하면서 두 사람의 지지율 격차는 15%까지 벌어졌었어. 하지만 정몽준과 후보 단일화에 성공하며 단숨에 이회창의 지지율을 넘어서버렸지.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게 뭔지 아나?”

“글쎄요.”

“정몽준 그 양반이 선거 전날 갑자기 지지를 철회했는데도 지지율이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올랐다는 사실이야. 선거판이 그래. 도무지 제대로 된 예측을 하기가 힘들어. 그러니 함부로 정치하는 인간들을 믿지 마.”

정치인들로부터 여러 번 뒤통수를 맞으며 몸소 체득한 교훈이었다.

“그럼 그럴 수 없도록 계약서를 보강하겠습니다.”

“아니야. 그걸로는 부족해. 베타 버전에 문제가 있을 확률이 얼마나 돼?”

베타 버전이란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 제품이 출시되기 전에, 일반인에게 무료로 배포하여 제품의 테스트와 오류 수정에 사용하는 제품을 말한다. 테스트 후 나타난 문제점들을 보완하여 최종 완성판을 출시한다.

그런데 베타 버전에 문제가 있을 확률을 묻는다? 그건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질문이었다. 문제가 없다면 베타 버전을 출시할 필요가 없다.

“확실한 건 베타 버전을 출시해봐야….”

“됐어. 자잘한 오류는 바로 상용화 한 다음에 수정해도 돼. 그러니까 베타 버전 없이 바로 상용화 하고 그걸로 교육부가 계약서에 사인하도록 만들어. 이해했어? 자신 없으면 말해. 다른 사람 알아볼 테니까.”

“아닙니다. 제가 시작한 일입니다. 제가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원하시는 대로 시행하겠습니다.”

“좋아. 기대하지. 대신 이번 일도 실패하면 사표 쓸 각오를 하는 게 좋을 거야.”

“물론입니다.”

대표실에서 나온 박유하 이사는 곧바로 크레이듀 별관 5층에 있는 크리 애플리케이션 연구실로 향했다.

크리 애플리케이션은 과거 초이스 애플리케이션의 전신인 코니 애플리케이션 직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회사이다.

당시 경영권을 가지고 있던 홍민수 사장의 상황이 어렵자 그를 배신하고 핵심기술을 가지고 빠져나왔다. 그 덕분에 초이스 애플리케이션이 개발한 교육용 앱 퓨처와 상당히 유사한 형태의 앱을 쉽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핵심기술을 빼갔다고 해도 완전히 똑같이 만들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코니 애플리케이션의 진짜 핵심기술은 홍민수 사장 머릿속에 있었으며, 이후 건우의 대대적인 투자 덕분에 음성인식 분야 등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뒀다.

기술력에서 차이가 나자 박유하 이사는 고민 끝에 퓨처의 다운그레이드 수준의 교육용 앱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중요한 건 기술력이 아니라 정부에 로비를 잘해서 공인 인증을 받으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박 이사님.”

“갑자기 방문해서 미안합니다. 김 실장님.”

박유하 이사가 연락도 없이 방문하자 크리 애플리케이션의 책임자인 김 실장이 황급히 그를 맞았다.

“아닙니다. 이사님이야 언제든지 찾아오셔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연구하는 데 방해되게 자주 들락거릴 수야 없죠. 서로 바쁘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베타 버전 출시는 전면 중단합니다.”

“네? 그럼 크리에이터 개발을 포기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이미 완성 직전인데 크리에이터를 포기할 수는 없죠. 베타 버전 없이 바로 상용화에 들어갑니다.”

“네에? 베타 버전 없이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잘한 오류를 잡아낼 수가 없습니다.”

김 실장은 완강히 거부했다.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기다려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자잘한 오류를 얕보시면 안 됩니다. 그런 것들이 모여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하세요. 무조건 하세요. 밤을 새우든 초이스 애플리케이션에 몰래 들어가 기수를 빼 오든 그건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이유 필요 없습니다.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오류? 잡으세요. 목숨을 걸고. 만약 못하면 사표는 물론이고, 크리 애플리케이션은 그날부로 폐쇄될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이러시면….”

“못하겠습니까? 그럼 지금 말씀하세요. 여기 연구원 중에 할 수 있다고 나서는 사람을 실장으로 앉히겠습니다.”

“그건… 아,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팀원들 사이에 신뢰나 유대감이 강하지 않는 것은 크리 애플리케이션의 가장 큰 단점이다.

이미 한 번 배신한 사람들이 모임이기 때문에 두 번 배신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는 인식이 서로 간에 팽배해있다.

박 이사는 그런 문제점을 잘 파악하고 아킬레스건을 찌른 것이다. 못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넘기고 일을 그만두어야 할 상황.

김 실장 입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좋습니다. 그럼 전 김 실장님만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

크레이듀는 학원이지만 조직 체계는 수직적 계급관계인 일반 회사와 다를 바 없다.

나성천 대표가 박유하 이사에게 압박을 가하면 박유하 이사는 김 실장에게, 김 실장은 자기 밑의 팀장들에게, 그리고 팀장들은 다시 자기 밑의 부하 직원들을 압박을 가하는 먹이사슬 구조.

군대 문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이런 식의 압박은 빠른 업무 진행이 필요할 때 큰 효과를 발휘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시간에 쫓겨 엉터리 결과물을 낳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크리 애플리케이션은 김 실장의 장담대로 베타 버전 없이 곧바로 크리에이터 개발을 완료했다. 나성천 대표와 박유하 이사는 그 성과물을 가지고 곧바로 정부와 협상을 시작했다.

정부는 선거를 앞두고 대국민 선전용 홍보물이 필요한 상황. 나성천 대표가 새로운 앱을 정부와 공동으로 개발했다고 광고할 수 있도록 허용하겠다는 제안을 교육부 실무자가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협상은 급물살을 탔다.

크레이듀의 독자적 개발이라는 타이틀을 포기한 덕분에 반대급부는 매우 짭짤했다. 정부의 인증을 받은 대한민국 유일무이의 교육용 앱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했음은 물론 전국의 모든 국공립 초, 중, 고등학교에 크리에이터 앱을 보급하기로 공급계약도 맺었다.

전국의 한 학년 평균 학생 수를 50만 명이라고 가정하면 총 학생 수는 약 1,000만 명.

이중 국, 공립학교 학생 비율이 50%만 되어도 교육용 앱 보급 대상자가 500만 명에 이른다.

애플리케이션 가격을 3만 원으로 책정했으니, 크레이듀는 어설픈 짝퉁 앱 하나로 약 1,500억 원의 매출을 올리게 되었다.

국, 공립 대학교에도 공급계약을 한데다가, 매해 50여만 명의 새로운 학생들이 들어오는 것까지 감안하면 매년 백억 원대의 추가 매출을 기대할 수 있다. 그야말로 대박 계약을 맺은 셈이었다.

***

초이스 에듀 대표실.

“어서 오세요. 차 팀장님.”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대표님.”

“무슨 일인지 알 것 같군요. 크레이듀에서 개발했다는 크리에이터 때문이죠? 정부와 공동개발했다면서요. 그것참. 차라리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게 낫지.”

“맞습니다. 대표님. 정부와 계약을 맺고 공급을 시작했으니 이제 슬슬 태클을 걸어줘야 할 것 같아서요.”

“우리 매출에 영향을 주기라도 했습니까?”

“아뇨. 그건 아닙니다. 정부의 정식 인증을 받았다고 해도 우리 퓨처는 차원이 다른 앱입니다. 게다가 무료고요. 단지 앱 프로그램을 팔아서 돈을 벌어야 하는 크레이듀와 달리 우리는 앱을 통해 공급하는 다양한 서비스로 이윤을 창출하고 있지 않습니까? 시작점부터 다릅니다.”

“그럼 급할 것 없지 않습니까. 그나저나 크리에이터(Creator)라. 어이가 없군요. 창조자라는 뜻이잖아요. 남의 프로그램을 베낀 주제에 이름이 뻔뻔한 것 아닙니까?”

마음이 급한 차지훈과 달리 건우는 여유가 넘쳤다. 확실한 대비책을 세워둔 덕분이다.

“그놈들 뻔뻔한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라 이젠 놀랍지도 않습니다. 대표님 생각에는, 그럼 언제 역공에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까?”

“선거가 끝난 다음에요. 지금 우리가 역공을 펼치면 선거가 뒤집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칫 선거개입으로 보일 수도 있어요. 급한 것도 아닌데 굳이 정부와 척을 질 필요는 없겠죠.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피해액은 커집니다. 보상 받을 돈도 늘어나겠죠.”

“알겠습니다. 그런데 마이크로소프트에는 미리 연락을 넣어 놓을까요?”

“그래야죠. 연락해서 미리미리 피해액을 계산해놓으라고 하세요.”

“하하하. 이거 괜히 기대되는군요. 우리가 소송을 걸면 콧방귀도 안 낄 와룡 그룹일 텐데, 생각지도 못한 해외 거대기업이 소송을 걸면 무슨 생각이 들까요?”

“워낙 거액의 소송이라 생각 따위를 할 겨를도 없을 겁니다. 상황도 좋습니다. FTA 때문에 지적 재산권이 굉장히 중요해졌으니까요. 마이크로소프트가 개입하면 미국 눈치를 봐야 하는 정부로서는 함부로 와룡그룹 편을 들 수 없으니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죠.”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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