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9화
“그런데 싱하형 말투 그거 10년에나 유행했던 거잖아. 난 네가 처음에 올린 기획안을 보고 솔직히 통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거든. 스파이 생활 그만두더니 얘가 완전히 감을 잊었나 했다니까.”
“에이. 그만둔 지 얼마나 됐다고 감을 잊어요. 원래 유행은 돌고 도는 거라고요. 요즘 들어 다시 복고 패션이 유행하고 있는 것도 몰랐어요? 그러니 과장님이 아직 노총각이라고요.”
“뭐? 노총각이 뭐가 어째? 너 이 자식 말 다했어?”
“좀 발끈하지 말고 제 말 좀 새겨들으세요. 우리 팀장님 보세요. 과장님과 함께 솔로 생활을 계속했지만 이젠 옆에 손다정 팀장님이 생겼잖아. 그게 뭐 아무 노력 없이 그냥 생긴 건 줄 알아요?”
”그냥 생긴 게 아니면?
“외모에 신경을 쓰세요. 외모에.”
“외모? 외모는 무슨. 너, 인마 나 못생겼다고 놀리는 거야?”
“어휴.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솔직히 과장님이 보기에 팀장님 얼굴이 잘생겼다고 생각하세요?”
정보팀의 차지훈 팀장은 스파이의 교본으로 불릴 만큼 특색 없는 얼굴로 유명했다.
“그건 아니지. ‘평범하다’와 ‘약간 못생겼다’의 중간?”
“그러니까요. 팀장님에 비하면 과장님은 남자답게 생겼잖아요. 생긴 걸로만 따지면 과장님이 여성들에게 훨씬 잘 어필할 수 있는데 왜 과장님이 아니라 팀장님에게 먼저 여자친구가 생겼을까요? 그것도 손다정 팀장님처럼 세련되고 아름다운 여성으로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랬으면 이미 애인을 만들었겠지.”
“스타일이라고요, 스타일. 여자들은 남자 외모보다는 스타일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물론 원빈처럼 극강으로 잘 생긴 사람은 뭘 입어도 어울리겠지만, 대부분은 안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맨날 후줄근한 옷만 입고 다니지 말고, 그렇다고 너무 멋을 부리지도 말고 심플하면서도 세련되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윤종수의 설명에도 고자성 과장은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지. 인마. 내가 그걸 알면 이렇게 노총각으로 늙고 있겠냐?”
“어휴. 그러니까 좀 댄디하게 입자고요. 과장님 바지 한번 보세요. 1980년대에나 유행했던 주름바지를 요즘 누가 입어요. 거기다 배꼽 위까지 추켜 입은 건 어쩌고요. 그렇게 입으면 여자들이 당연히 싫어한다고요.”
“그럼 어떻게 입으라고? 그걸 제대로 설명해줘야 할 것 아냐?”
“어휴, 답답해. 우리 팀장님을 보세요. 예전에 비하면 사람이 달라져 보이지 않아요?”
“그건 그렇지. 연애해서 그런가? 확실히 얼굴 뒤에서 광채가 나는 것 같아.”
“에이. 팀장님이 예수님인가요? 얼굴에서 후광이 비치게요. 저게 전부 손다정 팀장님에게 잘 보이려는 필사의 노력으로 이뤄진 스타일 변화의 결과물이라고요. 그리니까 모르겠으면 팀장님을 참고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고요. 아니면….”
“두 사람 뭐해?”
윤종수가 패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찰나 차지훈이 갑자기 나타났다.
“네? 하하. 그냥 이번 업무에 대해 잠깐 이야기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래? 차질 없이 잘 진행되고 있지?”
“물론입니다. 우리에게는 잘 준비된 언론과 수천억 원이 들어간 서버가 있잖아요. 그것만 있으면 여론 조작하는 건 일도 아니죠. 사실 지금 분위기면 따로 여론 조작을 할 필요도 없을 정도예요. 와룡그룹은 몰라도 크레이듀는 이제 망할 일만 남았습니다. 하하하.”
“그래도 방심하지 말고 끝까지 침착하게. 무슨 말인지 알지?”
“당연하죠. 세계교육 때처럼 다 잡은 박유하 이사가 다시 기사회생하는 일이 없도록 철저하게 밟아 놓을 생각입니다.”
“오케이. 그럼 난 두 사람 믿고 먼저 퇴근한다.”
“벌써 퇴근하세요? 어디 가시는데요?”
예전에는 퇴근하겠다는 사람 붙잡고 심심하다며 억지로 회식을 하던 사람이 차지훈이었다.
달라져도 너무나 달라졌다.
“나? 그냥 일이 좀 있어서 나갔다 올게.”
“설마 데이트 가시는 건 아니죠?”
“으흠. 데, 데이트는 무슨.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어서 일해.”
“옛 썰.”
***
크레이듀 대표실.
“흐음. 세계교육이 당했을 때와 거의 똑같은 패턴인데 막을 방법이 없군.”
“모르고 당하는 것보다 알고 당하는 게 훨씬 더 악몽 같은 일이군요.”
건우가 크레이듀를 공략하는 방법은 사실 세계교육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후 함정을 파놓고 상대가 낚이길 기다리다가, 실제로 낚이는 순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신없이 몰아쳐 그로기로 만드는 수법.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도 도무지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건우와 초이스 에듀는 이미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경우의 수까지 모두 파악해 대비책을 마련해뒀다. 빠져나가려고 발버둥 칠수록 더욱 옭아매는 올가미처럼, 점점 더 조여지는 압박에 절망감밖에 남지 않는다.
가볍게 생각하고 인터넷 전문 신문사 기자를 납치했다가 모기업까지 위태롭게 만들었던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 재연되고 있었다.
냉정하게 말해 한국은 지적 재산권에 여전히 무지하다. 작가가 힘들 게 쓰고 그린 소설이나 만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불법다운로드한다. 그런 사람들을 고소하려고 하면 돈독 올랐다고 오히려 비아냥대기 일쑤다.
영화나 음악의 경우는 예전보다 사정이 많이 나아졌지만 불법다운로드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게 현실이다.
대학입시에서는 자기소개서와 교사 추천서를 표절했는데도 버젓이 합격해서 대학을 다니는 이야기가 뉴스에 나올 정도로 심각하다.
대학교수부터가 제자의 논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표절하는 세상이니 표절하는 입시생들을 단호하게 처벌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표절을 심각한 도덕적 흠결로 생각하는 외국과는 인식에서부터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와룡그룹의 특허권 침해는 그리 큰 이슈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하필 건우인 것이 문제였다.
국민들의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받던 그가, 사회적 불합리함의 상징과도 같은 대기업에게 탄압(?)받았다는 사실에 대중들은 엄청난 분노를 느꼈다. 평소 와룡그룹의 이미지가 안 좋았던 것도 한몫했다.
그리고 때를 기다리던 초이스 에듀 정보팀의 뒷공작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와룡그룹의 두 얼굴. 겉으로는 대기업 점잔, 뒤로는 호박씨.]
[와룡그룹에게 피해를 입은 중소기업,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대기업과 조폭은 종이 한 장 차이? 야만의 시대에 살고 있는 한국]
[아프니까 청춘? 아프니까 중소기업. 항상 당하기만 하는 을의 처지]
[갑의 횡포.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을.]
[돈으로 좌우되는 신 계급사회. 한국에 민주주의 없다.]
상황이 단순히 지적 재산권 분쟁이었으면 잠깐 이슈가 되고 말았을 일이다. 그러나 초이스 에듀 정보팀은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그들의 노련한 언론플레이는 지적 재산권 분쟁을 계층 간 갈등으로 심화시켰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기득권과 소외계층, 부자와 서민, 갑과 을의 대결.
논점이 사회적 계층 간의 갈등으로 옮겨붙자 건우는 어느새 사회적 불합리함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가 되어버렸고, 가해자인 와룡그룹은 모든 불합리함의 근원인 것처럼 인식되면서 안 그래도 좋지 않던 이미지가 더는 내려갈 곳이 없을 정도로 추락하고 말았다.
이번 사태로 인해 자동차, 통신, 제과 등 소비자와 직결된 사업분야의 매출은 전월 대비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해도 전월 대비 매출이 반 토막으로 떨어진 것은 와룡그룹뿐만 아니라 초이스 에듀 정보팀도 예상하지 못한 초유의 사태였다.
특히 자동차, 통신, 제과 분야는 한국 시장에서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던 효자 산업이었기 때문에 그 충격은 더 컸다.
거기다 믿었던 정관계 인사들마저 미국 정부의 압력으로 하나같이 등을 돌리면서 와룡그룹의 입지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
박유하 이사는 이런 좌절감이 벌써 두 번째였다.
한 번의 실수로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세계교육의 모습을 지켜봐야 했는데, 힘들게 다시 기회를 잡은 크레이듀는 그때보다 더욱 처참한 꼴을 당하고 있었다.
이젠 좌절감이 아니라 절망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세계교육이 무너지고 크레이듀로 옮겼을 때만 해도, 자신의 실력이 부족해서라 아니라 세계그룹이 허접해서라고 자위했었다.
그리고 세계그룹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막강한 파워를 발휘하는 와룡그룹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그러나 자신만만했던 박유하 이사의 오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나성천 대표가 방심하지 말라고 했지만, 와룡그룹을 등에 업고 보니 무서울 게 없었다. 거슬리게 했던 초이스 에듀도 그냥 밟아버리면 꿈틀하지도 못하고 죽어버리는 개미처럼 보였었다.
크리에이터 앱 개발을 거리낌 없이 추진했던 것도 그런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건우에게 부모도 재산도 개뿔 가진 것 없이 재능만 있는 인간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몸소 보여주고 싶었다. 재능이 있으면서도 사생아라는 이유만으로 느꼈던 패배감을 그대로 느끼게 해주고자 했다.
하지만 건우는 박유하 이사의 생각처럼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그룹을 넘어 이제 와룡그룹까지 위태롭게 만들어버렸다.
‘앞으로 짜증 나는 기업이 있으면 너를 거기로 보내야겠어. 어떻게 일하는 회사마다 거덜을 낼 수 있지? 그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인 것 같다.’
어제 사촌 형인 박준하 전무가 박유하 이사에게 한 말이었다.
조롱하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단지 무기력감만 들었을 뿐이었다. 더 이상 건우를 상대할 자신도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며칠 전만 해도 호랑이같이 무시무시하기만 했던 나성천 대표도 더는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연민이 들었고 동병상련이 느껴졌으며 그저 불쌍했다.
똑똑똑.
“네.”
할 말을 잃은 나성천 대표와 박유하 이사는 서로의 얼굴을 외면한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가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대표님. 본사에서 호출입니다.”
“그렇군. 드디어 올 것이 왔군. 이봐, 박 이사.”
“네. 대표님.”
“대표님은 무슨. 알량한 대표 자리도 이제 끝인데.”
“죄송합니다. 제가 크리에이터 앱을 만들자고만 하지 않았어도.”
“아니야. 코니 애플리케이션을 산산조각 내버린 건 내가 한 일이야. 자네가 아니었어도 어차피 초이스 에듀의 퓨처와 비슷한 앱을 만들었을 거야. 그러니 미안해할 것 없어. 그건 자네와 어울리지 않아. 어쨌든, 박 이사 자네는 젊으니까 좌절하지 말고 열심히 살게. 그리고 최건우 대표를 만나면 나 하나로 용서해달라고 전해주시게.”
“네? 그게 무슨 말씀인지.”
“차차 알게 될 거야. 그럼 난 본사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군.”
“알겠습니다.”
나성천 대표의 표정이 너무나도 심각해서 ‘나 하나로 용서해달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지 못했다.
박유하 이사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 비서실 앞 소파에 앉아 홀로 앉아 생각을 정리하고 나올 나성천 대표를 기다렸다. 하지만 10분, 20분, 30분이 지나도 그는 나오지 않았다.
똑똑똑.
“대표님. 본사로 들어가실 시간이 지났습니다.”
똑똑똑.
“대표님. 이제 본사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의아한 마음에 문을 두들겨 봤지만, 대표실 안은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계속 기다려도 대답이 없자 하는 수없이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나성천 대표는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제멋대로 펄럭이는 커튼이 눈에 들어왔다. 책상 뒤편의 창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대표님!”
설마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차 싶은 마음에 황급히 창가로 달려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언제나 당당한 사람이라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뭔가 자신이 모르는 다른 문이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절대 보고 싶지 않은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끔찍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서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젠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믿기지 않는 모습과 마주한 박유하 이사는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 하나로 용서해달라’고 했던 나성천 대표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죽음을 결심하고 최후의 유언을 남긴 것이었다.
과연 그 말을 최건우에게 전할 수 있을지 박유하 이사는 확신이 생기지 않았다.
그는 이제 최건우가 두려웠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