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190화 (190/256)

제190화

“제발 화를 풀고 우리 와룡그룹을 살려주시오. 최건우 대표. 우리가 최 대표에게 잘못한 것은 잘 알고 있소. 하지만 와룡그룹을 다니는 직원들은 무슨 죄가 있겠소.”

한준수 와룡자동차 회장이 초이스 에듀를 찾아왔을 때 건우는 과연 그가 무슨 말로 자신을 설득할까 궁금했었다.

솔직히 무고한 와룡그룹 직원들을 생각해달라는 사정하는 모습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도 하소연에는 절대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와룡자동차를 세계적인 자동차회사로 성장시켰고, 그 성과를 기반으로 재계 서열 3위 대기업의 강력한 차기 총수로 지목되고 있는, 재계의 거목이라고 불리는 한준수 회장이 자신 앞에서 무릎을 꿇는 모습은 건우도 상상하지 못했다.

“아니, 회장님. 갑자기 이게 무슨 일입니까?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제발 일어나 주십시오.”

“아니요. 최 대표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면 이 늙은이, 바닥에 머리를 찧을 수도 있소이다. 혹시 나성천 대표의 소식은 들었소?”

“네. 안타까운 소식이었습니다.”

“쯧쯧. 사람이 그렇게 강직하오. 회사에 누를 끼친 것을 그런 식으로 사죄하다니. 나 대표가 유언으로 박유하 이사에게 남긴 말이 있소.”

“그게 뭡니까?”

“자기 하나로 끝내달라고 그랬더이다.”

“휴우. 그렇군요.”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나성천 대표는 자신을 희생하면서 와룡그룹이 기사회생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특허권 침해였다. 그런데 그 사태의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크레이듀 대표이사가 모든 책임을 지고 자살을 했으니 더는 와룡그룹을 비난할 명분이 없어진 것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한준수 회장이 한술 더 떠 건우 앞에 직접 무릎까지 꿇었다. 만약 건우가 여기서 한준수 회장의 읍소를 모른척한다면 그 소문은 와룡그룹이 미리 준비해놓은 언론을 통해 금세 퍼져나갈 것이 분명했다.

예전보다 세상 보는 시야가 넓어진 건우는 자신이 강경책을 고수했을 때 벌어질 일들이 쉽게 상상이 됐다.

“정말 아까운 인재를 보내버렸소. 우리 와룡그룹은 이번 사태의 책임을 통감하고, 학원 사업에서 모든 손을 떼고 물러날 것이오. 그리고 크레이듀에 대한 모든 권리는, 특허권 침해에 대한 보상으로, 초이스 에듀에게 넘기겠소. 그러니 제발 우리 와룡그룹을 용서해주시오.”

이 정도면 외통수라고도 할 수 있다. 보통 때였다면 무릎을 꿇고 크레이듀에 대한 모든 권리를 넘기는 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성천 대표의 죽음은 그런 부족함을 충분히 채우고도 남았다.

그룹 전체를 휘청이게 만들던 커다란 위기를 자존심을 버리고 무릎 한 번 꿇는 걸로 극복해냈다. 역시 한준수 회장은 운으로 와룡자동차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든 게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마이크로소프트에 잘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그러니 그만 일어나 주십시오.”

“고맙소. 고맙소, 최 대표.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으리라.”

‘은혜라니요. 원한을 잊지 않겠죠.’

건우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말없이 웃는 낯으로 한준수 회장의 손을 잡았다.

이번 일이 끝이 아니라는 것은 건우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래의 위협 따위는 더 이상 겁나지 않았다.

와룡그룹을 비롯해 그동안 건우를 적대시하던 세력들이 숨죽이고 수면 아래로 몸을 움츠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번 사태의 효과는 충분했다.

그들이 숨죽여가며 복수의 칼날을 열심히 갈고 있을 때, 초이스 에듀와 마이크로소프트의 합작 회사인 MS Choice는 순식간에 세계 교육시장을 장악할 것이다.

또한, 건우가 투자했던 게임 회사와 미래지식을 이용한 초이스 이노베이션이 엄청난 권력과 부를 안겨줄 것이 분명했다.

그때가 되면 언제든 밟아 죽일 수 있는 개미는 초이스 에듀가 아니라 그들이 될 것이라고 건우는 확신했다.

***

“정말 이대로 끝내셔도 되겠습니까? 한국 정부와 와룡그룹을 압박할 카드들은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건우가 전화를 걸어 특허권 침해 소송 취하를 요청하자 데이비드 하워드 부사장이 이렇게 말했다.

- 아닙니다. 지금까지 도와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혹시 와룡그룹이 노골적인 협박을 한 건 아니지요?”

물론 조건 없는 소송 취하는 아니었다. 보상으로 크레이듀라는 학원을 넘겨받는다고는 하지만 그 가치가 1천억이나 될까?

반면 이번 소송을 계속 진행하면 1조 원 가까운 보상금을 받아낼 수 있다. 한국에서만 사업을 한다면 모를까 수출업이 큰 비중을 차지 와룡그룹이 미국 정부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압력을 무시하긴 힘들다.

어쩔 수 없이 재판까지 가야 하고, 와룡그룹이 아무리 대단한 로펌을 앞세운다고 해도 데이비드 하워드 부사장은 이번 소송에서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런 그로서는 건우의 선택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 하하하. 제 뒤에 마이크로소프트가 있는데 어떻게 저를 협박하겠습니까? 와룡그룹은 성의 있게 사과를 했습니다. 오히려 과할 정도로 성의가 있어서 문제였습니다.

“과할 정도로 성의가 있었다? 그건 무슨 뜻이죠?”

- 너무 과하게 사과를 해서, 그 사과를 받아주지 않으면 제가 나쁜 놈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상대의 성의를 무시하고 과도한 욕심을 부린다고요.

“피해자가 어쩔 수 없이 사과를 받아 들어야 한다?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들군요. 사과를 받든 아니든 그건 전적으로 피해 당사자가 결정하는 거 아닙니까? 제가 듣기론 그것도 협박으로 들리는군요.”

‘사과를 받지 않으면 네가 나쁜 놈이 된다. 그러니 당장 사과를 받아라.’ 데이비드 하워드 부사장에게는 건우의 말이 이렇게 들렸다.

- 뉘앙스가 조금 다릅니다. 정확하게 설명 드리긴 어렵군요. 양국 간 정서의 차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속담에도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쥐도 도망갈 구멍을 보고 쫓아라. 이번에 완전히 사생결단을 낼 게 아니면 적당히 하고 놔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벼랑 끝으로 몰았다가 같이 죽자고 달려들면 곤란하거든요.

“반대로, 밟을 땐 다시는 기어오를 생각을 하지 못하게 철저하게 밟으라는 말도 있습니다.”

건우의 말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눈앞에까지 들어왔던 1조 원을 그냥 포기하기엔 미련이 남았다.

- 그러기엔 상대방 덩치가 너무 커서요. 아직은 때리다 보면 제가 지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음에는 지금처럼 물러나는 일이 없을 겁니다. 그땐 제 덩치가 더 커져 있을 거니까요.

“알겠습니다. 최 대표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소송은 제가 잘 마무리하겠습니다.”

- 네, 도움 감사했습니다.

Rrrr

전화를 끊은 데이비드 하워드 부사장은 곧바로 사이티 카푸르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리 건우가 소송 취하 요청을 했다고 해도 무려 1조 원이 걸려 있는 일이다. 이 정도 규모면 천하의 마이크로소프트도 무시하기 쉽지 않은 금액이다. 사이티 카푸르 회장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다.

- 네.

“회장님. 최건우 대표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 최건우 대표가요? 무슨 일이던가요?

조금은 나른하게 전화를 받던 사이티 카푸르 회장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이번 소송을 취하해달라고 요청이 왔습니다.”

- 원하는 대로 해주세요. 문제 있습니까?

“그건 아닌데 별 가치도 없어 보이는 학원 하나를 받고 1조 원을 포기한다는 게 좀 마음에 걸려서 말입니다.”

- 됐습니다. 보상을 받아도 최 대표와 반을 나누면 5천억 원밖에 안 됩니다. 고작 그런 돈을 탐하려고 그것의 수십 수백 배가 될지도 모르는 가치를 잃고 싶진 않습니다. 제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했던 건 최건우 대표를 위해서지 우리가 이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러니 최 대표가 소송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해주면 됩니다.

“회장님 뜻 잘 알겠습니다.”

-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지금 우리에겐 최건우 대표가 최우선 순위입니다. 명심해주세요.

***

2017학년도 수능시험이 종료되면 출제자들도 한 달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감금에 가까웠던 생활에서 해방된다.

조금 전 오전 8시 40분 국어 과목부터 수능시험이 시작되었고, 이제 출제자들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퇴소 준비를 해야 정상이다. 실제로 숙소에 갇혀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마음이었다.

그러나 박용희 출제위원장을 비롯해 각 과목 책임 출제위원들의 표정은 홀가분함과 거리가 멀었다.

그들 손에는 A4 크기의 두껍지 않은 책자가 들려 있었다. 그 책자가 그들의 표정을 어둡게 만든 원흉이었다.

책자 제일 앞에는 ‘2017학년도 수능 예상 문제집’이라는 제목과 함께 ‘초이스 에듀’라는 다섯 글자가 뚜렷하게 박혀 있었다.

“휴우. 대체 이게 왜 이제야 우리 손에 들어온 겁니까? 그리고 처음에 우리가 받았던 예상 문제집은 뭐고요?”

박용희 출제위원장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맞고 이것도 맞습니다.”

초이스 에듀에서 만든 문제의 책자를 들고 황급히 방문한 교육부 관계자가 그렇게 말했다.

“그건 또 무슨 생뚱맞은 소리입니까? 그것도 맞고 이것도 맞다니.”

“처음에 드렸던 것도 초이스 에듀에서 만든 것이고 지금 이것도 초이스 에듀에서 만든 예상 문제집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만 우리에게 전한 겁니까? 두 개가 있었으면 둘 다 우리에게 전해줬어야죠.”

“그게, 방금 드린 예상 문제집은 최건우 대표가 바로 며칠 전에 특강반 학생에게 나눠준 겁니다.”

“며칠 전이 정확하게 언제입니까? 조금만 일찍 알았어도 수능 시험 문제를 바꿀 수 있지 않았습니까? 이 예상 문제집이 사실이라면…. 아, 정말 말도 안 됩니다.”

교육부 관계자의 말에 출제위원들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일그러졌다. 절대 일어나면 안 될 일이 일어났다.

“안타깝게도 시험 문제 인쇄에 들어간 직후에 예상 문제집을 나눠줬다고 합니다. 첫 번째 예상 문제집을 받은 이후 마음을 놓고 거기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있어서 우리도 그 사실을 어젯밤에 알았습니다. 바로 알았다고 해도 이미 인쇄에 들어간 이후라서 시험 문제를 바꾸긴 어려웠겠지만요.”

”허…. 어떻게 그럴 수가. 설마 우리가 이런 식으로 일을 꾸밀 거라는 걸 초이스 에듀에서 예측이라도 한 겁니까?“

“그걸 확인하기 위해 부랴부랴 책자를 복사해 여길 찾아온 겁니다. 확인해보시니 어떻습니까?”

“완전 당했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최건우 그 친구의 수작에 우리 모두가 당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네. 첫 번째 예상 문제집은 떡밥이 분명합니다. 그걸 본 우리가 수능 문제를 지금처럼 만들 수밖에 없도록 유도한 겁니다. 그리고 새로운 예상 문제집으로 쾅하고 폭탄을 터트린 겁니다.”

박용희 출제위원장은 ‘쾅’하는 소리를 일부러 크게 냈다. 그 소리에 교육부 관계자가 깜짝 놀랄 만큼.

“크흠. 폭…탄이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방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떡밥이라고. 예상 문제집을 보고 우리는 좋다고 희희낙락하며 수능 문제를 출제했는데, 최건우 그놈은 그것까지도 이미 내다봤다 이겁니다. 그 머리 좋은 놈이 모든 걸 예측하고 문제집을 만들었으니 결과가 어떻겠습니까?”

“설마 재작년처럼 적중률이 50%를 넘은 겁니까?”

“그 정도면 우리가 이렇게 절망하고 있지 않았겠죠. 그놈은 정말 무자비합니다. 우리가 꼼수를 부린 걸 알고 잔인하게 우리를 짓밟은 겁니다.”

국어 과목 책임 출제위원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몇 퍼센트이길래 이러시는 겁니까?”

“휴…. 제가 볼 때 70%입니다.”

“네? 70%라고요?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아무리 최건우라도 수능 적중률 70%가 말이 됩니까? 잘못 보신 것 아닙니까?”

70%란 10문제 중 7문제를 적중했다는 의미다. 말도 안 되는 수치고, 말이 되어서도 안 된다.

이렇게 되면 예상 문제집을 본 집단과 못 본 집단 사이에 너무나도 큰 차이가 난다.

분명 불평불만이 쏟아져 나온다. 그 불만이 누구에게 향하겠나?

70%라는 말도 안 되는 적중률을 보인 건우? 아니면 건우에게 수능 70% 적중이라는 엄청난 영광을 안겨준 교육부와 출제위원에게?

굳이 말하지 않아도 결과는 뻔했다.

“그래서 우리를 잔인하게 짓밟았다고 한 겁니다. 차라리 이런 꼼수를 안 부렸으면 70%까진 나오진 않았을 텐데, 오히려 우리가 최건우 그놈을 도와준 꼴이 됐습니다.”

“다른 과목도 그렇습니까? 혹시 국어만 그런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안타깝지만 수학, 과학, 역사 세 과목도 마찬가지입니다. 약속이라도 한 듯 70% 선을 유지했습니다. 이걸 보면 최건우가 사회적 파장을 생각해 일부러 70% 선을 지킨 것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방법이 없겠습니까?”

“무슨 방법이요? 이미 수능 시험 문제는 잘 인쇄되어 전국 수능 고사장에 전부 나눠줬는데 이제 와서 어쩌겠습니까? 그러기에 왜 이런 꼼수를 부려서는….”

이번 적중률 결과가 알려지면 출제위원들의 위상은 바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최건우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출제위원들이라고 조롱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자 박용희 출제위원장의 원망이 자연스럽게 교육부로 향했다. 그렇지만 교육부 관계자는 그런 원망에도 대꾸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히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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