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201화 (201/256)

제201화

Rrrr

“네. 여보세요.”

- 안녕하십니까, 최 대표님.

“아, 시장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장문오 시장에게 전화가 걸려온 건 두 사람이 만난 지 열흘이 지난 후였다. 닷새 안에는 연락이 올 줄 알았는데 일주일이 넘어도 감감무소식이라 건우도 내심 당황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너무 강한 카드를 꺼내 든 건 아닌지 후회도 됐지만, 그 일은 잠시 잊고 학원 업무에만 전념했었다. 그게 아니라도 지금 건우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 잘 지냈으면 좋은데, 최 대표님이 안겨주신 숙제 때문에 잘 지내지 못했습니다.

“아, 고민이 정말 많으셨던 모양이군요.”

- 생각이 너무 많았습니다. 일주일 내내 갈팡질팡했거든요. 그렇게 고민하다 보니 한 십 년은 훌쩍 늙은 기분입니다. 초등학생 때 받아쓰기 숙제 이후 처음 겪어보는 고약한 숙제였습니다.

장 시장의 말은 엄살이 아니었다. 뜬눈으로 몇 날 며칠 밤을 고민하느라 건우와 전화하는 지금 목소리에 피곤함이 잔뜩 끼어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하셔야 할 숙제 아니셨습니까?”

- 허허. 역시 최 대표는 보통 사람이 아닌가 봅니다. 사람을 꿰뚫어보는 재주가 있네요. 맞습니다, 언젠가는 해야 할 숙제입니다. 그러니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제게 조금이라도 힘이 있을 때 해치우는 게 맞겠지요?

“그럼… 지금이 가장 젊으시지 않습니까?”

- 그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하나만 물어보겠습니다.

“네. 뭐든 물어보셔도 됩니다.”

- 최 대표님은 정말 정치할 생각이 없으십니까?

지난 만남에서 이 질문을 받았을 때는 단순히 떠본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면, 지금은 ‘같이 해볼 생각이 없느냐’는 권유의 느낌이 강했다.

“네, 정치는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 일에 굉장히 큰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하다 보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불합리한 압박들이 자꾸 들어오더군요. 자기 자식이나 손주를 우리 학원에 등록시켜 달라는 청탁이 제일 비일비재한데 그걸 안 들어주면 정계, 관계, 재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압박이 들어옵니다. 자기들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큰 곤욕을 치를 거라고.”

- 휴…. 이상한 인간들이 참 많죠? 자신들이 가진 권력은 국민들로부터 받은 건데 그걸 모르고 사적인 일에 휘두르는 무개념 정치인들을 저도 많이 봤습니다.

“그래서 제가 시장님을 찾아간 겁니다. 불합리한 압박을 없애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기 위해서요. 그런 제가 정치를 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정치를 하게 되면 일을 마음껏 할 수 없는 건 매한가지다. 그러려고 장문오 시장을 찾아간 게 아니다.

서로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게 건우가 원하는 모습이다.

- 그도 그렇군요. 사실 최 대표님이 함께 해주신다면 신당 창당으로 가닥을 잡아볼까 했는데, 생각이 없다고 하시니 어쩔 수 없군요. 그럼 제가 선택할 방법은 하나 남았네요. 이번 달 안에 민국당으로 복당하겠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에 건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탑 연예인보다, 어쩌면 대통령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 건우다.

그냥 인지도만 높은 게 아니라 이미지도 굉장히 긍정적이다.

‘젊고, 성실하고, 건강하고, 명석하고, 가정적이고, 바르고, 따뜻한 남자.’

이게 대다수 국민이 가지고 있는 건우에 대한 이미지다. 지금 당장 신당을 창당하고 정치를 한다고 해도 충분히 통할만큼 대다수 대한민국 사람들은 건우를 좋아한다.

민국당은 예전부터 대한민국에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힘써온, 역사가 오래된 정당이다. 그 세월이 좋은 전통을 만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현실 안주와 구태의연함이 만든 악습도 곳곳에 숨어 있다.

대한당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나아 보일 뿐, 민국당은 장문오 시장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정당과는 분명 거리가 있는 곳이다.

그래서 건우에게 정치에 뜻이 있는지 물어본 것이다. 서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류명훈 전 대통령의 적자 장문오 시장과 건우가 힘을 합친다면 국민들로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건우가 정치에 관심이 없는 이상 민국당으로 들어가 그곳의 안정적인 정치적 기반을 이용하는 게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이 있다지만, 싫은 점을 고칠 수 있다면 굳이 떠날 필요가 없는 것 또한 세상사다. 장문오 시장은 둘 중 후자를 선택했다.

건우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한 줄기 피어올랐다. 무소속이던 장문오 시장이 민국당으로 복당한다는 건 열흘 전 제안을 수락한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마음을 결정하셨나 보군요.”

- 사실 처음부터 최 대표님의 제안에 끌렸습니다. 하지만 확신이 필요했습니다. 제가 이 바닥에 있으면서 깨달은 게 뭔지 아십니까? 정치는 전쟁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정치가 전쟁이라.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들리네요.”

- 총칼만 안 들었을 뿐, 여긴 진짜 전쟁터보다 더 비정한 곳입니다. 누군가는 저를 보고 여주시에서 와신상담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하지만, 그건 실상을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사실 저는 다시 전쟁터에 나서는 게 무서워서 제 고향에 숨어 있는 겁니다. 세상 누구보다 강한 분이라고 생각했던 류명훈 대통령님이 그렇게 허무하게 가시는 걸 보고 비정한 세상에 겁을 집어먹었죠.

“정치는 잘 모르지만 시장님의 마음이 어떤 건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제 가장 큰 지지자였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우리 가족이 길거리로 나앉게 생겼을 때, 저도 세상이 원망스럽고 무섭고 그랬었습니다.”

- 아, 부모님 일은 정말 유감입니다.

“아닙니다. 이제는 저도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제 동생들도 처음보다 굉장히 씩씩해졌고요.”

아직도 부모님이 무척 그립지만 예전처럼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다. 익숙해진 건지 이겨낸 건지 알 수 없지만.

- 다행입니다. 그런데 최 대표님은 그 공포를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음. 저는…, 좋은 분들을 만난 덕분에 극복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분들의 따뜻한 도움을 받으면서 세상이 꼭 무서운 곳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 좋은 분들이라…. 참 쉬운 듯하면서도 어려운 방법이군요. 특히 이 바닥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여긴 어제 전우였던 사람이 오늘은 적이 되어 나타나는 곳이거든요.

“그 말씀을 들으니 저는 절대 정치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하하하. 저 때문에 우리나라가 최고의 대통령감을 잃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 최 대표님.

장문오 시장이 나직하게 건우를 불렀다. 조심성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네. 시장님.”

- 건네주신 자료는 잘 봤습니다. 정말 기가 막힌 내용이더군요. 그게 전부 공개된다면 우리나라가 뒤집힐지도 모를 만큼요. 혹시 이걸 어디다 쓰실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저는 처음부터 사용할 생각이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사설 정보기관의 역량을 확인해보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필요하시다면 시장님 마음대로 사용하셔도 됩니다.”

- 음…. 아마 예전의 저라면 무조건 터트리고 봤을 겁니다.

정치에 갓 입문했을 때의 장문오 시장이었으면 건우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일단 언론에 공개부터 했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그는 그만큼, 좋게 말하면 열정적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맹목적이었다.

물론 지금도 계속해서 그런 성격이었다면 건우가 장문오 시장을 찾아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요?”

- 그걸 터트려 제대로 효과를 볼 수 있다면 저는 지금이라도 언론에 공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랬다간 오히려 그들끼리 똘똘 뭉쳐 저를 이상한 놈으로 몰고 갈 게 뻔히 보이는데 그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럼 그냥 모르는 척하시는 겁니까?”

- 최 대표님은 실망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냥 가지고만 있을 생각입니다. 혹시 모를 치졸한 공격에 대비한 방패막이 용도라고 해야 하나.

꼭 공격용으로 사용하라는 법은 없다. 공격이 최선의 수비라는 말은 정치판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성급하게 공격했다가 엄청난 역풍에 처참하게 고꾸라지는 걸 한두 번 목격한 게 아니었다.

그럴 바에는 비수처럼 숨겨두는 게 현명하다. 그리고 상대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릴 때 조용히 꺼내 입을 다물게 하면 된다.

이게 바로 방패막이 용도의 의미였다.

“비장의 카드 같은 겁니까?”

- 네, 바로 그겁니다. 중요한 순간에 상대를 당황케 만들기 딱 좋은 자료들입니다. 이런 정보를 그때 알았으면 류명훈 대통령님도 그렇게 허무하게 가시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래서 정보기관이 중요하다고 했던 겁니다. 어렵게 구한 자료일 텐데 제가 그렇게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이미 시장님에게 넘긴 정보입니다. 어떻게 사용하시던 그건 시장님 마음입니다.”

- 그렇다고 전부 묻어둘 생각은 없습니다. 자료에 있는 이들 중 민국당 국회의원들의 문제는 터트려야죠. 민국당은 지금 너무 고여 있는 상태입니다. 지나치게 매너리즘에 빠져 있어서 한 번쯤 경각심을 일깨워줘야 해요. 썩은 부위는 미리미리 잘라내야 하는 법이죠.

민국당에는 장문오 시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순수하게 그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류명훈 전 대통령의 지지세력이다. 류명훈 전 대통령이 그에게 남겨준 정치적 유산이었다.

장문오 시장이 복귀한다면 뿔뿔이 흩어져있던 사람들이 그를 중심으로 몰려들 것이다. 장문오 시장은 그것을 기반으로 민국당을 뜯어고칠 생각이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건우가 준 자료가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시장님이 복당하시면 한동안 민국당이 들썩이겠습니다.”

- 그 들썩임으로 잠에 빠진 민국당이 깨어났으면 좋겠습니다. 흠…, 최 대표님.

“네, 시장님.”

- 정치판에 있으면서 참 많이 배신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최 대표님 덕분에 다시 한번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필요에 의해서 만나긴 했어도 서로 등을 돌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초심만 잃지 않는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건우는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장문오 시장은 그래서 더 신뢰가 가는 걸 느꼈다. 그가 보기에 건우는 지금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사람이었다.

- 초심이라…. 허허허. 그렇군요. 생각해보니 그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서로 초심이 변하지 않는다면 등을 돌릴 일이 없겠지요. 그 간단한 이치를 그동안 제가 잊고 있었네요. 저만 초심을 잘 지킨다면 우리 사이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최 대표님,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 중에 제가 한번 찾아가겠습니다. 어차피 교육타운 문제도 마무리해야 하니까요.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나누시죠.”

- 그게 좋겠군요. 알겠습니다. 연락기다리겠습니다.

***

[여주시에 세계 최대 규모의 교육 타운이 들어선다.]

오늘 여주시와 초이스 에듀가 교육타운 건설을 위한 MOU를 체결했다.

이번 합의서에 따르면 초이스 에듀는 남한강 주변(여주시 대신면)에 있는 약 3㎢(90만 명)에 혁신 교육 도시(일명 교육 타운)를 건설한다고 한다.

10년간 약 20조 원이 투입될 예정이며 마이크로소프트가 5조 원을 투자하기로 하는 등 이미 10조 원 규모의 재원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나머지 10조 원만 초이스 에듀가 자체 조달한다고 한다.

이번 MOU 체결 소식을 듣고 초이스 에듀나 여주시에 투자 의향을 적극적으로 밝히는 사람도 있었지만 마이크로소프트를 제외한 투자는 모두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초이스 에듀 한 관계자는 ‘교육 타운 프로젝트는 최건우 대표님의 꿈이 담긴 숙원 사업이다. 투자자의 입김 때문에 계획이 변질될 바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더라도 자금을 자체 조달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10조 원을 자체 조달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 초이스 에듀의 역량을 생각한다면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라고 밝혔다.

한편 장문오 여주시장은 ‘교육 타운의 교육 과정은 모두 무료다. 가난함 때문에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 학생들이 경제적 사정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는 최건우 대표의 말에 크게 감동했다. 향후 한국을 이끌어 나갈 창의적인 인재들이 이곳 교육 타운에서 많이 배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라며 큰 기대를 드러냈다.

(후략)

건우와 관련된 뉴스가 또다시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20조 원이라는 엄청난 스케일이 문제였다. 그동안 건우 일이라면 앞뒤 안 가리고 발 벗고 나섰던 지지자들도 설왕설래하는 모습이었다.

‘된다, 안 된다’, ‘사기다, 아니다’, ‘아무리 최건우라도 이건 미친 짓이다’, ‘여주 땅값 엄청 오르겠다. 저걸로 시세차익 노리는 거 아니냐?’, ‘저게 실제로 만들어지면 대박이긴 하겠다.’, ‘여주 시민에게만 혜택이 돌아간 건가? 그럼 나도 여주로 이사 가야겠다’ 등등.

정말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까지 돌았지만 건우와 초이스 에듀는 어떤 추가 설명도 없이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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