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203화 (203/256)

제203화

“류명훈이라…. 그 망령이 장문오를 통해 다시 살아나는 건가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은 죽어서도 우리를 괴롭히는군요.”

“장문오와 류명훈, 두 사람의 신념이나 정치 성향은 거의 비슷하지만 확연하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바로 성격입니다. 류명훈은 사실 너무 물렀어요. 그 성격 덕분에 사람들이 많이 따랐고 대통령이 될 수 있었지만, 적도 품을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순진함이 결국 자신을 망친 것 아닙니까?”

그런 분위기를 조성한 게 이들이지만 그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장문오는요?”

“독하죠. 그래서 류명훈이 보여준 포용력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원래라면 딱 이인자에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대통령을 하기에는 성격이 너무 강해요.”

“그러면 신경 쓸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그 성격 때문에 나가떨어질 텐데.”

“평소라면 그랬겠지요. 하지만 친류 세력에겐 예외입니다. 그들은 대한당과 우리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어요. 복수할 대상이 있을 땐 포용력 있는 사람보다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 리더로 더 적격입니다. 그들은 대한당을 포용하려는 게 아니라 피의 복수를 하고 싶은 거니까요. 독한 성격쯤은 대의라는 명목 아래 얼마든지 감내할 겁니다.”

외부에 강력한 적이 있으면 내부의 갈등은 잠시 뒤로 밀리게 된다. 이런 모습은 역사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다.

“그렇다면 장문오가 대통령이 되는 걸 막아야겠군요. 그 사람에게 약점 같은 게 있던가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하니, 장문오에게도 뭔가 약점이 될 만한 게 있지 않을까요?”

“안 그래도 조사를 해봤습니다. 민국당으로 복당하면서 우리에겐 특급 요주의 인물이 되었으니까요.”

“특급이면 국정원에 조사를 부탁했겠군요.”

이들은 국정원을 마치 사설 정보기관인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결과가 어땠습니까? 쓸 만한 약점이 나왔습니까?”

“아니요. 전무합니다.”

“그럴 리가요? 아무리 장문오 성격이 대쪽 같다고 해도 작은 약점 한두 개쯤은 있는 게 정상 아닙니까? 부모와 형제자매, 부인, 자식들이 있을 텐데 그들이 전부 장문오 같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본인이 아무리 청렴해도 주변 사람까지 그러기는 쉽지 않다. 도덕성이 강점이라면 주변 사람을 공략해 도덕성에 금이 가도록 만드는 게 이들이 좋아하는 방식이다.

“부모는 이미 사망했고 장문오는 외동입니다. 부인은 전업주부인데 봉사활동 말고는 따로 하는 일이 없습니다. 늦게 본 아들은 이제 겨우 중학생입니다. 일진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모범생이라고 하더군요.”

“장문오 본인은요?”

“깨끗합니다. 증조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건 유명하니 다들 아실 테고, 현역으로 해병대를 나왔습니다. 그 이후 사법시험 합격, 민변에서 활동했습니다. 재산이라고는 여주에 있는 40평 아파트와 10년 된 자동차가 전부입니다. 더 나오는 게 없습니다.”

“정말 그게 끝입니까?”

“국정원 조사 능력을 믿지 못하진 않으시겠죠?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음주운전, 위장전입, 논문 표절 같은 웬만한 정치인들은 하나쯤 가지고 있는 그런 약점도 못 찾았습니다.”

독할 정도로 깨끗하게 살았다. 이게 바로 조사를 맡은 국정원 요원의 평가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독기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장문오가 대통령이 되면 우리도 위험해질지도 모릅니다. 예전처럼 힘으로 무조건 찍어 누를 수도 없으니 뭔가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저… 용 이사장님,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백발노인의 말에 다른 세 남자의 시선 또한 용 이사장에게 향했다. 그는 지금껏 말없이 조용히 회의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발언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발언의 무게 때문이다.

용 이사장이 소유하고 있는 사학 재단만 10개가 훌쩍 넘어간다. 그리고 각 재단에 포함된 초, 중, 고, 대학교 모두 합치면 100개가 넘는, 그야말로 교육계의 재벌로 불리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의견을 말하면 그냥 의견이 되지만 용 이사장이 말하면 거의 통보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 모임에서 그의 위상은 그만큼 높았다.

그도 그걸 알기 때문에 쉽게 의견을 내놓지 않지만, 지금처럼 멍석을 깔아주는 것까지 마다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예전에도 약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갑자기 장문오가 왜 위협적이게 된 겁니까?”

뻔한 듯한 질문이었지만 모두 신중한 얼굴이었다. 용 이사장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런 질문을 던졌을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전의 장문오와 지금의 장문오가 다른 점은 딱 하나입니다. 바로 최건우의 존재 여부. 정황상 장문오와 최건우가 손을 잡은 건 확실하고, 최건우가 밀어주기 때문에 장문오가 무서운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진짜 문제는 장문오가 아니라 최건우겠군요. 그럼 최건우를 공략해야지 않겠습니까? 최건우가 무너지면 장문오도 더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장문오는 내버려두고 최건우에게 집중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한데 그놈도 절대 호락호락한 인간이 아니라서요. 오죽하면 세계그룹과 와룡그룹이 최건우 때문에 흔들리기까지 했겠습니까?”

“장문오가 무너진다고 해도 최건우만 있으면 언제든지 제2의 장문오가 등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2의 최건우는 절대 쉽게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최건우를 공략해야죠. 뼈가 가루가 되도록 잘근잘근 밟아서 다시는 그와 같은 인물이 우리를 위협하는 일이 없도록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용히 논의를 지켜보고 있을 때와 달리 그의 말은 굉장히 논리정연하면서도 사나웠다. 도전자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에 참석자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동감합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제 동생도 최건우에게 호되게 당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제 동생이 못나서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간접적이라고 해도 정치에 개입하는 걸 보니 더는 좌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 이 장관 일은 저도 참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최건우가 참 영악하게 굴었어요.”

이 장관은 얼마 전에 낙마한 이완종 교육부 장관을 의미한다. 그를 동생이라고 칭한 사람이 바로 교피아의 양대산맥이라고 불리는 이태종 이사장이다.

이태종 가문이 소유한 8개의 사학재단에 산하 학교만 60여 개다. 용 이사장 가문과 비교하면 격이 떨어지긴 하지만 교피아를 구성하는 가장 강력한 두 가문 중 하나임은 분명했다.

“최건우는 똑똑한 놈입니다. 쉽게 생각하다가는 우리가 당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조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힘을 합치면 결국 무너지는 건 최건우가 될 겁니다.”

“좋습니다. 그럼 국정원에 최건우를 타깃으로 삼을 것을 지시하겠습니다. 반대하는 분 계십니까?”

“없습니다. 실장님.”

“그렇군요. 그럼 다음 회의는 국정원의 사전 조사가 끝난 후로 하겠습니다. 중요한 사안인 만큼 한 달 이상의 조사기간을 부여할 생각입니다. 정확한 날짜는 추후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시죠.”

***

“무슨 일로 나를 보자고 한 겁니까?”

건우의 말투에 불쾌감이 가득했다. 사람을 대할 때 웬만해서 이러지 않지만 오늘은 그럴만했다.

그를 찾아온 사람이 다름 아니라 박유하 이사였기 때문이다.

“싫어할 걸 알고 있었지만 꼭 한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박유하 이사는 미성년자 성폭행으로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바로 오늘 보석으로 풀려났다.

증거를 인멸하거나 조작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굳이 구치소에 감금할 필요가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구치소에서 풀려난 박유하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바로 초이스 에듀였다. 보석으로 나왔다고 해도 재판에서 이기긴 희박한 상황이다. 성폭행당했다고 적힌 유서가 있고 사산된 배속 태아는 DNA 검사 결과 명백히 박유하의 자식이었다.

그런데 법정 구속되기 전 마지막 자유 시간에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나 다름없는 건우를 만나러 왔다는 게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래서 대체 할 말이 뭡니까?”

고생이 많았는지 굉장히 초췌한 얼굴이었지만 건우는 하나도 동정심이 들지 않았다.

“역시 최 대표는 나를 싫어하는군요.”

“제가 어떻게 당신을 좋아할 수 있습니까? 하도훈 선생님에게 한 짓을 생각해보세요.”

하도훈에게 성폭행범 누명을 씌운 것만으로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만약 건우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누명을 벗겨주지 않았다면 하도훈은 예전 삶의 건우처럼 폐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도 건우가 박유하를 두고 치를 떠는 이유는 아니다. 100% 확실한 건 아니지만, 회귀 전 건우가 당했던 누명도 박유하의 짓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니라고 하기엔 두 사건은 너무나도 유사했다.

삶이 달라졌다고 해도 그때의 그 끔찍한 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존대는커녕 시원하게 욕이라도 퍼붓고 싶은 걸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참고 있었다.

“그렇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도 제가 싫거든요.”

“재벌가 자식이면서 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혼외 자식이라는 게 그렇게 억울했습니까?”

“역시 알고 있었군요.”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난 그런 사람을 조사도 안 했을 것 같습니까? 그렇다고 뭐 어쩌라고요? 당신을 동정해주길 원합니까? 세상에는 당신보다 훨씬 힘든 환경에서도 씩씩하고 착하게 살아가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그딴 출생이 좀 꼬인 걸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인 척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배부른 돼지처럼 보여 역겹습니다.”

“하하하. 이런. 여기 오면 욕을 먹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렇게 신랄한 지적을 받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왜 기분이 안 나쁠까요? 다들 제 앞에서는 가식 떨기에 바빴는데 이런 솔직한 모습을 보니 내 속이 다 후련합니다.”

박유하는 모든 걸 내려놓은 것처럼 편안하게 말했다.

“끝까지 마음에 안 드네요. 아프라고 한 말인데 후련하다니…. 혹시 저랑 싸우자고 온 겁니까?”

“아닙니다. 그냥 궁금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으면서 오직 재능으로만 세상에 우뚝 선 느낌이 어떤지.”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내가 정말 가지고 싶은 게 최 대표의 그런 반짝반짝 빛나는 재능이었는데, 나는 능력이 받쳐주지 않았어요. 능력은 안 되는데 욕심은 많으니 무리수를 쓸 수밖에요. 빌어먹을! 나도 당신 같은 재능이 있었으면 좋았을걸.”

“미친, 개소리하네.”

“네?”

“개소리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오직 재능으로 이 자리와 왔다고 생각합니까? 대체 어떤 재능이요? 좋은 머리? 아니면 수능 찍기 실력? 나보다 머리 좋은 사람들은 세상에 쌔고 쌨습니다. 내가 다녔던 하버드엔 서너 명 중 꼭 한 명은 나보다 아이큐가 높았습니다. 그런데 재능만으로 지금의 초이스 에듀를 만든 것 같습니까?”

“그럼 아니라는 겁니까?”

“당신이 이렇게 된 건 당신의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 겁니다.”

“노…오력이요?”

“네, 노력이요. 학생 때는 학교 공부를 하느라, 지금은 학생들을 좀 더 잘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느라 하루에 2시간 이상 누워서 자 본 적이 없습니다. 쉬는 시간에는 끊임없이 책을 봅니다. 깨어 있는 거의 모든 시간을 수강 준비에 투자합니다. 최소 이 정도는 해야 노력했다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실 노력이 성공의 비결은 아니었다. 건우가 지금의 초이스 에듀를 만들 수 있었던 건 노력도 재능도 아닌 ‘운’이었다. 그것도 회귀라는 말도 안 되는 엄청난 행운 덕분에 지금의 초이스 에듀를 만들 수 있었다.

미래의 지식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왔는데 실패할 리가 있나. 건우의 승승장구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건우가 박유하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걸 말해준다고 믿어주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작정이라도 한 듯 ‘노력’이 부족했다고 독설을 날린 것이다.

“최 대표님은 정말 그렇게 노력한 겁니까?”

조롱 끼가 노골적일 만큼 담겨 있었는데 박유하는 그런 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절박하게 물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초이스 에듀를 지금처럼 키우지 못했겠죠.”

“그렇군요. 결국 내 노력이 부족했던 거로군요. 저는 그동안 환경 탓만 하고 살았는데, 그게 사실은 내가 못나서 그렇다니…. 그래도 마음은 편합니다. 어쩔 수 없었던 게 아니라 내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하니.”

“그러시던지요.”

박유하가 마치 해탈한 사람처럼 행동하니 건우도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은지 말투가 퉁명해졌다.

“감사의 의미로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려드리죠. 용선재 대표를 조심하십시오.”

“뭐요? 용선재 대표요? 지금 뭘 하자는 거죠?”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했는데 박유하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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