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4화
용선재 대표는 건우가 등장하기 전까지 학원계의 신화적 인물이었다.
다른 학원 강사들의 부러움과 존경을 동시에 받았다. 비록 거품이 있었다고는 하나, 전성기 시절 기가 싱크빅은 코스닥 열풍에 힘입어 시가 총액 1조 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코스닥에 대한 관심이 한풀 꺾이면서 주가가 절반 가까이 떨어졌지만 그렇다고 해도 웬만한 대기업 계열사보다 높은 시가 총액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런 것 때문에 다른 학원 강사들의 존경을 받은 건 아니었다.
용선재 대표는 돈만 잘 버는 학원 운영자가 아니었다. 일부 인기 강사를 제외하고 을에 가까웠던 학원 강사들의 처지를 완전히 뜯어고치는데 앞장섰다.
가장 크게 바꾼 건 급여 체계였다. 용선재 대표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학원이 강의로 벌어들이는 수익의 대부분을 독식하는 구조였다.
학원 운영에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게 그 이유였는데, 아무리 그런 걸 감안해도 강사가 가져가는 돈은 너무 적었다.
한 달에 1,000만 원 정도의 매출을 올리는 강사가 월급으로 가져가는 돈이 100만 원이 조금 넘을 정도로 불균형이 심했다. 지금은 상상도 하기 힘들지만, 그때 당시에는 그런 일이 상당히 비일비재했다.
굉장히 불합리함을 느껴도 항의하는 게 쉽지 않았다. 누군가 총대를 메고 나서면 학원 원장들은 자기들끼리 담합해 매장시켜버린다.
학원 원장들의 담합에 의해 메이저 학원에서 밀려난 해당 강사는 동네 보습 학원이나 지방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예전보다 버는 돈은 더 줄어든다. 그러니 웬만큼 실력이 있어도 용기를 내기가 어려웠다.
용선재 대표는 그런 갑을 구조가 극으로 달했을 때 혜성처럼 나타나, 기존 체계를 완전히 탈바꿈해버렸다.
사실 엄청난 묘수를 부린 건 아니었다. 학원 강사들에게 더 많은 돈을 지급했을 뿐이었다. 1,000만 원의 매출을 올리는 강사라면 500만 원 이상의 급여를 보장하는 식이었다.
지금은 너무 당연한 일이 되었지만, 당시 용선재 대표의 결정은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불러왔다.
실력 있는 인기 강사들의 대이동이 일어났다. 돈뿐만 아니라 다른 대우도 더 좋아졌는데 실력이 있다면 기가 싱크빅으로 옮기는 걸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강사들은 계속 몰렸고, 학생들도 실력 있는 강사를 따라 기가 싱크빅으로 학원을 옮겼다.
용선재 대표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강사들을 계속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최고 실력자들만 스카우트했다면 나중에는 중상급 실력의 강사들도 모집했다. 그리고 각지에 분점을 만들어 새롭게 뽑은 강사들을 그리로 보냈다. 굉장히 공격적이고 위험부담도 있는 마케팅 방식이었다.
실력 있는 강사들은 순식간에 품귀 현상이 일어났다. 기가 싱크빅에 좋은 강사를 빼앗긴 학원들은 그제야 부랴부랴 다른 강사 모집에 나섰지만 원래 조건에 일하려는 양질의 강사는 거의 없었다. 남는 건 실력이 모자란 어중이떠중이 강사들인데 그런 학원은 학생들이 등록할 리가 없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들은 학원들은 뒤늦게 강사처우를 개선하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렇게 변화에 성공해 살아남은 학원도 있지만, 변신에 실패해 도산한 학원도 많았다.
그때 도산했던 학원들은 강사를 노예처럼 부리며 쥐어짰던 곳이 대부분이었고, 그런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학원 강사들에 대한 처우도 많이 개선되었다.
물론 지금도 완벽한 직업이라고 하긴 어렵다. 굉장히 좋아졌다고 해도 정규직이 되기 힘든 직업 특성상 한계는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과거와 비교하면 상전벽해 수준으로 대우가 달라진 건 확실했다.
그 변화를 만들어낸 사람이 바로 용선재 대표였다.
만약 용선재 대표가 없었다면 지금의 건우도 없었을지 모른다. 학원에 착취당하는 강사로 살던가, 아니면 처음부터 학원 강사로 진로를 결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용선재 대표를 조심하라?
그러기에 건우와 용선재 대표 사이는 어떤 안 좋은 조짐도 없었다. 박유하가 만든 가짜 스캔들로 용선재 대표가 내친 하도훈을 건우가 데리고 와 스타강사로 키우긴 했지만, 그 일로 두 사람 사이가 멀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용선재 대표가 먼저 전화해 하도훈을 데려가줘서 고맙다며 인사를 하는 바람에 건우가 미안해할 정도였다.
초이스 에듀의 열풍으로 많은 학원들이 부침을 겪은 중에서도 용선재 대표는 대인배의 풍모를 보이며 기가 싱크빅을 여전히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최 대표님은 용선재라는 사람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아십니까?”
‘용선재 대표’가 아니라 ‘용선재’라고 지칭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박유하 이사가 용선재 대표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 알 수 있었다.
“기가 싱크빅과 교류는 꽤 하고 있지만 용선재 대표를 잘 아는 건 아닙니다. 제 경험과 사회적 평판으로 미뤄 짐작할 뿐이죠.”
“그래서 미뤄 짐작해보니 어떻던가요?”
“호인이죠.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고,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학원 강사의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한 걸로 보아 정의로운 일면도 있겠죠.”
“후후. 역시 최 대표님의 판단도 세간의 평가와 다르지 않군요.”
건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유하 이사가 실소를 지었다.
“그 평가가 틀렸다는 뜻입니까?”
“완전히요. 제가 볼 때 대중들은 용선재가 쓰고 있는 가면에 철저히 속고 있습니다. 그는 굉장히 이기적이고 비열한 사람입니다.”
“그 이야기를 왜 저한테 하는지 모르겠지만, 증거는 있습니까? 용선재 대표가 그런 사람이라는.”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용선재가 학원 강사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합니다. 그게 정말 사실일까요?”
“다른 건 몰라도 용선재 대표가 기가 싱크빅을 설립한 이후 학원 강사들의 처우가 개선된 건 사실입니다.”
“그건 용선재의 전략적인 선택입니다. 용선재가 기가 싱크빅을 세웠을 당시의 우리나라는 사교육 시장이 굉장히 활성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입 학원 시장은 메이저로 불리는 몇 개의 학원이 카르텔을 구성해 단단한 방벽을 세워놓았죠. 다른 학원들은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자기들끼리 그 큰 시장을 나눠 먹었습니다. 용선재가 그 시장에 끼어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습니까?”
“그리니까 어떤 선의도 없이 오직 마케팅적 선택이다?”
“그럼요. 단단한 방벽을 깨트리려면 일단 흔들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학원 강사들을 위한다는 그럴듯한 핑계를 만든 겁니다. 적절한 명분이 생겼으니 비싼 돈을 들여 인기 강사를 빼 와도 누가 뭐라고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전부 학원 강사의 처우 개선을 위한 일인데. 당시엔 언론까지 용선재의 편이었죠.”
“그래서요?”
모두가 용선재 대표를 찬양하지는 않는다. 싫어하고 미워하는 부류도 있고, 그런 사람들이 주장하는 내용 중에 방금 들은 ‘설(說)’도 있었다. 그냥 얻어걸렸다는 거다.
하지만 그게 어쩌라는 건지, 건우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기부천사로 불리는 건우지만,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보다는 대중적인 관심을 받으려는 사심이 더 컸다. 그러다가 기부의 순기능을 깨닫고, 한편으론 보람도 느끼게 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다.
건우는 고작 그런 이유로 용선재 대표를 조심하라는 건가 싶어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반문하는 말투도 저절로 퉁명해졌다.
“그냥 일례를 말씀드린 겁니다.”
“그게 전부입니까? 제가 용선재 대표를 조심해야 하는 이유가?”
“동류는 동류를 알아본다는 하죠?”
“갑자기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설마 박 이사 당신과 용선재 대표가 동류라는 건 아니겠죠?”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제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 눈에는 대범한 호인처럼 보일지 몰라도 저는 그의 계산된 하나하나 행동으로 보이더군요. 믿기지 않는다면 용선재의 배경을 알아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자수성가한 사업가로 아는데 절대 그게 아닙니다. 금수저도 보통 금수저가 아닙니다. 들으면 깜짝 놀랄만한 굉장한 집안이 뒤에 있습니다.”
단순히 이간질한다고 치부하기에는 박유하 이사의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했다. 건우는 그게 마음에 걸려서 이 대화를 쉽게 끊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세계그룹 이상의 재벌가라도 버티고 있는 겁니까?”
“아까 말씀드렸죠? 용선재 대표가 등장했을 때 언론이 굉장히 호의적이었다고. 그때 당시 메이저 대입 전문 학원들이 힘이 없어서 그걸 지켜봤겠습니까? 그들도 신문사와 상당한 친분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더 강한 힘에 눌려 속수무책 당한 겁니다. 용선재가 대단했다고요? 개뿔, 그냥 그 집안이 대단했던 겁니다. 진짜 대단한 사람은 최 대표 당신 같은 사람이지 용선재 따위가 아닙니다.”
“그것참 이상하군요. 재벌가에는 용 씨 성을 가진 집안이 없는데.”
“힘 있는 집안이 꼭 재계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직접 알아보십시오. 제가 할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헛소리라고 잊어버리셔도 좋습니다. 제 말을 믿든 안 믿든 그건 최 대표님이 알아서 할 일이죠.”
“왜 이런 이야기를 제게 하는 겁니까? 저에게 좋은 감정이 없을 텐데요.”
“당연히 싫습니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게 짜증날 정도로. 하지만 용선재는 증오합니다. 딱히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동족 혐오라고 해야 하나요? 큭. 난 이 지경이 됐는데 용선재가 잘 되는 게 배가 아픕니다. 동족이라고 했지만 난 아류고 그놈이야말로 진짜거든요. 그래서 더더욱 그놈이 망했으면 좋겠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네요.”
건우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해해달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솔직히 지금도 후회 중입니다. 말하지 말걸. 당신이 망했으면 좋겠거든요. 크크. 그런데 당신 말고는 용선재를 잡을 사람이 우리나라에는 없습니다. 미치광이 같겠지만, 그게 내가 이러는 이유입니다. 저는 그만 일이나 보겠습니다. 시간을 내줘서 감사합니다.”
박유하 이사는 그렇게 알쏭달쏭한 말을 마지막으로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우도 떠나는 그를 굳이 잡으려 하지 않았다. 박유하 이사의 말은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사실이든 말든 그건 자신과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설사 용선재 대표가 정말 야비하고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해도 그건 그의 성향일 뿐이다.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지 않는 이상, 단지 그런 성격을 가졌다는 이유로 대립하고 제재를 가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이기적인 건 불법이 아닐 뿐더러, 사람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보지 않은 이상 진짜 성품을 아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그건 신의 영역이다.
건우는 박유하 이사와의 대화를 털어버렸다. 그냥 자신과 용선재 대표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 만들어낸 헛소리라고 치부했다.
교육 타운을 만드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할 상황에 엉뚱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싶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건우는 불과 한 달도 안 돼 자신이 직접 정보팀을 불러 용선재 대표 조사를 지시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
교육 타운 프로젝트를 발표한 이후 초이스 에듀 수뇌부들은 굉장히 바빠졌다.
여주시와 MOU를 체결하고 미리 준비해둔 부지에 교육 타운을 열심히 짓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세상일은 그리 간단한 게 아니었다.
무려 20조 원이 투입 예정인 사업이다. 거기서 떨어져 나오는 콩고물을 먹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들은 하루가 멀다고 초이스 에듀를 찾아와 직원들을 괴롭혔다.
실무자만 괴롭히면 괜찮은데 직원이다 싶은 사람은 아무나 붙잡고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공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학원 강사들까지 애를 먹어야 했다.
심지어 학원 강사를 붙잡고 안 놓아줘서 강의에 지각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건우는 도저히 참다못해 법무팀에 지시해 정도가 심한 사람들을 영업방해로 고소하는 초강경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런 일이 있고부터 학원 내로 무작정 찾아오는 경우는 급격히 줄어들었지만, 학원 밖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대대적인 공사인 만큼 설계사무소, 건설회사, 조경회사, 인테리어회사 관계자들이 제일 집요했다. 이 공사만 따내면 최소 10년간은 안정적인 자금원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다들 혈안이 되어서 덤벼들었다.
급기야 친척이나 동창생까지 동원해 초이스 에듀 직원들을 괴롭히자, 수뇌부는 이 문제부터 시급하게 해결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