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2화
바로 그였다.
거짓말로 건우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여학생의 아버지. 그리고 건우에게 염산 테러를 해 얼굴을 엉망으로 만든 장본인.
‘어떻게 내가 저 인간의 얼굴을 잊을 수 있었을까?’
건우는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느라 애썼다. 그에게 예전 삶에서의 연륜이 없었다면, 많은 귀빈과 언론인이 모인 중요한 날이 아니었다면, 곁에 동생들이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달려들어 목을 졸라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무서운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참았다. 그의 곁을 든든히 지키고 있는 동우, 정우, 은우 세 명의 동생을 생각해서라도 참아야 했다.
오늘은 좋은 날이었다. 건우의 꿈을 이루기 위한 시작의 날이었다. 이런 날 분노로 감정을 주체하지 모든 걸 망칠 수 없었다.
화를 냈다간 이곳에 몰려든 수많은 기자들에게 재미난 기삿거리만 던져줄 뿐이었다. 절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아릿한 고통이 뇌리에 파고들자 힘겹게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얼마 전부터 제가 데리고 있게 된 친구입니다. 그러니 최 대표님도 오늘 처음 봤을 겁니다.”
“아, 그…렇군요. 아…는 사람이랑 닮…아서 제가 잠시 착각을 했습니다.”
“평범하게 생겨서 그런가 봅니다. 아차! 제가 대표님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만 제 자리로 돌아가 교육 타운 기공식을 즐기도록 하겠습니다.”
“조,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아무리 인내심이 좋아도 김승악을 마주 보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건우는 계속해서 들끓어 오르는 분노를 삭이며 두 사람을 떠나보냈다.
아직 두 사람의 정확한 관계도 모른다. 분노는 모든 게 드러났을 때, 그때 드러내도 늦지 않는다.
건우는 동생들을 뒤로한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왜 용선재 대표와 저 망할 인간이 같이 있는 걸까? 생각하기도 싫지만 만약 나를 그렇게 만든 인간이 정말 박유하 이사가 아니라 용선재 대표라면? 그럼 김승악 저 인간의 딸은 누가 임신시킨 거지? 설마 용선재 대표가? 말도 안 돼. 아니지, 아니야. 말이 안 될 건 또 뭐 있어?’
나성천 대표는 자살했고, 박유하 이사는 모든 걸 잃었다.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사람에 대한 복수는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다.
얼마 전 박유하 이사가 찾아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대중들은 용선재가 쓰고 있는 가면에 철저히 속고 있습니다. 그는 굉장히 이기적이고 비열한 사람입니다’
박유하 이사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본성을 숨기고 착한 척하는 그런 이중적인 인간이겠거니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어쩌면 예전 삶에서 자신을 그렇게 만든 진짜 당사자는 용선재 대표일 지도 모른다.
건우는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반전에 머릿속이 터질 듯이 아팠다.
‘만약 용선재 대표가 수행원의 딸을 임신시키고 그 사실을 무마하기 위해 모든 죄를 나에게 뒤집어씌운 거라면? 아니야, 아닐 거야.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 해. 서두르지 마라, 최건우. 확인이 우선이다. 만약 그 일의 원흉이 용선재 대표라면 지금부터라도 복수하면 그만이야. 지금 내겐 충분히 그럴 힘이 있어. 그러니 침착해라, 최건우.’
“오빠. 뭐해? 이제 곧 기공식이 시작될 것 같은데, 오빠가 제일 먼저 자리에 앉아야지.”
“어? 그래그래. 은우 먼저 가 있을래? 오빠는 차 팀장님하고 잠깐 나눌 이야기가 있거든.”
“알았어.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금방 와야 해.”
“그래, 잠깐만 이야기하고 갈게. 심심해도 조금만 참아.”
“응.”
건우는 투정부리듯 어리광을 피우는 은우를 들여보내고, 잠깐 떨어져 그를 수행하고 있던 차지훈을 불렀다.
“네. 부르셨습니까, 대표님.”
“지금부터 한 사람을 조사해주십시오. 초이스 시큐리티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요.”
“그게 누굽니까?”
이런 지시는 지금껏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었지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건우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기가 싱크빅의 용선재 대표입니다. 시간이 걸려도 좋으니,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조사해주십시오. 뭐든 좋습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요.”
“알겠습니다. 곧 전담팀을 편성하겠습니다.”
차지훈 팀장은 어떤 의문도 나타내지 않고 건우의 지시에 따랐다.
초이스 시큐리티는 설립 당시 어설픈 모습은 사라지고 사설 정보기관의 체계를 제대로 갖추기 시작했다.
가장 큰 힘은 역시 인력이었다. 경험이 많은 노련한 사람들 위주로 뽑아서 시행착오를 많이 줄일 수 있었다.
차지훈이 정말 심혈을 기울여 고르고 고른 사람들이라 능력은 충분했고, 국가기관에서 일하며 내부의 불합리함에 질려 초이스 시큐리티로 자리를 옮긴 경우가 많아 다들 열정이 넘쳤다.
사실 능력은 부족하지 않지만 일에 대한 회의감으로 무력감에 빠진 사람들도 꽤 있었다. 그런데 이곳으로 옮겨 더 이상은 정치인들에게 이용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꽤 큰 의욕을 불어넣어줬다.
거기에 건우가 꿈꾸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일에 힘을 보탤 수 있다는 사실이 자부심이 되면서, 초이스 시큐리티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똘똘 뭉칠 수 있게 되었다.
지원금도 막강하고 더불어 마이크로소프트와 해외 파트에 대한 정보까지 공유하게 되면서, 이제는 국정원의 정보력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보망을 구성하게 됐다.
“용 대표님. 제발 제가 생각하는 그 사건에 개입하지 않으셨기를 바랍니다. 그때 그 일이 만약 당신이 꾸민 짓이라면, 모든 걸 잃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분노에 찬 건우가 어금니를 바득바득 갈며 노려보고 있는 지금, 용선재 대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천진한 웃음을 지으며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정신과 의사인 조유미가 건우의 사무실을 찾았다.
과거 언론에서 떠들어댔던 정신과 상담 스캔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일단락됐지만, 건우가 정신과 상담을 받은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았다.
그게 나쁜 건 절대 아니다. 그러나 예전과 비교해 인식이 많이 나아졌다고 해도 한국 사회에서는 정신과 상담을 여전히 색안경을 끼고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본다.
항상 따라붙는 눈이 생기자 상담을 받는 건우도 상담을 하는 조유미도 이 상황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이제는 조유미가 건우를 찾아가 상담을 나눈다. 정신과 상담이라기보다는 친구 사이의 대화에 가깝지만, 한국에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전무한 건우에게는 그런 시간조차 큰 도움이 된다.
초등학교 입학 후 월반을 거듭하며 고등학교 과정까지 마쳤기 때문에 동기들은 다들 형·누나였지 친구라고 부르긴 애매한 사이였다.
아무리 원해도 나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위계질서가 강한 한국 문화에서 건우가 형이나 누나를 친구로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건우는 머리 좋은 어린 꼬맹이일 뿐 친구는 아니었다.
그 덕분에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소꿉친구를 제외하면, 미국에서 친해진 동기들이 건우가 만든 최초의 친구나 마찬가지였다.
지금이라도 새로운 친구를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순수한 의도로 다가오는 경우도 드물거니와 마흔까지 살았던 아재 감성의 건우가 이십 대 초반의 또래들과 허물없이 지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꿉친구였던 스칼라가 있었지만 스캔들 이후 어색한 사이로 변해 버린 이후 한국에서 또래 친구는 조유미가 유일했다.
다행히 조유미가 초이스 에듀를 방문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초이스 에듀가 운영하는 상담소의 상담 내용을 진학 위주에서 청소년들이 전반적으로 겪고 있는 심리적 문제로까지 확대했고, 조유미가 그곳의 총괄 책임자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정신의학 박사학위에 각종 심리 상담사 자격증까지 갖춘 그녀이기에 자격은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나이가 너무 어린 게 흠이라면 흠인데, 애초에 초이스 에듀를 총괄하는 건우부터가 나이가 어리니 그걸로 시비를 걸기는 어려웠다.
“웬일이야, 지금까지 한 번도 안 한 긴급 호출을 다 하고.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응. 아주아주 안 좋은 일이 있었어.”
나이는 조유미가 조금 더 많지만 두 사람은 이제 편하게 말을 놓는 사이가 됐다.
“정말 안 좋은 일이 있긴 한가 보다. 이 좋은 날 표정이 그 모양인 걸 보니까.”
“내 표정에서 그런 게 보여?”
“널 보아온 게 햇수로 벌써 사 년째다. 상담자로서 관찰하고 분석도 했는데 설마 그걸 모를까?”
“다행히 돌팔이는 아닌가 보네.”
“호호호. 불행히도.”
“돌팔이였으면 고소하려고 했는데 아쉽네.”
“미안하지만 우리나라 최고의 로펌을 앞세워 고소한다고 해도 나한테 이기진 못할 거야.”
“얼씨구 그건 왜?”
“내가 최고니까.”
조유미는 거만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편해지고 나서 나온 버릇이다.
“하여간, 그놈의 자신감 하고는.”
“네가 의대에 합격만 하고 공부는 안 해봐서 잘 모르는 가 본데….”
“의학은 이론과 임상이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임상 경력은 내세우기 어렵지만 이론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이 말 하려고 한 거지?”
“어! 어떻게 알았지? 내가 예전에도 말했나?”
“이번이 아마 열 번째쯤?”
“헐! 내가 그렇게나 많이 했어?”
“그러니까 그만하고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자.”
건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응? 그게 무슨 이야기야?”
“딴청 피우지 마. 내 기분 풀어주려고 일부러 오버하는 거잖아. 아주 조금은 도움이 됐으니까 상담이나 받아주시죠, 의사 선생님.”
“하여간 머리가 너무 좋아서 까다로운 환자라니까. 그럼 정식으로 다시 물어볼게. 오늘 기공식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응.”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서울에 도착하기도 전에 나를 부른 거야?”
부러질 정도로 어금니를 꽉 깨물고 피가 날 정도로 두 주먹을 꽉 쥐었는데도 쉽게 마음이 진정되지 않자, 건우는 서울로 가는 차 안에서 조유미를 호출했다.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김승악을 만나고 나니 잠시 잊고 있었던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때의 일을 극복한 게 아니라 그냥 억지로 묻어두기만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건우는 예전 삶에서 고독사로 죽었다. 무기력함에 빠져 식욕까지 잃어 결국은 굶어 죽고 말았던 그 끔찍한 기억은, 다시 과거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꿈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 같아. 너도 알지, 내가 꿨다는 긴 꿈.”
건우는 ‘긴’자를 유난히 길게 발음했다.
“네가 예전에 이야기한 그 예지몽 같은 꿈?”
“그래. 지금이 현실이라면 내가 겪었던 그 기억들은 꿈일 거라고 네가 말해줬잖아. 하지만 그게 가끔 들어맞을 때가 있어서 너도 많이 놀랐잖아.”
당시 심각한 혼란을 겪었던 건우는 절박할 정도로 상담이 필요했었다. 하지만 ‘사실 나는 미래에서 과거로 회귀한 사람이야’라고 말해 봤자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과대망상증 환자로 정신병원에 끌려가지 않으면 다행이다.
고민 끝에 건우는 자신이 겪은 현상을 조유미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적당히 꾸며서 이야기했다.
물론 듣기에 따라서는 그것조차 허무맹랑하게 들리겠지만, 건우의 말이 가끔 현실에서 일어날 때가 있어 조유미도 완전히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때의 꿈을 ‘예지몽’이라고 표현하기로 약속했다.
“이번에도 꿈과 현실이 뭔가 겹친 거야?”
“오늘, 그때 꿈에서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사람을 오늘 만났어. 시간 차이가 있어서 그런지 굉장히 젊은 모습으로 나타났더라. 처음엔 누군지 못 알아봤어.”
“혹시 현실과 혼동한 거야?”
“글쎄. 애매하네. 미칠 듯이 분노가 일었던 걸 보면 혼동한 건데, 그래도 억지로 참았으니 혼동하지 않은 건가?”
“그건 혼동한 거야. 애초에 혼동하지 않았으면 분노도 안 일었겠지.”
조유미는 이런 부분에서 단호했다. 건우가 현실과 꿈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다.
차라리 허무맹랑한 꿈이라면 그걸 완전히 부정하면 되는데, 건우가 꿨다는 꿈은 그게 안 되니 문제였다.
“그건 그러네. 혼동했으니 너에게 도움을 요청했겠지?”
“흠…. 네가 꿈에서 얼마나 끔찍한 경험을 했는지는 나도 들어서 어느 정도 알아.”
“넌 모를걸? 그 꿈에서 내가 얼마나 절망했는지 그리고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네 기분이 어떤데?”
“그 두 놈을 모두 죽이고 싶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