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4화
기공식이 끝나고 다음 날 동지 리조트에서 두 번째 연회가 열렸다.
이곳에는 건우의 진짜 지인들만 초대되었고, 기자들이나 다른 방문객들의 출입은 철저히 통제되었다.
유명 인사들이 많은 만큼 번거로움과 혼잡함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사전조치였다.
“축하한다, 초이. 정말 멋진 꿈을 꾸고 있더구나.”
스트리 교수가 황금빛 샴페인이 담긴 잔을 건우에게 건네며 축하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교수님의 도움이 정말 컸습니다.”
“허허. 무슨 그런 소리를. 혼자서 해낸 거지 내가 무슨 도움을 줬다고.”
“아닙니다. 교수님이 미국 교과서에 제가 만든 커리큘럼이 실릴 수 있도록 힘을 써주신 덕분에 일을 빨리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건 초이 네가 만든 커리큘럼이 워낙 획기적이라서 내가 아니라도 분명 쉽게 통과됐을 거야. 게다가 마이크로소프트가 뒤를 봐줬는데 안 될 리가 있겠어?”
“아무리 그래도 노벨상 수상자의 추천은 임팩트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허허허. 내가 이런 공치사를 들으려고 여기 온 게 아닌데.”
스트리 교수가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획기적인 커리큘럼에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가 로비를 하는데 안 될 이유가 없었다. 시기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공치사가 아니라 사실을 말씀드린 겁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인데 사실 한국에서는 아직 제 커리큘럼이 정식으로 교과서에 실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뭐? 그게 사실이야?”
“네, 안타깝게도 사실입니다. 보충 서적의 경우는 이미 제 커리큘럼을 모두 싣고 있는데 유독 교과서만은 예전 방식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교과서를 제외한 거의 모든 참고서에서 건우의 커리큘럼을 채택했다.
예전 방식보다 훨씬 쉽고, 돈을 지불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이윤을 창출해야 할 출판사들로써는 경쟁의 뒤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건우의 커리큘럼을 선택해야만 했다.
동영상 강의도 마찬가지다. 예전 방식으로 가르쳤다가 학생들에게 외면당하자 강사들도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커리큘럼으로 가르쳐야 했다.
한국에서는 오직 두 곳만 시대에 동떨어져 옛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바로 교과서와 EBS.
건우와 정부 사이가 틀어지면서 이 두 곳은 건우의 커리큘럼에 대해 절대 불가를 외치고 있었다.
학생들을 담보로 자존심을 세우고 있는 거라는 비난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허. 여기서 또 다른 싯다르타를 보게 되는 건가?”
“네, 싯다르타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싯다르타가 인도 사람이잖아. 그런데 인도에서는 브라만교에 밀려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고 정작 불교가 흥한 곳은 동남아나 동북아시아 국가니까.”
“하하. 굉장히 그럴듯한 이야기이긴 하네요.”
“그래? 그렇다면 초이 네가 싯다르타와 닮았다 이 말이렷다?”
“헉! 교수님, 제가 감히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랬다간 신성모독으로 사람들에게 매장당합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스트리 교수에게 RSFE-325는 평생 연구해야 할지도 모르는 숙명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건우와의 대화에서 힌트를 얻은 후 연구가 급진전을 보였고, 조급함이 사라지면서 예전과 같은 위트 있는 모습을 되찾았다.
“그래도 전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싯다르타 못지않을지도 몰라. 전 세계 수학, 과학 교과서가 전부 초이 네가 만든 커리큘럼으로 채워질 테니까.”
“그래 봐야 싯다르타의 발끝에도 못 미치지만, 어쨌거나 기분 좋은 상상인 것 같네요. 제가 만든 커리큘럼이 전 세계 교과서에 실리는 날이 오긴 오겠죠?”
“물론이지. 미국을 비롯한 영미 문화권에서 인정을 받았어. 그 외 유럽 국가들도 곧 네 커리큘럼을 도입한다고 했고. 지금 분위기면 시기의 차이일 뿐 머지않아 전 세계 교과서에 실리게 될 거야. 하나 걱정이 되는 것은 전 세계가 다 인정하는데도 한국이 네 커리큘럼을 거절하면 어떡하느냐는 건데….”
“설마 그렇게까지야 하겠습니까, 라고 말씀드리고 싶은데 저도 장담할 수는 없네요.”
건우에 대한 교육부의 반감이 워낙 깊으니, 미래 일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장문오 시장이 대선 경쟁에서 최종적으로 살아남아 정권을 잡는다면 교과서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그렇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장문오 시장을 도와준 일까지 더해져 온갖 괴롭힘을 당할지도 모른다.
“지금보다 더 유명해지고 더 강해지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겠지. 교육 타운이 완성만 돼도 초이 네겐 큰 힘이 될 거야.”
“그렇긴 한데 아직 완공일까지 10년이나 남았다는 게 좀 아쉽네요.”
“그럼 그 문제는 내가 해결해 줄까?”
“교수님이요? 교수님이 어떻게요?”
건우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스트리 교수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렸기 때문이다.
분명히 농담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말인데, 스트리 교수의 두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초이 네게 정말 큰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해.”
“제가 교수님에게 무슨 도움을 드렸다고…. 아, 혹시 RSFE-325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설마 제가 뭘 알고 도움을 드렸겠습니까? 그냥 얻어걸린 겁니다. 그것과 관련된 연구는 교수님이 모두 하셨잖아요.”
알고 도움을 준 건 맞다. 예전 삶에서 알고 있는 지식으로.
그리고 그 지식은, 원래 역사였다면 스트리 교수가 10년 후에 발표할 논문에서 알게 된 내용이다.
건우가 한 일이라고는 미래의 스트리 교수가 알아낸 정보를 현재의 스트리 교수에게 전달한 게 전부다.
건우는 자신을 우체부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정보가 담긴 봉투를 우체부가 배달했다고 해서, 그 우체부에게 큰 공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네가 말한 게 결정적인 단서였어. 그게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RSFE-325에 대한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허송세월을 보냈을 거야. 그런데 네 덕분에 그 시간을 줄였어.”
“그리고 저는 교수님의 도움을 받아 미국 교과서에 제 커리큘럼을 실었죠. 그 정도면 보상은 넘치도록 충분히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 내 연구가 단지 RSFE-325에 대한 정체를 밝히는 게 전부였다면. 그런데 이 망할 녀석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게 문제야.”
“설마 소문이 사실이었던 겁니까?”
건우도 RSFE-325와 관련한 소문은 듣고 있었다. 감기를 치료할 수 있다든지, 에이즈를 치료할 수 있다든지 하는 그런 이야기들.
하지만 그 소문은 모두 헛소리로 치부했다. 건우가 겪었던 예전 삶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두 세상 사이에 건우도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예전 삶에서 스트리 교수는 미생물RSFE-325에 대한 연구에 집착하면서 가정이 망가지고 건강까지 해쳤다. 그래서 더 이상의 연구는 하지 못하고 RSFE-325에 대한 정체를 밝힌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건우의 도움으로 연구가 급진전되면서 가정과 건강 모두 안녕하다. 그때보다 훨씬 젊고 체력도 강하며 열정도 넘쳤다.
거기에 먹음직한 연구자료까지 있는데 그걸 외면하는 건 말이 안 됐다.
RSFE-325를 이용한 신물질 개발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건 교과서 커리큘럼을 바꾸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어떻게 보면 건우의 선택이 전 세계인의 운명을 바꿔버린 셈이 됐다.
“초이 너도 들었구나, 그 소문들. 나도 계속해서 보안을 유지하고 싶었는데 성과가 너무 좋은 바람에 실패했어. 다들 들떠버렸거든.”
“아, 그럼 정말 RNA 바이러스 관련 질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된 겁니까”
“전부는 아니야. RSFE-325가 모든 RNA 바이러스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어.”
“그러면요?”
“감기나 독감 그리고 에이즈, 이쪽 바이러스들만 숙주로 삼더라고.”
“맙, 소, 사! 정말이세요, 교수님? 이거 무슨 깜짝 카메라 같은 그런 거 아니죠? 네, 교수님?”
건우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감기와 에이즈는 인류에게 가장 치명적인 바이러스 중 하나다. 특히나 감기는 인류가 생긴 이후 끊임없이 인간의 목숨을 위협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치료제를 개발하지 못하고 있다.
시중에 나오는 감기약은 정확하게 말해 감기 증상완화제이지 감기 치료제는 아니다.
그런데 감기 치료제가 개발된다?
감기로 인한 치명적인 합병증을 막을 수 있게 되고, 인류의 수명은 지금보다 최소 4~5년 이상 늘어나게 된다.
이것도 최소로 잡았을 때 수치다. 지금껏 아무도 감기 치료제를 개발한 적이 없기 때문에, 스트리 교수의 연구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아무도 정확하게 예측하기 힘들다.
어쩌면 10년 이상 늘어나게 될지도 모른다.
건우는 자신의 선택이 가져올 결과를 생각하며 할 말을 잃었다. 인류의 수명에는 분명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과연 이렇게까지 미래를 바꿔도 괜찮은지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허허, 녀석도 참. 설마 내가 이런 이를 가지고 농담을 하겠어?”
스트리 교수의 표정에는 어떤 장난기도 찾을 수 없었다.
100% 완벽한 진심.
“그럼… 정말 교수님이 감기를 정복하신 겁니까?”
“정복이라는 말을 하긴 일러. 예방 주사를 만든 게 아니라 치료제를 개발한 것뿐이니까.”
“얼마나 빨리 치료가 되느냐가 관건 아니겠습니까? 기간이 길어지면 합병증을 막을 수 없으니까요.”
“아직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을 한 건 아니라서 100% 장담하지는 못해.”
“동물시험은 어떻게 나온 건데요?”
“건강한 사람은 당일, 몸이 안 좋은 사람이라면 하루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어.”
“아! 맙소사.”
건우는 단말마 같은 감탄사를 내뱉고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역시 머리가 좋아서 그런지 신물질의 가치를 한 번에 알아본 모양이구나.”
스트리 교수의 칭찬에 건우가 쓴웃음을 삼켰다. 이건 머리와는 상관이 없었다. 머리가 안 좋아도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신물질 개발은 어마어마한 성과였다.
“축하…드립니다, 교수님.”
건우는 힘겹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제 와서 왜 RSFE-325 연구에 그치지 않고 신물질을 개발해 인류의 수명을 늘어나게 만드는 거냐고 멱살을 잡고 따져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저 이 결과가 인류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사실 인류의 수명이 늘어나는 걸 무조건 긍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다. 장기적으로 차츰차츰 늘어난다면 모를까 어느 날 갑자기 10년이 훌쩍 늘어난다면 사회 시스템에 큰 부담을 주게 된다.
수명이 10년 늘어나면 인구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건 필연적이다. 신생아는 계속 태어나는데 사망자는 계속 줄어드니 그럴 수밖에.
인구가 갑자기 늘어나면 일자리문제, 주택문제, 식량문제, 의료비 부담 증가, 연금 부족, 교통체증 증가 등 수많은 사회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런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하면 좋지만 그건 그저 장밋빛 희망일 뿐, 미래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지금부터 당장 준비한다고 해도 과도기적 혼란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건우가 걱정하는 부분은 바로 그것이었다.
“하하하. 말까지 더듬는 걸 보니 정말 많이 놀란 모양이구나.”
“네, RSFE-325가 RNA 바이러스 치료제의 중요한 성분이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으니까요. 임상시험까지 무사히 마치면 두 번째 노벨상을 받으시겠네요.”
어쩌면 노벨 생리의학상과 노벨 평화상을 동시에 수상할지도 모른다. 감기 치료제와 에이즈 치료제는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노벨상은 못 받아도 괜찮으니 임상시험이 무사히 성공했으면 좋겠어.”
“꼭 성공하실 겁니다.”
“그런데 초이.”
“네, 교수님.”
“이제 본론을 꺼낼 때가 된 것 같아.”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요? 그럼 혹시 방금 말씀하신 본론이라는 것 때문에 바쁜 와중에 기공식에 참석하신 건가요?”
“겸사겸사야. 오랜만에 네 얼굴도 보고 바람도 쉴 겸. 이번 기공식은 네 꿈을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잖아.”
“그렇긴 하지만….”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으면 절대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야. 받은 것 이상으로 갚아야 직성이 풀려. 그래서 웬만하면 도움을 안 받아. 받은 것 이상으로 내놔야 하니까 손해 볼 때가 많거든.”
“저한테는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제자잖아요.”
“중요한 건 내 마음이야. 정말 바라마지 않는 간절한 도움을 네게 받았어. 그러니 그 도움으로 얻어낸 결과도 당연히 나눠야지 않겠어?”
도움으로 얻어낸 결과? 그건 곧 신물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을 뜻한다.
대체 얼마가 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막대한 이득.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