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5화
“아니, 교수님. 제가 그때 말씀드린 건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제 주관적인 시선이었을 뿐입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모든 연구는 교수님이 하셨죠. 거기에 비하면 제가 드린 조언은 넓은 백사장에 모래 한 줌 더 얹은 것밖에 안 됩니다.”
건우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이런 일까지 바라고 한 조언이 아니었다. 연구에 미쳐 불행한 삶을 살았던 은사님에 대한 연민이었다.
미국 생활에서 많은 도움을 줬던 은사님이 10년 후에는 굉장히 불행하게 된다는 걸 아는데, 제자로서 그걸 외면할 수 없었다.
“이봐 초이. 등대 알지?”
“네,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등대가 바닷가나 섬에서 불을 켜 항로를 알려주는 시설이라면요.”
“그래 바로 그거야. 지구에서 바다와 육지의 비율은 7:3 정도 돼. 바다는 정말 상상할 수조차 없을 만큼 넓어. 거기에 비교하면 등대는 정말 미미한 존재야. 네 조언이 커다란 백사장에 모래 한 줌을 더한 것밖에 안 된다고 했지? 등대는 거대한 바다와 비교하면 모래 한 줌은커녕 모래 한 톨도 안 돼. 하지만 그 작디작은 등대가 내보내는 빛 덕분에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길을 찾을 수 있지.”
“등대야 그렇긴 합니다만….”
“초이 네가 해줬던 조언은 등대의 빛처럼 내려왔어. 그리고 내가 갈 길을 알려줬지. 사실 등대라고 표현하기도 부족해. 더 넓은 사막에 유일하게 있는 오아시스라고 해야 하나? 당시 나는 미칠 듯이 갈증을 느끼고 있었거든. 오죽했으면 네게 그런 조언을 구했을까?”
길을 묻는 사람에게 길을 알려줬다?
보통은 별일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던 길을 알려줬다면, 그건 별일 아닌 게 아니게 된다.
“음….”
“대답을 바란 건 아니야. 네 조언이 그만큼 큰 의미가 있었다는 걸 강조한 거야. 더군다나 당시 우리가 나눈 대화는 지금도 유튜브에서 많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고 하더라. 그렇게 버젓이 증거로 남아 있는데 모른 척할 수는 없잖아.”
“모른 척하셔도 괜찮은데…, 여기서 더 사양했다가는 교수님에게 왠지 혼이 날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맞아! 나를 도움을 받고도 모른 척하는 파렴치한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사양하지 않는 게 좋아. 다행히 우리 초이가 눈치는 빠르네. 허허허.”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눈치가 저절로 늘게 되더라고요.”
사양은 할 만큼 충분히 했다. 여기서 더 우기면 실례가 될 수도 있다.
한편으론, 아무리 생각해봐도 스트리 교수가 줄 수 있는 보상은 ‘돈’밖에 없으니 너무 과하다 싶으면 기부하면 그만이라고 쉽게 생각했다. 어차피 돈은 건우도 많다.
그렇다면 과연 감기 치료제가 상용화되면 예상되는 수익이 얼마나 될까?
감기는 전 인류가 달고 사는 질병이다. 건강한 사람도 보통 1년에 한 번 정도는 감기에 걸린다. 세계 인구는 약 70억 명이다.
계산의 편의성을 위해 70억 인구가 1년에 한 번씩만 감기에 걸린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의료보험 적용이나 나라마다 다른 물가 등 여러 가지 변수는 배제하고, 감기 치료제 가격은 만 원이라고 두 번째 가정을 한다.
이렇게 수치를 단순화해서 보면 70억 인구는 감기 치료를 위해 1년에 각기 만 원을 쓴다. 70억에 만 원을 곱하면 70조 원이다. 즉, 연 매출이 70조 원이란 얘기다.
스트리 교수의 감기 치료제는 예방 접종처럼 한 번 맞으면 다음에는 안 걸리는 그런 약이 아니다. 감기는 매년 걸리고, 그럴 때마다 감기 치료제는 매번 필요하다. 그러니 감기 치료제가 임상시험을 통과하는 순간 매년 70조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고정 매출을 올릴 수 있게 된다.
어디까지나 알약 가격이 만 원이라는 가정하에 산정한 매출이다. 만약 한 알당 가격이 5만 원이라면 일 년 매출만 350조 원이고 10만 원이면 700조 원이다.
너무 비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일주일간 앓는 고통에 병원 치료비와 약값을 생각하면 대부분은 감기 치료를 위해 기꺼이 그 정도 돈을 내놓지 않을까?
일단 한국에서라면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실 네게 무슨 보상을 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어. 그런데 여기저기서 네가 처한 상황을 설명 들으며 결심했지, 돈보다는 권력이 필요하겠구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건우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돈보다 권력?
그래, 스트리 교수가 정확하게 본 건 맞다. 지금 건우에게 필요한 건 권력이다.
돈은 많다. 어쩌면 돈으로 권력을 살 수 있을 만큼 많은지도 모른다. 그러나 권력을 돈으로 사는 순간 기득권 세력과 타협하게 돈다.
건우는 그게 싫어서 어려운 길을 돌아가고 있다. 장문오 시장을 노골적으로 밀어주는 것도 교피아를 비롯한 기득권 세력과 타협하기 싫어서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기득권과의 타협 없이 권력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건우가 거절할 이유가 없다.
아이러니하지만 권력을 가지고 싶다기보다는 권력에서 자유롭기 위해서 필요했다.
“내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건지 궁금하지?”
“네? 아니요. 그…럴 리가요. 하하.”
“전혀 감도 안 오고?”
스트리 교수가 슬며시 웃었다.
“네. 그냥 보상이라고 하시길래 단순히 금전적 혜택이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돈은 초이도 많잖아. 넘칠 만큼.”
교육 타운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예산만 20조 원인데 돈이 없을 리가 없다. 유산을 물려받지 않고 자수성가한 이십 대를 통틀어 세계 최고 부자가 건우다. 스트리 교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왠지 졸부가 돈 자랑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조심스럽긴 한데, 돈이 많은 게 사실은 사실이죠.”
“그래서 생각해봤어. 돈이 아니라면 뭐가 좋을까? 그런데 한국 유학생 중 한 명에게 초이 네가 한국 정부와 사이가 안 좋아서 불이익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 이야기를 듣고 정말 어이가 없었지. 국가적 영웅으로 대접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불이익을 주고 있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내가 다 화가 나더라.”
“저도 처음엔 답답하고 그랬는데 이젠 무덤덤해졌습니다.”
“무덤덤해지지 말고 권력을 가지면 돼.”
“어떻게요? 전 교수님이 뭘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임상시험도 제대로 시작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웃기지만, 1차 실험만 성공해도 슬슬 준비는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속 시원하게 대답하면 좋으련만 스트리 교수는 선문답을 하듯 말을 빙빙 돌리며 핵심을 일부러 비켜 나가고 있었다.
“뭘 말씀이세요?”
“신약 개발에 성공하면 그것에 관한 생산권과 유통권을 주지. 아시아 지역에 한해서.”
“네에에? 뭐, 뭘 주신다고요?
“아시아 지역에 대한 생산과 유통 독점권. 초이 너는 머리가 똑똑하니 내가 주는 선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잘 알겠지?”
“아, 맙소사! 교, 교수님 혹시 농담하는 건 아니시죠?”
세계는 육대주로 나뉜다.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인종이나 문화, 지리적 상황을 고려해 편의상 이렇게 나누었지만 인구수는 대륙마다 천차만별이다. 그중 아시아에는 전 세계인의 60%에 육박하는 40억 인구가 몰려 있다.
아시아를 평균적으로 보면 유럽이나 북아메리카와 비교해 경제력이 떨어질지 모른다. 그렇지만 아프리카처럼 극심한 경제적 빈곤을 겪는 나라는 거의 없다.
따라서 감기 치료제를 구매할 잠재적 고객들이 제일 많은 시장이 아시아다.
스트리 교수는 그 엄청난 시장의 이권을 건우에게 넘기겠다고 했다. 물론 매출의 일정 부분은 스트리 교수가 있는 본사에 넘겨야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아시아 시장 독점권은 막대한 수익을 보장한다.
그러나 수익이 문제가 아니다. 지금 건우가 투자한 사업과 앞으로 지원할 프로젝트가 모두 성공한다면 감기 치료제 이상의 수익을 얻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초이스 이노베이션은 그러기 위해서 설립한 회사다. 그러니 감기 치료제를 유통해서 돈을 벌지 못해도 상관없다.
그렇다면 스트리 교수는 왜 아시아 시장 독점권을 넘긴다고 했을까?
그건 감기 치료제를 단순히 재화로만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인류의 필수품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감기 치료제에 대한 유통 제한만으로도 아시아 국가들은 건우의 눈치를 봐야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절대 오버가 아니다.
만약 감기 치료제 개발에 성공하고 전 세계인이 그것에 익숙해질 무렵, 건우가 독한 마음을 먹고 특정 국가에 대한 치료제 유통을 막아버린다면?
예전에도 감기 치료제 없이 잘 살았으니 앞으로도 감기 치료제 없이 살라고 국민에게 강요할 수 있는 정부가 있을까?
자식이 온몸에 고열이 나서 악을 쓰고 펑펑 우는데, 감기 치료제 한 알만 있으면 금방 낫는데, 정부의 고집 때문에 그러지 못한다면 참을 수 있는 부모가 얼마나 있을까?
사람들이 감기 치료제에 익숙해지는 순간 건우는 국가에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지니게 된다.
스트리 교수는 이런 엄청난 권리를 보상이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은 것이다. 그러니 건우도 당황할 수밖에.
“내가 이런 농담을 하려고 태평양을 건너 여기까지 왔겠어?”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과한 보상입니다. 그런데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 넙죽 받고 싶은 보상이기도 하네요.”
“내가 말했잖아, 네게 꼭 필요한 거라고. 거절하지는 않겠지?”
“아…, 교수님. 정말 이런 걸 받을 만큼 도움을 드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그런데도 제가 뻔뻔한 건지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네요. 교수님 말씀처럼 제게 꼭 필요했던 것이거든요.”
필요한 정도가 아니라 과할 정도로 넘친다. 동아시아 독점 유통권만 가질 수 있어도 충분히 넘치는데 아시아 전체란다.
중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아랍국가에까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데 한국 정부를 무서워할 필요가 있을까?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지금 당장이 아니라 최소 2~3년, 많게는 5년 후에나 가능한 일이라는 것뿐이었다.
“필요하면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받으면 돼. 대신 금전적 이익은 예상보다 적을 거야. 유럽과 북아메리카 그리고 경제력 있는 아시아 국가에서 번 돈으로 아프리카를 지원할 생각이거든.”
아프리카의 몇몇 국가처럼 먹을 게 없어 기아에 허덕이는 곳에서는 5만 원은커녕 만 원도 굉장히 부담스러운 돈이다. 스트리 교수는 돈 때문에 그들을 외면할 생각이 없었다.
이윤 추구가 목적인 경영자가 아니라 이상주의적 성향을 지닌 순수한 연구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그건 상관없습니다. 사실 보상으로 돈을 준다고 하셨으면 교수님 이름으로 기부할 생각이었으니까요.”
“그것참, 나이도 어린데 참 물욕이 없어. 왠지 그럴 것 같아서 애초에 금전을 보상으로 제시 안 한 거야.”
“제가 뭘요. 저보다는 신약으로 벌어들이는 수익을 아프리카를 위해 쓰겠다는 교수님이 더 물욕이 없으신 거죠.”
“어허. 잘 모르나 본데 나 물욕 되게 많아. 평생 풍요롭게 먹고살 돈은 따로 킵 해두고 나머지 돈으로만 아프리카를 위해 쓸 거거든.”
“어, 그렇게 따지면 저도 물욕은 굉장히 많습니다. 저는 얼마가 됐던 제가 버는 돈의 30%만 기부하거든요. 제가 행복해야 진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해서요.”
물욕이 많다는 건지 물욕이 없다는 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서로를 칭찬하기 바쁜 대화가 이어졌다.
“그러니까 더 대단한 거지. 적당히 중도를 지킬 줄 아는 거잖아.”
“하버드에 있을 때 교수님에게 잘 배운 덕분입니다.”
“뭐? 하하하. 이게 그렇게 되는 건가? 제자를 잘 키운 보람이 있네. 그런데 초이.”
“네, 교수님.”
“힘들어도 조금만 견뎌. 아무리 늦어도 3년 안에 상용화를 완료할 테니까.”
“교수님이 이렇게 장담하시는 걸 보니 동물 실험 결과가 정말 좋았던 모양입니다.”
“그래, 맞아. RSFE-325가 가지고 있는 굉장히 특이한 성질 덕분에 임상시험도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믿고 있어.”
“어떤 성질인데요?”
한때는 생물학을 공부했던 학생이라서 그런지 저절로 관심이 갔다.
“RSFE-325가 특정 RNA 바이러스에만 숙주로 삼아 생식을 한다는 건 알지?”
“네, 그 성질 때문에 RSFE-325를 바이러스로 정의 내릴 수 없었던 거잖아요.”
“맞아. 그런데 이 녀석은 RNA 바이러스가 사라지는 순간 활동을 멈춰. 그런 후 하루가 지나면 완전히 힘을 잃고 몸 밖으로 배출이 돼. 소변이나 대변 그리고 땀으로.”
“아, 그럼 인체에 무해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 거네요? 특정 바이러스만 없애고 알아서 배출되는 거니 인체에 악영향을 주고 싶어도 줄 시간이 없겠고요.”
“그렇지!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1차 실험만 이상 없이 끝나면 그때 우리 다시 보자. 그땐 정말 본격적인 생산 협의를 해야 하니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교수님. 이 감사함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허. 내가 갚는 거라니까 그러네. 허허허. 아무튼, 내 할 이야기는 이게 끝이야. 난 이제 그만 가보마. 곧 다시 보자, 초이.”
“벌써 가시게요?”
“한국에 온 목적이 모두 끝났으니 이제 돌아가야지. 준비하느라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건우가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꾸벅 인사했지만 스트리 교수는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