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217화 (217/256)

제217화

“아직 어려서 인내심이 부족했던 듯합니다.”

“아마 세계그룹과 와룡그룹이 초이스 에듀에 양보한 것을 보고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사생결단을 내봐야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해 한발 물러선 것인데, 그걸 모르고 세상을 만만하게 봤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 자신감으로 인해 더는 인내심을 발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긴 하네요. 제가 최건우 나이였다면 더 했을 것 같긴 합니다. 세계그룹은 몰라도 천하의 와룡그룹을 밀어냈습니다. 거기에 마이크로소프트와 손을 잡고 세계 최고 부자로 꼽히는 빌 게이츠가 자신의 얼굴을 보기 위해 직접 내한까지 했고요. 아마 지금쯤 최건우는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자신감이 넘칠 겁니다.”

능력 있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인내심이 있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한계를 드러냈다는 게 용선국 이사장의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됩니다. 세계그룹이나 와룡그룹 둘 모두 고작 사설학원을 운영한다고 쉽게 보고 덤볐다가 개망신을 당한 건 사실이니까요. 거기에 나성천 대표는 자신의 실책을 목숨으로 막았습니다. 호락호락한 상대였다면 애초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겠죠.”

“그럼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가문 어른들이 늘 하시는 조언들이 있는데 제가 어찌 최건우를 쉽게 보고 덤비겠습니까.”

“설마 호랑이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라는 그 뻔한 잔소리를 아직도 하는 겁니까?”

용선재 대표가 안 봐도 알겠다는 듯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당연하지요. 그분들 버릇이 어디 가겠습니까? 오히려 연세를 드시면서 더 심해지는 기분입니다.”

“어허, 이런…. 예전에도 잔소리가 심했는데 그때보다 더 심해지면 대체 어쩌란 말입니까? 굉장히 힘드시겠습니다.”

“어쩌겠습니까? 틀린 말씀을 하시는 것도 아닌데.”

“그렇기는 하지만….”

“저는 이제 익숙해져서 괜찮습니다. 그런 잔소리 덕분에 한참이나 어린 최건우 그 친구를 상대할 때도 최선을 다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괜찮은 방법이 있으신 겁니까?”

“아직 고민 중입니다. 괜히 어설픈 카드를 내밀어 우리 정체를 드러내는 것보다, 방심하고 있을 때 치명타를 입히는 게 가장 좋으니까요. 사실 괜찮은 방법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교육 타운 건설 계획을 보고 전부 폐기했습니다.”

“계획에 문제가 있었습니까?”

“아니요. 계획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최건우가 너무 커버렸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수십조 원을 주물럭거리는 거물로 성장할 거라는 걸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최건우를 얕잡아 봤던 것이죠. 이러니 어른들이 아직도 제게 잔소리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용선국 이사장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걸로 자책하실 필요 없습니다. 최건우가 그렇게 예측 가능한 인간이었다면 애초에 정부가 그렇게 고생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형님이요?”

“최건우가 높은 수능 적중률로 뜬 것 아시죠?”

“물론입니다. 덕분에 첫해부터 교육계에 충격을 줬지 않습니까?”

사실 충격을 준 것에 그치지 않고 교육부를 발칵 뒤집어놨다.

유출이냐 아니냐 말도 많았고, 최건우를 견제하려고 나섰던 교육부 장관들이 줄지어 옷을 벗어야 했다.

“저는 그게 그냥 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수능 문제를 그렇게까지 적중하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경우의 수가 얼마나 많은데요? 인수분해만 해도 변형해서 나올 수 있는 유형이 수십 가지가 넘습니다. 그런데 수학이 인수분해만 나오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오래된 이야기라 가물가물하기는 하지만 수학 챕터가 엄청나게 많았던 건 기억이 나네요.”

“맞습니다. 엄청나게 많습니다. 나오는 이론만 해도 수백 가지가 넘고, 그 이론을 변형할 수 있는 방법이 또 수십 가지 이상입니다. 그런데 수학뿐만 아니라 과학까지 높은 적중률을 보였습니다. 저는 그걸 보고 천운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한 번 제대로 반짝했으니 그걸로 최소 10년은 먹고 살겠구나 이렇게요.”

“그런데 3년 연속으로 말도 안 되는 적중률을 보였으니….”

“그러니까 말입니다. 놀라운 수능 적중률에 힘입어 1위에 올라섰지만 우리 기가 싱크빅의 저력이라면 금방 다시 원래 자리를 되찾을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아득히 높은 곳으로 올라가 버리더군요.”

그걸 보고 잡을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욕심을 버리고 초이스 에듀와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2위 자리라도 고수하려 노력했다.

용선재 대표가 학원 사업에 뛰어든 이후 이렇게까지 답이 보이지 않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답답해도 어쩔 수 없었다. 교육부의 눈치를 봐야 하는 학교라면 모를까, 모든 학원이 건우가 만든 커리큘럼으로 수업할 정도인데 어느 누가 초이스 에듀를 넘보겠나?

건우는 명실공히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인자가 되었다. 바야흐로 최건우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런데 최건우가 갑자기 자기에게 맞지 않은 욕심을 부린 거로군요. 그냥 가만히 자신이 만든 단단한 성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게 훨씬 현명했을 텐데.”

“저도 이런 기회가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정치라니요. 처음엔 왜 그런 선택을 했나 어리둥절했는데, 생각해보니 정상에 올랐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이사장님은 우리 가문이 사학 재단으로 오랫동안 최고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어른들의 잔소리?”

“네에? 하하. 그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군요.”

“농담한 건데 틀린 말이 아니라고 하시니 민망해집니다. 형님, 정말 잔소리를 비결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두 사람만 놓고 보면 정말 살가운 형제 사이였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일부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대체 뭐길래요?”

“전통입니다.”

“전통이요?”

“네, 오랜 세월 온갖 부침을 겪으며 쌓은 노하우. 그게 우리 가문이 지랄 맞은 현대사를 겪으면서도 최고의 자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잔소리는 그런 전통을 전달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 말씀 절대 어른들에게는 하시면 안 됩니다. 그랬다가는 지금보다 잔소리가 더 늘어날 겁니다.”

“어른들과 제가 만날 일은 없으니 안심하십시오.”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쨌거나 전통이 중요하다는 형님의 말씀에는 동감합니다.”

용씨 가문이 계속 최고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진짜 비결은 의리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언제 어디서나 그 시대 권력가와 결탁하는 기회주의지만, 두 사람은 그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것 또한 전통이라고 하면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건우에게는 그게 없습니다. 집안도 보잘것없고, 최고의 자리에 올랐을 때 차분하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해줄 부모도 없습니다. 농구 황제로 불렸던 마이클 조던은 최고가 된 이후 그 공허함을 견디지 못하고 두 번이나 은퇴 선언을 했습니다. 수영의 황제로 불렸던 마이클 펠프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을 보면 정상에 오르기도 어렵지만 그 자리를 유지하는 게 몇 배는 더 어렵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최고에 올라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는 공허함. 그 마음이 뭔지는 알 것 같네요.”

용선국 이사장의 마음도 그와 비슷했다. 더욱이 자신의 노력으로 이뤄낸 자리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자리라서 공허함은 더 컸다.

지금은 대부분 극복해냈지만, 그런 고민이 있었기에 최고의 자리가 얼마나 고독한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10년 넘는 세월 동안 꾸준히 세계 1위 자리를 지켜냈던 사람도 있습니다. 테니스의 황제로 불렸던 로저 페더러 같은 경우가 좋은 예겠죠. 하지만 제가 볼 때 최건우는 후자가 아니라 전자입니다. 그래서 그 공허함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고 외부로 눈을 돌린 것 같습니다. 공허함이 아니라 심심했을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정치로 눈을 돌렸다는 건 우리에게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형님에게 좋은 방법이 있으십니까?”

용선국 이사장이 은근히 물었다. 사실 이런 일은 용선재 대표가 더 잘해냈다.

“제 생각을 물으시는 거라면 여유를 부리며 방법이나 강구할 때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아까도 이야기한 것처럼 최건우는 절대 만만한 인간이 아닙니다. 설사 정치를 너무 쉽게 봤다고 해도, 아무 생각 없이 뛰어든 건 아닐 겁니다. 그건 장문오를 파트너로 선택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정부와의 사이가 틀어진 최건우가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카드가 장문오니까요.”

“그건 그렇군요. 거드름 피우기 바쁘던 정부와 여당이 장문오의 약진에 화들짝 놀라 대책 마련에 분주한 걸 보면, 최건우도 어느 정도 고심을 하고 정치판에 뛰어든 것 같긴 합니다. 덕분에 우리까지 분주해졌지만요.”

여기서 우리라는 건 교피아로 불리는 사학 재단 수장들의 원탁 모임이다.

“지금 최건우는 장문오를 노골적으로 밀어주고 있습니다. 그 덕에 민국당 내에서는 순식간에 장문오 대세론이 힘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교육 타운 기공식 후광까지 받았으니 완전히 굳히기에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끌어내려야 합니다. 우리가 뭉그적거리는 사이에 장문오가 야당의 유일한 대권 주자로 국민들에게 인식되어 버리면 곤란합니다.”

“그건 곤란한 일이네요. 안 그래도 장문오는 약점이 전혀 없어서, 한번 올라가면 끌어내리기 정말 힘들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장문오가 대세로 굳어져도 안 되고, 최건우가 정치판에 적응하게 둬도 안 됩니다. 그놈은 정말 똑똑한 놈입니다. 그러니 더 크기 전에, 어설플 때 잘라내야 합니다.”

용선재 대표는 자신의 동생이 건우를 절대 쉽게 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계속해서 경각심을 줬다.

가문의 힘은 막강하지만, 그것만 믿고 있기에는 그동안 건우가 보여준 행보가 너무나도 거침없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내버려두었다가 손을 쓰고 싶어도 손 쓸 수 없게 되어버린 그 실수를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건우가 학원 사업처럼 정치에서도 놀라운 능력을 보여줄지는 미지수지만, 확신할 수 없다면 더 크기 전에 잘라버려야 변수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니 최고의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사장님, 우리에게 시간이 많이 없습니다. 최건우는 단 1년 만에 학원 사업에서 제가 손 쓸 수 없는 존재로 커버렸습니다. 아무리 변수가 많은 정치판이라고 해도 우리가 굳이 최건우의 성장 과정을 지켜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정체를 들키든 말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견제를 시작해야 합니다. 언론, 재계, 경찰 등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해서요. 우리 가문이 지원해준 장학생들이 경찰 고위직에도 있으니 그들에게 시키십시오.”

용선재 대표는 이번과 같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경찰에게 인기가 많은 게 문제라고 합니다. 최건우가 재작년부터 경찰 유가족을 꾸준히 지원해온 것 때문에 호감도가 굉장히 높아져서 지시 내리기가 쉽지 않다고 하더군요.”

“흥, 그래 봐야 경찰도 직장인입니다. 말 안 들으면 본보기로 강력한 징계를 내리면 됩니다. 항명하면 잘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줘야죠. 원래 한국 사람은 가끔씩 몽둥이로 때려줘야 정신을 차립니다.”

“역시 그동안 우리가 개돼지들에게 너무 신사적으로 대한 건가요?”

대중들은 절대 모르는 용선재 대표와 용선국 이사장의 본 모습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는 서재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평소에는 신사적인 가면으로 포장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신사적으로만 대하면 우리가 주인이라는 걸 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몽둥이가 약입니다.”

“이럴 땐 집안 어른들과 의견이 똑같으시군요.”

“달갑진 않지만 만고불변의 진리는 있는 법이니까요.”

“알겠습니다, 형님. 장문오가 더는 인지도를 쌓지 못하도록 전방위적인 압박을 넣겠습니다. 그러니까 형님도 도와주십시오.”

“다행히 제가 최건우와 어느 정도 친분이 있습니다. 그걸 미끼로 은근히 함정을 파 보겠습니다. 걸리면 좋고 안 걸리면 말 생각이니,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시고요. 이건 그냥 간만 보는 것이고, 진짜는… 제가 대통령을 한번 움직여 보겠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용선재 대표가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대통령을요? 아! 대통령은 저보다 형님이 설득하는 게 더 낫겠군요. 알겠습니다. 그쪽 일은 형님에게 맡기겠습니다.”

***

용선재 대표가 대저택에 들어가고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아 사방이 어둑어둑해졌다. 붉게 타올랐던 하늘도 까맣게 변했다.

꽁꽁 닫혀 있던 대저택의 커다란 철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잠시 후 용선재 대표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타나 집 앞에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올라탔다.

묵직하고 단단한 엔진음이 들렸다.

문 앞에 서 있던 고용인들이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자 용선재 대표를 태운 자동차가 출발을 시작했다.

그리고 멀리서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사람이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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