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0화
나는 말이야, 어릴 때 좀 놀았어.
워워워, 눈초리 이상해지는 것 좀 봐. 아니야 그런 거!
그런 거 아닌 게 뭐냐고?
애들 돈 뺏고 때리고, 그런 일진이었냐고 쳐다보는 거잖아. 나 그렇게 더럽게 안 놀았거든.
그냥 공부보다 다른 게 재미있어서 거기에 좀 빠졌는데 사람들은 나보고 ‘놀았다’고 하더라구.
그래, 놀긴 놀았지. 공부를 안 하고 딴짓을 했으니 안 논 건 아니야. 그래도 지금까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거나 범죄를 저지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음…. 단 한 번도 없는 건 아니네.
어허. 이봐 이봐. 또 눈꼬리 사나워진다.
내가 한때 일본 문화에 심취한 적이 있었어. 한국 문화와 다른 독특한 모습이 나에게는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어.
처음에는 애니메이션에 빠졌고, 그렇게 일본 문화에 익숙해지면서 드라마나 영화 나중에는 책에도 심취하게 됐어.
물론… 진짜 시작은 야동이었지만. 크험. 야동이라는 게 그렇잖아. 한 번도 안 본 남자는 있어도 한 번만 본 남자는 없다. 특히 혈기 왕성한 학창시절에는 정말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였어.
그리고 내가 본 영상들의 거의 99%는 불법다운로드였어. 그래서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고는 말 못 하는 거야.
일본 애니메이션을 본 사람은 알겠지만 한 작품당 에피소드가 최소 100화 이상이야. 슬램덩크 알지? 그건 그렇게 긴 편도 아닌데 101화거든. 솔직히 슬램덩크는 양반이야.
드래곤볼 알지? 훨씬 굉장해.
드래곤볼 오리지널 153화, 드래곤볼 Z 291화, 드래곤볼 GT 64화야. 엄청나지?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야. 지금은 드래곤볼 슈퍼가 나오고 있는데 곧 있으면 100화를 돌파할 예정이야.
정말 끝도 없지. 그렇지만 이것도 양호한 편이야. 건담 시리즈는 정말 끝도 없어. 그걸 다 보려면 수천 편은 봐야 할 거야.
갑자기 왜 이걸 이야기하느냐고?
내가 지금껏 본 걸 전부 합치면 수 만회가 넘어. 그걸 정식으로 돈을 주고 본다? 상상도 못 할 일이었어.
지금은 많이 싸졌는데 그땐 정말 비쌌어. 한 회당 2,000원씩만 잡고 10,000번을 봤다고 해도 2,000만 원이야. 우리 집 기둥뿌리를 뽑아야 할 정도지.
학생 신분에 그 돈이 감당이 안 됐어. 그래도 불법은 불법이었지만 억지로 우겨서 변명하자면 당시에는 지금처럼 불법다운로드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어. 다른 사람들이 공들여 만든 콘텐츠를 아무 죄책감 없이 다운로드받았어.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노래 심지어 만화책이나 소설책의 불법 스캔본까지 당연하다는 듯 돌았어.
지금은 절대 안 그래. 윈도우나 한글도 정품으로 쓰고 노래도 내 돈 주고 들어. 애니메이션도 DVD를 사서 볼 때가 많아. 다행히 가격이 많이 내렸거든. 슬램덩크 풀 DVD가 30,000원도 안 하고 5,000자 내외 글 한 편 보는데 100원이면 되는 세상이니까.
그러니까 너도 절대 불법다운로드 같은 건 하지 마, 알았지?
불법다운로드를 제외하면 다른 범죄는 단 한 번도 저지른 적이 없어. 난 무단횡단이나 무단투기도 안 해. 멀리 돌아가도 횡단보도를 건너고, 쓰레기 같은 건 비닐봉지 같은 것에 넣어 다니다가 쓰레기통이 나오면 그때 한꺼번에 버려.
바른 생활 사나이의 전형이랄까?
어? 잡설은 그만 풀고 얼른 본론을 꺼내라고?
좀 보채지 마. 안 그래도 슬슬 시작하려고 했으니까.
그래도 다행이네. 왜 하필 일본 문화 따위에 빠진 거냐고 욕하진 않아 줘서.
아…! 취존. 내 취향이니까 존중한다고? 고마워. 가끔 보면 ‘쪽바리’ 거 좋아한다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역사적 특수성이 있으니 이해는 하….
알았으니까, 닥치고 본론으로 들어가라고? 쯧. 하여간 까칠하긴.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일본 문화에 미친 듯이 빠진 지 대략 3~4년 정도 됐을 때였어. 한 나라의 문화를 모두 봤다고 하기엔 짧은 기간인데 어느 순간 갑자기 지겨워지더라.
그리고는 깨달았지. 나는 순수하게 일본 문화 자체를 좋아했던 게 아니라 한국 문화와 다른 이색적인 면에 잠시 매료되었던 거라고.
그 말이 그 말 아니냐고?
아니야, 달라.
그 당시 나는 공부가 싫었던 학생이었거든. 공부 말고 다른 걸로 시간을 때우고 싶은데 그때 눈에 들어온 게 하필 일본 문화였어. 내가 만약 그때 미국 문화를 먼저 알았다면 마블 시리즈나 미식축구 같은 것에 빠졌을지도 몰라.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대학 때 내가 그랬으니까.
그렇다고 중고등학생 시절처럼 그렇게 과하게 빠진 건 아니었어. 미국 문화가 일본 문화보다 재미없었던 게 아니라 내가 철이 든 거지.
어쨌든, 어느 순간 일본 만화나 드라마 그리고 소설이 재미없어지더라. 일본 특유의 감성이 있는데, 그게 처음에는 되게 신기했거든? 그런데 그게 계속 반복되다 보니 지치더라고.
일단 헤어나오긴 했는데, 막상 공부하려니까 멍하더라. 아는 게 있어야지.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공부해야 했어.
슬슬 먹고 사는 게 걱정이 되더라. 우리 집이 부자가 아니라서 언제까지 손 벌리고 살 수는 없거든.
고3이니 기술을 배우기도 너무 늦었고, 배우고 싶은 기술도 없었어. 이렇게 살다간 정말 굵어 죽기 딱 좋겠다 싶더라.
그러다 문득 내가 잘하는 게 하나 있다는 걸 깨달았어.
그딴 게 있을 리가 없다고?
있어! 바로 일본어야. 그냥 재미있어서 미친 듯이 본 것뿐인데 그것도 자주 반복해서 그런지 어느 순간 거의 원어민 수준으로 일본어 실력이 올라오더라고.
누구나 다 그런 건 아니야. 수천 편, 수만 편을 봐도 안 느는 경우도 있어. 내게 언어적 재능이 있었던 거지.
잘난 척하는 거냐고? 그래, 잘난 척하는 거다. 나는 뭐, 잘난 척 좀하면 안 돼?
다른 건 몰라도 일본어는 내가 정말 잘하거든.
다행히 자격증도 따놨어. JLPT 1급으로. 부모님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만화만 본다고 자꾸 잔소리하셔서 오기로 딴 거야.
난 노는 게 아니라 공부를 하는 거다. 자, 봐라! 제일 어려운 일본어 자격증도 따지 않았느냐.
이렇게 말이지.
휴… 내가 생각해도 사설이 좀 길었네. 미안. 말이 좀 많았지?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 일본어를 잘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부랴부랴 대입을 준비했어.
지금 내 성적으로는 힘들 것 같아 수시 전형으로 알아봤지.
대회 입상 경력이 있으면 도움이 된다더라?
그래서 고등학생 일본어 말하기 대회에 나갔어.
어떻게 됐느냐고?
어떻게 되긴. 당연히 일 등 먹었지.
대회 이름이 말하기 대회잖아. 그런데 애들이 말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읽는 수준이더라구. 열심히 외우긴 했는데 영혼이 없달까?
일본어는 말이야, 음… 예를 들어 ‘오이시(おいしい)’ 이 한 단어에도 여러 가지 표현이 숨어 있어. 어디에 악센트를 주느냐에 따라 얼마나 맛있는지 강도가 달라. 그런데 악센트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오이시’라고 읽으면, 그건 ARS 누나들의 말투와 다를 게 없어.
나는 다년간 애니, 드라마, 영화, 야동…. 아이고, 뭐래. 야동은 취소야, 취소.
수많은 일본 방송을 보면서 일본인 이상으로 호들갑을 떨며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쌓았다 이거야.
다른 애들이 그냥 흑백 일본어라면 나는 총천연색에 반짝이기까지 하는 일본어랄까?
그러니 경쟁이 되겠어? 당연히 내가 압도적으로 1위를 했지.
학교 성적은 엉망이라도 일본어 1급 자격증과 말하기 대회 1등 수상 경력이 있으니까 대학이 가지더라. 지방이긴 하지만 일본어 교육학과에 당당히 합격했어. 당사자인 나도 신기했어.
에휴······.
왜 한숨이냐고?
내가 참 순진했어. 난 대학만 가면 취직은 걱정이 없을 줄 알았어.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일본어 교육학과는 사범대야. 사범대란 교사가 되기 위해 모인 곳이야.
정상적으로 졸업하면 교사 자격증은 나와. 그런데 교사 자격증이 나온다고 학교 선생님이 되는 건 아니었어.
미치겠는 게, 내겐 언어적 재능밖에 없더라. 다른 건 완전 엉망이야. 능력도 없고, 재미도 없고.
그래도 일본어과니까 일본어만 잘해도 졸업하는 데는 아무런 지정이 없어. 오히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어. 그렇지만 그걸로는 임용 시험을 통과할 수 없었어.
일본어 선생님이 일본어만 잘 가르치면 되지 대체 왜 전혀 상관없는 다른 과목까지 공부해야 하는 거냐고!
뭐? 나 같은 인간이 교사가 되면 안 되기 때문에?
음…. 그럴듯하군. 이럴 테면 나 같은 편협한 인간이 아니라 균형 잡힌 인간이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거잖아? 그건…, 좀 배 아프긴 한데 인정.
사범대를 나왔는데 임용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선택할 수 있는 진로는 다섯 가지 정도 돼.
계속 임용 시험을 준비하든지, 기간제 교사를 하든지, 대학원에 진학하든지, 그냥 전공에 상관없이 취직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학원 강사를 하든지.
일본어가 큰 인기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제2외국어 시험 과목에 들어가거든. 분명 수요는 있어.
총천연색 일본어 실력을 가지고 있는 나는 자신감을 가지고 학원계로 뛰어들었어.
나쁘지 않았어.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내가 정말 잘 가르쳐주는 것 같다며 최고라고 해줬어. 자신감 급상승. 이대로만 쭈욱 간다면 인기 일본어 강사도 남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
한데 망할 놈의 학벌이 내 발목을 잡더라.
내 실력이 점점 입소문이 나니까 학부모들이 찾아왔어. 당연히 기쁜 마음으로 상담을 했어. 그런데 왜 하나같이 내 출신 대학을 물어보는 걸까? 그리고 왜 하나같이 내 출신 대학을 듣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까?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야. 내가 바보 멍청이는 아니거든. 실력이 어떻든 학벌이 개떡 같으니 애들을 믿고 맡길 수 없다는 거잖아.
나 원! 서울대 나왔다고 무조건 잘 가르치는 건 아니거든!
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괜히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먹고 살기 힘들어져서 참았어.
잘했다고? 그래, 내가 생각해도 잘한 것 같아. 난 애들 가르치는 게 참 좋거든. 큰돈은 못 벌어도 이걸로 먹고살 수만 있으면 만족해. 지금 상황으로는 먹고사는 게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그런데 요즘 학원가에서 이상한 소문이 하나 돌고 있어.
초이스 에듀가 라이브 스트리밍 교습소를 모집한다는 소문이었어.
지방까지 분점을 내달라는 요구가 너무 거세니까, 꿩 대신 닭으로 교습소를 차린다는 거였어.
자격 제한은 없고 초이스 에듀에서 실시하는 교육과정을 통과하면 교습소 강사로 인정해준다는 거야. 그것도 나쁘진 않은데 교습소 강사 중에 반응이 좋은 사람은 대도시에 있는 초이스 에듀 분점 강사로도 데려간다는 거야. 학벌이나 그딴 거 안 보고 오직 실력으로만.
난 이게 기회라고 생각했지. 소문을 들은 다른 강사들은, 초이스 에듀 하청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반발했지만 난 이게 우리나라 사교육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계기가 될 것 같았어.
직감이 잘 맞는 편이라서 곧바로 초이스 에듀에 연락을 하고 교습소 강사 신청을 하겠다고 말했지.
그랬더니 그쪽에서 그러더라. 아직 정식 모집은 시작 안 했지만 신청은 받겠다고, 무슨 과목을 가르치느냐고.
난 자랑스럽게 대답했어.
일본어 가르칩니다!
그런데 갑자기 침묵이 흘렀어. 나도 당황했어. 대체 왜 침묵이 흘러야 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갔거든.
전화가 끊겼나 싶었어. 그런데 그것도 아니었어. 나직이 한숨 소리가 들렸거든.
잠시 후 전화받는 사람이 그러더라. 아직 라이브 스트리밍 서비스 과목 중에 일본어는 없다고. 그러니 일본어를 교습소에서 가르치는 건 어렵대.
맙소사. 그야말로 맙소사였어.
얼굴이 화끈거리더라.
라이브 스트리밍 교습소가 뭐야?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수업을 듣고 그걸로 부족한 부분을 초이스 에듀에서 교육받은 강사들이 추가로 가르쳐 주는 거잖아. 그런데 일본어를 가르치는 강사 자체가 초이스 에듀에 없는 거야.
나도 그건 알고 있었거든. 그런데도 바보같이 교습소 강사 신청을 한 거지.
젠장. 내가 왜 이렇게 멍청한 건지. 그래도 상대가 날 안 비웃어줘서 마음이 많이 아프진 않았어.
그런데 말이야.
되게 웃기게도 갑자기 속에서 뭔가 알 수 없는 오기가 생기더라.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물었지. 왜 초이스 에듀에서는 일본어를 가르치지 않느냐고? 혹시 일본에 대한 반감 때문이냐고.
아니라고 하더라. 그런 건 전혀 상관없고 아직 초이스 에듀가 원하는 일본어 강사를 찾지 못해서 그렇다고 설명해줬어.
그 이야기를 듣고 어차피 오기를 부린 마당이라 한 번 더 부렸지.
나는 어떠냐고? 학벌은 개떡 같은데 가르치는 건 정말 잘한다고.
솔직히 개무시당할 줄 알았어. 그런데 상대가 그러더라. 비웃지도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모의 강의 준비해서 서울로 찾아올 수 있느냐고.
이게 무슨 상황인가 당황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잖아. 여기서 쪽팔리게 못 한다고 꼬랑지를 내릴 순 없지. 사나이 자존심에.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어떻게 되긴? 이게 바로 내가 초이스 에듀 강사가 된 이야기야.
초이스 에듀 유일의 일본어 강사.
최대한.
그게 내 이름이야. 잘 기억해둬.
그럼 새로운 라이브 스트리밍 수업에 보자. 안녕.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