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1화
명품이란 뭘까?
사전적 의미로는 뛰어나거나 이름난 물건, 또는 그런 작품이라고 되어 있다.
예전에는 그렇게 쓰였는지 모르나 요즘은 값비싼 유명 브랜드를 지칭할 때 ‘명품’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영어로 하면 Masterpiece(걸작)가 아닌 Luxury(사치)에 가깝다. 단지 Luxury가 한국에서는 부정적 의미로 자주 쓰이기 때문에 명품이라고 그럴싸하게 포장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최고의 명품은 뭘까?
유명 브랜드의 마크가 누구나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랗게 딱 붙어 있는 그런 제품을 최고라고 말할 수 있을까?
보통 사람들 기준에서는 그럴지도 모른다. 큰마음 먹고 수백만 원을 들여 명품을 하나 샀는데, 알아보는 사람이 없으면 그것만큼 속상한 일도 없다.
‘오! 이거 구X네? 멋지다.’
‘어머나. 샤X 핸드백 신상이네. 이거 구하기 어렵다던데, 어떻게 샀어?’
‘이거 몽블X 시계잖아. 한 달 월급 가격이라 망설였던 건데 부럽네.’
‘헉! 루이비X이네. 이 가방, 영롱한 색감 봐. 저절로 사고 싶어져.’
이런 식의 반응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애초에 과시욕 때문에 샀으니 다른 사람들이 내가 산 제품을 한눈에 알아봐 주길 원한다. 그래서 대부분은 크지는 않더라도 명품 브랜드 마크가 선명하게 박힌 제품을 선호하곤 한다.
그렇다면 돈에 구애받지 않는 부자들에게 최고의 명품은 뭘까?
부자들이라고 해서 과시욕이 없는 건 아니다. 명품은 태생부터가 서민이 아니라 부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일반인들과의 차별성, 그들만을 위한 특별함이 명품의 존재 이유였고, 차별성과 특별함은 과시욕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런데 대중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유명 명품 브랜드는 더는 차별성과 특별함의 대명사가 되지 못하고 있다. 상위 0.1%를 대변해야 할 상품이 상위 1% 또는 상위 10%를 위한 상품으로 변했으며, 심지어 평범한 서민들도 돈만 있으면 언제든 살 수 있는 흔한(?) 브랜드가 되었다.
진입 장벽이 낮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전국에 있는 유명 백화점이라면 어디든 1층만 가면 손쉽게 명품을 살 수 있는 세상이 됐다.
그중에서도 특별한 제품은 여전히 구하기 어렵기는 하나 최상위층 부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진짜 부자들은 특별한 차별성을 원한다.
길거리에서 두세 명 중 한 명은 들고 다니는 그런 흔한 브랜드로는 차별성을 얻을 수 없게 되자, 그들은 명품 그 이상의 것을 원하기 시작했다.
돈이 있어도 아무나 살 수 없는, 아주 특별한 부자들만 살 수 있는 그런 명품.
보통 명품 매장은 백화점 1층에 많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특별한 명품은 그래서는 안 된다.
일반인들과 같은 매장에서 같은 물건을 쇼핑하는 걸 최상위층 부자들은 원하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극소수의 사람들만 드나들 수 있는 특별한 공간에서 쇼핑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제품을 보러 매장을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편하게 앉아 있으면 옷이나 가방들이 이동식 진열대에 실려 찾아온다.
제품은 당연한 것이고 쇼핑 방식 또한 특별해야 한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돈을 기꺼이 지불한다.
강남의 G백화점 VVIP 라운지.
특별한 손님이 방문했다. 어제 전화로 예약을 받고 G백화점은 VVIP 라운지 내에 있는 프라이빗 룸을 특별한 손님을 위해 기꺼이 비워두었다.
VVIP 라운지의 프라이빗 룸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 VVIP 중에서도 VVIP만이 이용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공간이다.
“어서 오세요, 사모님.”
특별한 손님은 약속시각보다 두 시간이나 늦게 도착했다. 그렇지만 약속시각보다 한 시간 전부터, 그러니까 세 시간 넘게 특별한 손님만을 기다리고 있던 매니저는 어색한 표정 하나 없이 밝은 웃음으로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내가 조금 늦었죠. 많이 기다렸어요?”
말과 다르게 미안한 기색 한 톨 없는 당당한 모습으로 특별한 손님이 들어섰다.
이들 부류는 시간에 맞춰 오는 걸 수치로 여긴다.
“아닙니다. 사모님처럼 공사가 다망하신 분이 특별히 시간을 내셔서 저희 백화점에 방문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입니다.”
조금 늦은 것이 아니라 많이 늦은 것이지만 매니저는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특별한 손님은 말 그대로 특별한 손님이기 때문이다.
3대 신문사 현 사주의 여동생,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는 내로라할 가문의 큰 며느리.
이 두 가지만 해도 충분히 넘칠만한 타이틀이지만 여기에다가 현 정권의 비선 실세라는 소문까지 더해지면서, G백화점 측은 그녀를 재벌가 직계보다도 우선순위에 두며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소문이라고는 하지만 특별한 손님에 대한 소문은 이미 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비위를 거슬렀던 모 백화점은 강도 높은 세무조사와 부당노동행위와 관련된 검찰 조사, 그리고 안전시설 미비로 이유로 대대적인 소방 점검을 받았다.
그 결과로 본점은 삼 개월 영업정지를 당했고, 백화점 사장은 검찰에 의해 구속되어 아직도 구치소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잘 나가던 백화점이 그렇게 되기까지 딱 한 마디가 있었을 뿐이었다.
국무회의에서 현직 대통령이 했던 ‘참 나쁜 백화점이네요.’라는 그 말 한마디로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던 백화점이 휘청인 것이다.
직접 관여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없으니 소문이라고 말할 뿐, 누구 때문에 그 사달이 났는지 업계 관계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약속시각 조금(?) 늦은 것 정도는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신상들 들어왔다고 하던데.”
“그렇지 않아도 사모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에 대기시켜 놓고 있었습니다. 준비하라고 할까요?”
“아니. 아쉽지만 오늘은 내가 쓸 게 아니라서.”
“그럼 누가…?”
“내가 다른 사람 옷을 보러 올 일이 그분 말고 또 있겠어?”
“아…! 그럼 여사님이 좋아하는 스타일로 준비시킬까요? 안 그래도 사모님께서 방문하신다는 소식에 두 가지 스타일로 준비해놓고 있었습니다.”
여사님이란 영부인인 황금숙을 말한다. 언제 어디서든 듣는 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직접적인 이름은 피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오늘 G백화점을 방문한 특별한 손님은 황금숙의 친구이자 용선재의 아내인 조순희였다.
매니저는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지 조순희의 요구에 어떤 당황함도 보이지 않고 신속하게 대응했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니까 매니저도 잘 알고 있겠지만, 한 번만 더 이야기할게요. 우리 여사님 위치가 위치인지라 노골적인 명품은 곤란해요.”
황금숙은 현 대통령의 부인이다. 모든 공직자의 부인이 그런 건 아니지만 영부인쯤 되면 공인 중에서도 공인이다.
즉,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는 위치이기도 하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보자.
명품으로 분류되는 브랜드 중에 국내 기업은 없다. 전부 해외 브랜드다. 그런데 현 대통령의 부인인 영부인이 해외 브랜드 마크가 덕지덕지 붙은 옷을 입는다?
정말 그렇게 입었다간 다음날 뉴스에 그녀를 ‘매국노’라고 비난하는 기사들이 도배될 게 분명하다.
정치적으로는 최고의 권력을 얻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포기해야 할 것들 또한 많다. 명품도 그중 하나다.
문제는 황금숙의 집안이 엄청난 재력가라는 데 있다.
황금숙은 어릴 때부터 명품에 익숙했다. 그렇지만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해서는 명품을 포기해야 했다.
매번 한복 아니면 국내 브랜드의 평범한 옷들이 전부였는데 그런 것들이 평생을 부자로 살아온 그녀의 성에 찰 리 없다.
국회의원의 아내일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영부인이 되자 하지 말아야 할 게 더욱 늘었고, 그 답답함이 황금숙에게는 굉장한 스트레스였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준 사람이 바로 조순희였다.
“네. 알겠습니다, 사모님.”
“무난하고 단정하면서도 세련된 옷이어야 해요.”
“한 번 더 강조하겠습니다.”
무난한데 세련되다? 굉장히 모순된 말이다. 세련됐다는 말 자체가 무난함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이다.
그렇지만 매니저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매니저는 방금 조순희가 말한 의미를 잘 모른다. 그런데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건, 다자인이 어떻든 어차피 조순희 마음대로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매니저 눈에 무난해 보여도 조순희가 세련되었다고 하면 세련된 것이다. 매니저가 하는 일은 제품에 대한 추천이 아니라 객관적인 정보 제공이다.
잠시 후 준비된 옷과 가방들이 하나씩 이동식 진열대에 실려 프라이빗 룸으로 들어왔다.
조순희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남편의 부탁도 있으니 오늘은 평소보다 몇 배는 신경 쓰며 골라야 했다.
돈이야 얼마가 되었든 상관없었다. 그녀에게는 용씨 가문에서 준 무제한에 가까운 한도의 카드가 있으니까.
***
“안 그래도 입을 옷이 없어서 고민이었는데, 역시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은 순희 너밖에 없는 것 같아.
입고 싶어도 마음대로 입을 수가 없다. 그게 영부인의 자리다.
하지만 철의 여인이라고까지 불리는 황금숙은 다른 사람에게 그런 내색을 하기 힘들다. 소심한 남편을 대신해 항상 강한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오직 한 사람 조순희를 제외하고.
“왠지 그럴 것 같아서 일부러 백화점에 들렀어.”
“호호호. 안 그래도 답답했는데 고마워.”
남편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백화점 쇼핑은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래서 조순희가 청와대에 방문하는 날이 황금숙에게는 오아시스 같은 시간이다.
“얘는 친구 사이에 고맙기는. 고마워 안 해도 돼, 나도 재미있어서 하는 일이니까. TV에서 내가 골라준 옷을 입고 나오는 네 모습을 보면 얼마나 마음이 뿌듯한데.”
“나도 네가 골라준 옷을 입고부터 자신감이 생기는 기분이야. 마음 같아서는 순희 너를 내 의상 담당으로 두고 싶을 정도야.”
“그랬다간 친구끼리 다 해먹는다고 입방아에 오를걸?”
“그렇지? 남편이 대통령이 되면 세상을 다 가지는 기분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뭘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게 많은지, 내가 꼭 철창 속에 갇혀 사는 기분이야. 그래서 그런지 순희 네가 세상에서 제일 부러워.”
황금숙의 하소연이 시작된다.
두 사람의 만남은 단순히 옷만 전달하고 끝이 나지 않는다. 수행비서 한 명도 없는 공간에서 남들에게는 말하지 못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스트레스를 푼다.
지금 모습 자체는 보통의 아줌마들과 다를 바 없다.
“어머머. 대통령 남편을 둔 사람이 나를 왜 부러워해? 우리 남편은 고작 학원 원장일 뿐인데.”
“웬만한 기업보다 잘 나가는 학원을 두고 고작이라니, 너무 했다.”
“그것도 예전 이야기지. 지금은 초이스 에듀가 다 해 먹잖아.”
“최건우 대표?”
“그래, 바로 그 최건우 대표. 요즘 사교육 시장은 초이스 에듀가 싹쓸이하고 있어. 실력이 있으니 그럴 수 있긴 한데 최근 모습을 보면 상도덕이 없다고 해야 하나?”
조순희는 자연스럽게 건우를 이야기 소재로 삼았다.
그녀는 영리했다. 아무리 절친한 친구 사이라도 노골적인 부탁은 하지 않는다. 그랬다면 조심성 많은 황금숙이 그녀를 편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 이번에 백화점 갔다가 완전 무시당했잖아.”
“뭐? 무슨 일이 있었는데 네가 무시를 당해?”
“거기 매장에 들렀다가 금숙이 네게 정말 딱 어울리는 옷을 찾았거든. 최근에 본 옷 중에 제일 예쁜 옷이었어. 무조건 사야겠다 싶어 직원을 불러 물어봤더니 글쎄 이미 예약이 되어 있다는 거야. 혹시나 해서 또 물었어. 언제 찾으러 오기로 되어 있느냐고.”
“그랬더니?”
“내일이래. 그래서 이건 내게 팔고 다른 매장에서 같은 제품을 가져오면 안 되느냐고 물었지. 배송비가 든다면 내가 지불하겠다고도 했어. 그런데도 안 된대. 그렇게까지 나오면 나도 물러서야 하는데 정말 금숙이 네게 잘 어울릴 것 같은 옷인 거야.”
“아…!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어떤 옷인지 정말 궁금해진다.”
“너도 보면 한눈에 반할 거야. 완벽한 네 취향이거든. 그런데 이미 예약이 되어 있기 때문에 곤란하다는 말만 반복하는 거야. 정말 기가 찬 건 직원이 귀찮다는 눈으로 나를 보더라.”
“대체 어디 백화점인데 그런 짓을 해?”
“분당에서 있는 백화점. 어쨌든 직원 눈빛을 보니 나도 오기가 생기더라. 그래서 금숙이 네 이름을 팔았어.”
“잘했어. 어차피 내 옷을 사려고 했다며. 그럼 당연히 내 이름을 팔 수도 있는 거지.”
“고마워, 이해해줘서. 그런데 그 직원이 코웃음을 치더라. 이 옷은 이미 이름만 들으면 다 아는 재벌 총수 부인이 예약한 거라며, 대통령 부인이 아니라 대통령 할머니가 와도 안 된다고 하더라.”
“허! 결국 내가 우습게 보인 거네?”
“설마 그렇기야 하겠어? 그 직원은 내가 허풍을 떤다고 생각했겠지.”
모 백화점이 휘청인 사건의 전말이다.
조순희는 늘 이런 식이다. 못마땅한 일이 생기면 약간의 거짓과 허풍을 섞어 황금숙이 나설 수밖에 없게끔 상황을 몰아간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백화점에서 건우로 대상이 바뀌었을 뿐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