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4화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고 덕목은 뭐니뭐니해도 돈이다.
돈만 있으면 만사형통이라고까지는 할 순 없어도 돈이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다.
대한민국에서 돈이 제일 많은 사람은 대기업의 주인인 재벌들이다.
특히나 한국처럼 땅덩어리는 좁고 자원은 부족하고 인구가 오천 만밖에 안 되어 내수시장만으로는 유지가 어려운 국가에서는 세계를 대상으로 물건을 파는 대기업이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게 당연하다.
그렇다면 대기업 총수가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을까?
재벌들이 엄청난 금력을 바탕으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나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기엔 다소 부족하다.
자본주의 근간에는 민주주의가 있고 민주적 합의인 투표로 뽑은 사람이 정치인이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재벌들은 정치인 눈치를 봐야 한다. 하지만 정치인들이라고 해서 재벌들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대통령제에서는 대통령이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국회의 협조 없이는 찻잔 속의 폭풍에 지나지 않는다.
물고 물리는 관계. 이해득실에 따라 여기도 붙고 저기도 붙을 수 있는 게 권력이다 보니 어느 누구도 내가 최고라고 말하기 어렵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곳을 말하라고 한다면 첫손에 꼽히는 단체가 바로 교피아다.
교피아 개개인의 힘은 대통령이나 재벌 총수와 비교해 떨어질지 모르지만 ‘원탁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모이는 순간 그 어떤 세력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교피아가 막강한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가 뭘까?
그들은 재벌과 비교해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대통령처럼 국민이 선출해서 권력을 쥐여준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 어떤 단체보다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인맥이다.
상상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사방에 포진한 막강한 인맥은 누가 적인지 누가 아군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상대에게 공포를 안겨준다.
분명히 완벽한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변심해 턱밑에 칼날에 들이밀 수도 있다는 공포가 다른 이들이 교피아를 무서워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차지훈이 초이스 시큐리티 직원들을 뽑을 때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부분도 바로 그런 점이었다.
‘갑자기 변심해 내부의 스파이로 돌변할 가능성이 있는지 여부’
아무리 출중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면이 있다면 무조건 제외를 했고, 그 노력 덕분에 초이스 시큐리티는 교피아로부터 지금까지 청정지역을 유지할 수 있었다.
분명 지금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교피아가 가지고 있는 인맥의 무서움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지금까지 차지훈처럼 조심한 사람이 없었을까?
분명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도 오래가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유는 주변 사람들 때문이다. 꼭 내부 사람만 깨끗해서는 소용이 없다. 아내, 형제, 친척, 친구, 학교 선후배 등 내부 사람을 흔들 수 있는 주변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감옥처럼 완전히 폐쇄적인 공간에서 생활하지 않은 이상 틈은 언제든지 생기게 된다. 그리고 교피아는 지금껏 그 틈을 놓친 적이 거의 없었다.
그게 교피아의 진짜 무서운 점이다.
건우와 전면전이 선포되고 시작된 첫 번째 싸움은, 싸움이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로 싱겁게 막을 내렸다.
사실 싱겁다고 표현하기도 어렵다. 가볍게 잽이나 던진다고 생각하고 무심코 덤볐다가 엄청나게 매운맛을 보고 물러나야 했으니.
건우에게 한 방 먹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간이나 본다고 덤볐다가 된통 당한 건 교피아가 아니라 정부다.
교피아는 약간 기분이 나쁠 뿐 그것 때문에 잔뜩 흥분해 앞뒤 가리지 않고 덤비는 무모한 단체가 아니다.
상대가 강하게 나올수록 수뇌부는 더욱 냉정해진다. 차갑게 이성을 유지하며 상대가 곤란해 할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찾아내는 게 이들이 하는 일이다.
선전포고는 어설펐지만 어쨌거나 전쟁은 시작됐다. 이제는 그동안 잘 갈아두기만 했던 진짜 무기를 꺼내야 할 때다.
교피아의 끝을 모르는 거대한 인맥.
차지훈은 모를까 고자성, 윤종수, 이중규 이들 초이스 에듀 정보팀 창립 멤버는 아직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초이스 시큐리티는 덩치가 큰 만큼 정체를 숨기기 불가능했다.
처음부터 숨길 생각도 없었다. 그런 의도가 있었다면 ‘초이스 시큐리티’라는 이름의 회사를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체가 드러난 만큼 그곳 직원들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교피아의 표적이 된다. 차지훈이 아무리 행적이 뚜렷한 사람들로만 뽑았다고 해도,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게 사람 마음이다. 베갯머리송사라는 말처럼 아내에게 설득될 수도 있고 친구나 형제의 말에 넘어갈 수도 있다.
온종일 내부인력을 감시하는 건 불가능한 만큼 아주 미세한 틈은 언제든지 생길 수 있다.
교피아는 지금껏 그런 틈을 이용해 수많은 적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초이스 에듀와 초이스 시큐리티 또한 마찬가지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괜히 간을 본다고 덤볐다가 입맛만 버렸군요.”
원탁의 테이블에 앉아 있던 용선국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평소에는 거의 경청하는 입장이었지만 확실한 목적이 있는 회의일 경우 그가 제일 앞서서 모임을 주도한다.
“그러게 말입니다. 정부가 하는 일이 지금껏 전부 엉터리라 큰 기대는 안 했지만,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쉽게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백발노인이 실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제가 볼 때 정부가 무능했다기보다 초이스 에듀가 유능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정부 계획은 꽤 그럴싸했습니다. 그런데 초이스 에듀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대책을 마련한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건 미리 알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리 알고 있었다? 초이스 에듀에 그만한 정보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까? 이 부장, 어떻게 생각합니까?”
“초이스 시큐리티가 있지 않습니까? 말은 정보보안 회사라고 하는데, 하는 일은 사설 정보기관과 유사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한결 부장이 대답했다.
원탁 모임에도 따로 운영하는 정보 단체가 있다. 자체 정보 수집 능력은 떨어지지만 국정원과 경찰청이 긴밀한 협조를 하기 때문에 다루는 정보력 자체는 매우 높은 편에 속한다.
그 정보단체의 수장이 바로 이한결 부장이다.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거겠죠, 이 부장?”
“물론입니다, 이사장님. 국정원 조사에 따르면 초이스 시큐리티 직원 대부분이 전직 국정원, 특전사, 기무사 등 국가 정보기관 출신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뽑아 놓고 단순히 정보 보안만 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곳에서 정부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하고 대책 마련을 하고 있었다?”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게 국정원의 분석 결과입니다.”
이한결은 단정적이지 않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고작 학원을 운영하는 주제에 사설 정보기관을 가지고 있다? 어울리지 않는 짓 같은데 규제할 방법은 없습니까?”
“안타깝게도 불법적인 일을 벌였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있지 않은 이상 규제할 방법은 없습니다.”
“어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군요. 학원과 정보기관이 무슨 상관이라고 그런 걸 만들었을까요?”
“그만큼 뒤가 구리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똑똑한 놈이니 정보 선점이 얼마나 중요한지 눈치챘을 수도 있습니다.”
용선국이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저마다 개인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그렇지만 생각 정리가 끝난 듯 용선국이 고개를 들자 회의장은 금세 조용해졌다.
“최건우가 무슨 의도로 초이스 시큐리티라는 회사를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건 그 회사가 최건우의 눈이 되어 정부의 움직임까지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도 용 이사장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그렇다면 초이스 시큐리티라는 회사부터 잘라내야겠군요. 그래야 최건우의 눈을 가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부장.”
“네. 용 이사장님.”
“국정원에서 초이스 시큐리티에 대해서 조사도 했겠죠? 분석처럼 정말 최건우의 눈이라면 잘라내야 하는데 국정원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사설 정보기관이라면 합법적인 일만 할 것 같지는 않은데, 정부가 개입할 수 있답니까?”
가장 간단한 방법은 법의 힘을 빌려 초이스 시큐리티의 문을 닫게 하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개입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왜 그렇죠?”
“초이스 에듀가 만든 교습소를 골목 상권 침해라고 몰아붙였다가 실패한 게 바로 그제입니다. 그런데 또다시 최건우와 연관된 다른 회사를 정부가 공격한다면 대중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섣부른 공격이 타초경사의 우를 범한 셈이군요. 처음부터 초이스 시큐리티를 목표로 했으면 일이 쉽게 진행됐을 수도 있는데.”
“죄송합니다.”
아쉬워하는 용선국의 모습에 이한결이 자신의 일인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아닙니다. 이 부장이 죄송할 일이 뭐 있습니까? 그렇게 당하고도 섣부르게 덤빈 정부가 멍청했던 것이죠. 그래도 덕분에 최건우가 꽤 능력 있는 정보기관을 운영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그걸로 됐습니다.”
“어떻게 보면 최건우가 가지고 있던 비장의 카드라 드러난 셈이니 그렇게 손해본 장사가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이 부장, 초이스 시큐리티에서 일하는 직원들 파악은 해뒀겠죠?”
“직원 명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파악을 끝냈습니다. 그게 전부인지 숨어 있는 인원이 더 있는지는 아직 파악 중입니다.”
“그럼 이 부장 주특기를 발휘할 때가 됐군요.”
“이미 준비 완료했습니다. 인가해주시면 곧바로 실행에 옮기겠습니다.”
말을 마친 이한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용선국에게로 향했다.
“기다릴 것 없이 곧바로 시작하세요.”
“알겠습니다.”
“왠지 기대가 되네요. 비장의 카드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뒤통수를 맞는 최건우의 모습이.”
***
이수철은 초이스 시큐리티의 직원이다. 국정원에서 5년간 근무하면서 지금 하는 일에 큰 회의를 느껴 사표를 내고 초이스 시큐리티로 자리를 옮겼다.
직장을 옮긴 지 1년, 역시 이곳으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무 환경이 훨씬 좋고, 연봉도 두 배 가까이 많다.
예전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국정원 소속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당당하게 초이스 시큐리티 소속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정확하게 뭐하는 회사인지도 모르면서 최건우가 운영하는 곳이라는 설명에 덮어놓고 부러워하는 사람들의 반응도 즐거웠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일을 하면서 제대로 된 보람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국정원에 있을 땐 장관이나 국회의원, 심지어 재벌 총수의 부탁까지 들어줘야 했는데 초이스 시큐리티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예전엔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들어줘도 욕만 안 먹으면 다행이었다면 지금은 수고했다는 말은 당연하고 성과에 따라 합당한 성과급까지 지급하니 일하는 재미도 있었다.
어머니가 몸이 편찮으신 것 말고는 아무 고민도 없이 회사 생활을 하던 이수철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국정원에서 일할 때 이수철을 가장 많이 챙겨주던 선배였다. 별다른 용건은 없고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는 전화였다.
이수철은 반가운 마음에 곧바로 약속을 잡았다. 교습소 논란이 일단락되면서 다행히 여유가 좀 있었다.
“오, 이수철! 못 보던 사이에 신수가 훤해졌네.”
선배의 이름은 지대한.
약속 장소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그는, 뒤늦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수철을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들었다.
“오랜만이에요, 선배님.”
이수철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지대한 앞에 다가갔다.
“선배님은 무슨, 이제 선배도 아닌데. 그냥 형이라고 불러.”
“에이, 그래도 제가 어떻게. 한번 선배는 영원한 선배잖아요.”
“그거야 회사에 일할 때나 그랬던 거지. 지금은 회사가 다른 완전 아저씨 관계잖아. 그냥 형이라고 해. 그게 나도 편하니까.”
“네. 그럴게요, 형.”
“회사 일은 어때? 할 만해?”
직원에게 차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자 지대한이 자연스럽게 회사 일을 물었다.
“그럼요. 편하고 재미있어요. 야근이 없는 건 아닌데 예전처럼 한 달 내내 야근하는 일은 없어서 몸이 축날 일도 없고요.”
“이야, 초이스 시큐리티 좋다는 소문이 내 귀에까지 들어온 이유가 있구나.”
“에이, 그게 어디 우리 회사만 그런가요? 대기업으로 자리를 옮긴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봐도 비슷하더라고요.”
“그건 그렇지만 너흰 신생이잖아. 네가 처음에 여길 그만두고 그쪽으로 옮긴다고 해서 내가 얼마나 걱정을 많이 했는데. 학원 운영하는 사람에게 너 같은 인재가 왜 필요한가 싶었거든.”
“저도 처음에는 그런 걱정을 했는데 생각보다 할 일이 많아요.”
“무슨 일?”
지대한의 두 눈이 반짝였다.
“하하하. 왜 그러세요, 형. 그런 건 말하면 안 되는 거 잘 아시면서.”
옛 친분을 이용해 편안하게 물었지만 이수철은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국정원에서 일할 때는 같은 팀이라서 뭐든지 다 이야기했는데, 이젠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지대한은 예전의 어수룩했던 이수철로 생각하면 안 되겠다고 느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