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8화
“저도 좀 알 수 있을까요? 계속 당하기만 했더니 울화병이 생길 것 같아서요.”
건우가 장난스럽게 울상을 지으며 농담 아닌 농담을 던졌다.
낙관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건우는 긍정적인 마음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이런, 여유가 넘치시는 것 같더니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으셨나 봅니다?”
“그게, 각오는 한 일이지만 막상 닥치니까 마음 같지가 않네요.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야 한국에서의 사업을 접고 미국으로 떠나면 된다고 하지만, 막상 그렇게 떠나버리면 그동안 제가 도와주던 분들의 손을 놔야 하지 않습니까? 그분들을 두고 마음 편하게 미국으로 갈 수 없을 것 같아서요.”
건우가 만든 초이스 장학회(Choi’s Choice Scholarship)가 1년에 도움을 주는 학생들만 수백 명이다. 그중에는 대학 졸업할 때까지 지원해주기로 한 경우가 상당수다.
그리고 군인, 경찰, 소방관 유가족에게도 개인적으로 엄청난 거액의 성금을 내놓고 있다.
이것만 합쳐도 1년에 건우가 부담하는 기부금이 500억 원이 넘는다.
그 덕분에 이제야 겨우 삶에 약간의 여유가 생겼는데 만약 이번 싸움에서 진다면 건우만 바라보고 살던 사람들은 또다시 예전의 고달프고 팍팍한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말씀을 들으니 절대 싸움에서 지면 안 될 이유가 또 하나 생겼네요. 그런데 대표님.”
“네, 차 실장님.”
“너무 그렇게 속 끓이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요? 뭔가 제대로 된 실마리를 잡은 건가요?”
“애매하긴 한데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애매하긴 한데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게 대체 무슨 뜻이죠?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속을 더 끓일 것 같은데요.”
“하하하. 죄송합니다, 대표님. 조사를 해보니 생각보다 공격할 곳이 많아 놀라서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너무 허술해서요, 이게 진짜인지 아니면 함정을 파놓은 건지 처음엔 꽤 혼란스러웠습니다.”
그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줬다.
상황이 그렇게 여유가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차지훈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흘렀다.
“그 말씀은 지금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셨다는 뜻인 거죠?”
“네. 음,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전명우와 조순희 커플이 완전히 정신을 놨다고 해야 할까요. 세상이 변한 줄도 모르고 자신들이 마치 왕이라도 된 것처럼 겁도 없이 여기저기 똥을 싸고 다니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실 수 있으세요?”
“대통령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비리를 조심성 없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대기업을 협박해 모 재단에 강제 모금을 하도록 하고, 친분이 있는 기업에 일감을 몰아준 것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또, 10대 대기업 중에 6곳에서 뇌물을 받은 정황도 포착되었습니다. 그리고 부당한 인사개입은 넘치도록 많습니다.”
“맙소사. 그걸 다 대놓고 저질렀다는 겁니까, 몰래 숨겨서 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대통령이여?”
이야기를 듣던 건우도 어이가 없는지 입을 제대로 다물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대통령이 아니라 영부인인 황금숙이 저지른 일들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재미있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용선재 대표 와이프가 조순희인데, 그 여자가 황금숙이랑 둘도 없는 친구 사이입니다. 그리고 황금숙이 비리를 저지르도록 물심양면 도운 사람이 바로 조순희입니다. 그것도 꽤 소문이 나서 청와대 관계자 중에서는 조순희를 황금숙의 행동대장 또는 비선실세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합니다.”
“허, 호가호위가 따로 없네요. 그런데 차 실장님. 행동대장하고 비선실세는 완전히 다른 의미 아닙니까?”
건우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행동대장은 앞장서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고 비선실세는 뒤에서 일을 꾸미는 사람을 뜻한다.
한 사람이 완전히 상반된 별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행동대장처럼 보이는데 알고 보면 그게 전부 황금숙을 자신의 계산대로 움직이려고 하는 행동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잘 모르는 사람은 행동대장이라고 하고 눈치가 빠른 사람은 비선실세라고 부른다더군요.”
“와, 그 정도면 거의 막장인데요.”
“그래서 제가 표현을 이상하게 한 겁니다. 원래 전쟁이라는 게 내부 단속부터 확실히 하고 시작해야 이길 수 있는 건데 이런 식으로 난장판이면 우리가 건드릴 수 있는 약점이 굉장히 많습니다. 손으로 툭 건드려도 무너질 느낌이니 제가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아…. 참 반가운 소식이긴 한데, 무시무시하다는 교피아는 대체 뭐했을까요? 100년 가까이 대한민국을 암중에서 지배했다는 세력이 하는 일치고 너무 허술한 것 아닙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됐다.
건우가 지금 받은 느낌은 차지훈이 처음 조사 내용을 확인했을 때 느낌과 다르지 않다.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하고 애매한 불안감.
그래서 차지훈이 아까 ‘애매하긴 한데 그런 것 같기도 하다.’는 알쏭달쏭한 말을 던진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대통령이 그렇게 시원찮을지 몰랐던 것이지, 교피아 내부 단속을 잘했을 겁니다. 지금까지 조사한 결과만 봐도 교피아 내부 약점은 하나도 없습니다. 문제를 일으킨 건 정부 아니면 여당입니다.”
“그럼 교피아의 실수는 단 하나네요. 신뢰할 수 없는 세력과 손을 잡은 것.”
“맞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게 다 조순희 덕분입니다. 영부인의 가장 친한 친구이며 교피아 수장의 형수. 이 두 가지 위치 덕분에 두 세력이 아무 걱정 없이 손을 잡았는데 그게 자충수가 된 것이죠.”
“잘하면 그걸로 용선재 대표까지 몰락시킬 수도 있겠군요.”
“충분히 가능합니다. 조순희가 하는 일을 용선재가 몰랐을 리 없을 겁니다. 설사 몰랐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조순희가 집중포화를 받는 순간 용선재도 큰 타격을 입게 될 테니까요.”
“일단 틈은 찾아냈는데 그걸 어떻게 공론화시킬 생각이십니까?”
대통령과 영부인이게 문제가 많다고 해도 그걸 언론에 터트리는 건 다른 문제다.
강압적인 언론 장악 정책 덕분에 지상파 세 곳이 대통령 편인 상황에서 아무 생각 없이 비위사실을 알렸다간 오히려 역공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
황금숙과 조순희가 그렇게 뻔뻔하게 행동했던 것도 이처럼 확실하게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좀 더 확실해지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몇 가지 시나리오를 만들고 있는데 그게 완성되면 다시 보고드리러 오겠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그때까지 마음 편하게 계십시오.”
“알겠습니다. 차 팀장님만 믿고 저는 제 할 일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시면 됩니다. 대표님이 지금처럼 학생들과 학부모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그쪽도 쉽게 우리를 못 건드릴 테니까요.”
하지만 이번만큼은 차지훈의 예상이 빗나가고 말았다.
그도, 그의 팀도 전명우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무작정 밀어붙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
유난히 황사가 심했던 아침.
애오개 언덕에 우뚝 선 두 개의 초이스 에듀 빌딩도 뿌연 스모그에 둘러싸여 흐릿하게 보였다.
그러나 초이스 에듀는 아침부터 활기차게 움직였다. 재수 학원도 운영하기 때문에 아침 일찍 등원한 수백 명의 재수생이 초이스 에듀가 마련한 최신식 열람실에서 자율학습을 하고 있다.
첫 수업은 9시부터지만 대부분의 재수생들은 7시도 채 되기 전에 학원 앞에 나타난다.
직장인들 출근 시간과 겹쳐 힘들게 학원에 오느니 좀 더 서둘러 편하게 오겠다는 생각도 있지만, 사실은 그것보다 초이스 에듀의 최신식 열람실 때문이었다.
열람실은 각종 시청각 시설은 물론이고 학생들이 가장 마음 편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첨단장비들이 구비돼 집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몇 배는 효율이 좋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래서 이곳 재수생들은 수업이 시작하기 9시 전까지 열람실에 앉아 자신이 부족한 공부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9시 5분 전.
수업 예비종이 울리자 재수생들은 각자 가방을 들고 교실로 이동했다.
답답하게 막히던 학원 앞 마포대로도 어느 정도 정체가 풀렸다. 차가 줄어든 만큼이나 스모그도 줄어들었으면 좋으련만 뿌연 먼지들은 마포지역 전체에 내려앉아 움직일 줄 몰랐다.
잠시 후 공덕역으로부터 수십 대의 검은색 차량 행렬이 스모그를 뚫고 마포대로에 들어섰다. 차량흐름을 방해할 만큼 느린 속도였다.
하지만 누구도 긴 차량 행렬을 향해 클랙슨을 누르지 않았다. 경찰차의 호위까지 받고 있는 공무 차량들이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마포대로에 나타난 긴 차량 행렬은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이스 에듀 건물 앞에 차례로 섰다.
어떻게 알았는지 수십 명의 기자들이 나타나 제일 선두 차량을 에워쌌다. 지상파 중계차도 대기하고 있었고, 심지어 방송국 헬기도 떴다.
타다다다닥.
수십 대의 자동차 문이 일제히 열렸다. 검은색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차량에서 줄지어 내렸다. 몇몇 사람은 트렁크를 열어 커다란 파란색 박스를 꺼내 들었다.
중계차의 지휘를 받던 기자가 선두 차량에서 내린 중년의 대머리 남자에게 마이크를 내밀었다.
“유 부장님. 지금부터 초이스 에듀에 대한 전격적인 압수수색이 시작된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이유로 이번 결정을 내리신 겁니까?”
유 부장이라고 불린 남자는 때맞춰 나타난 기자들의 행렬을 흐뭇한 얼굴로 둘러봤다.
그는 서울검찰청 소속 부장검사였다.
“자세한 건 조사 후에 발표하겠습니다.”
“초이스 에듀의 최건우 대표는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정확한 압수수색 이유를 알려주시지 않으면 여론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흠. 죄를 지은 사람이 있으니 압수수색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유 부장검사의 당당한 발언에 수십 대의 카메라에 달린 플래시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지금 그 발언은 최건우 대표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뜻입니까?”
“글쎄요.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그건 조사해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유 부장님. 아무리 그래도 이유 없는 압수수색은 국민들을 납득시킬 수 없습니다. 대략적인 이유라도 알려주십시오. 국민들이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수행원들이 억지로 뚫은 길을 여유롭게 지나가던 유 부장검사의 발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섰다.
“초이스 에듀는 학원이지만 하나의 기업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기업들이 가장 많이 저지르는 범죄가 뭔지 아십니까?”
“혹시 탈세입니까?”
“탈세라? 그럴 수도 있겠군요.”
확실하지 않은 애매모호한 대답이었다. 그렇지만 이 자리에 온 기자들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받아적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중계차에 있는 카메라에도 고스란히 찍혔다.
“그럼 최건우 대표가 탈세를 저질렀다는 말씀입니까?”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자세한 건 우리 조사가 끝난 후 알려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최건우 대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구속 영장이라도 발부된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참고인으로 임의동행을 요청할 생각입니다. 그럼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유 부장검사는 초이스 에듀 앞 계단에 올라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거의 오십여 명의 검찰청 직원들이 그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릿한 웃음을 짓던 유 부장검사가 큰소리로 외쳤다.
“지금부터 압수수색을 시작한다. 압수할 물품들은 사전 회의에 이야기한 내용을 그대로 따른다. 모두 출동.”
외침이 끝나자 대기하고 있던 인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계단을 오르고 빠른 속도로 초이스 에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학원을 지키는 경비원들이 있었지만 무슨 지시를 받았는지 아무 대응도 하지 않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대체 무슨 일이야?”
검찰청에서 출동한 모든 인원이 사라지자 파마머리의 기자 한 명이 물었다.
“글쎄. 나도 갑자기 연락을 받아서 제대로 내용은 알지 못해. 그냥 오늘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기사화하라던데, 넌 어때?”
“나도 마찬가지야.”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이야? 다른 곳도 아니고 초이스 에듀를 압수 수색을 하다니.”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최근에 정부가 하는 행동이 이상했어. 초이스 에듀가 운영하는 교습소를 가지고 골목상권 침해니 어쩌니 하며 억지를 부렸잖아. 이번 일도 그것과 관련된 일이 아닐까?”
“그럼 정부가 초이스 에듀랑 전쟁이라도 벌인다는 거야?”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솔직히 그동안 정부랑 초이스 에듀 관계가 불편했던 건 사실이잖아. 이번에 제대로 칼을 뽑은 거겠지.”
“허. 재미있게 됐네.”
“그렇지? 우리야 누가 이기든 기사만 내면 되니까. 당분간 취재 걱정은 없어서 좋네, 하하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