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4화
“반갑습니다, 소하정 님. 다행히 나와 주셨네요. 전화로 계속 귀찮게 해드렸던 차지훈이라고 합니다.”
서울 은평구 불광동의 한적한 카페에 모자와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들어오자 차지훈이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네, 안녕하세요.”
“쉽지 않은 결정이셨을 텐데 용기를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생각을 해봤는데 평생 이렇게 병신처럼 살 순 없을 것 같아서요. 그런데 차 실장님, 혹시 여기서 이야기를 하다가 다른 손님이 들어오면….”
소하정은 카페를 두리번거리며 불안한 어투로 말했다.
어렵게 용기를 냈지만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다.
“그 문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 이 카페는 저희가 빌려서 다른 손님은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러니 편안하게 저와 이야기를 나누시면 됩니다.”
“아… 다행이네요. 혹시 제가 유난스러워 보여도 이해해 주세요.”
“아닙니다. 소하정 님이 어떤 일을 겪으셨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까요.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커피나 차라도 한잔 드시겠습니까?”
“여길 빌렸으면 일하는 직원도 없을 텐데 어떻게…?”
“제가 바리스타 자격증이 있거든요. 커피 정도는 곧잘 만듭니다. 차는 티백에 뜨거운 물만 부으면 되니 어렵지 않고요.”
차지훈은 왕년에 잘나가던 국가 정보 요원이었다.
일의 특성상 잠복근무가 많았다.
목표물이 생기면 단순히 차 안에 앉아 지켜볼 때도 있지만 가게 종업원 같은 역할로 분장해 좀 더 적극적으로 접근할 때도 많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러운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바리스타, 소믈리에 같은 종류의 자격증을 여러 개 따두었다.
“로즈마리 티가 있으면 그걸로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차지훈은 주방으로 들어가 전기 주전자에 물을 넣은 다음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물이 끓는 동안 수납장에 있는 로즈마리 티백을 꺼내 머그컵에 넣고 소하정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소하정은 2010년 중국 광저우 아시안 게임을 1년 앞둘 때만 해도 조정 에이트 부문 국가 대표 선수였다.
비인기 종목이지만 금메달 전망이 밝았기 때문에 팀 내부의 사기도 좋았다.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만 따면 국민들이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져줄 거라는 핑크빛 희망도 있었다.
그러나 용현철의 등장으로 소하정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누가 봐도 겨우 초보 수준을 벗어난 보잘것없는 실력인 용현철이 국가 대표라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협회와 감독은 선수들의 반대를 묵살했다.
한 명이 새로 들어온다는 건 한 명이 새로 나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덟 명이라는 정원이 정해진 만큼 용현철이 들어오면 여덟 명의 선수 중 한 명은 국가 대표에서 탈락해야 했다.
사실 원래 탈락 예정자는 소하정이 아니었다.
그가 한국 조정계에서 최고의 실력자는 아니더라도 최소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드는 베테랑이었다.
그러니 아시안 게임 메달을 위해서라도 소하정을 탈락시킬 순 없었다.
감독이 정한 최종 탈락자는 다른 사람이었는데 하필이면 그가 소하정의 절친한 친구였다.
정의감이 남달랐던 소하정은 친구의 탈락을 인정할 수 없다며 감독에게 항의했고, 그 항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언론에 알리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까지 했다.
그게 소하정의 실수였다.
용현철이 그저 좀 잘사는 집안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지 그 뒤에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하는 교피아의 수장과 대통령을 쥐락펴락하는 영부인이 버티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걸 알았다면 아무리 정의감이 넘치는 소하정이라도 절대 언론에 알리겠다는 협박 따위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확히 누군지는 몰라도 막강한 권력자가 뒤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협박 이후였다.
훈련이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납치를 당해 폭행을 당했다.
심한 폭행은 아니고 겁을 주는 정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혈기왕성했던 소하정은 곧바로 그 사실을 경찰과 언론사에 알렸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신문 뉴스가 아니라 무자비한 두 번째 폭행이었다.
폭행을 당하는 과정에서 어금니와 갈비뼈 그리고 왼쪽 다리가 부러졌다.
회사에 다니고 잘 다니고 있던 가족들은 모두 직장에서 쫓겨났다.
항의해도 소용이 없었다.
경찰에게 ‘그냥 닥치고 조용히 사는 게 신상에 좋을 거다.’라는 잔인한 조언을 들어야 했다.
부상을 이유로 국가 대표에서 잘렸다. 자신이 편을 들어줬던 친구는 가장 앞장서서 소하정을 외면했다.
삐이익 하는 전기 주전자 소리에 차지훈은 상념을 멈추고 머그잔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로즈마리 특유의 향이 카페 전체에 금방 퍼져 나갔다.
“로즈마리는 심신을 안정화시키고 정신을 맑게 해준다고 하지요.”
소하정 앞에 머그잔을 내려놓으며 차지훈이 말했다.
“그래서 저도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불면증에 시달릴 때가 많거든요. 비가 올 때면 특히 그래요. 다리가 부러졌다 붙은 자리가 계속 사람을 괴롭히네요.”
“후회하십니까?”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소하정은 그 말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후회합니다. 용현철 뒤에 그렇게 대단한 인간들이 버티고 있는 줄 알았으면 현실과 타협하고 조용히 지냈을 겁니다. 여대수 그 개자식 편도 안 들었을 거고요.”
여대수는 원래 에이트 팀 탈락 예정자였던 사람의 이름이다.
“저도 똑같이 조언을 해드렸을 겁니다. 세상은 공평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세상이거든요.”
“20대 중반에는 그걸 몰랐습니다. 혈기왕성했으니까요.”
“안타깝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후회하느니 복수하셔야죠.”
“네, 저도 그러려고 나왔습니다.”
“TV는 보셨죠?”
“봤습니다, 용현철 입학 비리 보도. 기대 안 했는데 정말 나오더군요.”
미친 듯이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 하나로 몇 년을 고생했던 가족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당시 무자비하게 당했던 폭행도 두려웠다.
처음 1년간은 수면제 없이는 잠을 잘 수 없었고, 이후에도 신경 안정제를 먹으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끔찍한 공포이며 트라우마였다.
그 상처를 억지로 덮을 수 있게 됐을 때쯤 차지훈에게 연락이 왔다.
한 달 넘게 설득과 거절을 거듭해왔다.
복수는 하고 싶었지만 경찰과 언론을 좌지우지하는 용현철의 뒷배가 마음에 걸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완벽하게 보호해 주겠다는 말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 말을 순진하게 믿기엔 친구였던 여대수의 배신이 너무나도 뼈아팠다.
망설이는 소하정에게 차지훈이 결정적인 한마디를 던졌다.
‘언론과 경찰이 나설 수밖에 없게끔 용현철을 흔들어 보겠다. 그걸 보고 판단해 달라.’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냥 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차지훈의 장담처럼 정말 용현철의 입학 비리 문제가 터졌다.
바닥까지 내려온 건 아니지만 자신이 한 팔을 거든다면 완벽하게 숨통을 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7년여 만에 이 자리에 나온 것이다.
“이제 시작입니다. 제가 준비한 건 아직 두 개가 더 남았습니다. 입학 비리와 비슷한 급의 폭탄으로요. 여기서 소하정 님이 도와주신다면 용현철을 완벽하게 몰락시킬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음. 증언…하겠습니다.”
“녹음해도 되겠습니까?”
“네.”
“본명이 필요할 수도 있고 법정에서 증언을 하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소하정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차지훈은 한 번 더 확인 작업을 거쳤다.
“저와 제 가족을 완벽하게 보호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죠?”
“물론입니다. 원하신다면 해외에서 지내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그것만 확실하면 무서울 게 없습니다. 지금 곧바로 증언 시작할까요?”
“차를 다 마시고 하셔도 됩니다.”
“괜찮습니다. 향만 맡아도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네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차지훈은 고개를 숙여 꾸벅 인사를 한 뒤 녹음기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REC 버튼을 꾹 눌렀다.
“대략적인 상황은 아실 테니 가장 참담했던 순간을 먼저 이야기하겠습니다.”
“순서는 상관없습니다. 편안하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첫 번째 폭행을 당하고 집에 돌아와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한 시간 정도 있으니 경찰 두 명이 찾아왔더군요. 납치당해 협박받고 맞았다고 말했는데 반응이 시큰둥했습니다. 순간 화가 났지만 너무나도 억울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제가 당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굉장히 건성으로 설명을 듣더니 알았으니 일단 조사를 해보겠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5분 정도 후에 다시 현관 벨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경찰이 다시 찾아온 줄 알고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그날 저를 억지로 데려가 때리고 협박했던 놈들이 또다시 저를 찾아온 거였습니다.”
“경찰이 다녀간 직후에요?”
“네.”
“굉장히 의심스러운 상황이네요. 그 부분은 다시 자세하게 파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 상황만으로 보면 경찰과 납치범들이 한통속으로 보였다.
“이야기 계속할까요?”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놈들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재빨리 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저도 힘이라면 어디서 잘 안 뒤지는 편인데 몇 명이 한꺼번에 밀어붙이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집에서 두 번째 폭행을 당한 겁니까?”
“아니요. 이웃들이 듣고 신고할까 봐 그런 건지 제 입을 억지로 막고 다른 곳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미친 듯이 폭행을 시작했습니다. 이가 부러지고, 갈비뼈가 부러지고, 다리가 부러졌는데도 때리는 걸 멈추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순간 이대로 죽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두들겨 맞는 게 너무 아파서 오히려 제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정말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습니다.”
소하정이 침을 삼켰다.
“정말 미칠 듯이 때리다가 어느 순간 구타를 멈췄습니다. 이제야 다 때렸나 싶어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제가 감금된 곳 문이 열리고 사람이 한 명 들어왔습니다. 아는 얼굴이었습니다.”
“누구였습니까, 그 사람이?”
“용현철이었습니다.”
“네? 용현철이요? 그때 용현철이 고등학생이었는데 고문이나 다름없는 짓이 벌어지는 곳에 나타났다고요?”
“네, 7년이 지났지만 확실합니다. 그놈의 히죽거리는 얼굴이며 제게 했던 말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소하정의 하얀 눈동자에 붉은 핏줄이 섰다.
강한 분노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용현철이 뭐라고 한 겁니까?”
“흙수저도 안 되는 놈이 배운 것 없이 기어오른다. 돈도 실력인 걸 몰랐느냐, 주는 대로 처먹을 것이지 왜 기어오르느냐, 평생 노를 못 잡게 만들어 주겠다, 거지가 거치처럼 살아야지 기어오르면 안 된다. 진짜 거지가 되고 싶은가 본데 그렇게 만들어 주겠다, 네 가족 전부 다.”
“그 말을 전부 용현철이 한 겁니까? 성인도 못 된 그 자식이?”
“네. 이것도 전부 기억한 건 아닙니다. 사실 제가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닌데 너무나도 끔찍한 기억이라서 지금까지 잊어버리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용현철을 제 엄마 치맛바람에 휘둘리는 등신 같은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인간 자체가 쓰레기였네요. 안 되겠네요. 우리나라를 좀먹기 전에 그놈을 격리를 해버려야겠습니다.”
차지훈은 자기가 일을 당한 것처럼 진심으로 화를 냈다.
“그놈에게 당한 수모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꼭 대가를 받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차 실장님. 이런 이야기도 도움이 되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입학 비리는 따지고 보면 용현철이 아니라 용현철 엄마가 주체가 돼 저지른 짓입니다. 그래서 그놈이 몰랐다고 하면 처벌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소하정 님의 증언이라면 다릅니다. 당시 나이가 미성년자였다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다른 두 건의 폭탄과 잘 묶으면 어렵지 않게 매장시킬 수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이네요.”
“생각만 하지 않고 현실에서 일어나도록 할 겁니다. 나머지 이야기도 계속 해줄 수 있으시죠?”
“그것 말고도 몇 개 더 있습니다. 몸을 겨우 추스르게 되자 친구였던 여대수까지 데려와 저를 조롱한 적도 있고… 그리고 또….”
***
고용이 불안정해지면서 안정적인 직장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공무원과 교사도 그런 직업 중 하나였다.
그 덕분에 그런 직업과 관련된 커뮤니티나 인터넷 카페도 매우 활성화되었다.
합격자들은 자랑스레 합격 수기를 남기고 응시생들은 그런 글을 읽으며 시험 준비에 참고를 했다.
건신건정(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은 체육교육학 쪽으로 가장 유명한 카페다.
그런데 최근 이 카페에 올라온 묘한 글들이 응시생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임용 시험에 도움이 되는 글이 아니었다.
한가지 의혹이 담긴 게시물이었다.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용현철하고 친구 사이인데 임용 시험에 붙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임용 시험은 굉장히 어려워서 고시원 골방에 틀어박혀 미친 듯이 공부해도 붙을까 말까라고 들었다. 그런데 나는 용현철이 공부하는 꼴을 한 번도 못 봤다. 집에서 공부할 수 있지 않으냐고?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얘는 이틀에 한 번 술 마시고 이틀에 한 번은 클럽에 가서 여자를 꼬시고 다닌다. 그런 놈이 과연 임용시험 공부할 시간이 있었을까? 나도 몰랐던 엄청난 천재일 수도 있는데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람들 이야길 들어보면 공부에 별 소질이 없었다고 한다. 그럼 어떻게 임용 시험에 붙은 걸까? 이유 아는 사람 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