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236화 (236/256)

제236화

Rrrr

“네, 차지훈입니다.”

요즘 차지훈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만큼 바쁘다. 그가 하는 일의 성과에 따라 초이스 에듀의 미래가 달라지기 때문에 무엇 하나도 허투루 할 수가 없었다.

정신없이 서류 작업을 하는 와중에 그의 전화기에 낯선 번호의 전화가 걸려왔다.

고민도 하지 않고 곧바로 받았다. 지금 이 전화기는 매주 중요한 사람들만 번호를 알고 있다.

- 저… 소하정입니다.

“네, 소하정 님.”

소하정은 용현철에 밀려 국가대표에서 밀려났던 조정 선수였다.

- 갑자기 전화를 드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사소한 일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연락 달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소하정 님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람입니다. 필요할 때면 마음 편하게 전화주시면 됩니다.”

- 매우 중요한 사람이라…. 그 말 굉장히 기분이 좋네요.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소리까지 들어서 자존감이 많이 떨어졌었는데.

“혹시 용현철이 그 말을 한 겁니까?”

- 네.

“정말 판에 박힌 뻔한 위로처럼 들리겠지만, 그딴 헛소리 따위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제 엄마 아니면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쓰레기입니다. 그딴 놈보다 자기 힘으로 국가대표 자리를 꿰찼고, 불의에 맞설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소하정 님이 훨씬 대단한 사람입니다.”

뻔하지만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소하정도 그걸 알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차지훈의 설득에 넘어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 제가 그렇게 대단한 인간은 아닌데…, 감사합니다. 사실, 조금 전에 용현철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그것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았었는데 차 실장님 덕분에 힘이 나네요.

“용현철에게서요? 갑자기 무슨 일로요? 한동안 연락 없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그랬죠. 저를 괴롭히는 일도 시들해졌는지 요 몇 년 조용했는데 갑자기 얼굴을 보자고 전화가 왔습니다. 할 말이 있다고.

몇 년이 지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소하정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묻어났다. 쉽게 잊을 수 있는 기억이 아니었다.

이대로 계속 간다면 앞으로 십 년 이십 년이 지나도 그때의 상처가 트라우마가 되어 그를 괴롭힐지도 모른다.

“만나 보실 생각입니까?”

- 제게 선택의 여지가 있나요?

“만나기 싫으시면 안 만나셔도 됩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 생각을 해봤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 몇 년간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저를 찾아와서 예전처럼 두들겨 패고 그러진 않을 것 아닙니까?

“장담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 예전에는 다짜고짜 찾아와서 저를 괴롭혔는데 이번엔 전화로 먼저 연락을 했어요. 그렇다는 건 뭔가 제게 부탁이나 당부할 일이 생겼다는 뜻 아닐까요?

소하정의 말에 차지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 저, 차 실장님?

“아, 죄송합니다. 소하정 님이 무슨 마음으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 생각을 해봤습니다.

- 무슨 마음일 것 같은데요?

“소하정 님 두 손으로 직접 복수하고 싶으신 거죠? 용현철을 만나서 도발하실 생각이신 겁니까?”

괜찮은 계획이었다.

한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진득하게 맺혀 있지만 그걸 극복하고 직접 복수를 꿈꾸는 모습이.

- 역시 바로 알아들으시네요. 맞습니다. 단지 제가 당한 일을 증언하는 것만으로는 성에 안 차서요. 하지만 그놈이 그놈 입으로 직접 제게 했던 일을 말하게 만든다면, 그리고 그걸 녹음할 수 있다면 차 실장님이 계획하는 일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그놈을 직접 봐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 그럼요. 괜찮다마다요. 이런 식의 복수, 꿈에서만 수십 수백 번은 꿨습니다. 그렇지만 한 번도 현실이 될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하늘이 도왔는지 이런 기회가 찾아온 것 아닙니까? 제 손으로 직접 그놈의 숨통을 끊을 기회가요.

뿌드득 이 가는 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렸다. 용현철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깊은지 지금 상황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려 저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소하정 님 말씀처럼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카드를 가질 수 있게 되니까요.”

- 그럼 도와주세요.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던 두려움마저 잘라낸 듯 단호한 목소리였다.

“원하신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소하정 님에게 어떤 피해도 가지 않도록 약속드리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지긋지긋했던 악몽을 이제야 끝낼 수 있을 것 같군요.

***

“여! 얼굴 좋아졌다. 못 본 사이에 선배 신수가 아주 훤해졌네. 요즘 좀 살만한가 봐?”

약속 장소에 나타난 용현철이 조롱하듯 웃으며 소하정에게 제일 처음 건넨 말이었다.

뻔뻔한 행동에 웃음이 났다. 만약 용현철이 나타나 눈물을 지으며 그동안 미안했다고 사죄한다면 그땐 어떡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그런 고민은 전혀 할 필요가 없었다.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세상이 용현철을 향해 손가락질하는데도 놈은 눈곱만큼도 반성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 한동안 네 얼굴을 안 봐서 그런가 보다.”

소하정의 너무나도 솔직한 말에 용현철의 얼굴에 걸렸던 미소가 사라졌다.

“오, 선배. 한동안 안 맞았더니 간이 좀 커진 거야?”

“그건 아니고 재수 없는 네 낯짝을 안 보니까 살 것 같더라고.”

“큭. 크크크크크. 이 선배 보게. 죽고 싶어 환장했어? 살기 힘들어서 자살하고 싶은 거야? 내가 도와줄까, 응?”

계속된 도발에 인내심이 바닥난 용현철은 금방 본성을 드러냈다.

바로 이 표정이었다. 몇 년이 지나도 매일 같이 악몽을 꾸게 만들었던 뱀처럼 섬뜩한 눈빛.

소하정은 어렵게 용기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이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지는 걸 느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어 봐도 마음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바로 그때 그의 귀에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 소하정 님, 떨 것 없습니다. 여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카페입니다. 지금 저놈은 소하정 님에게 어떤 위해도 가할 수 없어요. 그리고 제가 지켜보고 있으니 안심하세요. 지금까지 굉장히 잘하고 있습니다. 이제 심호흡 몇 번 하고 마음이 좀 편해지면 자극을 더 줘 봅시다. 단순한 놈이라서 금방 떡밥을 물 것 같네요.

정말 작은 송신기를 귓속에 숨겨놨기 때문에 용현철은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후우···.”

“얼씨구, 한숨을 쉬어? 진짜 제정신이 아니구나? 내가 요즘 언론에서 두들겨 맞으니까 되게 만만하게 보였나 봐. 그지? 예전처럼 두들겨 맞아서 질질 싸고 싶은 거야? 설마 기억이 안 나는 건 아니지?”

“어떻게 잊겠어. 네가 깡패 새끼들까지 동원해서 사람을 반병신으로 만들었던 일인데.”

“머리가 돌아버린 줄 알았더니 잘 기억하네. 그래, 맞아. 선배를 반병신으로 만든 사람이 나잖아. 이도 부러지고, 갈비뼈도 부러지고, 왼쪽 다리인가? 그거도 부러졌었지, 아마? 그런데도 이렇게 기어오르는 거야? 대체 뭘 믿고?”

소하정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아까처럼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기쁨의 세레모니와 비슷했다.

용현태가 자신이 저지른 일을 너무나도 쉽게 실토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안하무인인 줄은 알았지만 언론의 표적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까지 조심성 없이 굴 줄은 몰랐다.

“당연한 걸 이야기하는데 믿는 게 있어야 해?”

“와나! 이런 씨발, 미치겠네. 이봐, 소하정 씨. 요즘 내가 언론에서 까이고 있다고 존나 만만하게 보이나 본데 지금 이거 실수하는 거야. 언론에서 이러는 게 얼마나 갈 것 같아?”

“얼마나 갈 것 같으냐니? 입학 비리에 임용 시험 비리까지 저질렀으면 심각한 거 아니야?”

“아하, 이거였어? 쥐뿔 가진 것도 없는 놈이 왜 이렇게 모가지가 뻣뻣하나 했더니 믿는 게 종이 쪼가리 몇 장이 시끄럽게 떠드는 거였어? 그런데 말이야, 이거 오래 안 가.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 줄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나도 알아, 잘 난 집안이라는 거.”

“훗. 순진한 이야기 한다. 그냥 잘 난 집안이 아니야. 우리 아빠가 용선재고, 우리 작은 아빠가 용선국이야. 넌 누군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용씨 집안 직계야. 장관이나 국회의원도 우리 집안 눈치를 봐.”

“그렇겠지. 그러니까 경찰에 신고했는데도 오히려 내가 협박을 당했지.”

“잘 아네. 그렇게 잘 알면서 왜 이렇게 기어오르는 거야? 정말 미친 건 아니지?”

용현철은 머리를 향해 검지를 펴서 빙글빙글 돌렸다.

“정의는 승리한다고 믿어.”

“뭐? 푸하하하하하하하. 뭐가 승리해? 정의? 이런 병신 새끼. 나 좀 웃어도 되지? 크크크크크. 지금 혹시 중이병 놀이 하는 거야? 진심으로 내가 잡혀들어갈 것 같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럴 일은 절대 없어. 증거가 있어야 나를 잡지.”

“모르지 그건. 아직 수사 중인데.”

“경찰이 제대로 수사할 것 같아? 그리고 언론에서 떠드는 거 봤어? 내가 미리 임용시험 문제를 빼돌려서 시험을 봤대. 병신들. 그거 절대 아니거든. 그러려면 포섭할 사람이 몇 명인데 그런 멍청한 짓을 해. 그냥 실력 있는 애 한 명만 포섭하면 안전한데.”

“그런 이야기를 내게 쉽게 해도 돼? 내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어쩌려고?”

지금 상황을 눈치채고 거짓 정보를 흘리는 건가 싶을 정도로 용현철은 조심성이 없었다.

“말하고 싶으면 말해. 그런데 말이야, 네 말을 누가 믿을까? 예전에도 경험해봤잖아. 경찰에 신고해도 언론에 제보해도 무시만 당할 거야. 그리고 결정적으로 네 가족을 생각해야지. 예전에는 직장에서 잘리는 것 정도로 넘어가 줬지만 이번에는 적당히가 안 될 수도 있어. 온 가족이 전부 다리가 부러지면 그것도 재미있겠다, 그지?”

“이런 개자식이!”

가족을 들먹이는 용현철의 말에 소하정은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럽게 밀려난 의자가 쿠당탕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뒹굴자 카페 손님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용현철의 입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워워. 진정해. 사람들 많은 곳에서 주먹질이라도 하려고?”

“너, 이 새끼. 만약 우리 가족 건드리면 내가 절대 가만 안 있을 거야. 반드시 찾아가서 죽여버릴 거야.”

- 소하정 님. 진정하세요. 소하정 님 가족이 잘못될 일은 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가족들은 모레 미국으로 떠나는 거. 용현철은 아무것도 못 합니다.

소하정이 과하게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자 차지훈이 재빨리 마이크를 들고 다독였다.

“아이고 무서워라. 새끼, 가족 이야기 하니까 존나 흥분하네. 그러니까 안 될 거 알면서 왜 기어올라.”

“제발 가족은 건드리지 말아줘.”

“너만 조용히 찌그러져 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줄까?”

“….”

“공부 좆도 안 한 내가 어떻게 임용시험에 합격했을까? 사실 고사장 내 뒷자리 놈을 포섭했어. 내 주변에 있는 놈 중에 그놈이 제일 공부를 잘했거든. 시험은 그놈에게 맡기고 나는 대충 찍고 잤어.”

“설마 컨닝을 했다는 거야?”

“에이, 그건 아니지. 지켜보는 눈이 몇 갠데 그런 짓을 해? 그냥 답안지에 이름과 수험번호를 서로 바꿔 적었지. 나는 합격해서 좋고, 그놈은 평생 만지지도 못할 돈을 벌 수 있어 좋고. 얼마나 좋아.”

“그런데 이 이야기를 내게 하는 이유가 뭐야?”

“나한테 복수하고 싶잖아. 내가 많이 괴롭히긴 했지. 그래서 나한테 엄청난 약점을 이야기해주는 거야. 복수하고 싶으면 그걸 가지고 경찰이나 언론에 알려. 경찰이나 언론이 별 관심을 안 가져주겠지만, 혹시 모르잖아? 네 정성이 하늘에 통할지도. 그렇게 되면 네 가족이 대신 죽어 나가겠지.”

소하정의 귀에 ‘빙고’라고 기분 좋게 외치는 차지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같이 즐거워하고 싶었지만 소하정은 애써 흥분을 가라앉혔다. 아직은 좋아할 때가 아니었다.

“너무 자신감 넘치는 것 아니야? 정말 미친 척하고 언론에 제보하면 어쩌려고?”

“아까도 이야기했잖아. 할 테면 해봐. 과연 경찰이 움직일까? 우리 집안만 내 뒷배가 아니거든. 영부인이 우리 이모야. 친 이모는 아닌데 우리 엄마랑 세상에서 둘도 없는 친구 사이라서 이모라고 불러. 이모가 날 되게 좋아해서 내 부탁은 웬만하면 들어줘.”

“영부인이면 대통령 부인이잖아. 대통령도 아닌데 무슨….”

“뭘 모르네. 완전 머슴처럼 이모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줘. 내가 볼 때 지금 진짜 대통령은 우리 이모고 전명우 그 양반은 좆밥 허수아비야. 크크크. 오죽하면 이모가 전명우를 보고 그런 말을 했을까.”

“…….”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했지만 그냥 침묵을 지켰다.

“뭐라고 했느냐면.”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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