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240화 (240/256)

제240화

“그래도 안 되면요?”

조순희가 불안한 듯 물었다.

“무조건 되게 만들어. 무조건. 설마라는 생각 절대 하면 안 돼. 내가 문제가 아니고 당신이 문제야. 솔직히 나는 친일파 집안이라고 욕 좀 먹으면 돼. 그렇지만 당신이 저지른 일은 범죄야. 잡혀들어갈 수도 있다고.”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러겠어요? 나 혼자 꾸민 일도 아니고 금숙이랑 같이 한 일인데. 아무리 여론이 안 좋아도 현직 대통령 부인을 누가 잡아넣는다고.”

“어허, 이 사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사실을 말한 건데 뭘 그렇게 정색해요.”

“현철이 녹취록 못 들었어? 금숙 씨가 대통령을 자기 장난감이라고 했다며?”

“농담처럼 말한 건데. 현철이가 그걸 듣고 있는 줄은 몰랐어요.”

“사실이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대중들이 사실로 생각한다는 문제지. 그리고 대통령도 마찬가지야. 과연 현철이 말을 장난이라고 생각할까? 안 그래도 금숙 씨 때문에 자격지심이 가득한 사람인데.”

“하여간 가난한 집 출신은 그래서 어쩔 수 없다니까요. 얻어먹는 주제에 웬 자격지심?”

전명우도 전명우지만, 전명우 집이 문제였다. 전명우가 엄청나게 부잣집 딸과 결혼하자 그 집안에게 금전적 도움을 받는 걸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했다.

부모는 그나마 나은데 전명우 형제들은 물주라도 만난 것처럼 황금숙에게 돈을 받아 물 쓰듯이 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전명우에겐 콤플렉스가 된 것이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전명우가 현철이 말을 사실로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중요하지. 만약 그걸로 자격지심이 폭발한다면 더는 금숙 씨의 장난감이 되는 걸 거부할 수도 있어.”

“아무리….”

“장담할 수 없는 일이야. 상처 입은 짐승이 더 사나운 법이거든. 게다가 누가 뭐래도 현 대통령이야. 지금까지는 전명우의 암묵적인 인정이 있었기 때문에 금숙 씨가 제멋대로 국가 일까지 간섭할 수 있었던 거지, 그게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국민이 투표로 뽑아서 권력을 준 사람은 대통령이지 영부인이 아니니까.”

“그럼 어떡해요?”

“달랠 수 있으면 달래야지. 그런데 금숙 씨 성격에 제대로 달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장난감이라 생각했던 사람에게 고개를 숙일 수 있을 것 같아?”

용선재가 아는 황금숙 성격이라면 절대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조순희 이상으로 자기중심적이다.

“구속될 수도 있는데 설마요.”

“그래, 구속 직전까지 몰리면 손을 내밀 수도 있겠지. 그런데 민국당이랑 장문오가 문제야. 대충 넘어가게 둘 놈들이 아니거든.”

“아, 머리 아파. 정말 산 넘어 산이네. 일이 왜 이렇게 재수 없게 꼬여서는. 그런데 당신 학원은 괜찮을 것 같아요?”

“괜찮게 만들어야지. 그래도 다행인 건 수능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야. 이시기에 학원을 옮기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거든. 심리적 안정이 얼마나 중요한데 쉽게 학원을 옮겨. 설사 옮기고 싶어도 우리 학원보다 나은 곳이 초이스 에듀 밖에 없는데 거긴 이미 3월부터 정원이 꽉 차서 자리가 없어.”

“그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는 거예요?”

“그래. 두어 달만 버티면 사람들도 모두 잊을 거야. 친일을 내가 한 것도 아닌데 욕먹을 이유가 없지. 내년 3월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학생들이 몰릴걸?”

“다행이네요, 그건.”

“그러니까 이번 일이 더 커지지 않게 처남부터 만나봐.”

“알겠어요. 지금 바로 오빠한테 연락할게요.”

***

정치판이 요동치고 있다. 인터넷은 온통 용현철과 관련된 기사들뿐이었다.

댓글창은 이전투구의 현장으로 변했고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는 이번 사태와 관련해 자기의 주장이 옳다고 우기는 게시물들이 넘쳐나는 바람에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이미 올해 초부터 시작된 전쟁은 건우의 압도적인 우위로 진행되었다. 지금 정부, 여당 그리고 교피아는 자기 앞가림을 하느라 건우와의 전쟁은 신경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건우를 잊어버린 건 아니었다. 그러나 차지훈과 초이스 시큐리티 요원들의 계속된 공세를 막기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반격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건우는 아직도 배가 고팠다. 건우가 진정으로 바라는 건 정권 교체나 교피아의 몰락이 아니었다. 그건 최종 목적지로 가는 길을 방해하는 방해물에 지나지 않았다.

진짜 목적은 처음부터 오직 한 사람이었다.

용선재.

건우의 예전 삶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개자식’.

건우는 자신이 성폭행범 누명을 쓰게 된 진짜 배후를 알게 된 이후 혼자 있을 때는 용선재를 개자식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원한이 깊었다.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고 해서 그 기억이 지워지는 건 아니었다. 단지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위협이 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족에게 버림받고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채 쓸쓸하게 죽어가던 시간이 쉽게 잊힐 리가 없었다.

그래서 건우는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국가대표 선발, 한강대 입학, 임용, 병역 등 비리란 비리는 다 저지르고 다닌 용현철 덕분에 쉽게 승기를 잡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지금 상황이 용선재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주는 건 아니었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사람은 용현철과 더불어 그 일들을 뒤에서 꾸민 조순희와 황금숙이었다. 전명우도 대통령으로서 정치적 신뢰에 치명타를 입었다.

자신이 직접 저지른 비리가 아니기 때문에 대통령직은 계속 유지할 수 있겠지만 국민들에게 제대로 대통령으로 인정받을지는 다른 문제였다.

이틀 전 대통령 지지율 조사에서 전명우는 2%라는 말도 안 되는 지지율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게 전부였다.

용씨 집안은 과거 친일 행적이 국민들 앞에 까발려졌지만 그 사실로 그들을 단죄할 수 있는 수단은 없었다.

친일을 이유로 학교와 학원을 몰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심정적으로는 그러고 싶지만 법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여기서 건우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용선재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

솔직히 말하면 아직 용선재가 저지른 범죄는 어떤 것도 드러나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둘 중 하나다. 초이스 시큐리티 정예요원도 찾아내기 쉽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흔적을 숨겼던가 아니면 아직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던가.

만약 아직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지금의 단죄가 옳을 일일까?

이 명제가 어제부터 계속 건우를 괴롭혔다.

그렇지만 아무리 고민해봐도 결론은 역시 하나였다. 설사 일어나지 않은 범죄라고 해도 그게 일어나길 기다리느니 미리 응징하는 게 낫다는 결론이었다.

이 행동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선택이 최선이라고 믿었다.

Rrrr

완전히 마음의 결정을 내린 건우가 전화를 걸었다.

- 네, 대표님.

“밤새 고민해서 결정을 내렸습니다.”

- 목소리를 들어보니 대표님이 어떤 결론을 내리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며칠 전부터 세워둔 계획들, 그대로 진행할까요?

“네, 실행에 옮겨주세요.”

***

전다혜는 고3이고 기가 싱크빅을 다니고 있다. 원래는 초이스 에듀 수업을 듣고 싶었지만 경쟁률이 너무나도 치열해서 어쩔 수 없이 기가 싱크빅을 골랐다.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기가 싱크빅도 전통 있는 입시전문 학원이고 여전히 유명 스타 강사도 많았다. 초이스 에듀 수업은 인터넷 강의로 보충해도 충분했다.

그런데 최근 고민이 생겼다.

기가 싱크빅 대표인 용선재가 친일파 집안의 자손이라는 소문 때문이다.

지금 상황만 놓고 보면 소문이 아니라 사실에 가까웠다. 친구들이 캡처해서 보여준 친일인명사전에 용 씨 성을 가진 사람이 몇 명 있었다.

초이스 에듀만큼은 아니더라도 기가 싱크빅 또한 나쁘지 않은 학원이라 부러워하던 친구들도 얼마 전부터는 ‘쪽바리 학원생’이라고 놀리기 시작했다.

농담으로 한 말이라는 걸 알지만 수능을 앞둔 예민한 상황이라서 그런지 그냥 쿨하게 웃고 넘기기 어려웠다.

몰랐으면 모를까 알고 있는 상황에서 친일파 자손이 운영하는 학원에 다니는 게 너무나 찜찜했다. 짜증이 나고 스트레스가 생겨 안 그래도 속을 썩이던 변비가 더 심해졌다.

그 때문인지 불그스름한 뾰루지가 입과 코 주변에 자꾸 생기기 시작했다. 그게 신경 쓰이자 공부는 자꾸 뒷전으로 밀렸다.

엄마한테 학원을 옮기는 게 어떨지 물어봤지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한 달만 참으라는 하나 마나 한 소리만 들었다.

그렇지만 참아도 안 됐다. 친구들의 놀림도 계속돼서 어제는 큰 소리로 싸우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웃자고 한 소리에 죽자고 덤빈다고 전다혜만 이상한 취급을 받았다.

계속 스트레스만 쌓이자 이대로 공부를 포기해버릴까 하는 못난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면 자신만 손해인 걸 아는데도 자신에게 큰 기대를 하고 있는 엄마의 마음에 스크래치를 내고 싶었다.

정말 가기 싫었지만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무거운 발걸음으로 어쩔 수 없이 학교에 왔다.

오늘도 어김없이 김진숙과 고상희가 책상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는 전다혜에게 다가왔다.

주먹을 꽉 쥐었다. 오늘은 또 어떤 걸로 시비를 걸려는 건지,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였다.

“또 무슨 일이야?”

저절로 뾰족 선 물음이 나왔다. 그런데 두 사람이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분명 묘한 비웃음이 걸려 있어야 하는데 왠지 모르지만 부러워하는 눈빛이었다.

“다혜야, 혹시 학원 옮겼어?”

“무슨 학원? 기가 싱크빅?”

“응.”

“아니, 안 옮겼는데.”

“뭐어? 왜애? 왜 안 옮겨?”

이게 난데없이 무슨 말이지? 놀리는 건가 싶어 노려봤지만 그런 기색이 아니었다.

뭐지? 놀리는 방법을 바꾼 건가?

두 친구의 낯선 행동에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너희가 하도 쪽바리 학원이라고 놀려서 옮기고 싶은데 엄마가 그냥 다니래. 이제 한 달하고 조금만 더 다니면 되니까 참으라고.”

“헐, 대박! 너희 엄마 왜 그러셔? 당연히 옮겨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게, 나 같으면 당장 옮겼다.”

김진숙과 고상희가 참새처럼 시끄럽게 재잘거렸다.

이제야 확신했다. 신종 놀리기 수법이라고.

정말 심하다 싶었다. 적당히 하라고 소리를 지를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나도 옮기고 싶다. 그런데 어디로 옮기라고?”

전다혜의 엄마가 학원 옮기는 걸 반대한 건 주변에 기가 싱크빅만큼 잘 가르치는 학원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초이스 에듀는 제외하고.

“당연히 초이스 에듀지!”

“뭐? 너희 진짜 너무한 것 아니야! 거길 몰라서 안 들어가? 가고 싶어도 방법이 없으니까 못 들어가는 거지. 그러는 너희는 왜 안 들어가는데?”

“너, 설마 아직 몰랐던 거야?”

“뭘?”

분위기가 요상 했다. 분명히 놀린다고 생각했는데 놀리는 느낌과 너무나 달랐다.

처음부터 선망의 빛으로 쳐다보는 눈길도 신경 쓰였다.

“초이스 에듀가 기가 싱크빅 그만 두고 나온 학생들은 받아준다고 하던데.”

“뭐, 정말? 그게 정말이야? 나 놀리는 거 아니지?”

웬만해서는 놀라지도 대꾸하지도 않으려고 했는데, 이건 너무나도 의외의 소식이었다.

“진짜야. 지금 전교에 소문이 다 났어. 기가 싱크빅 다니는 애들은 무조건 오늘 당장 학원 옮긴다고 난리야.”

“아니, 왜?”

반가운 이야기이긴 한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친일파 후손이 운영하는 학원에 다니며 스트레스를 받는 학생들을 위해 한 달간 특별히 정원을 늘리기로 결정했다고 하더라. 단, 삼 개월 이상 다닌 학생들만 된대. 이럴 줄 알았으면 억지라도 기가 싱크빅 수강증을 끊어 놓는 건데.”

“아….”

멍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최건우 선생님 진짜 대단하지 않아? 예전부터 좋은 일을 많아하셔서 평소에도 존경하긴 했지만 이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시는 줄은 몰랐어.”

“그런데 원래 최건우 선생님이랑 용선재 대표랑 친했지 않아? 그래서 온라인 방문 학습인가 뭔가 하는 사업도 같이 한다고 들었는데.”

“예전에 친했으면 뭐해? 친일파도 보통 친일파 집안이 아니라고 하던데. 내가 그저께인가 어떤 칼럼을 봤는데 이완용을 능가하는 역사상 최악의 친일파 집안이래.”

“으아. 끔찍하다. 우리 학교가 그 집안이 운영하는 곳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나 같으면 진짜 전학 가고 싶을 것 같거든.”

전다혜를 사이에 두고 김진숙과 고상희의 수다가 계속되었다.

뭔가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전다혜도 아직 정신이 멍해서 두 사람이 수다를 듣고만 있었다. 귀에 제대로 들어오는 건 아니었지만.

“내 말이. 우리도 이런 마음인데 최건우 선생님 마음은 오죽하겠어? 소문인데 합작하고 있던 온라인 방문 학습도 올해를 마지막으로 끝낸다고 하더라.”

“와, 역시 최건우 선생님은 단호박이시네. 그래서 내가 존경하는 것 아니겠어?”

“그런데 다혜야.”

끝이 날 것 같지 않던 수다가 멈췄고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전다혜를 불렀다.

“어? 왜?”

“너도 학원 옮길 거지?”

“당연하지! 오늘 당장 가서 옮길 거야.”

“히잉. 부럽다. 우리 다혜.”

갑자기 ‘우리 다혜’라고 부르며 친한 척하는 친구의 이중성이 짜증 났지만 그것도 웃어넘길 수 있을 만큼 전다혜는 날아갈 듯이 기분이 좋았다.

친구들이 뭐라고 하던 전다혜는 스마트폰을 꺼내 문자를 남겼다.

- 엄마, 나 오늘 무조건 학원 옮긴다. 초이스 에듀로!!! 괜찮지? 사랑해, 이따 전화할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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