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1화
“뭐?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그게 말이 돼? 최건우가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아내와 아들이 저지른 비리 행위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나라 전체가 뒤집어졌다. 거기에 전 국민들의 공분을 산 아들의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온갖 비리를 저지른 것도 문제였지만 녹취록 내용은 그런 심각한 문제도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엄청난 타격을 줬다.
국민들이 이렇게까지 분노한 건 단순히 비리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냉정하게 말해 소위 상류층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비리를 하나씩은 저지르고 산다.
재벌가, 국회의원, 고위직 공무원을 보면 그중 2/3 이상은 본인 또는 가족이 병역을 면제받았다.
대학 진학 시에도 있는 집 자식들에게 더 쉽다. 수시, 입학사정관제 전형에서는 집안 형편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특히 예체능계 대학은 그 정도가 더 심하다.
취직 문제도 마찬가지다. 준 공무원 취급을 받는 공기업의 경우는 뒷배가 없으면 취직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 돌 정도다.
현실이 이럴진대 과연 용선재의 아들만 가지고 비난할 수 있을까? 이 문제가 계속 불거지면 비슷한 종류의 비리를 저지른 다른 상류층 집안들도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의 협조를 얻어낸다면 서둘러 진화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의 멍청한 아들은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제대로 초를 치고 말았다.
아니, 설사 초를 쳐도 적당히 쳤어야 했는데 대통령 가족까지 끌고 들어와서 같이 힘을 모아야 할 사람을 적으로 만드는 창조적(?)인 뻘짓까지 해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이번 사태의 피해자는 아내와 아들, 대통령과 영부인일 뿐 자신이 받을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피해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온 나라 전체가 떠들썩한 사건의 중심에 있는 것치고는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칭 역사학도라고 말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인간이 올린 게시물 하나가 용선재와 그의 집안까지 사태의 중심으로 끌어들이고 말았다.
‘친일 가문’ 낙인.
모르고 있던 사실은 아니었다. 지금도 그의 집안은 일본 문화를 많이 따라 하고 있으며 일본 정계와도 친밀하고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근현대사의 숱한 굴곡 속에서도 용씨 가문이 몰락하지 않고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과의 친분이 가장 컸다. 사실상 용씨 가문은 일본의 비공식적 대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용씨 가문의 입장이 곧 일본 정부의 입장일 때가 많았다. 그 덕분에 대한민국의 권력자들은 용씨 가문을 쳐내지 못하고 가까이 두려고 애써왔다.
그렇게 가문의 흥성(興盛)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친일’이 처음으로 비수가 되어 돌아오고 있는 게 지금 상황이었다.
용씨 가문은 존경받는 교육계의 큰 어른 자리는 사라지고 조롱받는 친일 쪽바리 집안으로 손가락질 받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가문이 경제적으로 타격받을 일은 없다. 가문이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훌륭한 인질이나 마찬가지라서 사학 재단을 건드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는 논리를 들이대면 누구 하나 쉽게 덤벼들 수가 없었다.
문제는 용선재 본인이었다. 학교와 달리 학원은 학생이 원하지 않는 순간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
만약 이번 일을 잘 대처하지 못하면 기가 싱크빅은 세계교육이나 크레이듀처럼 재기불능의 나락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상황에 이번 논쟁이 터진 거랄까?
한데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 변수가 나타나 용선재의 뒤통수를 쳤다. 지금까지 나쁘지 않은 관계라고 믿었던 초이스 에듀가 등을 돌린 것이다.
그동안 용선재는 건우를 잘 구워삶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워낙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어 당분간 1위 자리를 노리긴 힘들지만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틈을 노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믿었다.
그런 그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성공적이었다. 한때 라이벌로 분류됐던 세계교육과 크레이듀가 완전히 나가떨어진 상황에서도, 초이스 에듀가 사교육계를 완전히 평정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 속에서도 기가 싱크빅은 예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매출을 유지했다.
똑똑해도 어린 만큼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믿었고 건우가 틈을 보이기 전까지 이 관계가 오래 유지될 거라고 자신했다.
비서가 놀라서 가지고 온 소식을 전해 듣기 전까지.
“초이스 에듀의 공식적인 발표는 없었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사실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어제부터 시작해서 학원생들이 대거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어제 일을 왜 이제야 보고해!”
“일시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안 좋은 소문 때문에 잠시 갈등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학원 이상 가는 곳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일단 두고 보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수능시험을 고작 한 달 정도 남겨놓고 학생들이 이렇게 대거 이동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용선재 자신도 차라리 이 시기에 터져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크흠. 됐어, 나도 당황해서 그런 거지 조 실장을 탓하려고 했던 건 아니야. 그래서 초이스 에듀에 연락은 해본 거야?”
“네, 대표님.”
“그쪽에서는 뭐라고 했는데?”
“학생들의 사정이 딱해서 어쩔 수 없이 받아줬다고 합니다.”
“뭐? 그게 무슨 개떡 같은 소리야?”
“고3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친일 논란이 있는 학원에 다니며 스트레스를 받는 학생들이 안타까웠다고 합니다. 이대로 방관하면 12년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고, 사실 여부를 떠나 어른들의 싸움에 학생들이 희생양이 되는 게 안타까워 대승적 차원에서 학부모들의 요청을 받아들였을 뿐 기가 싱크빅에 대한 악감정은 없다고 했습니다.”
“뻔뻔한 놈들. 친일 논란으로 학생들이 스트레스를 받아? 어른들 싸움에 희생양이 된다고? 대승적 차원 좋아하시네. 우리가 흔들릴 것 같으니까 이때다 싶어 달려드는 거지. 그렇게 정의로운 인간들이었으면 상대의 약점을 보였을 때 비겁하게 뒤에서 칼을 찌르는 짓은 했을까.”
초이스 에듀에 친한 척하며 그들이 틈을 보이기만을 기다리던 용선재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에 상식이라는 단어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용선재의 눈에 분노가 어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건우 대표가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거라고는 저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하는 짓을 보니 천성이 야비한 놈이야. 세계교육과 크레이듀가 왜 무너졌나 했더니, 이런 식의 비겁한 방법을 썼나 보네. 젠장, 내가 어리석었어. 순진한 놈인 줄 알았는데 속에다가 능구렁이를 열 마리 정도 키우는 놈일 줄이야. 그래서 지금 상황이 어때? 아니, 다른 걸 다 떠나서 수업에 나오는 애들이 얼마나 돼? 절반?”
비서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뭐? 그럼 1/3?”
“그게… 1/3 정도가 오긴 왔는데 수업은 듣지 않고 사물함 정리해서 퇴실한 학생들이 상당수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남았다는 건데?”
“한 반에 다섯 명 정도 남았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기들도 초이스 에듀에서 받아주는 걸 이제야 알았다고 내일부터는 그쪽으로 옮기겠다고 한 학생이 반수 이상입니다.”
“허…!”
용선재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비서의 말이 사실이라면 최악의 경우 한 반에 2~3명의 학생만으로 수업을 진행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초이스 에듀가 현시점에서 대세인 곳이라고 해도 기가 싱크빅은 명색이 전통의 명문 학원이다. 예전과 비교해 위상이 떨어졌다고 해도 2위 자리를 공고히 하고 있어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게 전부 허상이었던 모양이다.
다른 시기도 아니고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렇게 대규모 이동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혹시 남은 애들은 왜 남겠다고 한 건지 물어봤나?”
허탈한 마음이 가득했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희망의 끈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대체 뭐라고 했길래?”
“학생들이 굉장히 적게 남았으니 일대일 강습수준으로 수업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남았다고 했습니다.”
“만약 수강생 수가 부족하다는 반을 통합한다면?”
“미련없이 초이스 에듀로 떠날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용 꼬리가 되느니 뱀 대가리가 되겠다는 의미였다. 수강생이 너무 적어 뱀 대가리밖에 없을 상황이지만 그건 학원 사정이지 학생 사정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영악한 놈들 같으니. 빡빡한 강의실에서 관심도 못 받고 수업을 듣느니 여기 남아서 황제처럼 지내겠다는 거잖아. 이런 젠장, 완전히 호구 잡힌 거로구만. 조 실장은 어떻게 생각해?”
“네?”
“애들이 그것밖에 안 남았는데 반을 계속 운영하는 건 너무나도 비효율적이잖아.”
“네.”
“그런데 효율성을 위해 반을 통합해버리면 그나마 남아 있는 애들도 초이스 에듀로 떠날 가능성이 높아. 여기까진 내가 제대로 이해한 거지?”
“맞습니다, 대표님.”
“그럼 어떻게 하는 게 나을까? 이왕 망한 거 올해는 접고 내년부터 다시 모집할까? 초이스 에듀가 내년에도 똑같은 짓을 하진 않을 것 아니야.”
“이번이 특수한 거지, 내년까지 이러면 형평성 논란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그렇지? 아니면 손해를 감수하고 걔네들이라도 데리고 버텨야 하나?”
“그건…, 대표님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이대로 학원 문을 닫고 내년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손해는 막을 수 있지만 이미지에는 심각한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들은 친일 논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학원 문을 닫았다고 생각할 겁니다.”
“흠…. 그럴 수도 있겠군.”
비서의 논리정연한 말에 용선재의 머리가 끄덕여졌다.
“만약 초이스 에듀에 복수를 하고 싶다면, 기가 싱크빅은 여전히 사교육계의 강자라는 걸 보여주려면 지금 반을 계속 유지해야 합니다.”
“복수라? 이번 건 이해가 잘 안 가는데.”
“물론 그냥 현상유지만 해서는 복수는 어렵습니다. 현상유지만 해서는 오히려 올해는 접고 내년에 다시 시작하는 것보다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기가 싱크빅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학생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수능에서 최고의 성적을 거두게 만들어야 합니다. 초이스 에듀 평균 성적보다 더 나은 결과를 얻으면 금상첨화겠죠. 그렇게만 되면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 봐라, 우리도 마음만 먹으면 초이스 에듀 이상의 성적을 낼 수 있다. 이게 바로 전통과 역사를 가진 기가 싱크빅의 저력이다. 이렇게요.”
“어허. 조 실장에게 이런 구석이 있는 줄 몰랐군, 그래.”
용선재는 새삼스럽다는 듯 비서를 바라봤다.
“상황이 너무나도 단순명료해서 말씀드린 겁니다. 혹시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
“아니야, 전혀. 조 실장 지적이 정확해. 여기서 물러나버리면 우리 학원은 세간의 조롱거리로 전락할 수 있어. 손해 볼 돈에 눈이 어두워 내 시야가 너무 좁아진 것 같아. 고마워, 그 조언.”
“별말씀을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대표님 마음에 드는 선택지가 있으십니까?”
비서가 조심스레 물었다.
용선재의 지금 선택에 기가 싱크빅의 미래가 달려 있다.
“도망치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은데, 만약 실패한다면 재기할 기회도 없이 완전히 끝장나는 거잖아. 음…, 쉬운 결정이 아니야. 아무래도 좀 더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군. 내일까지 고민해보고 결정을 내리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럼 나가 봐. 나는 전화할 곳이 있으니까.”
“네.”
비서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용선재는 전화기를 들었다.
Rrrr
- 네, 용 대표님.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최건우 대표.”
용선재가 전화를 건 사람은 건우였다.
- 네, 저야 늘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제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기가 싱크빅도 바쁘시죠?
“모르고 묻는 겁니까? 알고 묻는 겁니까?”
- 뭘 말씀이시죠?
“초이스 에듀가 애들을 빼가서 우리가 크게 바쁠 일이 없다는 걸 최 대표도 알고 있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 아, 그 일이요? 그건 저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건우의 목소리는 별거 아니라는 듯 평온했다.
용선재는 그 모습에 왠지 약이 올랐다.
“유감스러웠으면 안 했으면 됐을 것 아닙니까?”
-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실망입니다, 용 대표님.
“뭐라고요?”
- 아무리 사설 학원이라고 해도 우리가 하는 일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겁니다. 그렇다면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건 당연히 학생이어야 합니다. 돈벌이나 정치적 싸움이 아니라요.
“지금 내가 돈벌이에 연연하고 있다는 뜻입니까?”
- 그렇게 말씀드린 적은 없습니다만. 혹시 도둑이 제 발 저린 건 아니시죠?
“뭐요! 이봐요, 최 대표. 지금 나랑 싸우자는 겁니까?”
이러려고 전화한 건 아닌데 건우와 대화할수록 용선재는 화를 참기 힘들었다.
- 휴…. 용 대표님. 전화를 거신 분은 제가 아니라 용 대표님입니다. 그리고 다짜고짜 화를 내신 것도 용 대표님이고요.
“흥! 요즘 좀 잘나간다고 눈에 보이는 게 없나 본데, 그게 언제까지 갈지 두고 봅시다. 먼저 시비 건 사람은 내가 아니라 최 대표라는 걸 명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Rrrr
건우와의 통화를 끝낸 용선재는 씩씩거리는 모습으로 거칠게 전화버튼을 눌렀다.
- 네, 대표님.
“조 실장. 아까 이야기했던 거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기서 무섭다고 도망가면 안 될 것 같아. 되든 안 되든 시도는 해봐야지. 그러니까 강사들에게 내 말 꼭 전해. 우리 학원의 사활이 걸려 있으니 일대일 과외하는 수준으로 집중력을 가지고 수업시간에 최선을 다해달라고.”
- 알겠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