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2화
- 먼저 시비 건 사람은 내가 아니라 최 대표라는 걸 명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용선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띠링, 하는 통화 종료음이 들렸다.
건우는 피식 웃으며 전화기를 내려놨다.
그러자 차지훈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용선재 대표입니까?”
“네.”
“뭐라고 하길래 그렇게 웃으십니까?”
“협박하더라고요. 두고 보자고.”
“하하. 재미있는 협박이네요. 지금 상황에서 뭘 더 두고 보자는 건지.”
“그러게 말입니다. 용선재 대표는 저를 굉장히 쉽게 봤나 봅니다. 선전 포고 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굳이 이렇게 연락을 해온 걸 보면 말입니다. 혹시나 전화를 저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요?”
기가 싱크빅 학생들이 대거 초이스 에듀로 옮겼다.
자발적으로 옮긴 건 맞지만 이번 일에 있어서 초이스 에듀의 행동은 굉장히 노골적이었다.
이 정도면 대놓고 학원생을 빼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용선재는 서운하다는 전화를 걸어왔다.
마치 투정부리며 설득하면 건우가 이번 결정을 번복하고 사과하리라 기대한 것처럼.
어처구니없는 전화에 건우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의 장단에 맞춰줘야 하나?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용선재 같은 인간에게는 설사 연극이라고 해도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대표님 나이가 어려서 언제든 구워삶을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러니 그런 유치한 협박을 한 거겠죠.”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과연 기가 싱크빅에서 내밀 카드가 뭔지. 정부든 교피아든 다들 자기 앞가림하기 바빠서 지금 당장 이용할 수 있는 카드가 없을 텐데 말이죠.”
“그래도 모릅니다. 십수 년 동안 사교육 시장을 평정했던 사람입니다. 비장의 한 수 정도는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음… 그렇다면 숨기고 있는 한 수를 꺼낼 생각도 못 하게 더 흔들어야겠군요.”
“온라인 방문 학습 계약 해지 말고 다른 공격 방안이 있으십니까?”
기가 싱크빅은 원래 세계교육에 밀려 방문 학습 사업으로 큰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세계교육을 견제하기 위한 초이스 에듀의 도움으로 온라인 방문 학습이라는 새로운 교육 플랫폼을 만들어냈다.
방문 학습과 온라인 방문 학습은 둘 다 일대일 방식의 학습 방법으로 매우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지만 명백한 차이점이 하나 있다.
바로 오프라인으로 직접 만나서 학습하느냐 아니면 태블릿을 이용해 온라인으로 학습하느냐이다.
기존에도 온라인 일대일 학습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퓨처 앱의 개발로 예전보다 훨씬 개선된 방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오프라인 학습보다 효율성은 조금 떨어져도 가격 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보인 덕분이기도 하지만 초이스 에듀라는 이름이 주는 신뢰감도 큰 몫을 차지했다.
그렇게 시작된 온라인 방문 학습은 세계교육이 망하면서 독보적인 자리에 올라섰고, 그때부터 기가 싱크빅의 매우 중요한 수입원이 되어주었다.
그런데 건우는 바로 그런 수입원을 끊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기가 싱크빅으로서는 막을 방법이 없다.
아무리 양질의 방문 학습 교사들을 많이 데리고 있다고 해도, 온라인 방문 학습의 가장 중요한 틀은 ‘퓨처 앱’이다.
건우가 퓨처 앱 사용을 금지하는 순간 기가 싱크빅의 온라인 방문 학습 사업은 전면 올 스톱 되고 만다.
단, 그 방법을 사용하기에 앞서 우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온라인 방문 학습 교사 문제를 알아보신다고 했잖아요. 그건 어떻게 됐죠?”
방금 건우가 언급했다시피 퓨처 앱 사용을 금지하는 순간 방문 학습 교사들은 직장을 잃게 되는 게 문제였다.
“다행히 방법을 찾았습니다. 기가 싱크빅이 고용하고 있는 온라인 방문 학습 교사들은 전부 계약직으로 1년 단위로 재계약을 하고 있습니다. 12월이 되면 올해 계약도 끝이 납니다. 그래서 말인데 내년부터 우리도 온라인 방문 학습 사업을 시작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방문 학습 교사들을 전부 우리가 수용하자는 말씀이군요. 괜찮긴 한데 언론에서 가만히 있을까요? 자칫 기가 싱크빅의 효자 사업을 강제로 빼앗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지금이 딱 적기입니다. 이번에 기가 싱크빅 학생들을 데리고 왔던 논리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아! 친일 논쟁으로 우리 행동을 정당화시키자는 말씀이신 거죠?”
친일 논쟁만 잘 이용하면 초이스 에듀는 약탈자가 아니라 구원자가 될 수도 있다.
“네.”
“괜찮은 방법이네요. 그대로 실행 준비를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다음엔 제가 만든 교습을 사용 금지시킬 겁니다.”
“네? 대표님이 만든 교습법을요? 그렇게 되면 다른 학교들이나 학원들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기가 싱크빅만 사용 금지할 예정이니까요.”
건우의 교습법이 최초로 수록된 것은 건우가 만든 참고서고, 그 참고서에 대한 저작권은 당연히 건우에게 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저작권 행사를 한 적이 없지만 그렇다고 교습법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 건 아니었다.
“대표님의 교습을 가르칠 수 없는 학원이라… 그건 곧 사형 선고나 다름없겠군요.”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아무리 노련한 용선재 대표라고 해도 막는 데 급급할 수밖에 없겠죠?”
“허허. 그렇다 뿐이겠습니까? 전 세계적으로 대세가 될 커리큘럼을 홀로 가르칠 수 없게 되는 건데 어떤 학생이 그 학원에 등록하겠습니까? 그 정도면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도 기가 싱크빅이 버틸 수 있을지 벌써 그게 궁금해지네요.”
***
용씨 가문은 자식 교육에 철저하다.
특히 직계의 경우엔 과할 정도로 엄격한 교육 과정을 거친다.
교육 내용을 살펴보면 일반인들과는 다른 독특한 구석이 있다.
‘착하게 살아라.’, ‘바른 사람이 돼라.’ 같은 인성 교육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어떤 것보다 평정심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평정이란 평안하고 고요한 상태를 말하고, 평정심은 그런 상태를 유지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용씨 가문은 아무리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고 짜증이 나도 그 기분을 얼굴로 드러내지 않는 방법을 어릴 때부터 가르치는데, 그 과정이 굉장히 가혹한 편이다.
용선재가 어마어마한 재산과 권력이 보장되는 가주 자리를 포기한 것은 바로 이 과정을 견디지 못해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그렇게 싫어했던 집안 교육이 아니었다면 기가 싱크빅의 신화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속에는 사나운 맹수 기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만의 가면을 만들어 그걸 숨길 줄 알았다.
겉으로는 언제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상대를 대한 덕분에 경쟁자들은 용선재를 경계하지 않았다.
기가 싱크빅은 그 틈을 파고들어 상대의 등에 칼을 꽂아가며 이룩한 신화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던 용선재는 가문에 대한 반발심으로 자식 교육에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그때 선택이 비수가 되어 그의 심장을 겨누는 중이었다.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머리가 다 큰 자식을 이제 와서 누르기도 어려웠다.
워낙 제멋대로 자라서 그런지 사소한 잔소리도 견디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기 일쑤였다.
지금도 세상 사람이 모두 그의 막돼먹음에 대해 손가락질하고 있지만, 정작 용현철 본인은 일말의 반성은커녕 대화를 몰래 녹취해 공개한 소하정을 향해 강렬한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씨발, 감히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개자식 내가 반드시 죽여버리고 만다.”
지금 용현철의 편은 아무도 없다.
친이모처럼 든든했던 황금숙은 말실수 하나로 이제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고, 안 그래도 무뚝뚝했던 아버지의 눈빛은 벌레를 보듯 냉담해졌다.
믿을 건 엄마밖에 없는데, 그녀는 용현철이 벌여놓은 일을 수습하러 다니느라 바빠서 얼굴조차 보기 힘든 상황이었다.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신문에서는 황금숙과 조순희가 구속될 확률이 매우 높다고 연일 떠들어 대고 있다.
야당은 연일 공세고 두 사람을 보호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커서 정부와 여당도 한 걸음 물러서서 방관하고 있다.
괜히 편을 들었다가 같이 도매금으로 취급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다들 노심초사하며 냉정하게 선을 긋고 있다고 했다.
정치적으로 사정이 안 좋아지자 조금 전에는 외출할 생각은 하지 말고 조용히 집에 처박혀 있으라는 아버지의 독설을 들어야 했다.
화가 미칠 듯이 차올랐다.
그렇지만 아버지에게 화를 낼 수 없으니 방에 들어와 소하정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안 받을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속 걸었다.
사건이 터진 이후 줄기차게 연락을 해봤지만 소화정은 용현철의 전화를 받지 않고 문자도 씹었다.
전화기를 죽일 듯이 노려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소하정은 이번에도 역시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넘어갑니다.’라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인내심의 끈이 툭 하고 끊어졌다.
이젠 정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용선재와 조순희가 자숙할 것을 당부했지만 이번 사태의 주범(?)인 소하정만은 반드시 응징하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전화만 안 받으면 끝일 거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개뿔 가진 것도 없는 흙수저가 금수저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처절하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 Rrrr
스마트폰 주소록을 검색해 ‘깡치’라고 저장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깡치는 용현철과 친하게 지내던 조직폭력배로, 서울의 그리 크지 않은 폭력 조직 동심파의 행동대장이다.
또한 용현철의 사주를 받고 소하정을 납치 폭행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런 일을 대신 한 덕분에 동심파는 강남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이게 바로 조폭들이 권력가들에게 빌붙는 이유다.
조폭은 권력가들이 직접 손대기 싫은 껄끄러운 일을 대신 처리하고 그 대가로 권력가들은 경찰이나 검찰의 수사를 막아주는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준다.
그런데 연락을 하면 언제 어디서라도 달려오던 깡치가 오늘은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번을 다시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소하정에 이어 깡치까지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자 용현철의 눈이 뒤집혔다.
“이 새끼 지금 설마 내 전화를 일부러 안 받는 거야? 우와, 씨발. 이젠 깡패 새끼들까지 나를 무시한다 이거지. 어디 두고 보자. 나도 아쉬울 게 없다 이거야. 너 말고도 알고 지내는 깡패 새끼들 많거든. 동심파 새끼들 어디 두고 보자, 앞으로 강남 쪽에 발도 못 붙이게 해줄 테니까.”
용현철은 혼잣말로 씩씩거리며 주소록에 있는 다른 번호를 찾기 시작했다.
***
“실장님. 동심파 아시죠?”
고자성이 차지훈을 보며 물었다.
“동심파?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아! 동심파면 얼마 전에 자성이 네가 애들 데리고 가서 해산시켜버린 폭력 조직 아니야?”
“네, 맞습니다.”
“그런데 거기가 왜?”
“거기 놈들 중에 깡치라고 있습니다. 그놈이 용현철하고 친하게 지내며 앞장서서 소하정 씨를 괴롭힌 놈이죠.”
“그래? 그런 놈이면 당연히 반 죽여 놨겠지?”
“물론이죠. 완전히 잘근잘근 다져놨으니 깡패 짓은 다시는 못 할 겁니다. 강제로 시골에 보내면서 혹시나 하고 그놈 핸드폰을 압수해 놨었거든요. 그런데 조금 전에 용현철한테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뭐? 용현철이? 지금 그놈이 조폭 찾을 여유가 있어?”
“아니요. 지금 상황에 그놈이 조폭이랑 만나는 걸 걸리면 완전 끝장날걸요?”
“그런데도 깡치에게 전화를 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고자성의 이야기를 듣던 차지훈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깡치 폰으로 전화 오기 전에 소하정 씨 폰으로 전화가 왔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용현철이 처음에 소하정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안 받으니까 깡치에게 전화를 했다는 거야?”
요즘 스마트폰은 마음만 먹으면 위치 추적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래서 소하정의 핸드폰은 초이스 시큐리티에서 별도 보관하고, 소하정에게는 다른 사람 명의의 핸드폰을 사용하게 했다.
번거로운 일이지만 이번 사태가 해결될 때까지는 불편해도 참기로 했다.
“네, 실장님. 실장님이 보기에도 좀 이상하죠?”
“설마 용현철 이 새끼, 예전처럼 소하정 씨를 또 납치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닐 거야, 응? 지가 닭대가리도 아니고.”
“제가 봤을 땐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녀석이라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어떻게 하지? 일단 소하정 씨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겠지?”
“그건 당연한 거고, 거기에 맞춰 함정도 파야 한다고 봅니다.”
고자성은 신이 난 듯 두 눈을 반짝였다.
역시 그에겐 이런 류의 현장 일이 가장 잘 맞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